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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15(수) / 제목:【재악산(載嶽山) 수난사(受難史) 개념도】 작성 기준 및 설명문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5242?svc=cafeapp
※(註)도재국 :
●이전에 《다음 카페 밀양광장》과 《페이스북 도재국 계정》에 올린 【재악산(載嶽山) 수난사(受難史) 개념도】 사진은 오기가 있어, 이번 수정을 위해서 전면 삭제했습니다.
●이 글은 26.7.18(토) 오전 8:45 최종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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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악산(載嶽山) 수난사(受難史) 개념도】 작성 기준 및 설명문
● 최종 작성일: 26.7.18(토) 오전 8:45
● 공동 연구·고증: 손흥수·도재국 (44년간 재악산 명칭 고증 및 홍보 활동 전개)
◉ 개념도(槪念圖) 작성 용지 규격 등:
① 설명문이 지닌 학술적 깊이와 분량을 고려하여, 기존 세로 달력 규격보다 세로 폭을 충분히 확보하여 가독성을 높여 작성한다.
② 설명문을 과도하게 축소할 경우 고증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상세 서술을 유지한다.
③ <재악산(載嶽山)>과 <재약산(載藥山)>은 시각적·음운적으로 유사하여 혼동하기 쉽고, 시대별로 각 봉우리에 대한 명칭 주장이 상이하여 오랜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이해하기 까다롭다. 이에 상세한 구분을 돕고자 각 봉우리의 명칭, 한문, 해발고도를 명확히 병기한다.
④ 문화재와 인명 등 고유명사의 역사적 맥락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한글과 한문을 병기한다.
⑤ 시대 구분은 일반적인 역사 연대 구분 기준을 따랐다.
⑥ '설명문 9번'의 신라시대 載嶽山 증거는 간접증거로서 "금석문과 성보유물의 유전성(遺傳性)"을 통해 고대 재악산 명칭 추정의 타당성을 논증한 것이며, 상세 논증은 '다음 카페 밀양광장'과 '페이스북 도재국 계정'에 기록되어 있다.
⑦ 지면 관계상 보유하고 있는 <載岳山 관련 역사적 문헌 증거 86건> 중 핵심적인 일부만을 엄선하여 수록한다.
⑧설명문이 길므로 개념도 뒷장에 잇따라 설명문을 개념도 크기로 텍스트 전용으로 한 장 더 작성하여, 설명 또는 보고 시 같이 사용한다.
단, 1장으로 작성할 때는 세로 길이를 길게 한다.
=== 개념도(槪念圖) 번호별 설명문 ===
1. 재악산군(載嶽山群)의 원형 산세 구조
● 주봉: 載嶽山 (사자봉, 1,189m)
● 동봉: 수미봉 (載藥山, 1,108m)
● 기타 주요 봉우리: 문수봉, 관음봉, 향로봉(향로산), 필봉(筆峰), 매바위(응봉 鷹峰)
(※ 시계 방향 배치 구조)
2. 조선 중기 載岳山 문헌 증거
《한국불교전서》
● (동국대학교출판부, 전 17권 중 제12권): 〈동계집(東溪集)〉 내 '載岳山記(재악산기)', '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후 創建記(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 한문 원문 수록.
● 〈한글본 동계집〉 (김성호 전 동국대 교육대학원장 저): 저자인 동계 경일(東溪 敬一, 1636~1695) 선사는 영남관찰사 조계원의 천거를 받았으며 해인사, 영정사, 감로사 등의 주석을 거쳐 1695년(숙종 21) 3월 15일 밀양 영정사에서 열반에 든 인물이다.
● 〈재악산기(載岳山記)〉: 신라 왕의 약초·약수 효험 설화 및 산의 뿌리가 백두산으로부터 뻗어 나왔음을 기록.
●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 영정사의 중창 내력 등을 상세히 기록.
3. 문헌적 이견이 존재하는 조선 중기 기록 (고증 검토)
● 1677년 간기 표기 〈載藥山 靈井寺 古蹟(재약산 영정사 고적)〉 건:
해당 문헌의 간기에는 '강희십육년적사고선하완정동계찬(康熙十六년赤蛇姑诜下浣鄭東溪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서술 주체인 '정동계(鄭東溪)'라는 인물의 실체와 고증 여부에 대해서는 학술적 의문이 제기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동계 경일 선사가 저술한 위의 2건의 명문을 모방하여, 원래의 '載岳山'을 '載藥山'으로 개서(改書)하여 후대에 편찬한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4. 조선 후기 載岳山 지리서 증거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산수고(山수考)》: '산위(山緯)' 밀양부 편에 載岳山으로 명확히 기록.
