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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효자(父作孝子)
부모가 효자를 만든다는 뜻으로, 부모가 잘해야 자식이 효자 소리를 듣는다. 아무리 효자 노릇을 잘해도 부모가 효자를 안 만들고 불효를 만들면 할 수 없이 불효 자식이 된다는 말이다.
父 : 아비 부(父/0)
作 : 지을 작(亻/5)
孝 : 효도 효(子/4)
子 : 아들 자(子/0)
1. 효자 부재의 시대에
어떤 이가 말했다. 현대는 효자가 없는 시대다. 그런 것 말하면 완전히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다. 노인 학대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이 경제적 이유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넉넉한 자식도 부모 모시기를 포기한다. 부모를 수류탄과 같이 폭탄 취급하며 서로 떠넘기기 바쁜 사람들도 많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노인에 대한 경제적 학대 가해자 466명 중 361명이 피해자의 친족이었으며, 이들 중 아들이 205명이었다. 피해 노인들은 자식과 친족들이기에 신고도 꺼린다. 어떤 자식들은 노인학대를 넘어 부모를 유기하기도 한다. 그런 노인들은 대부분 스스로 '내가 자식을 잘 못 키운 탓'이라고 하며 고독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제 노인 문제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 미래 사회의 큰 우환이 되어가고 있다. 노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난다. 국내 65세 이상 인구는 2029년 1,252만 명으로, 2017년 대비 1.8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국가는 노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갖추지 못한 채,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혜택을 줄이는 방안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재정적 부담을 줄이려고 애쓰는 일만이 능사는 결코 아니다. 연금 개혁에서도 더 내고 덜 받는다는 것을 기본 기저로 하는 것 같다. 더 내고 덜 받을 때 잘못하면 미래의 노인들을 더 가난으로 내몰 수 있다.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경제적인 계산만 하는 것 같다. 인륜과 삶의 질의 문제는 뒷전인 것 같다.
문제는 사회 총체적으로 노인에 대한 책임감의 부재이다. 지금 사회에서 노인은 그냥 늙은이일 뿐이다. 그러나 옛날에 노인은 세상의 어른이며 대접받아야 할 인격체였다. 옛날에는 노인에 대한 책임감이 고스란히 자식들의 몫이었다. 자식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주 중요한 노령 연금이었다. 효자는 그 본보기였으며 국가에서는 이를 권장하여 효자문을 세워주며 칭송하였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효를 저버린 자는 인간 이하로 취급하여 관리로 등용하지도 않았다. 기본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효를 저버린 자가 버젓이 국가까지 경영하겠다고 나선다. 그런데도 세상은 무감각하다. 사회 분위기 또한 이를 용인한다. 모두 정치적․ 경제적일 뿐 인륜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식들이 부모에 대한 책임감을 인식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분위기는 점점 희석되어가는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 세대에게는 더 큰 사회문제가 될 것 같다.
결혼하고 부모를 집에 오지 못하게 하는 아들들이 많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며느리의 문제가 많이 도사리고 있다. 며느리들은 시부모를 완전히 남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문제는 오랫동안 사회적인 분위기와 매스컴 등도 한몫을 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남자들에게 “결혼하고 아내의 허락 없이 부모에게 아파트 비밀번호를 알려줄 것인가를” 묻는다. “안 알려 준다”고 대답하면 박수를 친다. 그게 옳다는 인식이다. 과연 그런가?
내가 아는 이들 중에 아들이 결혼하고 아들의 집에 한 번도 제대로 가보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떤 이들은 아들이 아이를 봐 달라고 하는데 힘들어 못 본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또한 옳은 일인가? 노인 문제가 심각한 만큼 자녀 양육 문제도 심각하다. 물론 거기에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만, 더 큰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왜곡이다. 거기다가 국가의 대책이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는 고도 산업 사회 문명사회로 접어들었지만 잃어버린 것, 왜곡된 것이 많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파괴되고 왜곡되어왔다는 점이다. 문명화가 곧 인륜의 파괴인가? 만약 그렇다면 문명화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탓만이 아니라 시대의 물결이며 총체적인 사회의 문제지만 우린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재인식해봐야 한다. 부모는 단순한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혈연 공동체이며 가장 근원적인 삶의 탯줄이기 때문이다.
