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명절 준비를 위하여 남동생 식구가 왔다.
자주 가족들이 모이기는 하지만, 식사만 하고 곧장 집으로 가는데,
명절을 앞두고는 전날에 와서 잠을 자는 남동생 식구들.
책과 장난감 등 짐을 잔뜩 들고온 이제 여섯 살이 된 조카는 오자마자 레고를 꺼내
진돗개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었다.
얼마전까지도 우주인이 꿈이었던 조카는 다시 꿈이 기관사로 바뀌어 있었다.
우주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주인이 매우 고단한 삶을 산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이다.
잠을 잘 때 거꾸로 매달려서 자야 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우주인이 영 싫단다.
그래서 다시 토마스 기차를 모는 기관사가 되겠다는 조카는 그래도 우주에 관한 책을 가지고
와서 내게 명왕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녀석이 저녁을 먹은 후 꽂이를 만드는 자기 엄마를 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왜 엄마는 이태원만 오면 일을 해? 여기 우리 집도 아니고 남의 집이잖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남의 집이니? 할머니 집이잖아."
나의 말에 조카는 "그래도 우리 집이 아니잖아요. 엄마는 미아리 할머니네 가면 일 안해요."
"그래서 엄마가 일하는 게 싫으니?"
"네, 싫어요."
그 녀석의 싫다는 소리에 모두 웃었다. 그런 녀석의 비위를 맞추려고 난 옛날 이야기를
10개나 해야 했다. 잊지도 않고 이야기 10개를 채우고야 나를 해방해준 조카는 밤이 깊어도
잠 들지 않는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은 그 녀석은 잠이 없다. 돌 지나면서 낮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책 읽고, 열심히 말을 하는 녀석은 밤에 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게 걱정되는지, 유치원 가게 되면 8시에 자신을 깨우라고, 안 일어나면 소리를 지르라고 엄마한테 당부를 한다.
지금까지는 엄마들이 모여서 모듬으로 아이들 놀이와 인성교육을 지도했었는데,
아이들이 하나하나 유치원에 가는 바람에 녀석도 올해에는 유치원에 간단다.
유치원에 대한 기대가 큰 조카는 딱 한 번 추첨을 하러 갔었던 유치원이 숲 속에 있다며
열심히 자랑을 하였다.
오늘, 아침을 먹은 후 전을 부치기 시작하자 동생과 둘이서 택배놀이를 한다며
시끄럽게 왔다갔다 하더니 내 방에 들어와서는 묻는다.
"다들 일하는데 왜 고모는 공부만 해요?"
"고모가 다리가 아프거든. 그래서 일을 안 시켜주는 거야."
"네, 오른쪽 다리가 아직 안 나았어요?"
그러며 다시 택배를 한다, 술래잡기를 한다, 외국 여행 놀이를 한다며 열심히 다니다가
갑자기 어딘가에 전화를 하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외갓집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할머니, 있잖아요. 엄마가 자기 집도 아닌데, 남에 집에 와서 일만 해요."
녀석의 말에 웃고 있는데, 저쪽에서 못 알아들었는지 조카가 같은 말을 또 한다.
그러더니 잠시 후 외갓집 전화번호를 말하고는 약간 쭈삣거리다가 "죄송해요."라며
전화를 끊는 게 아닌가.
"왜 그래, 잘못 걸었구나. 그렇지."
"아이 창피해. 아니요, 바로 걸었어요. 그런데 아줌마가 잘못 걸었대요."
"너가 잘못 눌렀겠지. 그런데 저쪽에서 뭐라고 해?"
"아가야, 지금 어디에 걸었니? 라고 물었어요."
"그래도 준범이가 바로 전화를 끊지 않고 '죄송해요'라고 해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런데 어른한테는 '죄송해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해.
다음에 전화를 잘못 걸면 반드시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어야 한다."
"네, 그런데 창피해요."
"괜찮아, 너는 아직 아가잖아. 그 아줌마도 너가 아가라 실수한줄 알거야."
"이제 6살이 되는데, 정말 창피해요."
전화를 끊은 후 자꾸 창피하다고 하던 녀석이 다시 전화를 건다.
이번엔 제대로 전화를 했는지, 다짜고짜 투정부터 부린다.
"내가 전화했는데 이모가 바로 안 받아서 잘못 걸었대요. 난 잘못 걸지 않았는데...
이모가 바로 받아야지요."
그렇게 투정을 부리느라 '엄마가 남의 집에서 일한다'고 일러야 하는 것을 잊었는지
그 말을 쏙 빼고 "내일 점심 먹고 갈게요."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너 이모한테 그렇게 신경질 부리면 되니? 내일 이모한테 가서 아까 아줌마한테 한 것처럼
죄송하다고 말해야 한다. 알았지?"
"네, 죄송합니다."
녀석은 장난스럽게 죄송하다고 하고는 영국을 가야 한다며 여행놀이를 하러 방을 나갔다.
다른 아이들보다 말이 빨랐던 녀석은 명확하게 말하고, 상황에 맞게 하였으며,
3살이 조금 지나자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에게 매일 전화를 하여 자신의 생활을 들려주곤 해
두 어른들을 뿅 가게 만들었다.
작년 가을 '우주의 신비'를 보고 와서는 우주인이 되겠다며 닐 암스트롱에게 짧은 편지를
쓰기도 하던 녀석.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예의바른 아이로, 그리고 말을 실천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였다.
오늘,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것을 알고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창피하다며 속상해 하는 녀석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엽던지...
그런데 이모에게 전화를 하면서 짜증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예의를 지키는 녀석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바람을 또 가져본다.
의외로 밖에서는 잘해도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외롭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족들에게도 예의를 지키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고 바른 모습이 아닐까?
나의 어린 조카가 그런 어린이로,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로 자랐으면,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이제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이제 여섯 살이 된 것을
몹시 기뻐하는 조카에게 바라는 나의 바람이다.
첫댓글바람님의 어린 조카 아이의 귀여운 행동을 보며, 오래전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글속에 담긴 순간 순간의 조카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들과 판이하게 다른 사실을 깨닷고 진정 문화란 이렇게 다를수 있구나, 하고 느꼈지요, 조카 만세 ! 멋진 설이라예 !
첫댓글 바람님의 어린 조카 아이의 귀여운 행동을 보며, 오래전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글속에 담긴 순간 순간의 조카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들과 판이하게 다른 사실을 깨닷고 진정 문화란 이렇게 다를수 있구나, 하고 느꼈지요, 조카 만세 ! 멋진 설이라예 !
귀여운 조카네요.
참 착하고 귀여운 조카입니다. 즐거운 설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 아이가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인줄 알았는데, 이제 유치원 들어가네요.. 귀엽고도 조숙해라..ㅋㅋ
정말 귀엽고 이쁩니다....새해엔 더 좋은일들이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