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601
12월6일 [대림 제2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__1oB7iAzc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1032836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더 깊은 광야로>
서품을 앞둔 형제들을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대견스럽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훌륭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도 끝까지 선생노릇을 해야 합니다. 누누이 당부하는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서품준비 기간은 여러분이 오랜 세월 배워온 신학과 그간 갈고 닦아온 수도생활의 내공을 세상 앞에 잘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첫 출발부터 부디 가난한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서품을 앞둔 여러분들에게 신자들은 얼마나 큰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서품 기념으로 이 것 저 것 챙겨주시고 꼭 뭔가 한 가지 해드리고 싶다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럴 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거요, 저거요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괜찮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부탁드릴 것은 오직 한 가지 제가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다고 쉽게들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집요하게 계속 하시지요. 그때는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제게 해주시려는 그 마음으로 세상의 가장 끝에서, 깊은 오지에서 묵묵히 선교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해외 선교 사제 한분을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릴 때 그 후원자분은 정말 큰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후원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정말 청빈의 대명사였습니다. 그의 삶은 극단적 청빈 그 자체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복음사가의 표현을 통해 이 사실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떠오르는 샛별, 대중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높은 성덕,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삶의 일치,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탁월한 언변에 사람들은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예루살렘 부인들도 따라다니면서 꼴불견스러운 낙타 털옷을 입고 다니고, 거친 음식으로 주린 배를 때우고 있던 그에게 다가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겠지요.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극단적인 가난을 선택했고 이를 기반으로 더 높은 성덕을 쌓아나갔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세례자 요한은 절대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대예언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회개했다면: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RCG0wqOFXA
----------------
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위해 파견된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목적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거나 경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의존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광야는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죽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될 때야만 하느님의 힘에 맡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회개의 세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윤치영 목사가 ‘감옥조차 하나님 나라로’란 제목으로 간증을 한 내용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윤치영 목사는 전도사 때부터 호주에서 사역하였습니다.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좋아 교회는 나날이 발전해갔습니다. 그런데 고3짜리 여자아이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됩니다. 그 아이는 남자친구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조차 폭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연락을 받고 윤 전도사는 다른 청년들을 동원해 그 아이를 강제로 교회로 데려옵니다.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아이의 등을 몇 대 때립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가려 하는 아이를 말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여권을 빼앗습니다. 부모는 윤 전도사가 한 일에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불만이었고 전도사를 고발합니다. 죄목은 납치, 집단폭행, 강도였습니다. 사실 죄목만 가지고는 수십 년의 형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모든 옷이 다 벗겨지고 마약 등을 몸속에 넣어오지 않았는지 개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 수치는 처음이었습니다. 1년 이상의 징역을 살면 호주에서 추방당한다고 합니다. 윤 전도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니 고통 때문에 주님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다가옴에 따라 두려움이 급습해와서 머리를 벽에 처박고 싶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순간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머리에 손을 얹으셨는데 그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두려움의 고통이 싹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자 자신과 함께 있는 수감자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재판에 나아가게 됩니다. 아이의 부모가 많은 변호를 해주었지만 어쨌건 강제적인 위력이 행사된 것은 사실이기에 실형 1년을 살게 됩니다. 윤 전도사는 또 실망합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아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 삐져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감옥에서 이슬람교도들과 마찰이 있게 됩니다. 교도소 막사는 A에서 E까지 있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오면 A막사에 살고 E막사는 출소 직전에 있는 수감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A막사에 있던 윤 전도사를 어느 날 갑자기 E막사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그런 것은 거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를 옮기고 나서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을 그다음 날 죽이려는 계획을 다 짜 놓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본 윤 전도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쥐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기기로 합니다.
1년 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이에 대한 분노로 공황장애와 공황발작, 폐쇄공포증 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몇 시간 남겨놓지 않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목사 안수를 받는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다 사그라지고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느 광고에 자주 나오던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You can do it!)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가진 생각입니다. 하지만 회개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공감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윤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한 아이를 회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위력까지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도 곧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그분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윤 목사의 광야는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크건 작건 이런 무너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힘을 빼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내 힘을 믿는 사람이고 아직 내 힘을 믿으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적당한 집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베들레헴의 큰 여관들이 아니라 광야의 마구간처럼 오직 주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나를 만들어갑시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 예언(40,3-4)이 실현된다는 것과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기다림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일어날 중대한 ‘어떤 사건’이 있고 오셔야 할 ‘어떤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을 기다리는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다.
