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서해랑 길의 변산 마실길,
서해랑 길 중 내소사에서 격포로 가는 길은 영광 백수 해안도로 못지 않게 아름다운 길이다. 줄포만 건너 소요산과 선운산을 바라보며 더 멀리 칠산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길을 걷다가 보면 운호리의 왕포리에 이르는데, 변산반도를 휘감아 도는 길이 변산 마실길이다.
지금은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진 변산마실 길을 만들게 된 것은 2009년 전라북도 행정부지사로 근무하고 있던 이경옥씨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에 콩나물국을 먹으며 전라북도에 <지리산 둘레 길>이나 <제주 올레길>과 같은 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산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이나 바닷가 길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변산이 떠올랐다. 그래서 전라북도청 공무원들과 외변산을 걸어보니 잘 조성된 옛길이 있었고, 그 길을 우리 땅 걷기 도반 200명, 전라북도의 방송국과 함께 개통식을 개최했다. 그리고 이름을 지었는데, <변산 마실길>이라고 지었다.
마실은 '나라 안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마을'의 방언으로 ’마을에 나간다‘는 뜻이 '마실 나가다'이다. 옛날 할머니가 이웃집에 놀러가거나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가거나 일이 있어 집밖을 잠시 나갈 때 '마실 나갔다 온다' 하고 나가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실은 마음과 육신이 한가할 때 나가는 것이다.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인 것이다. ” 라는 옛글이 있는데, 그런 한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걸으면 좋을 길이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휘감아 도는 변산 마실길은 그렇게 아침에 콩나물국밥을 먹으면서 만들어졌다.
다시 길을 나서서 그 지형에 말과 같다는 마동을 지나면 국립변산자연휴양림에 이른다.
국립 변산 자연 휴양림은 국립 자연 휴양림 중 산림과 해양의 특색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최초의 해안 생태형 휴양림인데, 변산은 어떤 연유를 가진 산인가?
1988년 6월 11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은 바깥에다가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으로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Km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 변산이라고 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 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이 섰다던 안 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의상봉(508m), 주류산성(331m), 남옥녀봉(432.7m), 옥락봉, 세봉, 관음봉(424m), 신선대(486m), 망포대(492m), 쌍성봉(459m) 등의 산들이 안변산을 에워싸고 그 안의 백천냇물이 해창에서 황해로 흘러든다.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쌓인 변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변산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구렁이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웠다. 곧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봉래구곡, 직소폭포, 선제폭포 같은 빼어난 절경이 있는 산 변산은 산이 깊고 울창하여 예로부터 약초나 버섯을 재배하거나 벌도 많이 쳤다. 특히 안 변산의 훤칠하게 자란 소나무는 곧고 단단해서 고려 때부터 궁궐을 지을 재목과 목선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이규보는 “변산은 나라 재목의 보고이다. 소를 가릴만한 큰 나무와 찌를듯 한 나무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에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펴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뿌리와 옆구리의 닿는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하였다. 그런 연유로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할 때에도 이 변산의 나무들로 전함을 만들었다.
1274년 정월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의 조정에 일본을 함락하러 가는데 필요한 전함 8백채를 3월까지 만들어 내라며 총감독으로 홍다구를 보내왔다. 홍다구는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귀화한 홍복원의 아들로서 원나라의 장수가 된 후 원나라가 고려를 칠 때에 선봉 노릇을 여러 차례 했었다.
배를 만들게 된 곳이 부안의 변산과 장흥의 천관산으로 정해졌지만 석달동안에 구백 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두 곳에서 삼만오 천 명쯤의 목수와 인부들이 밤낮없이 일을 했지만 3월에 다 만들지를 못했다. 홍다구는 미친 듯이 인부를 다그쳤고 그때의 상황의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기한이 급박하여 몰아붙이기를 바람과 번개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였다.” 예정보다 석 달을 넘겨 6월에 만들어진 배는 일본 땅에 닿기도 전에 태풍을 만나 모두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외 변산에서 작지만 아름다운 항구이면서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 모항이다. 수락동 동남쪽에 있는 이 마을은 뛰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뒤목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노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마치 그림과 같다. 1940년대 초 곰소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위도와 고창, 영광, 흑산도를 오고 가는 배들이 정박한 항구였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변산 마실길은 “바람으로 머리빗질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을 걷다가 보니 솔섬에 이른다.
나라 안, 바닷가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나는 부안의 솔섬을 추천할 것이다. 밀물 때에는 갈 수 없지만 썰물 때에는 들어갈 수 있는 솔섬으로 지는 해, 그 장면을 본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나는 부안의 이 솔섬 부근을 좋아했고, 가끔씩 인생에 힘이 빠졌다고 생각될 때마다 이곳을 찾아서 잠시나마 나를 내려놓고 멍한 채 몇 시간씩 보내며 해지는 풍경을 보곤 했다. 마음의 길을 잃었다가 마음의 길을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사고思考를 시작하면서부터 흔들리는 것들을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길을 걸으며 ‘길을 잃었고, 길은 잃을수록 좋다’는 하나의 명제를 터득했다.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 않는 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흔들리는 바다에 떠 있는 솔섬을 바라볼 때 문득 떠오르던 시가 박재삼 시인의 <바다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였다.
“고향 앞바다에는, 꿈이 아니라고 흔드는, 수만 잎사귀의 미루나무도 있고, 미칠만하게 흘러내리는, 과부의 찬란한 치마폭도 있고,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바다에서처럼 어리벙벙하게, 많이 있는 것은 없는가.....“
그 시를 가슴 아리게 읊조리며 다시 떠나는 서해랑 길, 이곳에 지금 서 있는 전북학생해양수련관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 도청초등학교가 있었다.
1990년대 초, 내가 문화운동을 시작하며 만들었던 황토현문화연구소에서 여름문화마당을 이곳에서 여러 차례 열었다. 그때 초대된 시인이, 신경림 시인이었다. <한국문학이 나아갈 길>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고, 그때 함께 온 사람이 <저문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를 지은 정희성 시인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작고한 <무당>의 작가이자 천재 무당인 정강우와 함께 용왕제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그런 사연을 지닌 변산 마실길을 8월 넷째 주에 걸을 예정인데, 1990년대 초에 함께했던 신경림 시인도 정강우 선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나는 다시 나와 도반이 된 사람들과 푸른 파도를 벗삼아 걸어야겠다.
2024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