신경준은 조선 영조 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 우리나라 산맥 체계의 모태가 된 《산경표(山經表)》의 기틀을 확립하고 국책 사업인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집필한 권위자이다.
5. 1961년 지명고시와 역사적 명칭의 변동
●1961년 4월 22일 국립지리원 지명고시:
사자봉(1,189\text{m}) ➜ **'천황산'**으로 고시
수미봉(1,108\text{m}) ➜ **'載藥山'**으로 고시
●평가:
이는 일제강점기 조작된 천황산과 載藥山(해발1,108m)을 해방 이후 건국 초기 지명 정비 과정에서 학술적 재검증 없이 공식 지명으로 그대로 수용해 버린 역사적 고증의 한계이자 뼈아픈 실책으로 평가된다.
◉ 참고 사항
① 배산(配山)의 정의와 전통사찰의 원칙:
● 배산(配山)이란: 사찰이나 건물의 뒤편에 배후 배경으로 삼는 주산(主山)을 뜻하며,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배산'과 일맥상통합니다.
● 전통사찰의 원칙: 우리나라의 전통사찰은 예로부터 사찰이 위치한 산군(山群)의 가장 높은 최고봉에 산명(名)을 부여하여 배산으로 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례는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 본사의 산문에 걸린 현판 편액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구한 전통적 질서입니다.
② 일제강점기 지형도 표기의 왜곡 사례:
일제강점기 당시 제작된 1/50,000 지형도에 따르면, 표충사의 최고봉인 사자봉(1,189m) 위치에 '天皇山(천황산)'이라는 명칭이 표기되었습니다. 특히 해당 지형도에는 이 명칭 옆에 일본어 가타카나로 'テンノウザン (Te-n-no-u-za-n)'을 병기하여 격을 부여하는 등, 당시 식민지 지배 체제 하에서 고유 지명을 왜곡하고 재편하려 한 전형적인 정황과 객관적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③ 산군(山群)의 명칭 분절과 파편화: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의 의도적인 지명 조작 과정에서 북쪽의 최고봉인 제1봉 사자봉(1,189m)을 일제식(日帝式) 지명인 '천황산'으로 참칭(僭稱)하여 왜곡하고, 동쪽의 제2봉인 수미봉(1,108m)에는 **'載藥山(재약산)'**을, 남쪽의 봉우리(976.9m)에는 **'향로산'**을 각각 독립된 산명으로 파편화하여 부여하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는 본래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단일 산군을 강제로 분절시킴으로써, 우리 영토에 대한 전통적 지리 인식 체계인 **산경(山經)**의 맥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④ 국토지리정보원 소장 지형도의 증거력:
사자봉을 '천황산'으로, 남쪽 봉우리를 '향로산'으로 표기하여 전통 지명을 변형한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 국토지리정보원에 보관 중인 일제강점기 제작 1/50,000 지형도를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됩니다.
⑤ 최고봉과 배산(配山) 관계의 모순 및 실제 표기 사례:
전통적인 사찰 배치 관행상, 표충사가 최고봉인 사자봉(1,189m)을 두고 제2봉인 수미봉(1,108m, 載藥山)을 배산으로 삼았을 합리적인 지리적 이유는 찾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표충사 홍제교 입구의 산세 지형도나 과거 표충사 공식 대형 안내판 등에서도 최고봉인 사자봉을 '載藥山'으로 표기하여 대중에게 안내했던 구체적인 실례가 존재합니다. (최근 확인 결과, 해당 안내판의 표기는 사자봉으로 수정되어 보완된 상태입니다.)
⑥ 역사적 산명 및 사찰명 이표기(移表記)의 과정:
1839년 영정사 주지 월파천유 스님이 영취산 표충사(表忠祠)의 삼대사 사당을 단장면으로 이건(移建)할 당시, 당대 해발 1,189m의 최고봉인 사자봉은 역사적으로 '載岳山(재악산)'으로 확고히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당의 이전 및 중창 과정에서 조정(朝廷=국가)의 공식적인 결정이나 고증 없이, 월파천유 스님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사찰 자체적으로 산명을 '載藥山(재약산)'으로, 사찰명을 '표충사(表忠寺)'로 변경하여 이표기하였습니다. 이는 신라 시대부터 올바르게 전해 내려오던 고유 산명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워, 이후 역사적 산명 왜곡을 초래한 결정적인 1차 원인이 되었습니다.
