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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과 애국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1. 애민은 사람이 온전한 존재로 대접받는 역사적 과정과 관련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애민은 민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애국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애민과 애국은 같은 말로 통용되면서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본의 이윤을 철저히 보장하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이자 애민이라고 하고, 또 광주민주항쟁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듯 반공과 반북을 위해서는 그 나라의 (국)민조차도 총칼로 짓밟는 것이 애국의 충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본의 탐욕이 제어되지 못하고 무한정 이윤을 추구하도록 방치하면 빈부격차가 확대되어 대다수 사람이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반공과 반북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도 허용되면 그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은 그곳에서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주장들은 참다운 애민과 애국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주장들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애민과 애국이 사회·역사의 주체이자 나라의 주인인 민과 연관되어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고 사회 통치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민과 애국을 도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를 참다운 의미로 옳게 사용하자면 어떤 과정을 통해 애민과 애국이 정립되었는지를 명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민의 정립 과정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애민의 단어 사용 여부가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받느냐와 관련지어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이나 시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사람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 애민의 시원으로 설정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애민은 사람이 사회·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과 관련되고, 주체의 등장은 사람으로 인정받느냐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인류사는 사람으로 자각해야만 시작된다고 봐야 하기에 애민의 등장은 인류사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는 게 부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애민이 언제나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류사의 초창기에 사람으로 자각하여 인류사가 개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다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먼저 자각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준이 뒤떨어진 사람들을 동물이나 도구와 같은 존재, 즉 노예로 취급해 부려먹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예제 사회에서 백성이나 시민을 언급할 때 노예는 배제되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크게 넓혀졌습니다. 하지만 신분적 제약을 가해 인간 간의 차별을 가하려고 하는 조건에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을 백성이나 시민으로 포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 간의 억압과 지배를 통해 자신들의 권좌를 유지해야 하는 사회 통치 세력의 입장에서는 천민과 같은 일정한 세력을 배제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것을 근거로 먹이사슬의 연계 고리를 형성해 차별적 억압 질서를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 자각하는 과정은 필연적 이치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 간의 관계 자체를 두고 차별하고 억압하는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천부인권을 가지고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고 사는 존재라는 천명되었습니다.
천부인권의 확립은 애민의 의미를 다시 한번 혁신적으로 확장했습니다. 백성과 시민을 언급할 때 이제 지난날과 달리 나라와 민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도 배제됨이 없이 모두를 포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류사에서 애민이 확립되는 과정은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온전한 존재로 대접받는 과정으로 진척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와 민족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다 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누리고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다르고, 또 사실상 민의 권리를 부정하는 주장을 전개하면서도 민을 위한 것처럼 기만하는 현상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노예제와 신분제 사회는 인간 자체를 놓고 차별하고 억압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누구나 다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고 사는 존재라고 천명된 상황에서도 지난날과 같은 인간 간의 차별과 억압적 질서가 성립되고 여전히 통용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사의 전개 과정이 보여준 바와 같이 아주 오랜 기간 인간 간의 차별이 행해지면서 억압과 지배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고 사는 존재라고 천명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그 잔재가 곧바로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이 없어지자면 인간 외적 부분에서도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외적 조건, 즉 빈부의 격차가 극대화되면 그 객관적 조건의 차이로 인해서 자유와 평등이 형해화되고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애민의 내용은 이런 시대 흐름에 맞게 또 한 번 혁신의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2. 애국은 삶의 단위와 관계된다
애민이 사람이 온전한 존재로 대접받는 과정에서 혁신의 길을 걸어오는 과정이라면 애국은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사회 공동체 삶을 공고히 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애국이 나라와 민족 단위의 삶과 관계되는 것은 인간의 자각 과정이 사회적 존재로 확립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자각했느냐의 판단 기준은 머릿속에서 깨달음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성립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고, 원시 사회의 연장이냐 인류사의 시작이냐의 구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건설은 원시 인류가 나타난 데로부터 장구한 세월을 요구했습니다. 구석기 시대로부터 중석기와 신석기 시대로 거쳐오는 과정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먼저 인간은 직립함으로써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도구를 이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불을 이용하여 지난날과 달리 고급의 단백질을 먹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의 뇌도 더 향상되었으며, 마침내 언어와 문자도 사용하게 됨으로써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활성화함과 동시에 지식도 축적하면서 인간 자체의 능력을 키워 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연의 위협 앞에서 인간 간의 협력을 강화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을 담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마을의 울타리를 넘어 인간 간의 협력의 영역을 계속 확장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위협 앞에서 먹고살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것도 당장 먹을 것만이 아니라 일정하게 먹고도 남을 정도의 잉여생산물까지 확보했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잉여생산물이 남지 않는 조건에서는 당장 그날그날의 생존을 위해 힘겹게 자연과의 싸움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잉여생산물이 존재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잉여생산물에 대한 분배를 놓고 다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에서 공동으로 일하지 않고도 그 잉여생산물을 확보하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할 요구가 제기됩니다. 