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모(洪敬謨)-월야억아(月夜憶兒)(달밤에 아이를 그리워하며)(먼저 떠난 아이를 그리워하며)
月華如汝面(월화여여면) 밝은 달은 너희 얼굴과 같아
夜夜上東園(야야상동원) 밤마다 동쪽 정원에 떠오르누나
萬事皆成恨(만사개성한) 지난 일들 다 한스럽기만 하여
九天欲訴寃(구천욕소원) 저 하늘에 원통함 하소연하고프네
新添枕邊淚(신첨침변루) 머리맡에 눈물은 새로 더해만 가고
時接夢中魂(시접몽중혼) 꿈속에 떠도는 넋 마주하곤 한다
猶有殘花馥(유유잔화복) 지고 남은 꽃의 향기 아직도 남아
凄然入酒罇(처연입주준) 서글프게 술병으로 들어오는구나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관암전서冠巖全書)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변구일님은 “1800년 늦봄에 마마가 돌았다. 첫째 아이 경증(慶曾)과 셋째 아이 복증(福曾)이가 앓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는 6살, 셋째는 돌을 조금 앞 둔 때였다. 우이동(牛耳洞) 선영에 둘 다 장사지냈다. 깊은 산 속 덩굴로 뒤덮인 곳에 아이들을 두고 오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픔에 짓눌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정원 동편으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노라니 아이들 얼굴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살갑게 얘기하며 함께 놀아주지 못한 것만 같아 아픔이 사무칠 뿐이다. 부친을 2살에 여의고 형제도 없는 내게서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아이들마저 빼앗아 간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눈물로 얼룩진 베개에 새 눈물을 다시 적시며 지새우는 밤들, 흐느끼다 지쳐 설핏 잠이 들면 꿈속에 나타나는 아이들, 깨어나면 술을 마시며 잔인한 현실을 잊으려는데, 저물어 가는 봄날 지고 남은 꽃의 향기가 술병 속으로 퍼져 오면서 슬픔을 더한다.
지난해 오늘 밤 너희 형제가 난간에 기대어 등불을 바라보며 이곳저곳 가리키면서 웃던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데, 올해 오늘 밤에는 다시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너희를 그리워하고 너희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잠긴 나는 시를 통해 그 슬픔을 풀어보고 싶었다만 차마 붓을 들지 못하였다. 힘겹게 붓을 들어 써 내려 가려니 울음이 먼저 쏟아지고, 울려니 목이 먼저 메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구나. 오늘 이 밤이 되자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배나 더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애통함을 자아내는구나.
홍경모가 지은 ‘곡아哭兒’편이다. 이밖에 ‘죽은 아이의 생일에 쓴 제문祭亡兒生朝文’에서도 아이를 잊지 못해 애통해하는 그의 마음을 잘 볼 수 있다.
너와 동갑인 아이를 보면 생각하고 너와 놀던 아이를 보면 생각한다. 붓과 먹을 보면서도 생각하고 진기한 물건,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서도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생각하고, 비가 와도 생각하고 바람이 불어도 생각하고, 달빛 아래 생각하고 꽃들 아래 생각한다.……만약 내가 생각을 할 수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내가 생각이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생각을 어느 때인들 그칠 수 있겠느냐?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내일은 없다. 어제, 지난달, 지난해, 그때만이 있을 뿐이다. 아이의 얼굴, 몸짓, 웃음을 떠올리고 되새기면서 더 잘해주지 못한 데 대한 슬픔과 회한만이 잔해처럼 가슴에 남는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너무 눈물을 흘린 나머지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지워지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는다. 그래서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홍경모[洪敬謨, 1774~1851, 자는 경수(敬修), 호는 관암(冠巖) · 운석일민(耘石逸民), 본관은 풍산(豊山)]-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홍중성(洪重聲), 조부는 대제학 등을 역임한 홍양호(洪良浩), 부친은 홍낙원(洪樂源)이다.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이존원(李存遠)의 딸이다. 부친 홍낙원이 24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조부 홍양호에게 양육되었다. 조부는 시문에 뛰어난 문사이면서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 · 금석문학자 · 수장가였다. 조부로부터 가학을 직접 전수받았고, 조부의 영향을 받아 예술적 취향이 강했다. 홍양호 역시 손자의 예술적 취향을 분발시키기 위해 <필진도>와 <난정서>를 날마다 익히게 하였으며, 10여 세에 이르러서는 「필원진결(筆苑眞訣)」을 친히 써 주어 서학(書學)의 원류를 깨닫게 하였다. 1830년과 1834년 두 차례의 연행에서 기윤의 손자 기수유(紀樹)를 비롯하여 진연은(陳延恩) · 진근광(陳瑾光) · 탁병렴(卓秉恬), 그리고 『고려금석록(高麗金石錄)』을 펴낸 섭지선(葉志詵) 등 중국의 인사들과 친교를 맺었다. 귀국 후에도 그들과 서신을 왕래하고 서적과 예술품을 교환하였다. 1831년에는 사신 편으로 기수유에게 <당왕발구영연(唐王勃句楹聯)>을 써서 보내고 진연은에게는 <이계선생영첩비판인본(耳溪先生楹帖碑版印本)>과 자신의 글씨를 함께 보냈으며, 1834년에는 섭지선에게 <남탑유문청공영첩(藍榻劉文淸公楹帖)> 1연을 주기도 하였다. 이들 중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예에 대한 중국 서가 비평가들의 주요 저술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금석학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서예 비평에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국내 비평가 및 예술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하였는데, 당시 최고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로 이름난 김정희(金正喜)를 비롯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였던 신위(申緯) 등과의 친교가 알려져 있다. 특히 김정희와는 금석문 탑본을 교환하는 등의 교유가 있었다. 서예에 대한 식견이 높았고 비평에도 탁월하였다. 집안의 수장품을 중심으로 이를 집성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먼저 홍이상 · 정명공주 · 홍만희 등 선조의 필첩과 홍양호가 홍경모를 위해 써 준 「필원진결」 등을 모아 『선세수묵(先世水墨)』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러 법첩의 판본 계통에 대한 고증, 오탈자의 정정, 제가의 품평 비교 등 상당히 체계적인 방법으로 집안에 소장된 예술품을 정리하여 해당 예술품의 가치나 성과 등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부의 수장품을 중심으로 『역대법첩』과 『동국묵적』을 엮었다. 직접 쓴 「역대법첩인(歷代法帖引)」에 따르면 집안에 소장된 20개의 금석첩을 묶어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을 잇고 싶다고 하였으며, 「동국묵적인(東國墨蹟引)」에서는 작품 하나하나에 제후(題後)를 달아 그 내용과 유래를 자세히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대동장고(大東掌攷)』, 『동사판의(東史辨疑)』 등의 역사서를 쓴 역사학자로도 유명하다. 이들 역사서에서 홍경모는 우리의 고대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문집으로는 『운석외사(耘石外史)』 전 · 후 · 속 3편과 『관암유사(冠巖遊史)』등이 있으며, 저술물로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대동장고(大東掌攷)』,『기사지(耆社志)』 등이 있다.
*訴寃(소원) : 지난날, 백성(百姓)이 원통(寃痛)한 일을 관아(官衙)에 하소연하던 일
*殘花(잔화) : 떨어지고 남은 꽃. 시들어 가는 꽃.
*馥(복) : 향기 복, 화살 꽂히는 소리 벽, 1.(향기 복), 2.향기(香氣), 3.향기롭다
*罇(준) : 술두루미 준, 1.술두루미(술을 담는 두루미), 2.술 단지(목이 짧고 배가 부른 작은 항아리), 3. 술잔(-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