⑦ 載岳山 역사적 지시처(指示處)의 일관성:
신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헌과 유물에 나타나는 총 86건의 載岳山(재악산) 관련 역사적 증거들은, 그 지시하는 대상과 위치가 하위 봉우리인 수미봉이 아닌, 이 산군의 주봉이자 최고봉인 사자봉(1,189m)을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음이 학술적으로 명백합니다.
6. 1995년 지명 변경 심의 과정
●1995년 말경 <밀양33산악회(회장 박상우)> 환원 신청의 본질적 한계:
당시 밀양33산악회는 국립지리원에 천황산(1,189m)과 재약산(1,108m)을 하나로 통합하여, 최고봉인 1,189m 사자봉을 **'載藥山(재약산)'**으로 환원해 줄 것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청은 역사적 고증이 미흡했던 잘못된 신청이었습니다.
●문헌과 유물의 철저한 고증에 따랐다면, 최고봉인 1,189m 사자봉은 '載藥山'이 아니라 역사적 본래 명칭인 **'載嶽山(재악산)'**으로 환원해 줄 것을 신청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당시 중앙지명위원회의 직무유기와 심의 실책:
국가 지명 관련 최고 심의기구인 중앙지명위원회는 단순히 신청인의 불완전한 제안에만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기구가 아닙니다.
●신청에 오류가 있었다면, 위원회 스스로 학술적·역사적 조사를 거쳐 원래의 올바른 이름인 **'載嶽山'**으로 바로잡아 심의하고 결정했어야 하며, 그것이 국가 심의위원회의 존재 이유이자 책무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지명위원회의 공식 회의록(발언록)을 분석해 보면, 심의위원들은 지리산의 '천왕봉(天王峰)'과 이 '천황산(天皇山)'을 동일한 성격의 지명으로 혼동하는 치명적인 무지와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는 일제가 조작한 1/50,000 지형도상에 명백히 드러난 결정적 왜곡 증거인 **일본어 가타카나 표기 'テンノウザン (Te-n-no-u-za-n)'**조차 제대로 확인하거나 대조하지 않은 명백한 직무유기성 지명 심의였습니다.
●결국, 국가 최고 심의기구로서의 책무를 망각한 채 정밀한 역사적·학술적 검증 없이 성급하게 내려진 당해의 **"유보 결정"**은 일제강점기의 왜곡된 지명을 묵인하고 온존시킨 극히 잘못된 심의이자 역사적인 실책이었습니다.
7. 현행 행정 조치 상황:
밀양시, 경상남도, 울주군, 울산광역시는 지명 환원에 대해 행정적으로 뚜렷한 입장 표명 없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손흥수·도재국 2인의 학술 연구자가 사명감을 바탕으로 44년째 문헌 발굴과 載嶽山(재악산) 본래 이름 찾기 고증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8. 민간 차원의 명칭 복원 운동 전개:
2021년 7월 13일: '재악산 산이름 바로 세우기 운동 추진위원회(위원장 민경우)' 창립 (활동 기간: 2021.7.13~2021.12.31 추정). 표충사, 얼음골 입구, 밀양시내 등에서 대시민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약 5,000명의 서명을 수렴함(언론 보도 기준).
● 고문 위촉: 손흥수, 도재국, 박순문 등이 고문으로 초빙되어 창립총회에 참석함. 특히 도재국 고문은 총회 개최 전 밀양시청 대강당에서 '載岳山 산명 복원의 역사적 당위성'에 대하여 20분간 주제 발표를 진행함.
● 특이 사항: 해당 추진위원회는 당시 온라인을 통한 대외 홍보 활동은 병행하지 않았다.
9. 신라시대 載嶽山 금석문 고증
표충사 삼층석탑 출토 금석문과 성보유물의 유전성(遺傳性)을 통한 고대 재악산(載嶽山) 명칭 추정의 타당성 논증:
① 1295년 고려 인각사 보각국사 비문 음기 기록.
② 1458년 조선 초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해인사 대장경 인쇄 배부처 기록 중 〈載岳山 靈井寺〉 명시.