2. 부작효자(父作孝子) - 부모가 효자를 만든다.
예로부터 부작효자(父作孝子) 즉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고 하였다. 여기서 작(作)은 ‘짓는다’의 의미를 넘어 ‘만든다’ ‘창조한다’의 의미를 지닌다. 부모는 자식을 탄생시키므로 만든다(창조한다). 그것은 일차적인 생명의 창조다. 다음으로는 자식의 정신과 인격을 만든다(창조한다). 그것은 이차적인 창조다. 그 탄생의 주도권을 부모가 쥐고 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정신과 인격의 탄생을 위해 교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옛날의 교육에서는 모든 교육의 시작과 끝이 인륜의 학습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에 대한 학습은 뒷전이다. 그래서 자식을 똑똑하게 가르치기는 하는데 인륜의 교육에는 실패하고 있다. 똑똑하게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집중되는데 인륜을 가르치는 데는 관심이 크게 없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효자로 알려진 청년과 불효자로 알려진 청년이 있었다. 효자 청년은 윗마을에 살고 불효자 청년은 아랫마을에 살았다. 불효자 청년의 집은 효자 청년의 집보다 부자였다. 그 둘은 나이가 비슷했다. 어느 날 불효자 청년이 자기도 효자가 되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효자 청년을 찾아갔다.
불효자 청년은 효자 청년을 데리고 인근 주막에 가서 대접하면서 효자 청년에게 물었다. “형씨는 어떻게 하기에 그토록 효자로 알려졌습니까? 나도 효자 소리 한번 듣고 싶으니 그 비법을 좀 알려주시오.”
효자 청년이 말했다. “나는 별로 하는 일이 없소. 그저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따를 뿐이오. 내 하는 일 하나만 일러준다면 나는 아침에 일찍 부모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 한참을 아버님의 옷을 안고 있다가 아버님이 일어나시면 그 옷을 드려 입게 한다오.”
옛날의 옷은 베옷이라 겨울에는 매우 차갑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입으면 그 차가운 기운으로 몸이 오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연로하신 부친이 입는 옷을 미리 안고 따뜻하게 하여 드린 것이다.
불효자 청년은 자기도 한번 그렇게 해 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버지보다 일찍 일어나 아버지가 벗어 놓은 옷을 안고 있다가 아버지가 깨어나자 품에 안고 있던 옷을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에서 험한 호통이 날아왔다.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 봐라. 이제는 하다못해 애비 옷까지 탐을 내”
청년은 아버지의 호통에 당황하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영영 효자의 길을 걷지 못했다.
위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그 이면에 몇 가지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 첫째는 자식에 대한 긍정의 힘이다. 그 긍정의 힘은 자식의 긍정적 에너지를 강화시킨다. 효자 청년의 부모는 자식이 어린 시절부터 자식의 긍정적 에너지를 강화시켜 왔다. 자식이 아버지의 옷을 안고 따뜻하게 한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실은 매우 정성이 깃든 행위이다. 그것을 아버지는 알아주고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불효자 청년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부정적 힘을 키워왔다. 그 부정의 힘은 자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으며 자식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키웠다. 그러기에 모처럼 효자가 되어 보겠다고 실천한 자식의 행동에 분노한 것이다.
이런 긍정의 에너지는 어디서 어떻게 성장할까?
