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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에서 애민과 애국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1. 사회의 기본 운영 원리에서 애민과 애국의 역할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이 이루어졌던 인류사의 전개 과정을 보면 사회는 크게 두 가지 기저 방향에서 전개됩니다. 하나는 사회의 통치 집단이 자기들의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기저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성원을 하나로 모아내는 기저입니다. 이 두 길항 관계에 따라 대체로 역사의 성쇠가 결정됩니다.
지배와 억압을 강요하자면 서로 간의 분열과 대결을 주장해야 하는데 그런 속에서 사회의 발전이 이뤄진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회를 발전시키자면 사회의 구성원들을 단합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지혜와 힘을 적극적으로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애민과 애국입니다. 그 때문에 사회 발전의 기본 동력을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에 두지 않고 애민과 애국을 사회 운영의 두 축으로 바라봅니다.
애민과 애국을 사회 운영의 기본 축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 방식이 노예제와 신분제, 자본제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민으로 포괄되는 대상이 계속 확대되었다고 하는 데에서 확인됩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으나 신분제 사회에서는 더욱 그 대상이 확대되었고, 자본제 사회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다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는 존재로 인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의 대상이 확장됨으로써 애민, 애국은 인류사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그 역할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이 이뤄지는 조건에서도 애민과 애국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런 지배와 억압이 사라지고 애민과 애국의 기치가 참답게 실현된다면 그 기능과 역할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이 이뤄진 조건에서도 애민과 애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한국사의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2. 애민과 애국이 강조될 때 민의 삶은 풍족해지고 국력은 신장된다
한국사에서 애민의 효시는 단군조선의 건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인류사의 효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애민이 등장하려면 인간으로서 자각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것도 사회적 존재로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국가의 건설로 증명됩니다. 단군조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건국되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나라의 건국사화가 있지만 이렇게 단군조선의 건국 시기보다도 이르게 인간의 자각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사화는 아직껏 없습니다.
물론 홍익인간의 이념은 단군이 아니라 환웅에 의해 제시된 것입니다. 여기서 환웅 시기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지금껏 누구나 역사서로 인정하고 있는 『삼국유사』에서 단군조선의 건국사화를 명백히 전하고 있으니, 단군조선의 건국만큼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시기는 금법팔조에서 알 수 있듯 노예제 사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사의 초창기를 열었던 때여서 불가피한 역사적 조건이었습니다. 노예제 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를 지녔고, 건국 초기에는 영역도 제한적이었지만 계속 확장해 수많은 열국을 거느린 대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영토 또한 한반도에서부터 중국 대륙의 북부 전반을 아우르게 되었으며, 이를 포괄한 단군민족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것도 무려 2,0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원불변한 게 없듯 단군조선 또한 열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던 중앙 집권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분열되었고, 끝내 붕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다시 이어받고 나선 나라가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대왕(고주몽)은 다물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다물은 다 무르자는 것으로서 단군조선의 영화와 번영을 되찾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환인, 환웅, 단군을 이어받는 하늘의 자손, 즉 천손민족임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각에 기초한 홍익인간의 정신을 계승하여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배와 패권의 추구와 관련이 없을뿐더러 그것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은 누구에 대한 지배와 패권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존엄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홍익인간과 하늘의 자손이라는 기치는 평화를 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관계로 단군조선과 고구려가 단군민족 공동체의 영토에는 확고히 되찾고 지키려고 하였지만 그 이상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한 침략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단군민족을 평화 애호 민족이라고 바라보는 것도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천손민족의 영화와 번영을 되찾기 위해 상무기풍을 확고히 확립하였습니다. 천손민족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침략자를 몰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천손민족의 자부심과 상무적 기풍에 근거해 단군조선의 영토와 단군민족의 통합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 결과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부터 중국의 대륙 북부 지역 전반을 아우르며 대륙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또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듯, 800년의 왕국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신라가 천손민족의 대의를 저버리면서 당나라의 외세를 끌어들여 침략해 왔는데, 이를 끝내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천손민족의 대의는 끊기지 않았고, 고구려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을 분쇄하고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천손민족의 대업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투쟁을 적극 전개함으로써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중국 