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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32 그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가시니, 그들이 놀라 따라가며 두려워하더라. 또 열둘을 다시 데리고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기 시작하시니라.
33 말씀하시기를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인자가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리니, 그들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며
34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침을 뱉고 죽이리라. 그러나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더라.
32-34절은 예수께서 8:31에서 하신 일의 반복이다. 거기서 주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고 그에 대해 8:31 주석을 참고하라.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열 가지 세부 사항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마치 2018년 6월 23일 내가 펜사콜라 중심가에서 보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어떤 자동차가 갑자기 꺾어들어와서 나를 칠 것이라는 진술과 같다. 나는 랄프라는 남자가 운전하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질 것인데 병원 도착 2분 전에 사망할 것이다. 내 장례에는 2만 달러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고 돌아오는 화요일 오전 11시에 펜사콜라 메모리얼 가든에서 관 뚜껑을 닫아놓고 진행되는 방식으로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일들에 대해 어김없이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마호메트, 부처, 공자, 조로아스터, 조셉 스미스, 엘렌 G. 화이트, 그리고 메리 베이커 에디 또한 그런 일을 시도조차 못 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하셨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여러분, 성경은 이 세상의 책들이 흉내낼 수 없는 일을 해 내는데 성경은 역사가 진행되기 전에 그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았다. 의회 도서관에 소장된 2천3백만 권의 책들 가운데 어떤 책도 성경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한다. 나는 시간이 종료된 먼 미래, 사후의 여러분들에게 있을 일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과 국가들에게 일어나리라 예고된 검증 가능한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또한 나는 마호메트가 운좋게 예측해서 맞춘 어떤 전투의 승리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이 미리 설계하거나 발생 여부를 확증할 수 없는 미래 사건의 세부 사항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등 비평가들"이 성경의 책들의 기록 연대를 그토록 뒤로 미루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그들의 예언의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그 예언들을 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비평가들을 반대하는 증거가 있다. 성경은 실제 역사를 담은 책이며(그 안의 사건들은 실제 일어났고 성경은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전설"이나 "우화"가 아니다) 또한 성경은 예언의 책이다(성경은 역사를 미리 알려준다). 예언은 신성의 증거가 되며(사 41:22-23, 42:9, 44:7, 46:9-10) 영감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벧후 1:19-21). 주께서는 성취된 성경 예언들의 풍성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미성취 예언들도 결국 다 이뤄질 것임을 알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400여개의 예언이 있는데 그 예언들은 기록된 대로 성취될 것이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서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위하여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니
36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고 하시니라.
37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 중의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소서.”라고 하더라.
38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모르는도다. 내가 마시는 그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또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하시더라.
39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우리가 받을 수 있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또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으려니와
40 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요, 예비된 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시니라.
35절은 여러분이 지겹게 듣는 바 "성경의 모순들" 가운데 하나로 제기되는 구절이다. 여기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이 요청을 했다고 되어 있지만 동일한 본문인 마 20:20에서는 그들의 모친이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 20:20은 "세베대의 자녀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요청했다고 한다. 왜 성경에서 사소한 꼬투리 잡는 그 자들은 모친과 그녀의 아들들이 함께 그 요청을 했기에 예수께서 그들 모두에게 대답하셨다거나 혹은 그 청년들이 모친을 통해 주께 부탁했다고(마 8:5을 보라 참고. 눅 7:3-6)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어떤 목적을 갖고 "백지 수표"를 요청했다: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위하여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35절). 그 "천둥의 아들들"(3:17)은 유대인들이 일컫는 바 "대담함" - 부끄럼을 모르는 뻔뻔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기본적으로 모든 제자들이 해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11:24). 물론 내가 전에 말했듯이 이것은 조건부의 약속이다(예. 약 4:3). 본문에서 두 형제가 하고 있는 요청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 요청은 이런 것이었다: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 중의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소서"(37절). 여기 언급된 "영광"은 재림으로 수립될 천년왕국을 뜻한다(마 25:31). 따라서 그들은 왕국에서 그리스도 다음의 2인자와 3인자 위치를 얻고자 한 것이다.
물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38절). 예수께서는 이제 막 자신의 죽음,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것도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주께서 곧 왕국을 수립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주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주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15:26)이라 쓰인 명패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완전한 진실이었지만 주께서는 그 당시 왕관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왼편과 오른편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 있었다: "강도 두 명을 십자가에 못박으니, 한 사람은 주의 오른편에, 또 한 사람은 주의 왼편에 있더라"(15:27). 만일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서둘러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 일은 왕국과는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아니다, 상관이 있다. 강도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그때 예수께서는 면류관도 보좌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가고 계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러나 두 강도 중 한 명은 주의 머리 위 명패에 있는 글씨를 보고 그 말을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가 맞지만 그럼에도 왕국은 여전히 핵심 주제였던 것이다.