첫째 그것은 부모의 배려와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매우 절제되고 분별 있는 것이다. 칭찬이 좋다지만 아무것이나 칭찬하지 않으며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과 꾸지람이 아니라 절제된 훈육과 설득이 깃들여 있다. 절제된 훈육에서는 깨달음이 주어지지만, 비난과 꾸지람에서는 분노와 일탈이 싹트게 된다. 불효자 청년의 부모는 그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둘째는 자녀교육의 주제와 방법의 차이였을 것이다. 자녀교육은 뭐라고 해도 생각과 행동 습관의 형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마 효자 청년의 부모는 그것에 먼저 노력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불효자의 부모는 그것보다는 일, 경제적인 것, 혹은 무관심하여 방치했을지 모른다. 그런 과정에서 불효자 청년은 바른 생각과 행동과 습관이 깃들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근원적으로 부모의 생각과 행동과 습관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셋째는 부모의 생각과 행동과 습관의 차이였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자식의 모든 행위를 보면 그 부모의 숨겨진 면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 효자의 부모는 그들도 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생각과 행동과 습관이 절제되고 분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효자의 부모는 그들 스스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으며, 생각과 행동과 습관이 무분별하고 일관성이 부족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의 젖줄이다. 그러나 그 젖줄은 매우 분별 있고 절제된 것이어야 한다. 잘한 것은 잘한 것으로 칭찬하고, 잘못은 깨닫게 하는 분별 있는 훈육을 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비난과 질책을 일삼는다면 자식은 분노와 일탈과 변명을 키워간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긍정의 에너지이다. 긍정의 에너지로 성장한 자녀는 부모에 대한 강한 애착심이 발달하여 부모를 받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모든 칭찬과 긍정의 에너지와 부모의 무한 지원이 모두 옳을까? 그렇지 않다. 많은 심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곤란 상황을 적절하게 겪지 않는 자식들은 오히려 긍정의 에너지보다는 왜곡된 에너지를 키워갈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성장은 곤란 상황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깨닫고 내면화하여 제대로 성장한다.
한석봉과 그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는 바로 그런 곤란 상황에 대처하는 어머니의 지혜로운 모습이다. 만약 한석봉의 어머니가 지혜롭지 못했다면 밤중에 돌아온 자식에게 종아리를 걷게 하고 채찍을 가했거나 앉혀 놓고 엄청난 훈계를 했을 수도 있고 껴안고 집에서 쉬게 하거나 선생님의 교육 방법을 탓하며 돌려보내지 않았을 수 있다. 부모의 자식 양육 태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곤란 상황에 대처하는 부모의 태도이다. 거기서 부모의 자식 교육에 대한 지혜가 차이가 난다. 가장 강한 긍정의 에너지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3. 부작효자(父作孝子)의 지혜 회복을 위하여
지금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 무너졌다고 한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어렵고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엉뚱한 행동을 한다. 딴짓하는 학생을 혹여 심하게 나무라기라도 하면 부모까지 나서서 학교에 큰 문제를 제기한다. 자녀가 집에 가서 선생님의 사소한 실수라도 말하면 크게 문제 삼는다. 아이들의 가슴속엔 부모의 선생님과 학교에 대한 비난과 질책만 남는다. 그런 아이들에겐 인격적인 품위가 자라지 않는다. 거기엔 비난과 분노가 자란다. 그런 아이들은 교사의 지도에 불응하고 심지어는 대든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 역성만 드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가르치자는 것인가? 부모들의 교육 가치관이 흔들려 왔다,
그런 부모들 상당수는 아이들을 똑똑하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밤낮으로 일을 하며 학원에 보내며 온갖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가슴에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가 키워지지 않은 자녀에게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모순이며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부모가 너무도 많다.
기성세대들은 참 고생하며 오늘을 일구었다. 그래서 간곡한 바람이 자녀들을 우리처럼 고생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녀에게 일을 시키거나 인륜을 가르치는 일보다 오로지 자녀의 경제 사회적 성공만을 기원하고 지원했다. 이런 여러 상황에서는 부모의 왜곡된 무한 사랑은 있었을지언정 절제되고 분별 있는 언행과 곤란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최종적으로 부모도 버릴 수 있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과 인륜의 문제다.
자녀에게 효심을 일깨우는 일은 부모의 이기적인 욕망을 넘어선 미래를 위한 인륜의 회복이다. 점차 늘어나는 노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정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부모들은 자녀교육 방식에서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국가 사회적으로 노인 문제와 효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풍토가 생겨나야 한다. 새해 벽두에 부작효자(父作孝子)에 담긴 조상의 지혜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부모가 잘해야 효자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거사리에서 효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상황]
1999년 5월 21일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거사리 차곡마을에서 김영례(여, 67)가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2005년에 출간한 '구전설화' 13에 수록하였다.
[내용]
옛날에 두 노인이 아래윗집에서 서로 벗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아들 이야기를 하였다. 윗집 노인은 ‘우리 아들은 효자’라고 자랑하였고, 아랫집 노인은 ‘우리 아들은 불효자식’이라고 불평하였다. 하루는 아랫집 노인의 아들이 윗집의 효자 아들에게 물었다. “대체 자넨 어떻게 하기에 그렇게 효자라는 소리를 듣나? 나는 아무리 효자 노릇을 하려고 해도 효자 소리를 못 들으니 그 방법을 하나 일러 주게.”