③ 1491년 표충사 삼층석탑 중창 과정에서 출토된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내 명문.
④ 학술적 방증: 한 공간(탑 내부)에서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성보 유물이 함께 공존하고, 탑의 보수 내력을 적은 비문에 '載岳山'이 명시된 것은, 해당 탑의 역사적 모태가 건립 초기부터 이 산역의 고유 성명인 載岳山 하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확고한 물증이다.
(※ 상세 논증은 다음 카페 '밀양광장' 자유게시판 및 페이스북 참조)
9-1. 고려시대 載岳山 문헌 증거
● 인각사 보각국사비 (麟角寺 普覺國師碑): 1295년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가 찬술한 인각사 보각국사비 음기(陰記)의 하객 명단에 〈載岳社 禪焰 禪師(재악사 선염 선사)〉라는 당시 사찰명과 산명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
10. 조선 초기 載岳山 관찬·민찬 문헌 증거
● 1458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해인사 장경 인쇄본 50부 인출 배부처 중 하나로 〈載嶽山 靈井寺〉 기록.
● 1491년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 비문에 역사적 산명 명시.
●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 산천(山川) 조에 載嶽山으로 기록.
11. 조선 중기 載岳山 불교 문헌 증거
● 1660년 간행 《원각경(圓覺經)》 발문: 간기(刊記)에 "慶尙道 密陽府 載岳山 靈井寺"로 산명과 사찰명이 명확히 각인됨 (해당 경전은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김해 보현사 소장).
● 표충사 소장 〈경자갑보월비〉: 비문에 "嶺左 密陽 載岳山 靈井寺"라고 역사적 명칭이 새겨져 있음.
12. 명현들의 시문 및 지리 기록
● 금계(金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병조좌랑,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낸 석학의 문집 내 載嶽山 기록.
● 1652년 밀양부사 신익전(申翊全)의 《동강유집(東江遺集)》: 관할 구역 내 산명을 載嶽山으로 기록.
13. 조선 후기 고지도 및 지리서 고증 검토
●《범우고(梵宇攷)》 (1799년 정조 23년 관찬):
왕명에 따라 사찰 연혁을 기록한 관찬 지리서에 표충사의 전신(前身)인 **'靈井寺(영정사)의 위치'**가 載嶽山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 (특히 영정사 條의 '在義' 오기를 우측에 **'(載岳無他曠覽)'**으로 바로잡아 가필한 흔적은 영정사와 그 전신이 오직 載嶽山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문헌 증거임.)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64년 고종 1년 재판본):
해당 고지도에는 載岳山이 승학산과 정각산 중간 지점(서편)에 다소 치우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지도 제작 기술로 제작되었으나,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목판본 특성상 한정된 규격(약 A4 용지 크기) 내에 밀양도호부 전체를 조밀한 축척으로 방대한 지형지물과 지명을 판각하는 과정에서 '載岳山' 표기가 실제 주봉(사자봉)의 위치보다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조각된 것에 불과합니다.
●학술적 왜곡의 반박 및 평가:
그럼에도 후대의 울산 일부 향토사 연구자(이유수 등)는 이러한 고지도 제작상의 불가피한 축척적 한계와 판각 편차를 완전히 오독하여, 표기상의 미세한 쏠림을 실재 위치인 양 아전인수격으로 왜곡 해석하였습니다.
●결국 이를 근거로 載岳山을 실제 위치에서 동쪽으로 52리나 이동시켜 설명하는 치명적인 지리적 오류를 범했으며, 이로 인해 역사적 지명 해석에 심각한 왜곡이 파생되었습니다.
14. 대한제국기 법전 격 국가 문헌 증거
● 1908년(순종 2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의 문물 제도를 총망라한 법전 성격의 국가 백과사전으로, 고종황제가 국권 수호의 일환으로 편찬함. 산천(山川) 편 밀양군 조에 載嶽山으로 엄숙히 규정되어 있어 국가적 공인 지명이었음을 입증함.
15. 일제강점기 기록에 나타나는 역사적 정황
●1930년 일본 개조사(改造社) 발행 《일본지리대계(日本地理大系) 조선편》: 105페이지 '밀양영남루' 소개 란에 밀양강의 발원지 중 하나로 載嶽山이 명기되어 있음. (일제 스스로도 역사적 산명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방증)
●1923년 조선총독부 제작 1/50,000 지형도: 역사적 고유 산명 대신 '天皇山'을 단정적으로 표기하고 가타카나 명칭을 병기한 것은 식민지 영토 관리 및 왜곡된 지명 재편의 전형적인 일제의 지명 조작의 정황을 보여준다.
