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居正(서거정)-悶雨(민우)(비가 안 와 걱정이네)(비가 와야 할 텐데)
自春無雨夏相仍(자춘무우하상잉) 봄부터 시작된 가뭄 여름까지 이어지니
女魃憑凌爾可憎(여발빙능여가증) 기승부리는 가뭄 귀신 네가 참 밉구나
天地爲爐烘似火(천지위로홍사화) 천지는 화로가 되어 불처럼 이글거리고
田原無髮禿如僧(전원무발독여승) 들판엔 초목이 말라 중머리처럼 민둥하네
螽蝗得勢能爲患(종황득세능위환) 메뚜기 떼가 극성이라 걱정스러운데
蜥蜴疎才不足憑(석척소재부족빙) 도마뱀도 신통치 않아 의지할 수가 없네
安得銀潢雙手挽(안득은황쌍수만) 어찌하면 두 손으로 은하수를 끌어다가
人間萬里洗炎蒸(인간만리세염증) 세상천지 찌는 더위 시원하게 씻어 줄까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사가집四佳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하승현님은 “곡식을 키우기 위해 제때 알맞게 내려 주어야 할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 때, 농민들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사전祀典 기우제용변증설祈雨祭龍辨證說’에 보면 송나라 관중關中에 가뭄이 들었을 때, 어떤 승려가 도마뱀 수십마리를 잡아 항아리 안에 넣어 놓고, 어린아이들에게 버들가지를 잡고 주문을 외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라. 비가 쏟아지게 하면, 너를 놓아 돌려보내 주마’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주문을 외자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고 한다. 도마뱀은 용과 닮았기 때문에 기운이 통할 것이라고 보아 용 대신 도마뱀을 쓴 것이라고 한다. 도마뱀을 써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은대조례銀臺條例’ ‘예고禮攷 기고제祈告祭’에 보면, 기우제는 하지 이후에 예조에서 임금께 여쭈어 2일 간격으로 거행한다고 되어 있다. 삼각산.목멱산.한강단1차,6차, 용산강.저자도2차,7차, 남단.우사단3차,8차, 북교4차,9차, 사직4차,10차, 종묘5차,11차 등지에서 12차례에 걸쳐서 차례로 거행하도록 하였다.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는데, 6차 때에는 내시를 보내어 호랑이 머리 모양을 만들어 제물과 함께 강물에 던지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9차 때에는 북교에 정2품, 모화관 연못가에 무관 종2품과 도마뱀에게 주문을 욀 동자를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12차 때에는 3품 당하관을 보내어 오방토룡제五方士龍祭를 거행했는데, 이는 흙으로 만든 용을 다섯 방위에 두고 채찍으로 용을 치면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제사이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내는 중에 비가 내리면 반가운 마음으로 이렇게 축문을 수정했다.
‘단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감패주하甘沛注下’”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년(세종 2)~1488년(성종 1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시호 문충(文忠)]-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魃(발) : 한귀 발, 한귀(旱鬼: 가뭄을 맡고 있다고 하는 귀신)
*憑(빙) : 기댈 빙, 1.기대다, 2.의지하다, 3.의거하다, 전거로 삼다
*凌(능) : 업신여길 릉(능)/얼음 릉(능), 1.업신여기다(≒陵), 2.능가하다, 3.심하다
*爾(이) : 너 이/꽃 많고 성한 모양 이, 1.너, 2.성(姓)의 하나, 3.어조사(語助辭)
*憎(증) : 미울 증, 1.밉다, 2.미워하다, 3.미움받다
*禿(독) : 대머리 독, 1.대머리, 2.대머리가 되다, 3.민둥민둥하다
*螽(종) : 메뚜기 종, 1.메뚜기, 2.베짱이, 3.마디충(벼의 마디를 먹는 벌레)
*蝗(황) : 메뚜기 황, 1.메뚜기, 2.황충(蝗蟲: 풀무치)
*蜥蜴(석척) : 1.도마뱀, 2.도롱뇽의 잘못 이르는 말.
첫댓글 지금과는 반대인 상황이네요...
와도 걱정 안와도 걱정..
적당히는 참 힘든거네요.
ㅎ, 손대장님 말씀처럼 적당히가 좋은데 그게 참 힘든 거 같아요.
무더위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금요일과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