이것이 국가의 건설 과정입니다. 이를 보고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의 역할은 지배 계급의 억압 기구라고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이 존재하는 조건에서는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국가를 그렇게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위협 앞에서 생존을 담보하자면 사회를 구성해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대항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담보가 국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에서 생존의 길을 확보하기 위한 주체적 대응 과정에서 필요적으로 국가의 건설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필연적 요구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가를 세움으로써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존재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처음의 역사 과정은 자연과의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지휘권을 행사했던 사람들이 국가를 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는 목적으로 도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 맞게 국가의 기능과 역할 또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날에는 국가의 기능과 역할이 주되게 통치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지만, 이제는 전체 인간을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활동하게 하는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다름 아닌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해 사람을 조절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정치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본질적 특성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국가가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체계를 공고화한다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인류 사회의 과정을 살펴보면 법과 제도의 시행은 오로지 국가와 관련됩니다. 그 이유는 국가를 매개로 해서 주권이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주권 행사의 여부가 삶의 단위로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게 인간 간의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은 강제력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관계가 공고하게 형성될 수 없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관계를 부정하고 나온다면 어떻게 사회적 관계가 굳건하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지금 시기에도 법과 제도는 사회에서 지켜야 할 규칙입니다. 이것이 허물어지면 그런 국가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법과 제도를 놓고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주권이 미치는 영토는 넓어질 수도 있고, 또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작위로 그런 과정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인간 간의 관계 맺음을 기본으로 두고 전개됩니다. 인간 간의 관계 맺음이 성립되지 않는 조건에서 사회적 관계를 강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 간의 관계 맺음의 기본이 형성되는 민족이 등장하게 됩니다.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의 형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에 기반하여 형성된 민족적 단위와 맞게 국가가 형성되고 주권이 행사됩니다. 따라서 주권의 행사는 분명 국가의 영토에 의해 기반하지만, 그 근거가 주되게 민족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삶의 단위를 국가라고만 한정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민족 또한 처음부터 그 범위가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또 내부적 관계도 똑같이 동등하게 형성되지 않습니다. 군사, 문화적으로 우월한 세력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이런 관계가 계속 확산되면서 결국 법과 제도가 세워지며 국가가 건설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가 건설되기 때문에 사회의 지배 세력들은 자신들의 통치 영역을 더 확장시킬 요구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국가가 건설되는 그때로부터 국가 간의 영역 투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에 현저한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지배하고자 침략을 가합니다. 노예제나 신분제 사회에서 국가 간의 침략과 전쟁의 역사가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민족 간의 융합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면 사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기 고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 비록 오랜 기간 침략과 지배를 받아도 다시 주권을 되찾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나라와 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나라 대다수가 노예의 처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자면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의 영토가 팽창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지배받다가 독립의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아예 민족이 사멸하는 길로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가 간의 전쟁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역사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적 근대국가가 성립하고, 이들 국가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 식민지 지배를 확대한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지배 체제가 세계적 규모로 형성된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지배 통치 방식은 그 자체로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자본이 자유롭게 유통되어야 하기에 노예적 처지나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게 자유를 행사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때문에 제국주의로 나아가더라도 자유와 평등의 요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 모국이나 식민지 나라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 지배 세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인정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노예적, 신분적으로 제약하는 구시대적 잔재가 많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모순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관계입니다. 제국주의 세력은 식민지 나라에는 형식적으로도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 모국보다 식민지 나라에서 노예적, 신분적 잔재가 더 많이 남아 있기도 했지만, 민족적 정체성이 서로 확연히 다른 조건에서 노예적으로 수탈하는 것이 제국주의적 이익 실현에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민지 나라는 제국주의의 수탈과 약탈의 대상으로 되었을 뿐이고, 그 나라의 모든 사람은 사실상 노예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침략 세력에 대항해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1차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제국주의 전쟁은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반파시즘연합전선과 민족해방전선이 구축되었고,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로써 나라와 민족 단위로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인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역할, 즉 정치적 지배권을 각 나라와 민족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인류사에서 애국의 내용을 또 한 번 혁신시키는 과정으로 되었습니다.