그러자 효자가 “달리 방법은 없네. 그저 겨울에 바지저고리를 꿰매서 아버지께 드릴 때 새 옷을 바로 드리지 않고 내가 하루 입고 드린다네. 새 옷은 차갑기 때문에 하루 입고 드리는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아랫집 아들은 그 말을 듣고는 윗집 효자처럼 새 옷을 하루 입고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랫집 노인이 “옷을 주려면 새 옷을 입게 줘야지, 입어 가지고 헌 옷을 만들어서 나를 준다.”며 호통이었다. 또 윗집 노인을 찾아가 아들의 행동을 이야기하며 ‘그것도 불효’라고 하였다.
아랫집 아들이 다시 윗집 효자를 찾아가서 “알려 준 대로 하였지만 불효란 소리만 돌아왔네. 다른 방법이 없겠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효자는 “저녁에 이불을 깔고 바로 들어가면 이불의 냉기 때문에 춥지. 그래서 나는 깔아 놓은 이불 속에 잠시 누워 체온으로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덥혀 놓고 나오네. 그러면 아버지가 좋아하시지.”라고 말하였다.
아랫집 아들은 윗집 효자가 일러준 대로 이불을 펴고 체온으로 이불 속을 덥혀 놓았다. 마침 아버지가 돌아오자 “이불 속이 차가워서 덥혀 놓았습니다. 어서 주무세요.”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아이구, 이놈 봐라. 이부자리 해 놓았으면 가만히 깔아 둘 것이지 거기 들어가서 풍덩거리네. 다 식어 가지고 나 춥게 잔다.”고 걱정을 하였단다.
[모티프 분석]
'부모가 잘해야 효자'의 주요 모티프는 ‘효자 아들을 둔 윗집 노인’과 ‘불효자식을 둔 아랫집 노인’이다. 이 전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동일한 내용의 효행을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효자’와 ‘불효자식’으로 갈린다는 것이다. 윗집 노인은 자식의 효행을 칭찬하고 있는 데 비해 아랫집 노인은 나무람과 비난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점에 대해 제보자는 “옛날부터 부모가 잘해야 자식이 효자 소리를 듣는다. 아무리 효자 노릇을 잘해도 부모가 효자를 안 만들고 불효를 만들면 할 수 없이 불효자식이 된다. 효부(孝父)가 있어야 효자(孝子)가 난다는 얘기”라고 말하였다.
[첨언]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칭찬하고 격려할 때, 자녀들은 더욱 잘 하려는 의욕으로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혹 자녀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신 부모님이 계시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효도는 어려서 부터 가르쳐야 한다. 본능적이고 희생적인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희들 끼리 먹어라" "우린 늙어서도 너희들 신세는 절대 안지겠다"는 등의 말을 한 적이 없는지, 또 아직은 어리니까 그렇지 크면 알아서 잘 할 거라는 생각으로 방치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자녀들에게 간식을 줄 때도 엄마, 아빠 몫을 남겨놓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맛있는 것은 자기들만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부모나 어른들에 대한 도리와 책임을 어려서 부터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꼭 효도를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앞으로 자녀가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해 주는, 자녀의 미래를 위한 가정교육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이웃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서로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굳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인사 안하면 아이들 역시 인사를 안 한다. 이웃집 아이들을 보면 귀여워서 "안녕, 참 예쁘구나"하고 먼저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다. '문제의 부모는 있어도 문제의 자녀는 없다'라는 말을 곰곰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 성장해 출가한 딸이 어느 날 사과를 깎아주면서 하는 말이, "엄마,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우리에게 제일 좋은 사과를 깎아 주면서, 지금은 너희가 어리니까 엄마가 좋은 것을 골라서 너희에게 주지만, 나중에 엄마가 늙으면 너희들이 엄마에게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주어야 한다고 하셨지? 그래서 내가 제일 좋은 것을 깎아 드리는 거야" 했다. 내 기억 속에는 사라진 말이었지만 어렸을 적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딸이 고맙고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대부분 자식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 키운다. 그러나 그들이 다 성장하고 나면 자신들이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들은 그런 것들이 못내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도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갚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리지 못하고 자식에게 대신 베푼 것처럼, 그들도 우리에게 갚지 못한 사랑을 그들의 자식들에게 갚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
암 환자로 다리 괴사로 절단되어 잘 걷지 못하는 분이 입원하셨다. 이분은 아들 두 명에 딸이 한 명이며 부인과는 오래전 사별했다.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밥을 끓여 먹으며 살아도 자식 중에 모신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늙으면 절대로 자식들하고 안 살아’라고 큰소리치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 보면 ‘걱정하지 마세요. 자식들이 안 살아줘요’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나이 들어 늙고 병들고 그러다 죽음을 맞이한다. 다만 지금 내가 젊고 아프지 않으니 그 일은 나와는 요원한 일이 양 살고 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건 어렵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내게도 그런 일이 온다는 걸 인지하는 건 필요하다.
