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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에페 4,32─5,8
복 음 : 루카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
-올바른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참으로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산이 산에 올랐네요. 불암사에서 천보사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하느님께서 ‘코로나 19’를 통해 저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입니다.”-
수도형제와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 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8시 주일 미사를 마치자 간단히 아침식사 후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의 불암사’에 올랐습니다.
자신을 산이라 지칭하여 산이 산에 올랐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정주의 상징이 산이기에 제가 참으로 사랑하는 산입니다.
참으로 깊고 넉넉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아버지의 울타리와도 같고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겸허하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산은 제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아주 오래전 가을 날, 단풍 물든 가을 산을 보며 쓴 시도 생각납니다.
-“산에 갈 수도 없다/산을 가져올 수도 없다
이 좋은 가을날!/아예 산 되어 살기로 했다
단풍 물든 장엄한 가을 산으로/사랑하는 이여
놀러 오지 않으련/넉넉하고 편안한 가을 산/내 품으로”-
정문 입구에는 ‘천보산 불암사’라 씌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보물같은 천보산天寶山 이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참 많은 사람이 불암사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마음을 끌었던 불암사 맨 위 자락에 자리 잡은 탑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하늘 향한 높은 탑이 상징하는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기도임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탑이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습니다.
참으로 인간 누구에게나 절대자를 찾는 간절한 마음을
불암사를 찾는 무수한 불자들에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의 갈망하는 바가 하느님과의 만남에 치유요 자유일 것입니다.
저 또한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만남을 찾아 성령에 이끌려 불암사를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가을 단풍의 절정시기에 불암사에 들렸다 산등성이를 넘어 천보사에 들린 후
참 오랜만에 수녀원 방문 후 오전 두 시간 동안의 순례를 끝냈습니다.
참으로 심신이 주님을 만나 치유된 듯 상쾌한 느낌이 가득했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간절한 믿음과 주님의 은총이 만날 때 비로소 치유에 자유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알게 모르게 많은 병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지요.
참으로 이런 저런 병고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영적 귀먹음,
하느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영적 눈 멈,
믿음을 제대로 표현 못하는 영적 벙어리,
행해야 할 바를 제대로 못하게 우리를 마비시키는 영적 중풍,
이웃과의 차단된 관계를 상징하는 영적 나병, 충동과 중독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악령 등
무수한 장애물들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하여 주님은 우리를 모든 영육의 질곡桎梏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자 찾아오십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한 믿음으로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안식일에 가르치고 계실 때 일어난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무려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까이 부르시어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치유 받은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반면 안식일 법에 사로잡힌 회당장은 분개하여
군중들에게 안식일이 아닌 다른 엿새 동안에 치료받을 것을 말합니다.
회당장 역시 치유 받아야 할 영적 장애인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통한 하느님의 치유행위를 깨닫지 못하는
편견의 병에 사로잡힌 회당장을 일깨우십니다.
“위선자들아, 아브라함의 딸이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새삼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자유로운 예수님의 모습인지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참 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 분별의 잣대가 된 삶이 예수님을 대자유인으로 만들었음을 봅니다.
예수님과 만남의 은총으로 불구의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어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여자입니다.
참으로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임을 깨닫습니다.
다양한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이런 분과의 만남을 희구希求합니다.
주님과 만나야 치유되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로써 끝이 아닙니다.
평생 보장되는 치유가 아니라 주님과 부단한 만남과 더불어
일상에서의 한결같은 수행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로 참 좋은 처방을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에서 주십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새 생활의 규범으로 묵은인간을 극복하여
새 인간으로 사는 올바른 삶의 방법입니다.
1.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십시오.
2. 서로 용서하십시오.
3.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4.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5. 감사의 말만 하십시오.
6.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이런 수행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영육의 건강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치유되어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수행의 응답이 뒤따라야 비로소 온전한 치유에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의 질병을 치유하여 자유롭게 하시고
올바른 삶의 수행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아이들에게 도시락 싸 들고 학교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어떨까요?
버스 안에서 반찬으로 싸 간 김칫국물이 흘러서 냄새가 진동하고,
교과서가 빨간 김칫국물로 얼룩져 있었다고 이야기해준다면 “설마?”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계란 반찬을 아이들에게 뺏기기 싫어서 보이지 않도록 밥밑에 깔아 놓았던 일,
겨울이 되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일….
