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 - BC235)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의 관료이다.
여불위는 상인 출신이다. 많은 재산을 모았다.
(*여불위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으므로)
상인인 그는 조(趙)의 한단에서 진나라의 왕족으로 조나라의 볼모로 잡혀있던 이인(흣날 자초로 개명. 진의 장양왕으로 즉위했다)을 보고 투자 가치가 있다고 보고 거금을 투자했다.
이인은 진 소양왕의 태자 안국군(훗날의 효문왕)의 아들이지만 이미 왕의 눈 밖에 나서 왕이 될 가능성도 별로 없이 타국에 인질로 보내진 상태였다. 본국에서는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 생활비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처지였다.
여불위가 투자라고 한 말은 이인이 세자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세자가 되도록 공작하는 것을 말한다.(권력은 만들어 내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뇌물, 음모, 작전 등등의 공작으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공작이 성공하여(야사같은 여러 공작 이야기는 선생님께서 직접 찾아보십시오)
이인의 아이가 즉 그 아이가 바로 훗날 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될 정(政) 즉 훗날의 진시황제이다.(공작으로 여불위가 이인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첩을 바쳤고, 그 첩에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가 자랐으며, 이 아이가 나중에 진시황이 된다는 이야기이다.-물론 야사이다.)
여불위의 식객에 훗날 진시황의 정승이 되는 이사도 있었다. 진시황이 세자이었을 때 눈여겨 보고 선택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기원전 239년 여불위는 자신의 식객으로 있던 석학들을 모아 《여씨춘추》라는 이름의 저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제자백가의 책과는 다른 사상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는,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여불위는 절망한 나머지 이듬해, 스스로 독을 마시고 죽었다.
여불위는 ‘아차’ 하는 순간에 자기 집안도 멸족을 당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집안을 살려냈다고 한다. 왜냐면 진시황이 여불위의 죽음 소식을 듣고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