건강할 때는 혼자 살고 아프면 자식들과 산다는 분들도 계신다. 건강할 때도 모시지 못했는데 아프면 모시기가 더 힘들다. 그래서 아프면 대개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노인병원으로 간 후 다시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요양원은 죽으러 가는 곳이라며 거부하는 분들도 있지만, 요즘처럼 맞벌이 부부가 많은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분은 딸과 사위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셨다고 한다. 걷는 것만 조금 되어도 다시 주간보호센터 다니시면 된다고 딸은 아버지를 재활병원으로 모셔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는 당신을 모시기 싫어서 병원에 입원시켰다며 재활치료를 거부했다. 치료받기를 권하면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고집도 세고 귀가 어두워 일상적인 대화가 안 되어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서 결국은 퇴원하기로 했다.
따님이 아버님 걱정 많이 하고, 치료 잘 받아서 나오셨으면 했는데 그냥 가셔서 딸이 속상하겠다고 하자 “걱정을 그렇게 하는 년이 나를 병원에 처넣어” 하며 노여워 하신다. 평소에는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하고, 눈 맞춤도 회피하던 분인데 내일 퇴원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나아져서인지 잘 알아 들으시고 대답도 잘하신다.
이런 분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다. 나이가 들면 시야도 좁아지고 생각도 좁아져 내 위주로 생각하게 되어, 자녀들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화내고 고집 피우면 어떻게 감당하나 싶다. 이럴 때 함께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역효과다. ‘연세가 있어서 저러겠지. 아프니까 그럴 수도 있지’라며 하시는 말씀 다 들어준 뒤 설명하면 의외로 쉽게 누그러진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화를 내지 말고, 어르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만 이해하고 들어주면 좀 덜 힘들다. 또한 한 번에 생각이 수정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에 또 같은 질문을 해도 느긋한 마음으로 다시 부드럽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자식이 잘해도 부모 맘에 차지 않아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 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고, 조금 못해도 “그만하면 잘하지. 참 잘해”라고 말하면 효자가 된다. 부모가 억지를 부려도 잘 들어주는 자녀의 지혜와 마음에 좀 들지 않아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는 부모의 맘이 통해야 좋은 관계 속에서 효자가 생긴다.
