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사색, 기다림
제1장 뱀(蛇品) :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
(143)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능력 있고, 정직하고 바르며,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
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144)
만족할 줄을 알고, 기르기 쉽고, 잡일을 줄이고, 생
활도 또한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관이 안정되고 총
명하여 마음이 성내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탐
욕을 부리지 않는다.
(145)
다른 식자들로부터 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모든 생물은 다 행복하라.태
평하라.안락하라.
(146)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
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짧고 가는 것
이건,또는 조잡하고 거대한 것이건.
(147)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148)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 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도 안된다.
남을 골려 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
어서도 안된다.
(149)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150)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 자
비를 행하라.
(151)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
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
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숭고한 경지라 부른다.
(152)
온갖 사뙨 소견에 팔리지 말고, 계를 지키고 지견
(知見)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
람은 결코 다시는 모태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숫타니파타>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요한보다 예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신다는 소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 것을 예수께서 아셨다.
-사실은,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준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이 마을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거기에 있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오정쯤이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없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 "웬일이십니까?" 하거나, "어찌하여 이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동네에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하므로, 예수께서는 이틀 동안 거기에 머무르셨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믿게 되었다.
그들은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 친히 밝히시기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도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께서 거기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다시 갈릴리 가나로 가셨다. 그 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거기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앓고 있었다.
그 사람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나와 갈릴리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 와서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신하가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종들이 마중나와 그 아이가 살았다고 보고하였다.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낫게 된 때를 물어 보니 "어제 오후 한 시에, 열기가 떨어졌습니다" 하고 종들이 대답하였다.
아이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그에게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나와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뒤에 행하신 두 번째 표징이다.
-(요한복음 4장)
오늘 <숫타니파타>는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는데,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같다. 어렵다. 그래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한 방편으로 들린다. 모두가 이렇게 되면 다툼이 없을 것이다. 굳이 평안을 얻으려고 수행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의 꿈은 인간의 본성과 차이가 있는 원대한 꿈이었던 것 같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를 보자.
물은 계속 마셔야지 한 번 마시고 그 다음부터 안 마시면 목이 마르다.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비유가 어떻게 해서 상대에게 인지가 되고 어떻게 그게 감동의 말로 굳혀질까? 나도 잘 모르겠다. 연구를 해보자.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식물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딴꽃가루받이가 필수적이며, 날아다니는 매개동물이 꽃가루를 나르는 역할을 해준다. 딸기 꽃이 피면 벌이 하루에 16번 정도 찾아가고, 박각시나방은 4분 동안 무려 106송이의 제비꽃에 드나든다. 이 꽃 저 꽃 가리지 않고 마구 찾아다니는 매개자도 있지만 두영벌, 꿀벌, 박각시나방, 새, 박쥐와 같은 충실한 매개자는 한 종의 꽃을 집중적으로 방문한다. 이런 충실한 매개자가 있기 때문에 한 종의 꽃가루가 같은 종의 다른 암술머리로 옮겨져 딴꽃가루받이를 일으킨다.]
자연의 생물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한편 원예와 정원 가꾸기로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 원예가 생물에 쓸데없이 신경을 쓰는 일만은 아니다. 관찰력을 자극하고 집 안의 오염된 공기를 흡수하며 심지어 땅에서 나온 박테리아로 미생물이 풍부해진다. 또한 나무와 함께하던 그때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자, 다시 인내하며 불안정함을 안고 살아가자는 의미다. 그때로 무사히 돌아가려면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대신 우리는 신체의 속도와 요구에 순응하면서 그만큼 겸손을 얻을 수 있다. 정원을 가꾸는 순간, 사물의 척도가 아닌 세상의 구체성과 사물의 내적 본성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며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게 되는 것이다.]
위 글에서 “정원을 가꾸는 순간, 사물의 척도가 아닌 세상의 구체성과 사물의 내적 본성을 돌아보게 된다.”를 보자.
한 기준으로 다른 사물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은 다 같다는 걸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렵다.
<나를 부르는 숲>에 나오는 글이다.
[비록 스스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말하면서도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당신은 자신에게 정신 차리라고 명령하지만-뭐라고 해도 단지 숲에 불과한 것 아닌가-권총을 빼 든 노츠(영화 ‘법과 질서의 수호자’ 주연 배우/옮긴이)보다 더 신경과민이 된다. 뜻밖의 소리-떨어지는 나뭇잎의 와장창 소리에 도망치는 사슴의 굉음-에도 놀라 현기증을 일으키며 제발 살려주십사 하는 심정이 된다. 아드레날린을 책임지는 신체 기관이 무엇이건 간에 그토록 광이 나게 잘 닦이고 기름칠이 잘 되어 있으며 나사가 제대로 조여 있어서 외부에서 신호가 오면 즉각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뿜을 준비를 갖추고 있던 적이 과거에는 없었던 듯싶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당신은 언제나 똘똘 감아놓은 용수철이다.
미국의 숲은 지난 300년간 사람들을 낙담시켜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연을 찬란하고 찬란하다고 노래했다. 빵과 맥주를 구하기 위해서 마을을 한가로이 산보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가 1846년 캐터딘 산으로 가는 길에서 거친 자연을 경험한 뒤로 그 찬미는 완전히 뼛속까지 배어든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 길은 무성한 과수원과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시 교외의 숲을 지나가는, 햇볕이 잘 드는 길처럼 길들여진 세계가 아니었다. “냉혹하고 난폭하며... 야만적이고 무시무시한.” 험악하고 공격적이며 원시적인 세계였기 때문에 “오직 우리보다는 바위나 야생 동물이 더 가까운 친척인 사람에게만 적합한” 곳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한 전기작가에 따르면 그 경험은 그를 “거의 광란 상태로까지” 몰고 갔다고 한다.]
숲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숲을 우리에게 맞춤형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중이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그가 허기를 굳세게 물리쳤던 일은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하지만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그 옛 시절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당시에 자기는, 자기가 카말라 앞에서 자랑스럽게 뻐겼던 세 가지 것, 그러니까 단식, 사색, 기다림이라는 세 가지 고상한 재주를 결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게 잘 부릴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재산이었으며 자기의 권세이자 힘이었으며, 자기를 받쳐주는 확고부동한 지주였다.]
단식, 사색, 기다림. 올해 나의 목표였는데, 살은 여전히 찌고 있으며, 사색은 치열해지지 못하고 있으며, 급한 성질은 여전히 그대로다. 1월에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단식은 아니더라도
소식으로 감량을 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깊은 사색을 하려고 했는데
얄팍한 잔머리가 항상 먼저 다가와
사색이 깊어지지 못하고 있다.
나무 공부를 하면서
기다림의 지혜를 배우려고 했는데
살아온 대로 사는 게 모순의 삶에 맞는 것 같아
진득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갖고 못하고 있다.
아, 이 어마 무시한 거짓말 같은 삶이여!
그래도 봄꽃에 열정을 느끼는 이 거지 같은 삶이여!
오랜만에
단식, 사색, 기다림
이 말을 접했으니
다시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해보자
그래야 꽃이 만들어내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볼
자격이 있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