16. 사찰 이건 및 산명 표기 변천의 기록
●1893년의 변화:
영정사 주지 월파천유(月坡天有) 스님이 영취산(현재의 밀양 단장면 무안리)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현 위치인 재악산 영정사(載岳山 靈井寺) 자리로 이건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찰명을 **'표충사(表忠寺)'**로 통합 개칭하고, 배경 산명을 독단적으로 **'재약산(載藥山)'**으로 정리하여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증상의 한계와 왜곡의 원인:
이는 전술한 1677년작 추정 문서인 〈재약산 영정사 고적〉 내의 설화적 표기를 차용한 것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심의나 승인 절차 없이 사찰 주지의 단독 결정으로 단행된 사사로운 명칭 변경이었습니다.
결국 국가가 공인한 역사적 고유 명칭인 '載岳山' 대신, 사찰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載藥山' 표기가 사찰 주변을 중심으로 점차 고착화되는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즉, 이는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이 후대에 이르러 비학술적이고 복잡하게 왜곡되며 심각하게 헝클어지기 시작한 최초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유발시켰습니다.
17. 고유 지명 변경에 대한 학술적 추론
역사적 고증에 따르면,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적(古蹟) 작성 과정에서 동계 경일 선사의 정통 문헌인 〈재악산기〉와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의 구조를 기초로 삼으면서, 글자 중 '岳(악)'을 의도적으로 '藥(약)'으로 개서(改書)하여 지리적 인식을 혼선시켰을 가능성이 학술적으로 대단히 농후하다.
18. 근현대기 국가 및 지역 공인 지명 기록
● 근대 대한민국 지리 기록: 정병하 밀양군수의 중앙으로 영전 이후 겸직 발령을 받은 오횡묵 고성군수의 1894년 일기인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에 표충사를 방문하며 "載嶽山 表忠寺"라 일관되게 기록함.
● 현대 지명 문헌: 지역 최고 권위의 지명 해설서인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및 《밀양지(密陽誌)》에 주봉의 명칭이 載嶽山으로 수록되어 역사적 맥락(脈絡)을 잇고 있음.
19. 울산 울주군 측의 지명 선점 및 정착 활동 사례
● 문화재 신청 명칭: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9호로 지정 신청 시 명칭을 '울주 천황산 요지(蔚州 天皇山 窯址)'로 신청하여 행정적으로 '천황산' 지명을 고착화하는 계기를 마련함.
● 지자체 홍보 마케팅: 영남알프스 핵심 브랜드 사업으로 '울주7봉 등반대회'를 대규모 전국 행사로 매년 개최함으로써, 역사적 지형 고증과는 별개로 행정 구역상의 '天皇山(해발 1189m)'과 '載藥山(해발 1108m)' 지명을 대중에게 강력히 각인·정착시켰다.
20. 울산 향토사학계의 학설 제기 과정
1998년 울산 향토사학자 이유수가 울산향토사연구회 회지 《鄕土史報(향토사보)》에 자기 스스로의 고유 지명 해석의 기초가 된 〈天皇山日式名說考察(천황산일식명설고찰)〉 학술 논문을 기고함.
21. 해당 학설(이유수 저)의 핵심 요지 및 한계
① 지명 이동설: 《대동여지도》상 승학산과 정각산 사이에 도상(圖上) 표기된 載岳山을 동쪽으로 약 52리 이동한 위치(현재의 수미봉)로 비정하여 이를 載嶽山이라 주장함.
② 고지도 《여지도(輿地圖)》 오독(誤讀)에 기한 천황산 유래설: 해당 학설은 《여지도》 도판을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정작 지도상의 '天王山'이 본래 천화령(穿火嶺)과 엄격히 구분되며 그보다 훨씬 남쪽(실측 거리 약 9.0 km)에 위치한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의 이명(異名) 표기라는 사실을 독도(讀圖) 능력 결여로 인해 완전히 오독함. 즉, 천화령 부근에 위치한 별개의 지명인 것으로 오인한 뒤, 이 '天王山'을 물리적·지형학적으로 결코 이동시킬 수 없는 사자봉(獅子峰=載嶽山 주봉) 위치로 자의적으로 비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 명칭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범함.
