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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 탈출 22,20-26
제2독서 : 1테살 1,5ㄴ-10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평생 사랑 공부
-1. 하느님 사랑, 2. 나 사랑, 3. 이웃 사랑, 4. 자연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2)
서울주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들어온 오늘 시편 화답송입니다.
이 시편구절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어제도 상담고백성사 후 세 차례 형제들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함께 십자성호를 긋고 기념사진을 찍으니 밝고 환한 모습이 그대로 성화聖畫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이 또한 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생래적 본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복된 운명입니다. 사랑하라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은 같은 어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이자 ‘사랑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고 우리는 사랑공부에는 영원히 초보자일 수뿐이 없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비로서 겸손의 덕입니다.
또 사랑의 여정 중에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야 하는 사랑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육신은 노쇠해가도 성장, 성숙해 가는 사랑과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 결핍이 만병의 근원이요 사랑만이 만병통치약입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길도 사랑뿐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은 사랑이 우리의 모두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물음에 주님은 거침없이 대답하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우선적인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런 갈림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수행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수행이
참으로 우리를 순수하고 자비롭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명하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참으로 분리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입증됩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이 없는 자유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약자보호법에서 이웃 사랑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신 하느님이요,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들을 사랑할 수뿐이 없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보호자 배경이 되어 주십니다.
이들이 부르짖으면 하느님도 그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다 합니다.
오늘 탈출기이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나는 자비하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랑으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하셨고
몸소 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완전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롤모델이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셨던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참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체험해야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열면 언제 어디서나 와닿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음이 바로 사랑 받고 있음의 체험입니다.
새삼 행복뿐 아니라 감사도 사랑도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깨달아
더욱 하느님을 예수님을 나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예수님은 물론, 자기도 남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아끼고 사랑합니다.
회개의 모범이 역시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사랑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다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자 성소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 중인 늘 사랑에는 초보자이자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웃이란 개념을 확장해야 할 시대입니다,
사람만 이웃이 아니라 공동의 집인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피조물이 이웃 형제들이라는 자각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모두가 공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작금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착취와 소비, 횡포와 탐욕으로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된 이웃 자연환경들이요 멸종되어 가는 무수한 피조물 이웃들입니다.
사람 이웃뿐 아니라 자연 피조물 이웃도 아끼고 사랑하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이
참으로 절박한 때입니다. 하여 생태적 회개가 절실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시어,
온 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나와 이웃 사람 형제들뿐 아니라
피조물 자연 형제들도 아끼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끝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쉐마: 들어라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어느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시지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예수님께서 첫째라고 말씀하신 대목은
바로 오늘 제 1 독서로 들은 신명기 6, 4-5를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들의 신경이었지요.
쉐마라고 불렀는데, 쉐마는 ‘듣는다.’ 라는 히브리어의 명령형이지요.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쉐마, ‘들어라.’ 라는 말을 항상 문장에 맨 앞에 두지요.
쉐마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선언으로
그들은 회당에서 예식을 할 때도 항상 쉐마로 시작했지요.
그들이 신경으로 만든 쉐마의 온전한 문구는
신명기 6, 4-9와 11, 13-21과 민수기 15, 37-41을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면서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 6)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성구 갑에 쉐마를 넣어 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쉐마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이 다름 아닌 바로
너희가 매일 외우고 소중하게 넣고 다니는 그 쉐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우고 성구 갑에 넣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둘째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레위기 19, 18절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시지만
여기에서 이웃의 범위를 확장시키십니다. 그들에게 이웃은 오직 이스라엘 동포였지요.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다른 대목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시니
결국 우리는 이 둘이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알아듣게 됩니다.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두려움 없이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성 이냐시오는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고 하셨지요.
가만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선뜻 이웃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처받을까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제가 서품 받을 때 만드는 상본에 넣을 성구로 택한 구절이기도 하지요.
