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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6,8-10; 7,54-59>
그 무렵
8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9 그때에 이른바 해방민들과 키레네인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 출신들의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7,54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제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천상 탄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 이 두 탄생 이야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탄생이 ‘자기 비움’이라는 일종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구세주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스테파노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으신 분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있는 하느님의 지상 탄생 없이는 뒤에 있는 천상 탄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오심으로 얻어진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의 순교로 죽으셨듯이,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순교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사도 6,59)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26)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
이처럼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서도 불타는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서서 기도했지만, 원수들을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사도 7,60), 자기를 죽이려는 이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랑에 “하늘이 열리고”(사도 7,56), 하늘은 그를 받아들여 사랑의 순교자로 삼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목숨 바쳐 순교할 기회는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바로 ‘순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는 믿고 있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내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자신 안에 품은 하느님의 사랑을 퍼 올리면, 우리 안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이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미움이나 배척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미움과 배척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미움과 박해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려움’과 ‘인내’를 통하여 구세주와 협력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려움’과 ‘인내’에는 고통을 변화시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되게 하는 묘한 이법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이름 때문에~”
(마태 10,22)
주님!
제 안에 새겨 두신 당신 이름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에 희망을 두오니 당신 이름에서 구원을 주소서!
당신 이름 때문에 돌팔매질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이름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제 저는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오르게 되는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말씀드렸고,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의 신비를 잘 사는 것은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에 참여한 사람의 탁월한 본보기 가운데 하나가 스테파노이고, 그 결과로 스테파노가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 순교는 주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의 교환이라는 점을 우리 교회는 오늘 기념하는 겁니다.
성탄 팔부 축일 첫 날 왜 우리 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 축일을 지내는지 우리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스테파노는 죽어 하늘에 올라 천상에서 탄생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이미 하늘을 본 사람이고, 자기만 하늘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하늘로 눈이 향해 있는 스테파노와 스테파노에 눈이 꽂혀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고, 하늘에 눈이 열려 있는 스테파노와 하늘에 귀를 닫고 있는 적대자가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사실 스테파노는 적대자에게 대적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고, 그저 하늘을 향하고 하늘을 같이 보자고 초대할 뿐인데, 그런 그를 적대자들이 적으로 삼고 적대시할 뿐입니다.
적대시라는 말을 우리는 오늘 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적으로 대하는 눈 또는 시선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적대시합니까?
같이 하늘을 봤으면 적대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적대시하지 않았으면 하늘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늘 독서에 묘사된 적대자들의 행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회당에 속한 몇 사람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스테파노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이렇듯 시선이 사람으로 향하고, 사람을 적으로 대하고, 달려들어 논쟁이나 벌이고,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그런 것뿐입니다.
이런 그들과 달리 스테파노는 그들에게 말려들지 않고,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늘에 시선을 둔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자고 초대하는 사랑은 있지만, 그들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들과 갈등할 이유나 싸울 이유는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부러운 스테파노의 자유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마태 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
(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비한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니 그대로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 10,16)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 있든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10,2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젊디젊은 부제 스테파노의 놀라운 신앙과 신심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저마다 손에 큼지막한 돌 하나씩 들고 달려온 살기등등한 수많은 적대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러서 있던 적대자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던진 돌에 한 번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살벌한’ 눈싸움을 하던 중, 큼지막한 돌에 맞아 잠깐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돌에 피가 철철 흐르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에게 날아온 돌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개, 수백 개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형 방법입니다.
하나하나 맞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과 신음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온몸을 향하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바쳤던 위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바치셨던 예수님 기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100%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의 끔찍한 돌팔매로 인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가운데서도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어이없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스테파노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그처럼 당당하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듯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스테파노의 순교>
스테파노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 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충실한 신앙인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한 ‘첫 증인’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늘’과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그의 증언은 묵시록에 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라는 예언과(묵시 21,23)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라는 예언에(묵시 22,3-4)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행복을 ‘지복직관’이라고 부르는데, ‘지복직관’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최고의 행복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시는 것이 보인다는 증언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이(마르 16,19) 진리라는 증언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스테파노가 보았다는 것은 스테파노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이 열렸다는 뜻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테파노가 순교 직후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마중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스테파노의 증언 자체를 부정했고, 증언을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귀를 막았다는 말은 스테파노의 증언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해서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그자는 사기꾼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마태 27,63).