제1독서에서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당신 백성을 승리로 다시 이끌기 위해 되돌아오시는 주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라’ 권고한다(이사 40,3-5). 그러면서 슬픔과 비탄에 젖어있는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고 한다.(40,9-11). 주님의 가장 위대한 ‘오심’은 당신 나라에서의 구원사업을 위한 것이다. 그 ‘오심’은 화해와 사랑의 ‘오심’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의 재건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분은 어미 양과 새끼 양들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목자이다(40,11). 그분 안에서는 권위와 사랑이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복음: 마르 1,1-8: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이 신비스러운 ‘소리’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며 그 소리는 사막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간다. 그의 선포는 아주 짧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온통 ‘더 훌륭한 분’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과 그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것이다. “내 뒤에 오신다.”(7절)는 말은 오심의 긴박성을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이며,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기조차 부당하다고 한다. “신발 끈을 풀어드린다.”(7절). 이 두 가지는 모두 주인을 위해 길을 내며 앞서가는 종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중요한 그리스도께 대한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요한 세례자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며, 또 하나는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는 것이다. “더 훌륭한 분”은 ‘더 힘센 분’의 의미로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켜”(1요한 3,8) 사탄을 쳐부수시어 구원업적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성령을 베푸실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마지막 날에 성령이 충만히 넘쳐흐를 것을 기대해 왔다(이사 44,3; 에제 36,26 참조).
요한은 단순한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자체로써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고 준비하였다. 그의 생활 자체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웅변적인 설교였기 때문에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5절). 낙타 털옷을 입고 들꿀을 먹으며 광야에 살았다는 것은, 그의 속죄의 정신만이 아니라 고행의 열정, 또는 그분을 찾아 얻기 위한 간절한 기도, 어떠한 상황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근본적 자유에 대한 갈구, 그리고 주님께서 지나가실 ‘광야의 길’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열망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요한은 삶과 설교를 통해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4절)의 세례를 선포한다. 즉 메시아의 오심은 마음의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개’가 없이는 메시아도 오시지 않는다. 만일에 오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들을 단죄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절) 이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체의 제목과도 같다. 이제 복음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쳐야’하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잘 준비하고 우리가 모두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계속해서 참여하여야만 한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날’을 기다림에 있어서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즉 신앙인들의 기다림은 무기력하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나아가 창조의 힘을 지닌 기다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다림은 ‘은총’이 아니라 단죄를 위한 ‘심판’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오심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짧은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긴장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까지 우리가 가진 몫을 꾸준히 채워감으로써 완성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또한 나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 가면서 이루는 것이다.
‘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에게 성탄을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진정한 제물로 봉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이사야 예언서의 두 번째 부분인 40―55장은 바빌론 유배 말기의 삶을 전하면서 ‘위로’를 주제로 삼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의 시작 부분으로서, 예언자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의 자비를 통하여 일어나는 위로와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자비의 힘을 강력한 자연의 모습에 비유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주님께서는 자비의 힘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복음서를 집필하며 예수님께서는 과연 누구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고민하던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사야가 예언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일어나는 위로와 변화의 힘을 복음서의 첫 장에 인용합니다. 마르코는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며,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자 요한의 외침으로 전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이었고, 그 방법이 ‘회개’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자 요한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힘으로 위로와 변화를 가져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앞서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날을 앞당기도록 회개해야 할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2-4).”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곧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만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일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만나려면 참되게 회개해야 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라는 말은,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으라고 선포했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회개했음을 나타내는 세례’일 뿐입니다. 그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참으로 회개하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진짜 ‘회개의 세례’가 됩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는 해마다 대림절을 맞이했고,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들었고, 회개했고, 주님의 길을 마련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이 좋아졌는가? 무려 이천 년 동안 길을 닦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길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고속도로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인간 세상 전체를 보아도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나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아도, 세례를 받을 때나 지금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별로 나아진 점이 없고...... 늘 그저 그렇게 살던 대로 살면서, 대림절은 특별하지도 않은 연중행사로 그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순수함과 거룩함은 잃어가고, 요령과 핑계만 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례자 요한의 첫 선포는 길 없는 곳에 길을 낸 일이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낸 다음에는 꾸준히 그 길을 잘 관리해야 하고, 부족한 부분은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좋은 길로 만들어야 합니다. 