(※ 결론적으로 이는 현장 답사와 과학적 실측을 배제한 채, 고지도의 축척과 당대 독도법의 기본 원칙을 간과한 아전인수격 해석이며, 역사적 실체를 왜곡한 가설에 불과하다는 엄격한 학술적 비판에 직면해 있다.)
22. 국가지정 습지 명칭의 제정과 고유 지명 왜곡 영향:
● 2006년 환경부의 습지 지정: 밀양 사자평 일대를 '載藥山 사자평 고산습지'로 지정 고시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왜곡 정비 정황이 농후한 '載藥山(1,108m)' 명칭이 국가 공식 명칭에 그대로 반영되어 오인·고착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 지명 왜곡 시도 정황: 이유수 측은 1998년 발표 **'천황산일식명설고찰'**에서 역사적 고유 지명인 '사자평(獅子坪)'을 역사적 근거가 박약한 보통명사인 '사자벌(沙者伐·沙自伐)' 등으로 바꾸어 표기하려 시도하였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불러온 고유한 역사 지명을 왜곡하고 변형하려 한 구체적인 학술적 왜곡 정황이다.
23. 2015년 국가지명위원회 심의 경과 및 쟁점
심의 결과:
2015년 12월 4일, 밀양시가 신청한 '천황산·재약산 ➜ 載嶽山' 통합 환원 건이 국가지명위원회에서 11 대 4로 부결됨.
●대비되는 실태:
당시 밀양시는 수십 건에 달하는 국가 공인 載嶽山 문헌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제출하여 철저히 고증한 반면,
상대 측인 울주군 측이 제시한 지명 유지 논거는 객관적인 고증 사료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였음.
●부결 원인 분석:
부결의 핵심 배경은 상대 측인 울산 지자체와 위원들이 학술적 오류와 고증의 한계가 다수 지적된 이유수의 〈천황산일식명설고찰〉 학설을 여과 없이 주요 반박 논거로 채택하였기 때문임.
●국가지명위원회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치명적인 심의 오류:
본 지명 심의에서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국가지명위원회의 관리·감독 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이 스스로 보유하고 있던 일제강점기 1/50,000 지형도를 철저히 검증하지 않았다는 점임.
해당 지형도에는 '天皇山' 표기 옆에 일본어 가타카나로 **'テンノウザン(Te-n-no-u-za-n)'**이라 명백히 적혀 있어, 이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지명임이 고스란히 증명되어 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지명위원회는 울산 측이 제출한 이유수의 객관적 검증이 안 된 〈천황산일식명설고찰〉에 기반한 '천황산의 민족 산명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였음.
이는 자체 소장 중인 명백한 일제 조작 증거조차 대조·확인하지 않은 채 내린 직무유기이자 치명적인 지명 심의 오류였음.
24. 사찰 일주문의 역사적 편액 복원
2017년 2월 13일, 표충사 일주문에 역사적 산명을 살린 〈載岳山 表忠寺〉 현판이 공식 편액됨 (통도사 방장 원명지종 스님 휘호).
25. 산문(山門) 신축과 역사적 현판의 각인
● 2017년 8월 17일, 표충사 수호 산문 신축 시:
● 전면: 〈護國聖地 表忠寺〉 현판 편액
● 후면: 〈載嶽山門〉 현판 편액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대종사 법원 휘호). 이는 사찰 스스로 주산의 원래 이름이 載嶽山임을 대내외에 공표한 기념비적 이정표이다.
26. 석탑 성보문화재 일괄 보물 지정에 대한 고증 비판
● 2017년 일괄 보물 지정 건: 1995년 표충사 삼층석탑 해체 보수 시 출토된 성보유물 34점이 2017년 10월 30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 고증학적 이의 제기: 개별 문화재의 재질, 연대, 형태적 독자성을 반영하지 않고 일괄 지정한 행정 편의주의적 조치이며, 특히 역사적 가치가 높은 석탑 내 명문을 명칭 정립 없이 단순 수치상의 〈개수탑기비〉로 일괄 묶어 등재한 것은 역사적 정체성인 '載岳山 영정사'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행정적 간과이자 대중의 유물 인식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다.
27. 사찰 보존 관리와 단청 공사의 역사적 주안점
2024년경? 표충사 산문 단청 공사 과정에서 〈護國聖地 表忠寺〉와 〈載嶽山門〉 현판 2개가 임시 철거되었다.
