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1독서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7,22ㄴ―8,1
22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24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한다.
25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26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
27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2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29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30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8,1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나라는 부모의 굳은살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 나라를 위해 당신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당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피가 하늘 나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The Unforgivable)은 2021년에 발표된 드라마 영화로,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줄거리는 블록이 연기한 루스 슬레이터가 20년의 징역을 마치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녀의 죄는 워싱턴주 스노호미시에 있는 집에서 자신과 다섯 살 된 여동생 케이티를 쫓아내려던 보안관을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루스가 그들의 어린 시절 집에서 케이티를 키우고 있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출산 중 사망한 후에 발생했습니다.
풀려난 후, 루스는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회와 마주합니다. 어떤 직장에서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던 남자도 그녀가 경찰관 살인자라는 말을 듣자 그녀를 멀리합니다. 심지어 보안관의 두 아들은 그녀 동생을 납치에 그녀의 눈앞에서 동생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루스는 보안관이 사실 자신들에게 잘해주었고 그런 사고가 일어난 것은 정말 잘못했으며 그렇게 해봐야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할 일이 없다고 설득합니다. 루스의 진심어린 사과에 보안관의 두 아들은 그녀들을 놓아줍니다.
루스의 여동생 케이티는 그날의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케이티의 양부모는 루스가 보내오는 편지를 하나도 케이티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는데 굳이 살인자 언니를 만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케이티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렸을 때 자기를 보호해준 어떤 흐릿한 기억의 여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했습니다. 루스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사실 그날 보안관에게 총을 쏜 것이 자신이 아닌 케이티였음을 밝힙니다. 그녀는 고작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었기에 케이티를 보호해주기 위해 대신 감옥을 살고 살인자로 낙인찍혀 견뎌왔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는 케이티는 언니를 끌어안으며 행복한 눈물을 흘립니다. 루스의 피가 케이티에게 하늘 나라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불안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생명과 같은 피를 자신을 위해 흘려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불안이 가라앉습니다. 그 평화가 하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와 같습니다. 루스는 케이티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케이티를 의롭게 했습니다. 케이티는 자기 잘못도 모른 채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자기 대신 모든 죄를 뒤집어썼음을 알았을 때야 비로소 참 행복을 느낍니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피를 흘릴 만큼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태국 광고 중에 ‘어머니의 볶음밥’이란 제목의 광고가 나왔었습니다. 아이가 집을 나와 배가 고파 어쩔 줄을 모를 때 길거리 음식 장사하는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서 입맛만 다시는 아이에게 맛있는 달걀 볶음밥을 해줍니다. 아주머니는 아이가 양파를 싫어하는 줄 어떻게 알고 그것을 빼고 해줍니다. 알고 보니 돈이 없을 줄 알고 엄마가 여기저기 다니며 아이가 오면 밥을 그렇게 한 끼 해주라고 돈을 주고 간 것입니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
저도 부모님을 통해 하늘 나라를 느낀 것은 부모님의 손과 발에 박힌 굳은살을 보고서였습니다. 그 굳은살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심지어 엄마가 나의 친엄마인지도 의심이 들 때 하늘 나라의 행복을 선사했습니다.
사람은 다 불안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은 ‘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걱정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도록 파견받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 안에 하늘 나라를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주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늘 침착함을 유지하십니다. 우리는 욕지거리를 들으면 침착을 쉽게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늘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상대의 화에 화로 마주하려 하고, 상대의 부정적인 말에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는 우리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래야 세상 안에서 잘 사는 것처럼 또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침묵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화를 내지 않는 저의 친구가 있습니다.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화 안 나?”
친구는 자기도 사람인데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냐면서, 대신 이것을 꼭 기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장에서 생각 중이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어도 가만히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듯이, 그 시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일까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쫓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히 안고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면서, 점차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입장에 서서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