만일에 관리를 소홀히 하고, 방치한다면, 잡초가 자라고, 비가 오면 파이거나 무너지는 곳이 생기고, 그러다가 결국 길을 내기 전 상태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라고 해도 그렇게 됩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일만 회개인 것이 아니라, 돌아선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도 회개입니다. 만일에 노력하지 않으면 돌아서기 전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회개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회개 선포’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의 회개 선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 세상의 회개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나 자신의 회개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습관적으로 회개하고, 형식적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인 회개와 형식적인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척 흉내를 내는 것뿐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형식적인 회개를 꾸짖는 요한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요한이 한 말을 뜻에 따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주는 세례를 받기만 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한 적 없다. 형식적으로 회개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참된 회개를 하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만심을 버려라.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형식적으로 판공성사를 보기만 하면 회개한 것인가?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리고 냉담한 적도 없고, 주일미사 빠진 적도 없고, 판공성사 빠진 적도 없고, 교무금 잘 냈고, ... 기타 등등 ... 다 잘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 ‘삶’이 세속의 안 믿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이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회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어떤 대재난이 닥치면 “종말인가?” 하면서 두려워하고, 회개를 생각하다가, 그 재난이 지나가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개를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지난 이천 년 동안의 인류의 모습이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어떤 심각한 병에 걸리면 두려워서 회개를 생각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복되면 금방 회개를 잊어버리고 태평스럽게 지냅니다. 눈앞에 닥친 위험이 아니라면 위험인 줄도 모르고, ‘남의 일’로만 생각하고, 자기에게는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고, 방심하고...... 그러다가 병자성사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고, 절망하고......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누군가에게는 올해의 대림절과 성탄절이 ‘생의 마지막 대림절과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나는 아니다.” 라고 누가 감히 큰소리칠 수 있습니까? (지혜로운 신앙인은 오늘이 ‘생의 첫날’인 것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회개하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이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로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왜 이렇게 안 되는 것인지......)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umbrella]
2020-12-05 ㅣNo.142651
미국에서 지내면서 한국과 다른 점을 봅니다. 그중에 하나가 ‘의료보험’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국가의 주도로 전 국민 의료보험을 채택하고 있지만 미국은 민간 의료보험이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이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암과 같이 중증의 질환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전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으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아주 잘 살거나, 아주 못 살면 의료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잘 살면 본인의 부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주 못 살면 정부의 부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은 부담이 되는 비용을 지출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이 제도화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구에 속한 사제들도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용을 부담한다고 들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회사에서 비용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인의 부담은 1년에 10,000불정도 된다고 합니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1년에 30,000불정도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비용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이 엄청난 비용의 의료비를 지출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의 역사를 통해서 분석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두 가지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광활한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땅은 미국에서 살았던 원주민의 땅입니다. 원주민들은 땅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노동은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들이 하였습니다. 광활한 땅에서 노예들의 노동으로 수익을 얻은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국가가 국민들의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전 국민 의료보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땅이 있었고, 땅에서 일할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간의료보험을 선택 할 수 있었고, 충분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마바 케어를 비롯해서 국가가 부담하는 의료보험을 제도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은 아직도 많은 이민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예전의 이민자들은 땅을 거저 얻을 수 있었고, 노예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민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거저 얻을 수 있는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흑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해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안정한 신분으로 충분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조업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미국의 제조업이 더 싼 임금을 찾아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땅, 꿈의 땅인 미국에서의 삶이 긴장과 불안의 삶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총기 소유의 자유는 역사의 유산이지만 그로인한 피해가 심각합니다. 해마다 총기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은 엄청난 자원을 가진 나라입니다. 막강한 부를 소유한 나라입니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나라입니다. 첨단의 과학과 기술을 가진 나라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을 바꾸면 아름다운 나라, 젓과 꿀이 흐르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연중 제33주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는 약한 이,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이 되신 후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이민자의 섬 ‘람페두사’였습니다. 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웃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에 빠져버렸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형제를 보면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가련한 영혼이여!’ 그리곤 그냥 가던 길을 가버리는 겁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내가 마음껏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주님이라면>