요즘 급식을 먹는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풍경일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말도 안 돼요. 도저히 못 믿겠어요.”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해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지 못 할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진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심을 하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일도 믿기 힘든 것이 많은데,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사탄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시어 여자의 인생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병에서 풀려났음을 선언하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져다주시는 해방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이어지는 논쟁에서 회당장은 안식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안식’이라는 말을 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짐승을 풀어 먹이를 먹인다면,
사람을 죄와 질병에서 풀어 주는 일도 마땅히 할 수가 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시는 일에서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 경배 받으시는 것을 시샘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사랑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품으며 사는 사람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들이
기쁨을 간직한 것처럼 큰 기쁨의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하시며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로나19 시대를 살면서 ‘넷플렉스’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심코 보는 영상물인데 넷플렉스는 정보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메일을 보내줍니다.
예전에 보던 것을 다시 추천하기도 하고, 제가 좋아할 만한 영상물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은 넷플렉스를 이용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작은 것일지라도 자료를 모으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빅벨리 솔라’는 쓰레기통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단순히 쓰레기통만 파는 것이 아니라 모든 쓰레기통에 센서를 달았다고 합니다.
센서가 달린 쓰레기통은 쓰레기의 양을 중앙의 서버로 보내줍니다.
이렇게 모인 정보는 시의 환경미화 담당 부서로 보내집니다.
그러면 쓰레기를 수거할 쓰레기통의 정보를 알게 되고 쓰레기를 수거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쓰레기를 수거하면 정해진 날에 쓰레기를 수거하던 방식보다
70%의 비용이 절감된다고 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이렇게 모든 자료와 정보가 연결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여러분야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힘든 곳은 항공업계와 여행업계입니다.
입국을 제한하는 나라가 있고, 여행계획을 취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
멕시코 청년 캠프도 취소되었습니다. 독일의 음악회도 취소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14억 명 정도가 해외여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20년은 11억 명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사업이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여행은 취소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억 명이 여행을 가지 않았으니 여행업계와 항공업계의 어려움을 쉽게 예상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한 여행사에서 제주도 상공을 경유하는 여행상품을 출시했다고 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치맥 파티’를 하고, 게임도하고, 한국영화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항공권은 1년 동안 사용가능하게 판매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내리지 않는 제주도 여행상품이 매진될 정도로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위기입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퀸즈의 한인성당은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이용해서 주차장에서 미사참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주일미사를 영상으로 제작해서 본당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리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도, 한국학교도 모두 영상을 통해서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임신부님은 매일 사목단상을 카톡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비대면의 시대를 살면서 교회도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박해시대에 한국의 교우들은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교우촌은 박해받는 교우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교우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촌이 발각되면 또 다른 교우촌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비대면 시대의 교우촌은 인터넷을 통한 신앙공간입니다.
본당의 홈페이지, 교구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찾으면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슬픔과 고통이라는 손님을 잘 맞이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입니다.
욥은 재산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잃어버리고, 건강까지도 상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설계자가 있음을 믿으며, 설계자는 충분히 자비하다는 것을 믿으면
슬픔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랑, 희망,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옵니다.
사랑과 희망, 믿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보여 주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루카 13,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픈 사람을 살리는데
특정한 요일이 필요한가.
때로는
안식일의 원칙과 형식보다
서로 돕는
치유가 더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치유를 원하신다.
치유가 안식이다.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다.
안식일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혼자만의 거룩함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안식일은
병든 우리 마음을
먼저 치유하는 날이다.
사랑과 규정
판단과 연민 사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이다.
안식일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알고 실천하는 날이다.
소중한 삶의 한가운데에
안식일의 주인이 계신다.
사랑의 실천이 빠져버린 종교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안식일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사랑보다 도움보다
더 우위에 있는 규정은
있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한 안식일인가.
안식일에 갇혀있는 우리를
풀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안식일은 사랑이다.
자아에 갇혀있는 안식일이 아니라
치유와 해방, 존중과 나눔
용서와 화해의 안식일이다.
안식일의 존재이유 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이며 함정이다.
사랑의 잔치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살게하는
생명의 잔치 치유의 안식일이다.
은총이 무용지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열여덟 해를 앓는 허리가 굽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병의 영”에서 풀려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병의 영에서 풀려나게 하시는 방법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거룩한 영’만이 병의 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하여 세속-육신-마귀의 압제에서 인간을 해방해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하느님 나라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목격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병을 고치는 행위는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라며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안식일은 분명 사탄의 압제에서 인간을 풀어주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오용하여 자기 영광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 주님은 그 선물을 거두십니다.
