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이렇게 긴 활동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작한 것도 아니다. 처음 이소룡을 알게 된 것은 1971년 홍콩 잡지 '영화정보'를 통해서였다. <당산대형>을 촬영하러 태국에 와서 인터뷰한 기사인데 이소룡은 평범한 모습이라 큰 관심이 가진 않았다. 워낙에 강렬한 마스크의 왕우, 나열, 강대위, 적룡 등을 봐왔던 터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잊혀졌는데 역시 같은 해에 서울 명보극장에 걸린 <당산대형>의 스틸을 보고는 그 영화가 국내에 수입되어 개봉되는구나 확인하였다. 스틸 역시도 "현대물 액션영화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동영상을 보지못하니 섣부른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동영상을 보지 않았으니 이소룡의 진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당산대형>은 이때 수입되지 못하고 결국 장철 감독의 <권격>이 수입 개봉되었다. 한국엔 생소한 이소룡 보다 장철 감독, 깡따위, 추룡이 인기 있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3때인 1973년 친구가 "이상한 영화가 나왔다."고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단성사에 영화구경을 갔다가 전단지를 통해 <정무문>의 국내 개봉을 알고 있었던 터라 바로 극장엘 갔다. 이소룡은 전대미문의 배우였다. 스토리가 특별한 것도 아니요, 감독이 유명인도 아니요, 오로지 이소룡에 의한 이소룡을 위한 영화였다. 엔딩 자막이 나오고도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다소 장황해졌는데 이렇게 이소룡은 내겐 갑작스럽게 훅 들어왔다.
이후 그의 영화를 본 이야기는 생략하고 2010년 '이소룡 평전'을 쓰고 출판사를 물색하고 '문학동네' 팀과 회의를 하였으나 결렬되었고 '푸른나무' 팀과 협의 후 바로 계약금 백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을 의미있게 사용하고자 국내 최초로 2010년 11월 27일, 그의 탄신 70주년을 맞아 이소룡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세미나에서 이소룡기념관의 설립을 공식발표했다.
세미나는 초청스타 2nd 브루스 리인 당룡의 참석으로 빛났고 뒷풀이를 인근의 엉터리고깃집에서 가졌다. 백만 원을 다 쓸 생각이었으므로 고기 먹고 술 마시고 기분 최고의 날이 되었다. 주석이 끝나갈 즈음 누군가 "다음 달에는 며칠에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하지요."라고 취한 김에 답했고 그로부터 10여 년간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모임을 가져왔다.
세미나는 50회를 넘기고 100회를 맞아 끝을 내려 했지만 무슨 미련인지 계속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을 맞았다. 이때야 말로 세미나를 끝낼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번에 원격 줌 세미나로 계속해 세미나를 이어 나갔다.
2022년 어느 날, 신일룡 회장이 내게 물었다. "이소룡이 친척이야?" 이 말은 친하니깐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이제 정말 끝낼 시간이구나."를 실감했다. (나는 친척도 아닌 신일룡 회장의 "신일룡 평전'을 쓰고 출간하여 그의 영전에 바쳤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예고했던 12월의 <협녀> 세미나까지를 마치고 정기 세미나를 마쳤다.
이렇게 세미나를 끝냈지만 사업회 자체가 끝난 건 아니다. 호남대에서 '이소룡연구회'를 하고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국내외 기업체에 배포했다. 그리고 2017년 중국의 광동성에서 이소룡기념관 설립 피칭이 있었지만 불거진 사드 사태로 사업은 불발에 그쳤다. 심혈을 기울여 공들인 기념관 설립 사업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 사업회에는 미완의 사업이 있고 신규 사업거리도 산적해 있다. 앞으로 이소룡의 영화 첫 개봉일을 기념하는 브루스 리 데이 행사는 계속 이어졌으면 하지만 모든 건 예정일 뿐이다. 그동안 본 사업회에 가져주신 관심과 애정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