+ 찬미예수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1년차 교수인 만큼 강의록도 만들어야 하고 시청각자료도 준비해야 합니다. 말이 쉬워서 강의록이지,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하고 적절한 예는 무엇이 있을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윤리적 문제들은 현대 사회 안에 혼재하므로 무엇이 더 시급한 일인지 주제도 선별해야 하니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준비가 잘 되면 확실히 수업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하는 강의가 얼마나 학생들에게 좋게 들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만족스럽다면 대체적으로는 학생들에게도 제 마음이 잘 전달되리라 봅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과목이 각각 다른 세 과목이고 본당을 겸직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쫒기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떻게든 성실히 수업을 준비하려 애쓰지만 제 마음과 달리 준비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업 때에 항상 허점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시청각 자료에서 오타가 발견된다거나 수업 후에 제 스스로 아쉬운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실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면 이유와 상관없이 만족하지 못한 채 후회만 남을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에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소중할수록 준비는 자연스럽게 정성을 들이게 되어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아무런 준비 없이 집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혹은 회사에서 중요한 발표가 있는데 아무런 준비도 연습도 없이 나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러한 예는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어른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갈한 옷을 갖춰 입고, 자녀들을 위해서는 영양분이 골고루 갖춰진 따뜻한 한 끼를 준비합니다. 장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살지 적어두거나 하다못해 지갑이라도 준비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준비가 쌓이고 쌓여 한 평생을 이루는 셈입니다. 이러한 준비에는 공통된 한가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 상대방을 위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어느덧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의 시간이며 동시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분,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일단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연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설레는 가슴으로 기다리는 분은 이 세상을 완성하실 분,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오실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분을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은 당시 메시아를 대망하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을 것을 촉구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다시 말 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하는 마음가짐, 즉 지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분을 모시고자 하는 회개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 회개의 생활에 대해 오늘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실제로 우리 마음이 항상 곧고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수한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작은 골짜기이지만 어떤 골짜기는 너무도 깊고 넓어서 메우지 않으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거칩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교만함, 내 마음대로 사람을 움직이고자 하는 욕심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보다 나의 권리와 이익만을 중요시 여기는 어리석음, 때로는 도망치고 피하고자 했던 하느님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곧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이 모든 장애물들을 다듬고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 다가갈 수 있으며 필요한 은총을 올바로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평탄하고 곧은 그 마음의 자리에 비로소 아기 예수님을 편안히 모실 수 있습니다. 이렇듯 대림절을 보내는, 그리고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모든 복음의 화두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삶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주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이고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이렇게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고 마음껏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주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미사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꾸어 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 갑시다. 바로 그러할 때에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회개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대림 시기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태어 나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자리와 길을 마련하는 시기입니다. 대림 2주일인 오늘 교회는 회개를 통해 주님께서 오실 수 있는 길을 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오심을 방해하는 굽은 것들, 움푹 페인 골짜기와 같은 관계들, 주님을 가리는 산과 언덕이 되어 버린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열어 보여 드리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어느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부는 평생 살아도 전혀 닮지 않으니 포기해라. 난 아직도 짠게 먹고 싶지만 니 엄마는 항상 싱겁게 요리한다. 난 아직도 온돌에서 자고 싶은데 니 엄마가 우겨 침대에서 잔다. 난 바다가 좋은데 니 엄마 때문에 매주 산에 간다. 아주 죽을 맛이다. 난 김치에 젓갈이 들어가는 것이 싫은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니 엄마는 아직도 젓갈을 넣는다.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고 하는데 개뿔! 하나도 닮지 않는다. 30년 함께 살면서 배운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고 살아라!
회개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서 예수님을 닮고 싶은데, 참 변하지 않는 우리 내적 외적 모습을 스스로 보면서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먹기 싫은 젓갈든 김치를 먹어야 하고, 온돌을 포기하고, 가기 싫은 산을 계속해서 가야하는 그 아버지처럼, 그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계속해서 실천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부부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듯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지속적인 회개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보다도 몸소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 줍니다. 또한 주님 앞에 겸손된 마음으로 자신을 정화하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임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의 길을 닦고 굽은 길을 바르게 하여라. 골짜기는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추어라. 굽은 데는 바르게 하고 험한 데는 고르게 하여라.” 요한과 관련된 고독한 광야와 요르단 강의 물은 우리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옮아가게 하는 회개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굽은 길과 골짜기, 높은 산과 언덕을 바르고 평탄하게 하는 것으로 상징화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안에는 주님의 오심을 방해하는 어떤 골짜기와 굽은 길과 높은 산이 있습니까?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욕심과 상처의 골짜기, 나태함과 안일함의 굽은 길, 하느님 위에 무엇인가를 올려놓고 그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높은 산과 언덕들은 우리와 하느님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우리 자신을 거짓된 모습으로 만들고 맙니다.