만약 청년이 된 자녀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었는데 계속 과속과 신호 위반을 하며 사고를 낸다면
자녀를 위해 그 차를 우선 빼앗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의 선물을 올바로 사용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안식일에 사탄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도 빼앗깁니다.
혹시 우리도 은총을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면서 계속 은총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은총을 주시는 분의 목적에 의해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은총 주인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그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주어진 은총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게 됩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보시면 앞으로 은총을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신 은총도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안식일의 은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 주인이 참 은총으로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많은 은총을 받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목적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이 ‘규칙적인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 때는 이미 주어진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그 은총들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지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이때도 이것, 저것 다른 것만을 주님께 청한다면
이는 자기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지금 받은 은총에 감사하고 주님 영광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분께서 알아서 합당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미사 때 이것저것 청하는 것보다 먼저 받은 은총에 감사합시다.
이것이 다른 은총도 받을 방법입니다. 성당이 성황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책에 제가 볼 때는 유일하게 현명한 판단을 내린 사건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의회를 찾아와 집이 비좁아 죽겠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단칸방에 사는데 잠깐 들른 친척들이 아예 눌러앉겠다고 그 집에 짐을 푼 것입니다.
의회는 그러면 소를 한 마리 집에 들여놓으라고 합니다.
분명 의회가 현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믿은 그 사람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날 방도 좁은데 소 때문에 더 좁아졌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닭을 몇 마리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그다음 날 또 하소연하였더니 닭을 쫓는 개 한 마리를 들여놓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의회는 개를 빼면 닭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은 닭을 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용해졌습니다.
다음은 소를 빼라고 했습니다.
소똥 냄새로부터 해방되고 큰 공간이 생기자 그 사람은 크게 고마워했습니다.
그렇게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이런 똑같은 일이 전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이 사람은 더 큰 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면 그 가진 것을 더 많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이것을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특별히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봉헌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들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고 마리마르타 수녀
오늘 복음을 보며 저의 눈에 가장 눈에 띈 등장인물이 있으니
바로 분개하는 회당장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상황에서 가장 많이 화가 났을 것 같은 사람은
오랫동안 병 때문에 고통 받은 여자가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회당장입니다.
복음에서 사용된 분개(indignant)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매우 분함을 느끼어 크게 화를 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떤 부분이 회당장을 그리도 화나게 만든 것일까요?
회당장(The Leader of Synagogue)은 회당의 지도자입니다.
회당을 찾은 군중들은 회당장의 도움을 받아야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선생으로서 굉장한 명예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요.
분개하는 회당장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야기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불상을 싣고 가던 나귀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불상에 절하는 것을 보고
자기에게 하는 것인 양 착각하여 우쭐대다가 넘어져 불상을 깨뜨리고
주인에게 혼쭐이 났다는 옛이야기 말이지요.
회당의 지도자이고 대표이며 선도자여야 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하는데
오늘 회당에서 가르치고 주목과 찬사를 받는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영광을 받는 대상은 하느님이신데
주객이 전도되어
회당장은 자기가 그런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우를 범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가 진정한 회당의 지도자라면
고통에 빠진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렸던- 여자를
치유하는 예수님과 하느님의 권능을 보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치유 받은 이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로 향하는 이들을 막으려 할 뿐이었지요.
의미도 모르고 또 자신은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
안식일 율법을 핑계 삼아 모두를 비난하면서요.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읽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에게 등 굽은 여인을 치유하는 것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민과 사랑의 실천이었지요.
회당장의 마음속에는 결정적인 그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치유를 일로 치부해버린 것이지요.
저는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은 참된 리더의 모습을 회당장인 그에게
보여주려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등 굽은 여인에게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회당장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찐 회당장이 되기를 바라시면서요.
그리고 더 나아가 ‘위선자야’가 아니라
‘위선자들아’하고 복수로 말씀하신 것은
회당장 뿐만 아니라 그 무리 가운데에
아닌 척하며 숨어있던 저에게도 같은 말씀을 건네고 계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함께 기뻐하자고요.
나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의 기쁨, 너희 모두의 기쁨으로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나가자고요.
오늘 그 초대에 응할 준비 되셨나요?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