▶️ 父(아버지 부/아비 부, 자 보)는 ❶회의문자로 又(우; 손)와 丿(곤; 회초리)의 합자(合字)이다. 丿(곤)은 회초리로 여기서는 일가를 다스리는 지배권을 나타낸다. 자식을 훈계하는 엄한 아버지라는 뜻을 합(合)하여 아버지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父자는 '아버지'나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父자는 얼핏 보기에는 '손'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父자를 보면 본래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던 것임을 알 수 있다. 父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무리 내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뜻했었다. 그래서 父자는 본래 공동체의 '어른'을 뜻했었지만, 후에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를 뜻하게 되었다. 父자는 부수로 지정되어는 있지만, 상용한자에서는 관련된 글자가 없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父자가 돌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父자와 斤(도끼 근)자가 결합한 斧(도끼 부)가 만들어진 것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그래서 父(부, 보)는 ①아버지, 아비, 아빠 ②친족의 어른 ③늙으신네 ④관장(官長) ⑤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근본 ⑥창시자(創始者) ⓐ자(甫, 남자에 대한 미칭)(보)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경칭(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총칭(보) ⓓ시작, 개시(보)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들 자(子), 어머니 모(母)이다. 용례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모(父母), 아버지와 아들을 부자(父子), 아버지와 형을 부형(父兄), 아버지와 그 딸을 부녀(父女), 아버지의 성씨를 부성(父姓), 아버지 쪽의 혈통에 딸린 계통을 부계(父系), 아버지의 죽음을 부기(父忌), 아버지의 가르침을 부교(父敎), 집안의 어른으로서 가족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권리를 부권(父權), 아버지를 부친(父親), 아버지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부도(父道), 한 동네에서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을 부로(父老), 아버지의 명령을 부명(父命), 말소리 가운데 홀소리에 닿아서 나는 소리를 부음(父音), 스승과 아버지로 가르침의 은혜가 높은 스승을 아버지처럼 높이어 일컫는 말을 사부(師父), 건국에 큰 공로를 세워 국민으로부터 아버지처럼 존경을 받는 사람을 국부(國父), 죽은 아버지를 망부(亡父), 늙은 아버지를 노부(老父), 친아버지로 자기를 낳은 아버지를 생부(生父), 농사일을 하는 늙은 아버지를 농부(農父), 엄한 아버지를 엄부(嚴父), 자애로운 아버지를 자부(慈父), 아버지의 형제를 유부(猶父), 할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조부(祖父), 큰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백부(伯父), 둘째 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중부(仲父), 작은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숙부(叔父), 아내의 친정 아버지를 빙부(聘父), 아내의 친아버지를 악부(岳父), 양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양부(養父), 친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실부(實父), 친아버지를 달리 이르는 말을 친부(親父), 돌아가신 아버지를 선부(先父), 아버지의 맏형을 세부(世父), 수양 아버지 또는 의리로 맺은 아버지를 의부(義父), 대대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함을 이르는 말을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살아 계심을 일컫는 말을 부모구존(父母俱存), 오륜의 하나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라는 뜻으로 자식은 부모로부터 그 정신과 육체를 물려받았음을 이르는 말을 부정모혈(父精母血), 부모가 남긴 몸이란 뜻으로 자식된 몸을 일컫는 말을 부모유체(父母遺體), 아버지는 낳게 하고 어머니는 낳아 기른다는 뜻으로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길러 주심을 일컫는 말을 부생모육(父生母育) 등에 쓰인다.
▶️ 作(지을 작, 저주 저, 만들 주)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㑅(작)의 본자(本字), 做(주)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乍(사, 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作자는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作자는 人(사람 인)자와 乍(잠깐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乍자는 옷깃에 바느질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옷깃에 바느질하는 것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작업하기가 쉬웠었는지 乍자는 후에 ‘잠깐’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人자를 더한 作자가 ‘만들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作(작)은 (1)작품(作品) 제작(製作), 저작(著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작황(作況)이나 또는 농사(農事)의 뜻으로 나타내는 말 (3)작전(作戰) 등의 뜻으로 ①짓다, 만들다 ②창작(創作)하다 ③일하다, 노동(勞動)하다 ④행하다, 행동하다 ⑤부리다, ~하게 하다 ⑥일어나다 ⑦일으키다 ⑧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⑨비롯하다 ⑩삼다, 임명하다 ⑪닮다 ⑫농사(農事) ⑬일, 사업(事業), 공사(工事) ⑭저작(著作), 작품(作品) 그리고 저주 저의 경우는 ⓐ저주(詛呪)(저) ⓑ저주하다(저) 그리고 만들 주의 경우는 ㉠만들다(=做)(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을 찬(撰), 지을 조(造), 지을 제(製)이다. 