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배우는 당쟁의 폐해, 1
오랜만에 화양동구곡에 파천에 가서 돌개구멍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지나간 역사를 회고한다. 지금으로부터 몇 백년 전 조선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우암 송시열이 이 자리에서 시를 지었고 뒤따라온 흥선 대원군도 이곳을 지나간 뒤 화양동서원과 만동묘의 폐해를 알고 서원 철폐를 단행했으리라.
조선 당쟁의 폐해를 낱낱이 지켜본 화양동구곡의 흐르는 물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당쟁의 페해 또한 오늘이나 지금이나 진배 없으니,
조선 오백년 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말을 들어보자.
“사대부가 살고 있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사대부들은 대부분 특정 당파에 가입하여 있었고, 서로 싸우다보니 인심이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여러 문집들을 보면 당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표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오죽했으면 이익이 붕당간의 반목을 두고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고 죽으며 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살면서도 평생토록 왕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겠는가? 그래서 조선의 선비로 붕당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벼슬을 버리고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각오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신축, 임인년 이래로 조정의 윗자리에 소론․노론․남인간의 원한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서로 역적이란 이름으로 모략한, 그 영향이 아래로는 시골에까지 미치어 큰 싸움터를 이루고 있는 지경이다. 서로 혼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 서로가 서로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다. 다른 파벌이 또 다른 파와 친해지면 지조가 없다 하거나, 항복하였다고 헐뜯으며 서로 배척한다. 건달이 되었건 종이 되었건 한번 아무개 집 사람이라고 말하면 비록 다른 집을 섬기고자 하여도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사대부로서의 어짊과 어리석음, 높고 낮음은 오직 자기 파벌에서만 통할 뿐, 다른 파벌에게는 전혀 통하지 못한다.
이 편 인물을 다른 편에서 배척하게 되면 이 편에서는 더욱 귀히 여기고, 저 편에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비록 죄가 천하에 가득 차 있더라도 한번 다른 편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면 잘잘못을 논할 것도 없이 모두가 일어나 그를 도우며, 도리어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비록 성실하고 바른 행실과 높은 덕이 있다 하더라도 같은 편이 아니면 우선 그의 옳지 못한 곳부터 살핀다.”
이와 같은 당파 간 싸움은 학문적 측면에서도 나타났는데, 기호학파가 영남학파를 두고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가 스승을 칭송하여 하나의 당을 만들었다.”고 몰아붙이면, 영남학파는 기호학파를 겨누어 “인조반정 후 산림의 도학자들을 존중하자는 허울 좋은 미명을 내걸고 권세에 급급하였다.”고 몰아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 명맥은 근․현대에 접어들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일제의 강점기 동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조완구, 조소앙 등의 노론계와 이시영(李始榮), 신익희(申翼熙) 등의 소론계 그리고 이동녕(李東寧), 홍진 등의 남인계와 엄항섭 등의 북인계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제각각 모였고 서로간의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같은 당색의 동류의식을 먼저 노출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독립운동세력은 임시정부파와 광복군 그리고 이회영李會榮과 신채호申采浩 계열의 아나키즘 운동 등 여러 갈래가 있었으며, 그 단체들은 해방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한은 북한대로 권력싸움이 계속되었고 남한은 남한대로 조선시대의 당색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 했다. 신채호, 박은식 등이 당파적 성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결국 해방이 되어서조차 김구, 여운형, 장덕수등 몇 사람이 당파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당색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자손들이 조상들의 주장을 지킴으로 인해서 200년 만에 굳어서 결코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었다.
노론․소론은 서인으로부터 분열한 지 겨우 4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까닭에 형제․숙질간에도 노론․소론으로 갈려진 자가 있었다. 편이 한번 갈라지면 마음들이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어져 같은 편과는 서로 의논하여도 다른 편이라면 가까운 친족 사이에도 서로 말하지 않았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내린 윤리도 다 없어졌다고 하겠다.”
이중환이 토로한 것처럼 한번 다른 편으로 갈라지면 서로 만날지라도 한마디 말로 나누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뒤주 속에서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를 예로 들어보면, 당파의 차이는 부부 사이에서도 수그러들지 않는 정도였다. 홍씨는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풍산 홍씨 가문과 아버지 홍봉한을 위하여 애를 썼던 흔적을〈한중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캐럴 태브리스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인간은 세상을 둘로 나누길 좋아한다. 우리, 그들, 좋은 놈, 나쁜 놈, 남자, 여자, 서양식 사고방식은 이분법을 강조한다. 인간 삶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들을 쓸데없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구분한다.”
탕평책을 펼치고자 했던 영조의 뒤를 이어 집권하여 조선 왕조의 마지막 르네상스를 일구었던 정조 임금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정조正租는 송시열宋時烈을 지극히 존숭하여 그 문집을 가리켜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 하였고, 또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몸소 정하였다. 논자들은 혹 지나치다고 여겼지만 비록 더욱 추존하고자 해도 다시 더 붙일 말이 없었다.
이에 송근수는 그 전집을 발췌해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행위를 가려 뽑아 책을 엮고는 <송자언행록宋子言行錄>이라 했다.
또 이승우李勝宇와 의론을 주고받아 <송서백선宋書百選>을 편집하여 정조가 친히 찬정한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비견하고자 하였다.
우암 송시열을 회옹悔翁고 나란히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한다면 당파에 따라 편들어 수호하는 습속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중 송근수宋近洙에 대해 실린 글이다.
정조 임금 자신도 ‘노론’ ‘소론’ ‘남인’ 등의 당색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당색의 중심에서 당색을 심화시켰던 송시열을 존경하였고, 송시열을 ‘공자’나 ‘맹자’ ‘순자‘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서 그의 문집을 <송자대전>이라고 치켜세웠으니, 그 당시 노론들의 콧대나 위세가 얼마나 높았겠는가?
2024년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