대륙 북부에 걸친 영토를 되찾았으며 해동성국이라 부를 만큼 강성한 나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발해라는 나라는 어느 시기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국으로 등장했던 나라가 단 한 번의 거란 침략에 무너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당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을 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화산 폭발 때문에 큰 피해를 당한 상황에서 거란의 침입에 제대로 항거조차 못 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발해의 멸망 이후 천손민족의 위업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벌써 국가 이름부터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단군조선과 고구려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개경을 수도로 두면서도 평양을 별경으로 삼아 서경을 설치하였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울러 단군민족의 구성원으로서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발해를 멸망시켰던 거란을 증오하며 거란이 고려와의 수교를 위해 낙타를 보내왔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만부교에서 그 낙타를 굶겨 죽이는 단호한 태도까지 보였습니다. 이것은 태조 왕건이 천손민족으로서 발해와의 공동체 의식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는 태도를 보여줌과 함께 거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영토를 단호히 수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확고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려 태조 왕건의 정신은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맞아 단호히 격퇴하는 모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원의 침략에 맞서는 투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실상 고려만큼 몽골제국과 장기간에 걸쳐 항전하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고려의 항쟁 정신은 거셌던 것입니다. 그 항쟁 정신의 사상적 뿌리가 단군조선의 역사성이었습니다.
외세의 침입을 맞아 고려가 위기에 처하자, 일연 스님은 고려가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단군민족으로서의 뿌리를 분명히 하면서 단군조선의 건국사화를 명확히 밝혔던 것입니다.
실상 사람이 저항해 나서자면 그에 대한 원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원동력이 없이는 힘의 우위 앞에 대개 굴복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그 정당성과 명분을 밝혀야 합니다. 여기서 단군민족의 유구한 역사성과 공동체 의식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애국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항상 위기에 처하게 되면 단군 할아버지를 찾았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이후 사대 모화사상에 의해 조선이 건국됨으로써 애국의 기치는 심히 손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습니다. 홍익인간과 하늘의 자손이라는 인식은 애민과 애국의 뿌리로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애민 정신이 강조되면 애국의 정신이 강성해지게 됩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조선 시기 세종대왕의 모습입니다.
분명 이성계에 의한 조선의 건국은 천손민족으로서의 대의를 저버린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대왕은 그런 와중에도 애민 정신을 세워 갔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훈민정음의 창제입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니 누구나 쉽게 배워 자기 뜻을 밝힐 수 있게 하겠다는 것에서 드러나듯 세종대왕의 핵심적 요체는 애민이었습니다.
실상 애민이 실현되려면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백성들의 뜻이 잘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대신들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의 창제로 나아갔던 것은 세종대왕이 애민 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가를 보여주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의 위대성은 그 창제 원리가 애민 정신에 기반하고 있으면서 과학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사상적 원리에 기반합니다. 천지인은 홍익인간의 사상과 연결됩니다. 천지인이 환인(天), 환웅(地), 단군(人)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각성을 앞세운 사상적 우월성을 갖추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은 사람의 목소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리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 기반해 누구나 쉽게 배워 자기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애민 실현의 길을 열어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애민의 길이 열리면 당연히 애국의 정신이 고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애민에 그치지 않고 애국의 정신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세종대왕 시기에 북진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 애국의 정신은 조선 사대부들의 모화사상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쉽게 말해 나라 내부는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극악한 세력에 의해 더 이상 사회가 지탱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이고, 제국주의 세력이 이런 조선을 식민 지배하기 위해 침략해 오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런 조건에서 민은 스스로 이를 극복하는 길로 나서게 됩니다. 그것이 인내천(人乃天)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가 단군민족이자 천손민족이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를 실현하자면 노비제도와 신분제를 없애 인간이 온전히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면서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동학 농민군은 신분제 타파와 반외세 기치로 죽창을 들고 녹두벌판에 나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갑오농민전쟁은 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고, 이를 면밀히 연구하였던 신채호는 단호하게 역사는 민족 공동체라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역사라고 설파하면서 일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전진시키자면 무엇보다 항일 독립투쟁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길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렇듯 애민과 애국은 나라와 민족의 융성을 담보하는 근간이었으며, 나라와 민족의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정신적 무기로 작용하였습니다.