따라서 요한 세례자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러한 골짜기와 높은 산을 평탄하게 하기를 권고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정화를 상징하는 광야와 물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고, 흐트러졌던 우리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과 자신 사이에, 그리고 자신과 이웃 사이에 놓인 방해물들을 치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방법이요 지속적인 회개의 길일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절을 보내는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준비는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골짜기와 높은 산으로 멀어지고 가리워진 하느님, 나와는 거리가 먼 낯선 곳에 계신 하느님, 나의 간청을 잘 들어 주지 않으시는 무심한 하느님, 나를 간섭하시고 벌하시는 두려움의 하느님이라면 좀 더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멀게 느껴지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시간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진다면 “나의 삶에 정화되어야 할 광야와 물이 필요하구나”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 고통이나 침묵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저항합니다. 자신의 주변에 벌어지는 고통과 상처를 보면서 주님께 원망을 드리기 보다는 그분께서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성장해 나갈 수 있고 그분과도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채우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니라, 부족한 채로 일상생활에서 거룩한 것을 발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던지 함께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과 더욱 친밀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세례자 요한처럼 낮추어야 할 것입니다. 내 뜻을 포기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한 정화의 시간인 대림절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깊은 상처의 골짜기들, 서로를 향해 쌓아 올린 불신의 높은 산들, 삐뚤어진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높은 언덕들을 평탄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지금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와 주위의 이웃 형제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형성시키는 법을 배워가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자신의 뜻을 상징하는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을 고르게 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뜻을 내안에 받아들이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닦아야할 주님의 길이요 진정한 회개의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과 같은 주님의 길, 사랑의 길을 닦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때때로 내 마음의 골짜기와 다른 이의 높은 산을 고르게 하는 것이 정말 너무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 그분의 마음으로 나와 다른 이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면 좋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아래에서 땅을 바라보면 깊은 골짜기도 높은 산도 그저 그렇게 평탄하게 보이게 됩니다. 지금 내가 보기에는 깊고 높지만 더 크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 보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내 골짜기만, 다른 이의 높은 산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림시기가 되시길 빕니다.
=====================
[대전교구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인간이 존엄한 이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인‘인권’은 이 마땅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가? 모든 피조물 중에 지능적으로 가장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라서? 그것이 존엄함의 이유일까? 원숭이보다 낫다는 사실이 인간 존엄성의 이유인가?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엇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 이루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존엄함이란 것이 그 무언가보다 더 낫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교와 차별은 각자의 존엄함을 위한 정당한 행위로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보다 못한 것과의 격차를 통한 존엄함이 아니라 세상 가장 존귀하신 분과 가깝다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함이다.
존엄함이란 것이 그런 거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보잘것 없어도 인간은 얼마든지 존엄할 수 있다. 재산, 학력, 지위, 출신, 성별 등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그런 것이라면 인간성이 회복되고 인권이 존중되는 삶이란 결국 우리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모습 안에서 지존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력을 통해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노력을 ‘사랑’이라 부르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이며 결국 그 사랑이 우리를 존귀하신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마태오 복음 25장 31절-46절 참조)
보다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격차와 차별이 자신의 존엄함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러한 세상 안에서 작고, 낮고, 약한 것들은 무시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세상이야말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마르코 복음 1장 4절)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녕 모든 사람을 존엄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코 복음 1장 1절)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치움으로써 ‘참사랑이신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마르코 복음 1장 3절 참조) 참된 회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
[대구대교구 김태형 베드로 신부님]
<가난과 겸손>
오늘 대림 제2주일 복음은 두 가지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와 인격에 대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설교에 대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메시지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던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되돌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하느님의 오심’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심’을 통해 드러나는 그분은 요한 다음에 오시는 분이지만 요한보다 더욱 강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권능과 함께 오시는 분이기에 악을 쳐 이기는데 더욱 강한 힘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로하러 오시는 목자이시며, 부서지기 쉽고 결핍된 것들을 배려하고 보살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십니다.