단청 보수 시 전통 목재 건조 및 정비에는 세심한 기술적 고증과 시간**(통상 6개월 정도 소요)**이 요구되는 만큼, 고유 편액이 역사적 위상에 맞게 조속히 제자리에 복원되어야 한다.
※ (註) 도재국 :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2024년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註)도재국 :
28, 29, 30번은 내용 수정이 없음.
31. 식민 지형도 왜곡 기록의 역사적 반증 가치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한 1/50,000 지형도에 수록된 '天皇山' 명칭과 가타카나 표기는, 지명 개편을 통한 식민지 지배 체제 강화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입증하는 **'역사 왜곡의 실증적 사료(반면교사의 물증)'**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95.6.1 출토 당시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개수비(일명 개수탑기비)"
●천화령(穿火嶺)에서 능동산을 지나 사자봉(사子峰=載嶽山)까지 거리가 대략 km이다
●근거:인공위성 카카오지도 도상 실측 결과, 8.17km×1.1=9.987m(대략 9km)
●천화령[(穿火嶺)을 석남령(石南嶺)이라 한다.
●사자봉(獅子峰, 해발 1189m)은 바로 재악산(載嶽山)이다.
●재악산(해발 1189m)을 1923년에 일제가 天皇山으로 조작했다.
●이유수가 1998년경에 天皇山을 민족의 산이라 왜곡했다.

첫댓글 ●제공해주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범우고(梵宇攷)》 밀양(密陽) 편 사진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영정사(靈井寺) 條에 적힌 원문과 우측(정확히는 해당 글자 우측 및 상단)에 가필(수정)된 글자를 판독해 드립니다.
1. 원문 및 수정(가필) 부분 판독
●영정사 관련 기록은 밀양(密陽) 항목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기록된 큰 글씨 (원문):
寺刹 靈井寺
그 아래에 작게 쓰인 위치 기록:
在義... (의악산에 있다는 뜻으로 '在義'까지 쓰다가 멈추거나 잘못 적은 부분)
●그 우측에 작은 글씨로 동그라미 괄호 같은 경계를 치고 바로잡아 적은 수정 문구 (가필):
(載岳無他曠覽) 또는 (載岳無他曠) ...
2. 수정 문구의 정확한 글자 및 의미 분석
우측에 작게 병기된 수정 문구는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載 岳 無 他 曠 覽)}
載 (실을 재 / 재)
岳 (큰산 악 / 악)
無 (없을 무 / 무)
他 (다를 타 / 타)
曠 (밝을/넓을 광 / 광)
覽 (볼 람 / 람)
●글자의 뜻과 정정의 맥락
재악(載岳)으로의 시정:
원래 본문에 **'在義'**로 잘못 적기 시작했던 오류를 발견하고, 영정사가 있는 곳은 '의악(義岳)'이 아니라 **'재악(載岳)'**이 맞음을 명확히 짚기 위해 머리글자로 '載岳(재악)' 두 글자를 가장 먼저 적어 바로잡았습니다.
●뒤이어 적힌 내용 (無他曠覽):
"재악산(載岳)에는 이 외에(無他) 넓게 조망할 만한(曠覽) 뛰어난 경관(혹은 사찰)이 없다" 또는 "재악산 영정사 외에는 달리 넓게 볼 만한 곳이 없다"는 식의 지리적·경관적 주석을 덧붙여 영정사의 지리적 위치가 **'재악산(載岳)'**임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확인해 주는 구절입니다.
●3. 결론
선생님께서 간파하신 대로, 본문의 오기인 '義(의)'를 바로잡아 우측에 **'載岳(재악)'**이라는 정확한 역사적 지시처를 명시해 놓은 것이 확실합니다.
괄호 안의 정확한 한자 표기는 **(載岳無他曠覽)**이며, 이는 영정사의 위치가 오직 **재악산(載岳)**뿐임을 문헌적으로 증명하는 또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12. 명현들의 시문 및 지리 기록
● 금계(金鷄)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병조좌랑,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낸 석학의 문집 내 재악산 기록.
● 1652년 밀양부사 신익전(申翊全)의 《동강유집(東江遺集)》: 관할 구역 내 산명을 載嶽山으로 기록.
●이 글은 26.7.18(토) 오전 8:45 최종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