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배우는 당쟁의 폐해, 2
항상 대의를 중시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들?
옥잠화 꽃이 피었다. 비녀와 닮아서 비녀꽃이라고 부르는 옥잠화 꽃은 해마다 새롭게 피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극한적인 당파 싸움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조정 관리들의 기강은 말할 수조차 없을 만큼 해이해졌다. 득세를 하면 권세를 마구 휘두르는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고 벼슬을 사고파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나라 곳곳에서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민중들의 힘이 분출되었던 것이다.
당쟁으로 인한 민심의 변화는 걸음걸이와 머리 그리고 의복까지도 변화시켰다. 화양동서원이 한창 주가가 오르던 시절 인근의 절에 있던 어떤 스님은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이 안 보이며 활발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이고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겨서 몸을 굽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이며, 그저 산수구경을 간단히 하고 만동묘 구경도 절차를 무시한 채 절을 찾아 와서는 중을 곧잘 꾸짖었던 사람은 ‘혁신적인 노론’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색은 인격이나 언동에까지 배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색은 의관에서도 나타났다. 의관은 의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 마련인데 그 중에 폭건幅巾은 당색까지도 나타내는 표시였던 것이다. 노론은 폭건을 홑으로 만들었고 소론은 겹으로 만들어 썼으며 남인은 아예 착용하지를 않았다.
그렇게 폭건마저도 서로 다르게 착용하는 사실을 알게 된 정조는 “한 조정에서 의관이 그 제도가 서로 다른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 제도를 똑같이 하여 다 쓰도록 하라.”고 특명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특명은 논의만을 거듭한 채 실현되지는 않았다. 당색에 관한 강한 집념 때문에 조상을 받드는 제사의 제수를 차리는 순서도 달랐을 뿐 아니라 적대 당색과는 혼인도 맺지 않았다.
또한 당색에 따라 부녀자들의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 스타일마저 달리 했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고 치마주름은 굵으며 접은 수가 적고 머리 쪽도 느슨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 쪽도 위쪽으로 바짝 추켜 지은 데다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고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소칭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같은 옷매무새나 머리모양은 당파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론과 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에대한 보수적 해석과 혁신적 해석 때문으로서 그것이 분당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짝 올려붙인 머리 쪽이 혁신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 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그와 같은 당색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인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헐뜯고 싸웠다. 국정을 책임지는 국회의원들은 동료들의 비리는 어떤 식으로든 감싸주면서 다른 당의 정책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반대의견부터 내놓는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고 전두환 시대 또한 지나간 지 이미 오래인 요즘에도 소신을 지키기 보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태도를 돌변하는 의원들이 있는 실정이다.
“근래에 와서는 4색이 모두 조정에 나아가 오직 벼슬만 할 뿐, 옛날부터 내려오는 의리는 모두 고깔 씌우듯 숨겨버렸다. 사문의 옳고 그름, 또는 충신과 역모에 대한 논의도 모두 지나간 일로 돌려버린다.
지금은 사납게 피를 흘리며 싸우던 버릇은 비록 전에 비하여 적어졌으나, 옛 습속에 더하여 나약해지고, 줏대 없고, 매끄러운 새로운 병을 추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입으로 말할 때에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처럼 꾸미고 있다. 공식 석상과 대중이 모인 곳에서 조정의 일을 이야기하게 되면 서로 자기주장을 비치지 않으면서, 대답이 곤란하면 쓴웃음으로 임시변통하여 그 자리를 넘기고 흐려버린다.
그런 까닭에 의관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직 들리는 것은 만당의 웃음소리뿐이고, 명령의 실시에 있어서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며, 실제로 나라를 근심하고 공을 받드는 사람이 드물다. 벼슬이나 직위를 매우 가벼이 보고, 관청을 마치 주막집 같이 여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
"의관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직 들리는 것은 만당의 웃음소리뿐"이라는 이중환의 말은 지금의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 만나면 아주 괜찮은 인사법처럼 서로 칭찬하고 그렇지 않으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서로 마음도 없는 덕담만 건넨다. 그것은 토론문화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의견을 개진하면 금세 난장판이 되고 말기 때문에 “좋은 게 좋다.”고 지나가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와 같이 오직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들만 있고, 나라를 근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뿐인가? 자기의 지분을 망각하고 나라 돈을 함부로 쓰거나, 직장을 술집이나 사유물처럼 여겨서 고스톱에, 주식에, 경마에,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만 있다.
그러므로 “재상은 중용을 지킴으로써 어질다 하고, 삼사는 말하지 아니함으로써 높게 평가되며, 외지에 나가 있는 관리들은 청렴하고 결백하고 검소함을 어리석게 여기니, 이대로 나아간다면 종말에 가서는 어떤 지경에 이를 것인가?”하는 이중환의 걱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오늘로 이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이러다가는 서로 공멸하는 길밖에는 달리 해답이 없다.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한 당파에 소속되어 버린 그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움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남이 옳은 얘기를 하면 “입 바른 소리를 잘 한다” 라거나 “삐딱하다”는 말로 몰아세우거나 하고 행여 그 자신이 난처한 경우를 당하게 될 사안이 있으면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핀다.
사색당쟁이 있던 시절이 250년이 더 지났지만, 오늘날의 정치판은 흡사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항상 대의大儀를 위한다고 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그뿐인가, 일부 공직자들과 사회 지도층(?)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경제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앞장을 서고 아무도 모르게 내 가족 내 집단만 챙기는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되며, 이리저리 당을 옮겨 다니는 ‘정치철새’라는 신조어의 등장으로 오랫동안 그 권력을 유지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생겨난 점이다.
조선시대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더 나아지지 않은 당쟁의 폐해. 어떻게 해야 풀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마음만 답답할 뿐이다. 정여립이 주창했던 대동의 세계는 요원하기만 한가?
2024년 8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