오시는 분을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을 회개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회개의 삶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을 갖추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 2주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배우도록 복음은 요한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꼭 필요한 본질적인 덕목은 가난과 겸손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모든 이는 이 두 가지 덕목 안에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가난의 덕은 주님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탄생할 때 화려한 궁궐이나 도시에서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골의 작은 마을 마구간에서 가난하게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러기에 가난은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구세주가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모든 부유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데 더욱 필요한 덕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교만함을 통해서 교회로부터 멀어져 갔음을, 반대로 주님을 닮은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겸손의 덕을 갖춘 이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를 닮는데 필요한 덕목을 증진 시키고자 노력하는 내적인 발걸음을 걷는 데 시간과 공간을 할애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 노력들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 길을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부디 모든 교우 여러분들이 이러한 노력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더욱 기쁘게 맞이하기를 기원합니다.
=====================
[의정부교구 유병만 가브리엘 신부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자기 죄를 고백하며>
1997년 제작된 제목으로 더 유명한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십대 네 명이 축제가 끝나자 고속도로를 질주합니다. 차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던 그들은 실수로 사람을 치게 됩니다. 당황한 네 명은 ‘신고하자’, ‘그냥 도망가자’ 의견 충돌을 하다가 시신을 강물에 버립니다. ‘무덤 속까지’ 비밀을 지키자고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1년 뒤 익명의 편지를 받습니다. 내용은 딱 한 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놀란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갈고리를 든 남자에게 쫓깁니다. 죽었다고 강물에 던졌던 그 사람이 살아서 복수극을 펼치는 겁니다.
-----
대림 시기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고해성사실에 있다 보면 가끔 들려오는 소리 “사는 게 다 죄죠.”, “죄를 지은 것은 없고, 그냥 성사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또는 “죄가 생각나지 않아요. 알아서 용서해 주세요.” 성사의 시작부터 애매모호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단 것을 모르고 지냅니다. 내가 나의 잘못을 감추고 숨긴다 해도 내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 신앙 생활의 시작입니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 기도를 합니다.
둘째, 감사하게 됩니다.
셋째, 자비, 용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저의 잘못과 죄를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 부족한 점을 은혜로 채워주시고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심에 감사합니다. 늘 주님 안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며, 주님 안에서 시작한 일을 주님 안에서 끝맺게 하소서.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칼럼니스트 김경의 책,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서 소설가 김훈과의 인터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작당해서 자신을 욕할 때, 이렇게 생각했다고 소설가 김훈은 이야기합니다.
“네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해 봐라. 너희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강력한 메시지가 보였습니다. 다른 이로부터의 삶이 아닌, 나로부터의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솔직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때가 많았습니다.
욕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아지고, 반대로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때 한순간의 기분만 좋거나 안 좋거나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말로는 내 육체의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존감이 상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으려 한다면 자존감이 상하는 순간에서도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떠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분명히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제대 앞에 켜져 있는 2개의 대림초를 봅니다.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인이 누리고자 하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구세주의 탄생, 이 구세주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지요.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당시 세상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비교되었거든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당신이 먼저 그분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비교를 막습니다. 그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주님을 충실히 준비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맞이할 겸손을 가지고 있나요?
###############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어느 식당에서 주방, 홀 서빙 등 일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일까요? 일을 너무나 잘했지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종종 손님과 언쟁이 붙는다는 것이 이 직원의 단점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이런 직원을 어디에서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까지는 달래가면서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직원과 손님이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사장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 직원을 사람들 앞에서 크게 혼냈습니다. 이때부터 직원은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고 혼을 낸 사장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손님 음식의 양을 정량보다 훨씬 많이 담기 시작했지요. 더 많이 담아주면 재료비가 늘어나서 식당에 큰 손해가 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효과가 있었을까요? 그 뒤 이 식당은 푸짐한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줄을 서서 식사할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기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닐까요? 나쁜 마음도 좋은 결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마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벌써 대림초 두 개에 불이 켜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만큼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15장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국어 공부를 잘하면 주제 파악을 잘하고 산수 공부를 잘하면 분수를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주제 파악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의 능력과 분별력, 자신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기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구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제 파악을 잘하였고 분수를 지켰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칭하며,
속이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하며 자신을 확실히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는 결코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음은 요한은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 역할이 무엇이며 또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한껏 받들어 올리고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함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도“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2베드3,14)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1독서를 보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곧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40,3)하고 외칩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광야요, 메마른 사막이라면 곧게 길을 닦아야 하고 서로 간의 골이 패인 골짜기라면 메우고, 나를 높이는 교만함이 산과 언덕이라면 낮추고, 거친 마음이면 평탄하게 하고, 험하다면 평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40,10)는 은혜를 체험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면, 길을 닦을 수도 없고 골을 낮추거나 평야로 만들 생각을 못하여 결국,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몫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몫이 있습니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고귀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요,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지만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 마음을 품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성경이 보이지 않고 화투장이 보이고 오락기나 보인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여자가 멋진 남자를 보고 아,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남자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내 아내는 저런 매력이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세요. 그 가정 안에 화목함이 있겠습니까? 내 자식은 왜 저 모양일까?.......