제가 오래 전에 번역했던 칼릴 지브란의 On Love라는 시에서
지브란도 사랑을 하면서 열망을 지녀야 한다면
“그대가 사랑을 앎으로써 상처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피 흘리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라고 합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 쉽지 않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려면
거기 반드시 피 흘리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두려워 선뜻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참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요한의 말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가장 알기 쉬운 해설이기도 하고요.
우리 언제나 잊지 않기로 해요. 모든 사랑은 그분에게서 온다는 것을.
우리가 살면서 참 사랑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느끼고 알 때,
우리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던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사랑의 마술이지요.
칼릴 지브란의 시 마지막 행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루의 삶이 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잠을 깨면 마음을 드높여
사랑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날에 감사를 드려라.
정오에 휴식을 취하며 사랑이 주는 황홀감에 젖고
땅거미가 질 때면 감사의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증권회사 분석가를 포함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간혹 자신의 전망이 완전히 빗나가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일류는 ‘예측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보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판명되었을 경우,
재빨리 그 상황을 보고하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이류는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을 늘어놓습니다. 신뢰하기 힘들어집니다.
삼류는 틀린 자기 의견을 계속해서 고집하면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신뢰만큼은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신뢰로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류, 삼류의 삶을 삽니다.
자신의 실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 주님께서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하셨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중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니까 특별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해한 질문을 하나 들고 나타납니다.
즉,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 613개 모두가 빠지지 않고 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단지 예수님을 이기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이 이기고 지는 수단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숨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틀렸음을 인정하고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류가 아닌, 이류, 삼류의 모습을 보입니다.
서툰 변명을 늘어놓으면 자신들은 맞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가득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익어가는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삶을 익어가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우리 인간을 익어가게 하고 변화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약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이방인, 과부, 고아, 그리고 병든 자, 헐벗은 자 등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가정에서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먼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 누가 불구된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프고 더 쓰릴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에는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곧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자유와 해방」(1986)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신학의 기본입장과 기본정신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키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딸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그렇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과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자신과 형제를 사랑한다면,
자신과 형제를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신에 대한 존귀함에서 오며,
자신에 대한 존귀함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실, 이러한 ‘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문헌 <새 천년기>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교의 영성을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되고,
한 아버지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형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지니게 되고,
형제의 바람과 요구를 깊이 공유하며 깊고 참된 우정을 지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진정한 자기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서로 한 생명이 되고, 하느님은 사랑이 됩니다.
이웃이 곧 하느님이 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요,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의 혁명을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곧 사랑의 혁명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 강론(2014,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어진 사랑의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혁명은 변화와 실천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애잔한 음색의 가수 심수봉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의 만찬에 함께 했었습니다.
어느덧 4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장충동에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간첩으로 조작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였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게도 10월 26일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든 노래가 ‘사랑밖에 난 몰라’입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이제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
시간을 되돌려 2000년 전 갈릴래아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삶이었지만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사랑밖에 모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가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해서 쓰러진 사람이 있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분들의 불편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면
그곳에서부터 하느님나라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헐벗음이 있는 것은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의료의 수준이 낮아서도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입을 것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서로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게 채우고도 많은 것들이 남을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오억 명을 먹이고도 넘치도록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3,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는 사랑의 길이다.
하느님 사랑이
마음을 살리고
목숨을 살리고 정신을 살린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한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며
사랑의 기쁜 관계이다.
계명의 본질 또한
하느님 사랑에 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방향성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율법에서 자유롭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참된 계명이다.
사랑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다.
생명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하다.
영원한 사랑의 기쁨은
오직 하느님 사랑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사랑은
나눌 때 가장 풍요롭다.
가장 기쁜 나눔의 주일이다.
마음을 나누고
목숨을 나누고
정신을 나누는 기쁜 복음이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끊임없이 해고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모든 율법의 목적지입니다.
