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엔 항상 강화도가 있었다.
160여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을 비롯해 남한 유일의 단군 유적인 '마니산 참성단'과 '삼랑성', 몽골족의 침입에 맞서 싸운 대몽항쟁의 중심인 '고려궁지',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바란 '팔만대장경',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왕실의 피난처로서 '5전 7보 53돈대'가 구축됐다. 또한, 영원한 제국을 꿈꾼 정조대왕이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외규장각이 이곳 강화에 있다.
'강화도령' 이원범(훗날 철종)이 유배되어 어린시절을 보낸 내수골 옛집(용흥궁)과 첫사랑 양순이와의 애뜻한 사랑을 간직한 '강화도령 첫사랑실'이 연인들을 발길을 머물게 한다.
근대에 이르러 병인년(1866년)과 신미년(1871년)에 겪은 두 차례 양요(洋擾)와 1875년 운요호 침입사건 이후 1876년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이곳 강화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189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교(統制營學校)'가 세워졌고, 한옥 건축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문화가 어우러져 동서양 건축 양식이 융합한 걸작으로 꼽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도 이 무렵(1900년) 건축됐다.
국권이 침탈된 일제 강점기에는 만세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의 강한 염원을 다졌다. 특히, 강화 만세운동은 경인지역 만세운동 중 가장 많은 약 2만4000여 명이 참여했다. 또한 광복과 한국전쟁, 분단을 겪으며 강화는 서해수호의 최전선에서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였다.
1960~1970년대 강화는 국내 방직산업의 중심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화문석공예의 전통은 심도직물로 대표되는 방직산업으로 계승되었고, 1920년 전후 가내공업으로 역사를 이어오다 해방 이후 공장형 직물산업으로 발전하며, 1960~1970년대 강화 전성기 부의 원천이 된다.
세계 문화유산, 강화 부근리 고인돌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 '지석묘'를 비롯해 부근리에는 인천지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14기의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석묘'는 무게가 52톤이 넘고 전체 높이는 2.6m,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깨 1.2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12월 강화 고인돌은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강화 고인돌의 특징은 형식과 분포면에서 연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늘이 열린 땅, 마니산 참성단
남한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단군유적으로 알려진 '마니산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자사를 올린 제단으로 국가 사적 제136호로 지정돼 있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은 하늘을,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 신라시대 지어진 경주 첨성대가 이와 비슷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개천절에 이곳에서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육대회의 상화가 바로 이곳에서 점화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참성단이 단군의 제천단인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국난 극복의 의지를 담은 고려왕국의 도읍, 강화
'고려궁지'는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해 강화로 천도한 1231년(고종 19년)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원종 11년)까지 39년 간 고려왕실의 궁궐이 있던 자리다.
비록 궁의 규모는 작았지만 도읍의 면모와 왕실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본궁을 비롯한 14개의 작은 궁궐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이해 본향에 대한 수복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하여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했다.
특히, 선원사에서는 부처의 가피로 외적을 물리치고 고려제국 부흥의 염원을 담아 '대장경'이 제작되기도 했다. 선원사는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외침에 대비해 1631년(인조 9년)에 행궁이 지어졌다. 실제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의 빈 강씨와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과 역대 왕의 신주가 이곳으로 피신하였으나 함락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최초의 근대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의 상징인 '강화도조약'까지 국난과 외환의 시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두 번의 양요를 거치며 강화궁궐의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조선 외규장각 등이 불타버리고, 현재는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보던 이방청 등 조선시대 유적만 남아 있다.
현대 분단 이후 강화는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 되고 있다. 특히, '교동도'는 북한과의 거리가 2.6km에 불과한 접경 지역으로, 지자체와 중앙정부, 민간기업이 협력해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강화
이처럼 역사의 구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강화는 이제 전통과 첨단,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 학습장이자, 평화의 성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그 중심에 '화개정원'이 있다.
시대상을 반영한 역사유물과 고향을 떠난 그리움의 '켜를' 품은 섬 '교동도', 거기서도 '화개정원'은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화개산 일대에 평화와 희망의 염원을 담아 아픔을 치유하고 밝은 미래의 꿈을 담아 11만㎡(약 3만 3333평) 규모로 만들어졌다. 물의 정원, 역사·문화 정원, 추억의 정원, 평화의 정원, 치유의 정원 등으로 조성돼 있다.
'화개정원' 내에는 익스트림한 스카이워크를 체험하고, 멋진 화개정원 및 교동도의 전망을 조망하실 수 있는 '화개산 전망대(스카이워크)'와 폐위된 연산군이 위리안치 됐던 강화군 향토유적 제28호 '연산군 유배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잠깐의 휴식과 힐링의 장소로 각광을 받는 '멍 때리기 ZONE'이 있다. '멍 때리기 ZONE'은 물멍 ZONE, 숲멍 ZONE, 북한멍 ZONE, 논멍 ZONE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서울, 경인 서북부 권역의 유일한 자연휴양림인 '석모도 자연휴양림'은 삼산면 지역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바탕으로 삼산면 석모리 일대에 총 128ha 규모로 조성돼 있다.
이 외에는 선홍빛의 진한 향기가 매력적인 고려산 진달래 꽃구경,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생활문화체험공간 '소창체험관'. 코딩교육과 가상현실 VR, 증강현실 AR이 융합된 첨단콘텐츠 체험관인 '강화 실감형 미래 체험관' 등도 들러볼 만하다.
아울러, 선사시대의 고인돌, 고려시대의 왕릉과 건축물, 조선시대에는 외세 침략을 막아 나라를 살린 진보와 돈대 등 역사와 선조의 지혜가 스며 있는 생활·문화 그리고 세계적 갯벌과 저어새·두루미 등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생태 환경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도보여행길인 '강화나들길'도 여행자들의 발길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