혹 빼앗긴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돌리십시오. 빼앗긴 마음을 인정하는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겸손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또한 천국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내적 혁명가의 삶>
-회개하여라, 위로하여라, 주님의 길을 내어라-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제39회 인권주일이고, 10회 사회교리주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1일 담화를 통해 “가장 가난하고 멸시 받는 이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며 인권을 강조한바 있습니다. 인권을 수호하고 사회교리를 배우고 익혀 시대의 징표를 예민하게 읽고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또 특기할 것은 지난 11월29일 대림 제1주일부터 내년 대림 제1주일 전날(2021.11.27.)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란 주제로,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게 됩니다. 가톨릭 평화방송(CBPC) 캠페인 월별 주제중 내년 희년이 끝나는 달에 이어 12월 마무리 주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예,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내년까지 갈 것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묻는 다면 지체없이 “예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대답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인답게 살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사랑의 내적 혁명가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하루하루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사랑의 내적 혁명가’의 삶은 바로 오늘 대림 2주일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삶, 위로하는 삶,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삶이 되겠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후렴의 가난하고 겸손한 간절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이 기도에 응답해 주님은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첫째, “회개하여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한두번 회개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회개하는 ‘회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입니다. 이래야 늘 맑게 흐르는 삷입니다. 결코 감상적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이 방향을 바로 잡는 삶의 방식을 개선하는 회개입니다. 늘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사는 회개입니다. 내적혁명의 삶, 바로 끊임없는 회개의 삶임을 뜻합니다. 내가 문제요 결국 변화해야 할 것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회개를 통해 변하면 주변은 저절로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해 질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지혜요 무지의 병도 치유됩니다. 무지의 병에 최고의 특효약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설교 주제가 일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위한 세례를 선포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역시 회개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다음 세례자 요한의 단순소박한 삶과 말씀도 그대로 그의 겸손을 반영합니다.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쓰레기를 전혀 내지 않는 무공해의 가난하고 겸손한 자연인 요한입니다. 그의 말씀 또한 그대로 겸손의 표현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회개의 귀한 열매가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회개의 진정성은 겸손을 통해 드러납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알수록 나를 알게 되어 겸손인 것입니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박상훈 신부의 인터뷰에서 강조하는 바 역시 겸손이었습니다.
“연대의 다른 말은 겸손입니다. 연대는 결국 겸손해지는 것이며 교회는 겸손함을 실천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의 마르지 않는 샘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께 대해 언급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유일한 소원도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마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장되는 날들은 회개하라 주어지는 은총의 날들입니다. 살았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회개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분발을 촉구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결국 회개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로 겸손해진 이들에게 활짝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의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위로하여라.”입니다.