사랑하면 그러니 모든 율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지식이 결국은 자신을 속이게 될 것입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지식의 목적은 행복이고 영원한 삶인데, 사랑을 위한 지식이 아닌 것들은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게 만들어 지식의 허세라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겸손과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배워서는 안 됩니다. 교만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마치 히틀러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경쟁하여 남을 이기는 목적이 된다면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은 그 배운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는
해고 대행 회사의 베테랑 직원인 ‘라이언 빙햄’의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전국의 사람들을 만나 회사 대신 해고통보를 해주는 일을 하며
1년 365일 중 322일을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런 그가 원하는 유일한 것은 아메리칸 에어라인(AA)에서 천만 마일리지를 모아
7번째이자 최연소로 플래티넘 카드를 발급받고 기장에게 인사 받는 것입니다.
그는 해고통보를 하는 일과 별개로 강의도 하는데,
그의 강의 주제는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있습니까?’입니다.
배낭에 넣는 물건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부담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의 장점을 피력합니다.
라이언은 결혼도 안 하며 어떠한 관계에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출장을 가서 바에 들른 어느 날,
자신처럼 출장을 다니는 아름다운 여인 ‘알렉스’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출장 일정을 맞춰보고 일치할 때마다 만납니다. 그러나 그냥 가벼운 관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언의 회사에 ‘나탈리’라는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패기 넘치는 신입인 그녀는 회사에 출장비용을 감축시키기 위해 비디오 회의를 건의합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멀쩡히 다니던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직접 출장을 가서 면대면으로 전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화면으로 해고를 한다는 것은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마일리지를 거의 다 모아 가는데
플래티넘 카드를 못 받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라이언에게 그럼 나탈리를 데리고 출장을 가서,
직접 만나서 해고하는 일의 장점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라이언은 혹이 달리는 게 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납니다.
나탈리는 선배인 라이언이 하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직접 해 보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듣고 낙담하고 좌절하고 화를 내고 자살을 하겠다는 등의
다양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탈리는 감성적이고 어쩌면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나탈리는 자살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여자를 건성으로 만나며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해고의 달인인 선배 라이언에게
자기만 아는 아이 같다고 한바탕 퍼붓습니다.
라이언은 나탈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가끔 만나던 알렉스의 집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정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자기가 해고하기 직전의 마음으로 만났듯, 그녀도 라이언을 그렇게 만났던 것입니다.
라이언은 관계의 짐을 지려고 하다 알렉스에게 차이는 마음의 아픔을 겪습니다.
그때 천만 마일리지에 도달해 기장으로부터 플래티넘 카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쁘지 않으냐고, 집이 어디냐고 묻는 기장의 말에
라이언은 “여기입니다!”(up to the air)라고 말합니다.
평생 자신이 쫓았던 목적을 달성했어도
한 명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당한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중누각을 지으며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별거 아니었던 한 사람과의 헤어짐이 자신의 감정에 이렇게 큰 울림을 준다면,
가족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얼마나 큰 행복을 줄까?
그는 마음을 바꾸어 그동안 해왔던 짐을 내려놓으라는 강의를 때려치웁니다.
그리고 해고 통지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그런 회사를 떠나버린 나탈리를 위해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도록 정성껏 추천서를 써줍니다.
또 돈이 없어서 신혼여행의 꿈은 꿀 수도 없는
자신의 매형이 될 사람과 누이를 위해서도 발 벗고 나섭니다.
해고 통지를 하던 삶에서 고용하는 삶으로의 전환.
이제 라이언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느낌입니다. 땅으로 조금씩 내려오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5년 이상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람을 해고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관계가 전부입니다. 늦더라도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 진리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식을 머리에 넣습니다.
그것은 공중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왠지 공허하고 하늘에 붕 떠 있어 정착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가지 맙시다.
주님은 플래티넘 카드를 들고 왔다고 칭찬해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들고 간 관계를 칭찬해주십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사랑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나를 내어 던지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두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오늘의 저에게는 하나의 의미로 들려옵니다.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진짜 사랑을 하라'고 말입니다.
참 사랑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처절하고 고통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아프지 않고, 나의 희생이 없는 사랑을 원할 따름입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타인을 제대로 사랑해 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여준
나를 위해 깊은 사랑으로 고통 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길
그래서 그분의 사랑에 맛을 들이길,
사랑하기에 내 모든 것을 저버리고 다른 모든 이를 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