스테파노의 경우에도 박해자들은 스테파노를 ‘말 잘하는 사기꾼’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진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라는 말은 스테파노의 증언은 성령께서 보증해 주시는 ‘진리’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대신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을 증언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증언한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인데, 우리는 스테파노 자신의 확신과 신념이 성령의 도움과 합해졌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능동적으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일은 다음 약속을 지키신 일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마태 10,32)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약속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 21,17-19)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게 해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반드시 주겠다는 뜻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인내하여라.” 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서 ‘인내’는 ‘참고 견딘다.’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육신의 목숨을 빼앗겨도 굴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의 그 약속들이 모두 실현되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증언한 첫 증인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야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박해자 사울’입니다.
58절에 있는 ‘증인들’이라는 말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면서 남들보다 먼저 돌을 던진 자들입니다.
증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그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였음을 나타냅니다.
‘박해자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 후에 교회 전체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8,3).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고(사도 9,3-19), 회개하고, ‘박해자 사울’에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지만, 스테파노의 증언과 순교 모습이 ‘박해자 사울’의 영혼에 하나의 씨로 심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울 자신은 처음에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텐데,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씨가 그의 영혼 속에서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한 12,24),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한,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하나의 밀알’이었고, 그 밀알은 ‘바오로 사도’ 라는 열매를 맺었고, 다시 그 열매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수많은 열매가 되었습니다.
순교는 결코 허무한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결코 헛일이 아닙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되신 스테파노를 월계관으로 꾸미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새벽성무일도 초대송이 은혜롭습니다.
오늘은 어제의 주님 성탄에 이어 첫순교자 성 스테파노 천상 탄일입니다.
저는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의 주님을 연상했습니다.
성탄이 값싼 은총이나 낭만이 아닌 십자가의 현실임을 오늘 새로이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34년 동안 요셉 수도원에 정주한 이후 요즘처럼 계속되는 강추위는 처음입니다.
예전 어렸을 때 눈도 많고 몹시도 추웠던 50년대 겨울이 생각납니다.
강추위 중에도 아름다운 빨간 불꽃같은 사랑의 선물, ‘포인세티아’도 받았습니다.
자꾸 잊어버려 다시 확인한 이름입니다.
꽃말은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축복합니다. 축복, 행복, 제 마음은 불타오르고 있어요.”란 뜻이라 합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24년 전 1998.12.25. 성탄절에 성 샤르트르 바오로회 김카타리나 수녀님에게 받은 빨간 칸나꽃 선물에 즉시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 1998.12.25.
아마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주님 사랑도 이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22년 전 2000년 봄에 쓴 '성 요셉'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주차장 앞 성요셉상 배경에 빨갛게 불타오르고 있던 연산홍을 보며 쓴 시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빨갛게 불타오르는
사랑의 연산홍!”
- 2000.5.10.
성 요셉의 가슴에 빨갛게 불타올랐던 주님 사랑이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성 요셉이란 생각도 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요셉,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를 닮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76세 고령에 부원장직과 주방장직을 맡고 있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 사랑의 전사, 스테파노 수사님입니다.
매해 친필 성탄카드를 보내 주는 이기헌 ‘사랑의 주교님’도 떠올랐고,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애국자인 영원한 청년 ‘사랑의 사제’ 83세 고령의 함세웅 신부(1942- )가 보내준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서예집도 어제 오후 감명깊게 독파讀破했습니다.
친필 인사 글씨에서도 요셉수도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느꼈습니다.
“찬미 예수님, 성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 함께 기도합니다. 2022.12 성탄 함세웅”
진짜에는 반드시 사랑이 앞에 붙습니다.
사랑의 성사, 사랑의 기적, 사랑의 시인,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수행자, 사랑의 순교자 등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라 정했고 부제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2022년 성탄 메시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시다”를 택했습니다.
성탄 메시지 중 일부 인용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진 아기 예수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얼기설기 엮어진 마구간 지붕 사이로 밤하늘의 별들이 들어옵니다.