내적혁명의 회개로 겸손해진 이들은 주님을 닮아 위로의 사람이 됩니다.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자 제2부 시작으로 ‘위로의 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은 위로의 사람입니다. 위로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로 구원 받은 시온이,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바로 위로와 격려의 주님을 반갑게 환대하는 은총의 대림시기이자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예언자 이사야는 위로와 연민,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을 참 다정하고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분께서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참으로 이런 다정한 착한 목자 하느님을 닮을수록 위로의 사람이 됩니다. 얼마나 위로에 목말라 하는 현대인들인지요. 충고나 조언보다 정작 필요한 것은 경청과 위로, 격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시지만, 분명 초점은 그분께 선명히 맞춰져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3-4)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그분의 길을 준비할 "사자"(마르 1,2)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그 사람이지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7)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가 자신에게 쏠리자 세례자 요한은, 자기는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일 뿐이고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존재임을 밝힙니다. 이 군더더기 없는 진실은 그의 담백한 겸손에서 나옵니다. 요한의 존재 목적, 곧 소명은 주님보다 앞서 와서 백성들이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지요.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백성을 위로합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이사 40,10)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힘과 권세, 재물과 지식이 소수 계층에 비정상적으로 쏠려 질서와 균형을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 빠져나올 수 없는 억압, 벗어버리기 힘든 차별에 다수의 민중이 끝간데를 모른 채 추락하고, 사람다움을 누릴 권리조차 잊은 채 체념과 비관을 강요받으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는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평화의 임금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다수가 일부 기득권층의 특권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보통 사람은 물론 작고 약한 이들까지도 사람다움을 회복하고 존중받는 나라지요.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 실존과 동떨어진 저 하늘 끝의 이상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현실입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동시에 바라는 희망이지요.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박해 시대를 살아가는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당시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의 위험을 곁에 두고 걸으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리라고 믿으며 견디어 냈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의 정의로 보상을 받는,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세상입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베드 3,14)
사도는 티도 흠도 없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주신 당신이 모상이 충만히 피어나는 상태가 곧 존재적 평화일 겁니다. 죄와 이기심은 이 평화를 훼손하지요.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2베드 3,11)은 우리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잘 견디고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 먹이시고 ... 품에 안으시며 ...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는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주님을 이렇듯 착한 목자의 표상으로 제시합니다. 어쩌면 대림 제 2주일의 모든 독서 내용이 바로 이 말씀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 싶습니다.
온 세상 모든 만물이 준비해서 맞이해야 하는 분, 세례자 요한이 자기보다 크시다고 이야기한 분, 그가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할 만큼 높으신 분, 지난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티나 흠이 없도록 애써가며 준비해 맞이해야 하는 분, 그분이 바로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며 찾아 헤메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목자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양들을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 일일이 거둬먹이는 자상한 손길, 허약하고 병든 양을 안고 위로하는 따뜻한 품, 각자의 처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조심스런 관계맺음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은 힘과 재물과 권력이 몰아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가 각자의 하느님 모상성을 활짝 꽃피우며 평화의 상태로 공존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큰 소리나 강제 없이 양들을 이끄시는 온유하고 양선한 스승이고 길벗이시지요. 그런 분을 우리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지요.
대림 제2주일의 말씀을 통해 보다 선명해진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와 온 세상을 구원해 주실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마음 안에 들어오시려 채비를 차리고 계신 착한 목자십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로 부드럽고 온기 넘치는 구유를 마음 안에 마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탄이 어느새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습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곳이요,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무서움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결국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을 전합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을 알리며,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회개의 증표를 보여라는 말입니다.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코 요한은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이며,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지만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이 증언에는 예수님께 대한 세 가지 내용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인데 인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자격, 곧 그분의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 집중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주님 되게 해드리는 일’ 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셋째 증언’은 그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과 사명에서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위하여 걷고,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1,3)
"마라나타!"
"주 예수님, 어서 오세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었습니다. 곧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오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회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를 바라십니다.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당신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자 '사회 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인권'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곧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결코 무시되거나 짓밟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낙태법에 대해 강력 반대하고 있고, 사형제도의 폐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마음인 인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회 교리'는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지킬 교리'입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 '나 자신부터' 먼저 회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 7)
진정한 울림은
마음을 울리고
공동체를 울린다.
요한 세례자의
정신이 우리를
울린다.
요한
세례자같이
사랑하면
낮아진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이다.
낮아질수록
가까워진다.
겸손은
낮추고
낮아지는
기쁨이다.
더 낮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인권의 문제는
인간 구원의
절박한 문제이다.
버림받은
이들을 직접
찾아 나서시는
주님이시다.
모순과 부당함
소외와 유린
냉대와 멸시
속에서도
소중한 우리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들
삶 속으로
깊이 들어셨다.
신앙의 진리는
사회교리처럼
세상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좀더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교회의
모습을 희망한다.
인간 존엄의
울림이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사회교리이다.
존중으로
변화된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사회교리의
삶이다.
삶을 나누고
보여주는 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신앙인의
참된 삶이다.
올바른
삶의 의미와
인생의 참된
가치와 행복을
일깨워주어야 할
우리의 소명이다.
인권과 대림
사회교리와
삶의 현장을
아우르는 근원은
주님이시다.
살아계신
주님처럼
살아있는
우리의 참여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것임을
믿는다.
대림의 여정은
삶의 전체를
일컫는
인간 존중의
참된 여정이기
때문이다.
존중이 없는
실천과 참여는
울림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과 참여는
올바른 존중이기
때문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