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상을 말할 때, 주체의 관점에 서 있습 니다. 그러나 주체는 동시에 타자의 영역과 걸쳐 있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표상된 타자 가 아니라, 실재로서 타자입니다. 인식에 포함되 지 않은 영역이죠. 세계는 이것이 겹쳐있다는 것 입니다. 바로 주체는 실재 타자의 응시를 받고 있 다는 것이죠.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이 겹쳐진, 즉 나의 시관적 의식의) 영역에 들어온 타자를 볼 뿐이며 그것은 표상-이미지라는 것입니다. 타자의 표상은 주체의 영역일 뿐입니다.
여기서 위 쪽의 깔데기는 주체의 위치에서 바라보 는 세계죠. 주체는 기하학적 조망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저편에 대상이 있고요. 그렇지만, 우리 는 그 대상의 실재에 다다르지 못하고 이미지를 본 다는 것이죠. 칸트가 말한 물 자체, 인식의 넘어에 있는 물자체라 할 수 있죠. 그렇지만 동시에 타자 로부터 세계 또한 그려진다는 것이고, 주체는 그 그림 안에 기입된 무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아 랫쪽 깔데기가 그것입니다. 광점은 타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고 그것이 주체를 포함하는 그림 을 투사하는군요. 나 자신 그림 속에 있다는 것인 데, 그렇죠. 우리는 누군가 나를 보고있다는듯이 행동 을 하죠.나는 이 세계의 한 부분을 점하고 있다 는 인식, 즉 그것이 존재감이고, 그것으로 우리는 멋지게 살고 싶죠. 누군가-누군가에겐 그것이 신 일수도 있고, 나를 보고있는 것처럼, 뽐을 내죠. 그 러나 그 누군가는 스크린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실재로서 인식되지는 않죠. 그걸 라캉이 상징적 타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누군가 나를 몰래 훔쳐보고 있다 면,,, 기겁을 하겠죠. 공포감, 혹은 불쾌감에 휩싸 이겠죠. 이것이 실재의 출현입니다. 우리의 삶에 서 실재는 종종 출현합니다. 누가 알아챈 것도 아 닌데,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있죠. 행하는 입장이 아니라 당하는 입장에 되는 순간, 아마 그 런 것 같습니다. 라캉이 꿈을 예로 드는데, 꿈에서 는 늘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시선 과 응시로 분열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응시가 상징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재적인 차원으로 나를 엄 습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죠.
스스로 '보여주는' 행동은 동시에 '보여지는' 차원 이 있는 것이죠. 보여준다는 행하는 입장은 보여 진다는 당하는 입장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존 재성의 근간인 보여준다는 것은 보여진다는 응시 의 대상이 된다는 위험을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것 이죠. 그렇기 때문에 '시선-응시'의 분열과 이중성 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여주고자 했으나 저 렇게 보여져버리는 순간이 있죠. 물론 그렇게 보 여지는 것을 내가 알아챘을 때죠. 이때 부끄러움 이 몰려오죠.
라캉은 '정어리통조림 깡통의 일화'를 들어 이를 이 야기합니다. 라캉은 금수저인가 봅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농사일, 사냥, 뱃일 등 막노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꼬마장이라는 어부와 고기잡이 배를 탄거죠. 이때 꼬마장이 햇빛을 반사하여 반 짝거리며 바다에 떠있는 깡통을 가르키며, "깡통 은 너(어부)를 보지 못하지만, 너는 그걸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깡통이 (아마도) 허세를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 을 합니다. 거친 자연과 맞서 싸우며 힘겹게 살아 가는 사람들의 그림 속에 자신은 우스꽝스런 얼룩 처럼 보였다는 것이죠. <자크 라캉 세미나11/새 물결/맹정현, 이수련/149~150p 참조)
행함의 이중성을 보여주는데, 그러니까 행함에서 주체의 근거를 어떻게 확보하는가 하는 과제가 결 국 주체의 과제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