[찬샘통신 48/191209]이웃마을 훑어보기
어제 오후는, 우리 동네와 바로 인접한 동네의 골목(골목이랄 것도 없고, 고샅 몇 군데가 맞겠다)을 한가로이 다녀보다. 이 집, 저 집 흘끗거리며 다녀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신경쓸 일이 없다. 이런 한량閑良이 따로 없다.
아하- 여기가 초등시절 친구집이었는데, 아하-여기는 명절 뒤끝 친구들과 민화투도 치고 디스코도 추면서 놀던 곳인데, 아예 집이 없어졌구나. 그 동네 ‘산서굴’로 불리는 곳에 10여호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살던 친구 네 명이 짱짜란히 모두 죽었다. 남자 3명, 여자 1명. 결혼한 지 3년도 안돼 갓난애도 있는데, 해상훈련 갔다오는 길에 추락사했다던가. 현충원에 누워 있다. 그 아내와 아들은 어찌 됐을꼬? 또 한 친구는 경찰이 되어 의기양양하다가 객기로 음주운전하다 신리 근방에서 트럭을 받아 2명이 현장즉사했다던가. 그 친구도 결혼하여 애도 있다고 들었는데. 여자친구는 유방암으로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 수삼년. 2년 전인가는 호인이었던 친구가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장례식장에서 깜짝 놀랐다. 방명록을 받던 친구의 동생이 친구와 판박이였다. 피붙이란 이런 것인데.
불과 100m도 되지 않는, 동네의 한켠에 살던 친구 넷이 숨진 것도 별나다면 별난 일. 들어본 이름의 어른들 문패, 친구의 형이 분명한 문패. 복숭아를 처리하는 창고를 기웃거리다 주인장을 만나니, 친구의 형이다. 몇 십년만에 보는 것이지만, 서로 낯이 익숙하다. 반갑게 악수를 한 후 10여분 농촌생활의 어려움 등 서로의 동정을 교환했다. 복숭아농장을 경영하며 올해도 1만 상자가 넘게 납품했다고 한다. 얼마나 벌었을까. 2억, 거기에서 일꾼 품삯, 농약, 퇴비값 등 갖가지 비용을 빼고 절반은 건질까. 그렇지만, 농장주의 인건비를 빼면 1년농사인 데도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골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위하여 쏟아부은 노동력이 얼마이겠는가. 지긋지긋한 3∼4개월 농번기가 지나면 한가할 줄 알아도 천만의 말씀. 겨울에도 거름을 해야 하고, 전지剪枝를 해야 하는 등 영일寧日이 없다. 지난 여름, 친구의 농장을 몇 번 갔는데, 변변히 얘기할 여유조차 없이 거센 노동의 연속. 나같은 손방은 조금도 도움이 안됨을 한탄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도둑질도 해본 넘이 한다던가. 어느 세월에 농삿일이 내 몸에 박힐 것인가.
뒷산을 홀로 올라본다. 헹뎅그레한 겨울산. 바짝 마른 잡풀 사이로 간간히 거북등 소나무들이 자태를 뽐낸다. 쌓인 낙엽들에 미끌어져 콧등도 찧어본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왔던 곳인데, 길은 이미 막힌 지 오래. 도저히 쌓을 수가 없다. 행기목재, 사막재 등등 , 골짝이나 봉우리 이름도 아스무라하다. 왕년에 갈끼(소나무잎, 갈비라고도 한다)나무 했던 곳인데. 허벌나게 헤매다 포기하고 내려온다. 숫제 뫼똥(무덤)들 뿐이다. 청주한씨, 옥천조씨, 교동인씨, 연안김씨, 진양하씨, 언제 이렇게 무덤들이 늘어났을까.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아는 이름도 제법 있다. 무상한 것은 역시 달구름(세월).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은게지. 아무도 없지만, 흠흠 헛기침을 해본다.
초겨울을 이렇게 맞는다. 12월 초순이 다 지나가건만, 눈 많은 임실지역에 눈이 오지 않았다. 눈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나는 왜 눈이 오기만을 기다리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금들판(5000여 마지기)에 싸목싸목 내리는 눈을, 거실 소파에서, 뒷산 신작로 전망대에서, 나아가 산등성이에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하염없이 감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이 눈같은 백색처럼 새하야질까. 그랬으면 좋겠다.
저녁엔 동네형이 집으로 잠깐 와보라한다. 대봉시를 깎아 고추건조기에 말린 꾸덕꾸덕한 감말랭이 한 뭉치를 준다. 넘 맛있다. 형님의 어머니는 허리가 굽어진 88세 할머니. 우리 어머니와 70년 가까이 한동네 친구이셨다. 어머니는 지난 1월 90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예기치 않은 눈물이 쏟아진 것은 순간이었다. 아주머니의 손을 부여잡은 채 눈물이 한바작 쏟아졌다.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생각해요. 이제껏 꿈에도 한번 안나타나요” 엉엉 울면서. 아주머니는 “엄마는 영락없이 존 데 갔응개 괜차녀. 울지 마. 꿈에 안비는 것이 존데 가서 그렁거래. 울지마잉. 집 잘 고쳐놓고 고향 지키고 있응개 조아헐 거여. 울지마” 엄마처럼 등까지 토닥거려주신다.
그나마 이렇게 보자마자 엄마가 생각나는 엄마 친구가 계셔(엄마 친구로는 유일한, 보기 드물게 음전하신 할머니다) 다행이다. 그분은 떡애기 때부터 나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런 분에게는 무조건 잘해드려야 한다. 엄마를 모시듯. 집으로 돌아와 밤늦게 세탁기를 돌린다. 막걸 리가 있으면 한잔 하고 싶었다. 헌데, 있어도 마시면 안된다. 여동생 셋이 몸무게가 너무 빠진 나를 위하여 흑염소 한 마리를 고아 보내왔다. 이것 먹을 동안에라도 성의를 생각해 한잔도 마시지 않을 생각이다. 이렇게 석 달 동안 고쳐진 나의 시골집의 나홀로 하루가 갔다. 안빈낙도 安貧樂道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