3. 애민·애국이 붕괴할 때 사회가 혼란되고 국력이 쇠락한다
단군조선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불러일으켜 원시 사회로부터 인류사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은 인류 앞에 크나큰 공적으로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단군민족을 굳건하게 형성시키며 융성 번영의 길로 나갔던 것은 우리 민족의 활로를 열어준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단군조선의 영화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망국의 아픔도 겪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미국으로부터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사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지 그와 반대되는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현시기 한국의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입니다.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홍익인간의 정신이 바로 애민과 애국의 기본 조건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홍익인간의 정신을 부정하게 되면 애민과 애국 또한 굴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홍익인간 정신의 부정은 안타깝게도 단군민족 내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 나라가 신라입니다. 신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단군조선의 열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라 또한 홍익인간의 정신이 사회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풍류도(風流徒)입니다. 풍류도는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라의 현묘한 도를 풍류라고 한다면서 그것은 공자와 노자, 석가모니의 삼교를 포함하고 있고 뭇 백성을 교화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으로 자각하도록 교화하여 참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홍익인간의 성신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이 풍류도가 신라 진흥왕 시기에 화랑도로 바뀝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풍류도는 홍익인간의 정신에 기반을 두어 뭇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아 산천을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교화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단체였습니다. 그런데 화랑도로 조직화하면서 그 대상을 귀족의 자제로 한정하면서 신라 정권의 이익을 우선하는 조직으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화랑도가 신라에서 구축되었기에 신라의 권리를 대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단군민족의 대의는 물론이고 인류 공동의 대의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되면 홍익인간의 정신에 기반한 애민과 애국이 설 땅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자기 존엄을 중심에 두는 것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자기 이익 실현에 관심을 두게 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남을 지배하고 통치하려 듭니다. 반면에 자기의 존엄을 세우는 것을 중심에 두면 스스로의 자존감을 드높이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은 당연히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반대하게 됩니다.
단군조선이 중앙집권적 힘을 강력히 행사했을 때에는 풍류도에서 홍익인간의 정신이 확고히 견지되었지만, 단군조선이 붕괴된 이후에는 그것이 고수되지 못하고 이색적인 사조가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라의 풍류도는 서로 내분을 겪다가 신라 왕권에 의해 화랑도로 재편되었고, 결국 신라 왕권의 이익을 수호하는 조직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화랑도였던 김유신은 풍류도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김춘추와 손을 잡더니 급기야 당나라까지 끌어들여 단지 신라 영토를 좀 확장하려는 길에 나섰던 것입니다.
단군민족의 통일을 이루려면 천손민족의 대의에 맞게 추구하여야 하고, 당연히 단군조선의 영토 또한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군민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당나라까지 끌어들였고, 신라 왕권의 영토를 좀 넓히려고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런 신라의 행위는 다물의 기치를 내걸고 단군조선의 모든 영토를 되찾아 영화와 번영을 누리려고 했던 고구려의 모습과 대비됩니다.
단군민족 간의 애민, 애국을 부정하는 신라의 모습은 고구려를 계승해 등장했던 발해와 끝끝내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라의 이런 일탈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는 가운데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겠다고 하면서 극복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패거리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세력의 준동은 또다시 나타났습니다. 고려 시기의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부식이었습니다.