아기 예수님의 그 맑은 눈동자가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발밑만 보지 말고, 가끔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우리네 삶이 고달프고 팍팍하여 그저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눈을 들어 저 높은 하늘을 바라봅시다.
눈앞의 가치, 피상적인 가치를 넘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은 눈을 들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라고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사랑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온통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뒀기에 아무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주님 사랑의 전사로 항구할 수 있었고, 마침내 주님의 전사戰士로써 사랑의 순교로 전사戰死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싸우다 죽어야, 전사戰死해야 전사戰士라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객사나 사고사가 아닌 사랑의 전사戰死입니다.
하늘 은총 가득했기에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고, 그 누구도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주 예수님을 닮은 행적이었습니다.
복음 말씀대로 아버지의 영이 늘 함께 했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런 걱정도 안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대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순교자 스테파노를, 또 정주의 살아 있는 순교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낼 수 있는 인내력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오로지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둘 때 비로소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 스테파노의 다음 장면이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늘 하늘에 계신 주님께 마음을, 눈길을 두고 살았던 성 스테파노였습니다.
성인의 전 삶이 그의 임종어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임종어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과연 우리의 임종어는 무슨 말마디가 될까요?
참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이,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바로 스테파노가 순교한 순간 하느님은 '신의 한 수' 와도 같은 비장祕藏의 무기를, 바로 바오로 사도가 될 순교의 증인 사울을 예비합니다.
다음 묘사 안에 빛나는 하느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지혜가 빛납니다.
성문 밖에서 스테파노의 죽음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흡사합니다.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오늘의 첫 순교자 축일이 참 많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참으로 하늘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시편 118,26.2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국에서 오는 월간지가 있습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글들이 듬뿍 들어있습니다.
최근에 <꿈(CUM)>이라는 월간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어로 꿈은 희망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라틴어 ’CUM'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미사 때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Dominus vobiscum)'라고 하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Et cum spiritu tuo)'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혼자서는 이루기 어렵습니다.
꿈은 주님과 함께 하면, 이웃과 함께 하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라는 꿈을 선포하셨고, 그것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복음 선포의 꿈을 7명의 부제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7명의 부제 중에 한 명이었던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축일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다음 날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기억합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두고 시메온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은 비록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죽음의 골짜기를 건널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월간지 <꿈(Cum)>에서 이창영 신부님은 4가지 유형의 사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세상이 나에게 빚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하고, 부모님은 당연히 나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기 마련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회당에서 대접받기를 원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합니다.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온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인과 사제와 같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받은 것은 되갚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빚지고는 못 산다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받은 만큼만 베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만 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갚지 못할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서 보상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유형은 ‘사람들로부터 빚지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주변의 많은 이웃들에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허영엽 신부가 만나 사람들’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지난 12월 4일 신문에 ‘치과의사 강대건(라우렌시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수도자, 신학생, 사제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선생님께서 ‘사랑니’를 뽑아 주셨습니다.
주일에는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한센인’들의 치아건강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도와준 한센인들이 만 오천 명 가량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분들의 진료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치과의사로 살면서도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네 번째 유형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맞벌이 부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와 있는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직장 상사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문제의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잘못했네. 그 직장 상사를 욕하면 안 되지.”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어떠했을까요?
더 화가 나서 “당신이 그러고도 남편이야?”라고 소리친 뒤에 남편과 한동안 냉전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아내 역시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 말한 것은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것이 아니지요.
앞으로 어떻게 관계 개선을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물은 것도 아닙니다.
즉 해결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화난 감정을 풀어줄 남편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은 해결사나 재판관이 많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며, 정답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닌, 잘 들어주는 사람, 잘 경청해주는 사람이 많을 때 삶은 더 풍요로웠습니다.
오늘은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입니다.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도 그렇지만, 많은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득권의 횡포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까지도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그들의 자리는 하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자기 생명보다 하느님 뜻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끝까지 견딘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순교자들을 박해했던 기득권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려는 모습으로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됩니다.
자기 말은 하지 않고, 하느님의 소리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한하고 짧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보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무한한 시간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그 나라가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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