용례로는 기계의 운동 부분의 움직임을 작동(作動), 사물 또는 사람의 이름을 지음을 작명(作名), 서로 헤어짐을 작별(作別), 만든 물품을 작품(作品),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作家), 일을 결정함을 작정(作定), 마음을 단단히 먹음을 작심(作心), 싸움을 진행하는 방법을 세움을 작전(作戰), 악곡을 창작함을 작곡(作曲), 글을 지음 또는 그 글을 작문(作文), 일터에서 연장이나 기계를 가지고 일을 함을 작업(作業), 농작의 잘 되고 잘못된 상황을 작황(作況), 움직이게 되는 힘을 작용(作用), 무리를 이룸을 작당(作黨),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듦을 제작(製作), 물건을 지어서 만듦이나 일부러 무엇과 비슷하게 만듦을 조작(造作), 기계 등을 움직이어 작업함을 조작(操作), 떨쳐서 일으킴 또는 일어남을 진작(振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 또는 그 움직임을 동작(動作), 토지를 갈아서 농작물을 심음을 경작(耕作), 썩 잘된 글이나 작품을 걸작(傑作), 처음으로 만듦을 창작(創作), 사람은 마음을 먹기에 따라 광인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작광작성(作狂作聖), 의견이 서로 달라서 일을 결정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을 작사도방(作舍道傍), 의리로써 형제 관계를 맺음 또는 그 형제를 일컫는 말을 작의형제(作義兄弟), 마음 먹은 지 삼일이 못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얼마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된다는 말을 작심삼일(作心三日), 끊임없이 힘써 함을 이르는 말을 작지불이(作之不已),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을 마부작침(磨斧作針),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를 자기가 받음을 일컫는 말을 자작자수(自作自受), 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을 일컫는 말을 환부작신(換腐作新),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뒤에서 일을 꾸밈을 일컫는 말을 이면공작(裏面工作),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남의 의견이나 주장을 제쳐놓고 제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방자하게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회빈작주(回賓作主) 등에 쓰인다.
▶️ 孝(효도 효)는 ❶회의문자로 耂(로; 노인)와 子(자; 아들)의 합자(合字)이다. 아들이 노인을 잘 봉양하는 뜻에서 부모나 조상을 잘 섬김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孝(효)는 (1)부모를 잘 섬기는 일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효도(孝道) ②상복(喪服: 상중에 있는 상제나 복인이 입는 예복) ③제사(祭祀) ④맏, 맏자식 ⑤부모를 섬기다, 효도하다 ⑥본받다 ⑦상복(喪服)을 입다, 거상(居喪)하다 ⑧제사(祭祀)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효성이 지극한 딸을 효녀(孝女), 부모를 잘 섬기는 마음을 효덕(孝德), 효행이 있는 며느리를 효부(孝婦), 효행이 있는 손자를 효손(孝孫), 효성스러운 마음을 효심(孝心),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효우(孝友), 효행을 다하는 마음을 효지(孝志),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효도를 효은(孝恩), 어버이를 잘 섬기는 행실을 효행(孝行),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효도(孝道), 마음껏 어버이를 잘 섬기는 정성을 효성(孝誠), 효행이 있고 유순함을 효순(孝順), 어버이를 효행으로 봉양함을 효양(孝養),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효친(孝親), 봉양할 줄 아는 새라는 뜻으로 까마귀를 달리 일컫는 말 효조(孝鳥),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못함을 불효(不孝),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충효(忠孝), 어버이를 잘 섬김을 극효(克孝), 한결같고 변함없는 효도를 달효(達孝), 지극한 효도 또는 지극한 효자를 대효(大孝), 순종하여 효성을 다함을 순효(順孝),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는 효도를 영효(榮孝), 어버이의 애정과 자식의 효도를 자효(慈孝), 지극하고 돈후한 효행을 독효(篤孝), 부모를 섬길 때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효당갈력(孝當竭力),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효자애일(孝子愛日), 효자가 난 가문을 일컫는 말을 효자지문(孝子之門),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형제끼리의 우애와 임금에 대한 충성과 벗 사이의 믿음을 통틀어 이르는 효제충신(孝悌忠信),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성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봉양함을 일컫는 말을 반포지효(反哺之孝),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백유의 효도라는 뜻으로 어버이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일컫는 말을 백유지효(伯兪之孝),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뜻으로 첫째 부모에게 영합하여 불의에 빠지게 하는 일 둘째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도 벼슬하지 않는 일 셋째 장가가지 않고 자식이 없어 선조의 제사를 끊는 일의 세 가지를 일컫는 말을 불효유삼(不孝有三), 효자가 죽은 부모를 너무 슬피 사모하여 병이 나고 혹은 죽음을 일컫는 말을 이효상효(以孝傷孝), 항상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행을 일컫는 말을 양지지효(養志之孝), 하늘이 낸 효자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출천지효(出天之孝)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를 이르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