김부식은 개경파 문벌 귀족이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강조하는 서경파와 대립하면서 묘청의 난을 직접 진압함으로써 실세로 등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정도라면 하나의 권세가로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부식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문벌 귀족 패거리들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에 의한 『삼국사기』를 집필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과 홍익인간의 사상적 계승에 심각한 굴절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얼과 혼이 살아 있으면 상황이 어렵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사상이 썩으면 스스로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홍익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자각과 존엄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이런 단군조선의 정신과 역사를 똑바로 계승하여 세우려고 하지 않고 사대주의에 빠졌습니다. 단군민족의 존립 기반을 몽땅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단군조선의 위대한 정신인 홍익인간의 사상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김부식이 단군민족의 존립 기반을 허무는 어리석은 짓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패거리들만의 이익을 앞세워 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자기 힘이 가장 세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앞에 와서 무릎 꿇으라고 강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는 세상에 위계질서가 있다는 식으로 강변하면서 자기 패거리들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실상 김부식 같은 문벌 귀족의 패거리 앞에는 고려 왕조가 있었고, 거기에다가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서경파는 물론이고 이에 함께하는 무장 세력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세력을 짓밟고 개경 문벌 귀족들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유교 사관이었습니다. 유학의 태생지가 중국이기에 그 중국을 사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학을 받아들인 문벌 귀족들이 국정을 장악해서 풀어가야 한다는 강변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패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뿌리도 부정하는 반인륜적 행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부정하는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은 김부식 당대의 시기에만 영향을 미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썩어빠진 정신이 계속 이어져 마침내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의 명을 거부하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까지 나타났습니다.
조상이 살았던 영토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후세대의 당연한 책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더니 결국 사대주의 때문에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온 격이었습니다. 이것은 김부식의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이 얼마나 단군민족의 정신 계승에 해악을 끼쳤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래도 신라 시기에는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려고 당나라와 손을 잡기는 했으나 사대주의적 핑계를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사대주의 때문에 단군조선 이래로 수천 년 동안 우리 조상이 살아왔던 영토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애민, 애국의 정신이 제대로 발양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문에 청이 새롭게 강성해 가는 데에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대륙의 정세도 몰라보고 명에 대한 사대주의만 주야장천 외치다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건만 여전히 자기 패거리들만의 이익만 추구하다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고, 제국주의적 열강이 침입해 오는데도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갑오년에 농민들이 신분제 타파와 반외세 기치를 내걸고 떨쳐나섰는데, 그 못된 사대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동포를 죽이라고 또다시 외세인 청나라를 끌어들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 또한 한반도에 군대를 끌고 들어오면서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후에도 사대주의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러시아에 의존하려다가 다시 러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에 또다시 의존하려 하였으나 이미 미일 간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을 서로 각각 지배하기로 협의하였으니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은 물론이고 애민과 애국을 저버리면서 사대주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결국 조선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의 길로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4. 홍익인간과 애민·애국은 서로 연동되어 진행된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국력이 강성하여 민의 삶이 풍족해지거나 민족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를 극복해 나갈 경우에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이 강조되었습니다. 반면에 통치 집단의 탐욕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나라가 혼란에 휩싸여 국력이 쇠퇴해 갈 때에는 하나같이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이 부정당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홍익인간의 사상과 정신이 애민과 애국을 담보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애민과 애국의 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삶의 터전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와 민족을 수호한다면 그 주인인 백성을 떼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애민을 견지하지 않는 조건에서 애국이 실현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민을 견지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짓밟은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밖에 모르는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나선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래서 애민이 관철되는 정도에 따라 애국의 내용이 견지되고, 애국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냐에 따라 애민의 폭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종대왕이 조선 시기에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이 확립되고 신분제 사회였음에도 애민의 정신이 추구됨에 따라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 천민인 장영실을 과감히 등용하고 훈민정음까지 창제하는 길로 나아갔으며, 마침내 북진정책도 강력히 밀고 나갔던 데에서 드러납니다. 반면에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면 조상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나서야 했던 요동 정벌을 포기하는 길로부터 시작해 그런 사대주의적 유교 사관을 확립한 패거리들의 권력 독점을 위해 싸우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고, 끝내 일제 식민 지배의 길로 빠지게 하였던 것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애민과 애국은 사실상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에 의해 담보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게 애민 정신의 표현이고, 바로 이를 기반으로 단군조선이 건국되어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이 애국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정신과 역사를 얼마나 확고히 계승하느냐에 따라 애민과 애국이 연관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면 애민, 애국은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부정하면 애민, 애국이 결국 부정당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얼마나 계승하려고 하였는가의 각도로 바라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며, 앞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도 시대 흐름에 맞게 홍익인간의 정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각도에서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2026. 8. 10.
우리겨레연구소(준) 소장 정호일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