3. 애민과 애국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한다
애민의 내용이 인간이 온전한 존재로 대접받는 과정으로 진전되어 왔고, 애국의 내용이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한 나라가 자기의 영역에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여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할 권리를 인정받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면 이제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미 제국주의는 이를 가로막고 나왔습니다. 미 제국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 절대적,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현대제국주의로 전화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세력 간의 동맹을 구축하여 우두머리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주의권의 형성과 신생 독립국들이 등장함에 따라 제국주의 세력이 서로 분열하여 싸우는 지난날과 달리 서로 동맹을 추구하여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으로 사회주의권을 고립시키고, 동시에 신생 독립국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주권을 인정한다면서 매국노를 내세워 지배하는 신식민지 지배체제, 즉 식민지매국사회를 세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동구권이 붕괴하자 세계제국주의, 즉 세계 유일 패권의 길로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습니다.
미국의 세계거대독점자본이 세계 유일 패권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세계화 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더욱 모순이 첨예화되었습니다. 국제적 관계가 거미줄처럼 형성되면서 국가 간 차원은 물론 국가 내부적 차원에서도 빈부격차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적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지배 수탈하려면 국제적 차원에서 자본의 유통이 자유로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자유와 평등이 형식적으로 인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의 형식적 인정은 신식민지, 즉 식민지매국사회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신식민지라고 하더라도 식민 지배인 이상 식민지 민은 노예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식민 지배 체제 사회는 기본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형식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폭압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를 유지하자면 강력한 독재정치가 필요했고, 그런 관계로 제3세계 식민지 나라는 주되게 군사독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이 형식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니 군사독재 체제는 유지될 수 없었고, 그 뒤를 이어 한때는 군사독재 세력에 대항해 싸웠으나 또다시 민을 배반한 배신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이 형식적으로만 인정되고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하면 별반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누리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애민의 내용이 또 한 번 혁신의 과정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누려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는 세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이 외세와 매국노입니다. 여기서 이런 상황을 해명하면서 애민과 애국의 과제를 풀어가야 할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외세와 매국노가 한통속이 되어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 현상은 객관적인 근거에 기초해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객관적 근거에 의해 외세와 매국노를 살펴보면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갖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해관계를 같이합니다. 이를 해명하자면 객관적 기초보다는 주체적 특성을 위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지난날에는 객관적 근거에 기초해서 사회적 존재로 온전히 대접받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자연스레 모두 다 민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남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세력은 민이 될 수 없고, 도리어 응징이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며 주인답게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참다운 민이라는 것입니다.
애민의 내용이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주체적 징표에 의해 그 내용이 혁신됨에 따라 애국의 내용도 혁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에는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을 놓고 민족 구성원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그런 객관적 기초가 있다고 하더라도 매국 행위를 저지른다면 민족 구성원으로 될 수 없고, 응징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검은머리 미국인이라고 명명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주권을 고수하여 한국 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애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껏 인류사에서 외세의 앞잡이 매국노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매국노들은 노예제나 신분제 사회에서의 앞잡이나 일제 총독부에서의 매국노와는 다릅니다. 이전에는 외세가 지명하거나 또 사욕을 위해 협조하는 정도였으나 지금의 매국노들은 사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매국노들이 외세와 함께 사실상 그 사회의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국노들을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상 외세에 대한 싸움이 제대로 전개되지 못하는 것도 이들이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았을 때 매국노들을 사회의 권력 집단에서 축출하는 것은 애국의 내용에서 중대한 대목을 차지하게 되고, 동시에 미국의 요구에 굴종하면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한국 민의 생명과 재산, 권리를 지켜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행위는 매국 행위로서 응징되어야 하는 내용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애민과 애국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발전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기의 시대적 흐름은 객관적 근거에 기초해서 바라보기보다는 주체적 징표를 위주로 해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 흐름에 맞게 애민, 애국의 이론을 혁신시키면서 그에 근거해 풀어가야만 인류사를 새로운 질적 단계로 전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6. 8. 3.
우리겨레연구소(준) 소장 정호일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