38-39절에서 예수께서는 "잔"과 "침례"를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잔"을 드시고 그 "침례"를 받으실 수 있었는데 이는 그 둘이 의미하는 바가 십자가 위에서 주가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에게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답답함을 어찌 견디어 내리요"(눅 12:50)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침례는 물침례와 무관한 것인데 이는 주께서 이미 물로 침례받으셨기 때문이다(눅 3:21). 말하자면 캠벨주의자들의 침례 중생 교리와 상반되게 물침례는 "구원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경우 물침례는 모형이고 그것이 구원의 모형인 경우와 같다(롬 6:3-4). 침례는 잠기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침례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잠기는 침례였다(시 69:1-2, 14, 88:7, 17; 욘 2:2-3). 이 관주들에서 지옥이 묘사되기를 죄인들이 물들의 홍수에 빠진 것처럼 비유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잔"도 존 R. 라이스가 가르치듯이 단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이에 대해 14:36 주석을 보라). 그 잔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렘 25:15; 시 75:8; 사 51:22).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그 잔과 침례에 주와 동일하게 참여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단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당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를 미워했듯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며 주를 박해했듯이 제자들도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8-21).
"참으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또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으려니와"(39절).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열두 제자 모두가(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대체한 맛디아를 포함하여 - 행 1장) 순교적 수난을 당했고 그 중 야고보와 요한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야고보는 첫번째로 순교한 사도였고(행 12:2) 요한은 열두 사도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박해를 당한 인물이었다(계 1:9).
야고보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주의 왼편과 오른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자리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비된 자들에게 주실 것이라"(40절). 모세와 엘리야가 그 대상자들이고 9:4에서 이에 대해 주석했었다. 슼 4장에서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촛대의 오른편과 왼편에 두 올리브 나무가 있는 것을 본다. "촛대"(메노라)는 성령을 상징하기도 하고(계 4:5) "세상의 빛"(요 8:12)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계 11:4-6에 등장하는 두 선지자는 모세와 엘리야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 선지자는 엘리야와 에녹인데 이는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이 그 둘이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두 선지자 중 하나가 절대 될 수 없다. 이 설명을 보라: 대환란을 살아서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기서 장수하고 죽는다(사 65:20). 엘리야는 그 부류의 대표자이다. 또 어떤 성도들은 대환란 때 순교했다가 환란후 휴거를 통해 부활, 휴거된다(사 26:19). 교회시대의 성도들 같은 경우 그들의 구주와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지만(빌 3:21) 그 순교한 환란 성도들은 나사로,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자신의 몸을 돌려받고 천년왕국에 들어가 그들 역시 오래 살다 죽는다. 이 부류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인가? 모세다. 그는 신명기 34장에서 죽었다가 곧바로 부활했는데(유 9절) 그는 대환란 때 다시 죽을 것이다(계 11장). 만일 여러분이 계 11장의 두 증인 중 모세의 자리에 에녹을 넣는다면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생할 유일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모형적 인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 특별한 성도들이 공중 재림 때 살아서 몸이 변화될 교회시대 크리스찬들이다(고전 15:51-53; 살전 4:17).
41 열 명의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매우 화를 내기 시작하더라.
42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방인을 주관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백성에게 주권을 행사하고, 또 그들의 고관들이 백성 위에서 권세를 행사하는 줄을 아느니라.
43 그렇지만 너희 가운데서는 그래서는 아니되느니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될지니라.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고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 두 번째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그들 중 누가 큰 자인지 논쟁을 벌인다(9:33-34 주석을 보라). "열 명"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매우 화를 내기 시작"(41절)했는데 이는 그 둘이 "막판 질주"를 통해 왕국의 최고 상석들을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을 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스스로에 대해 자만하고 있었다 해도 나머지 제자들 또한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수고한 게 있는데 우리야말로 상석에 앉을자격이 있다." 단지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쳐서" 주께 그 요청을 먼저 드린 것이 화가 난 것이다.
42절은 느부캇넷살에서 오바마에 이르기까지(단 2장) 이방 정부들의 일반적인 운영 형태에 대한 묘사이다. "거물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하급자들이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물리적, 영적 모두)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여러분이 상급자가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3절의 "섬기는 자"는 "손님을 모시는 웨이터"의 의미로서 행 6:1-3에도 쓰인 디아코노스(diakonos - "집사")라는 단어이다. 44절의 "종"은 바울이 롬 1:1에서 자신을 지칭한 둘로스(doulos)라는 그 단어이다. 경매에 부쳐진 노예를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셔서 자신의 일을 위해 쓰시는 것이 이 단어의 의미이다(고전 6:20).
예수님 자신이 43-44절에서 말씀하신 사례에 적용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45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께서는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그들의 더럽혀진 발을 씻기셨는데(요 13:5) 그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요 13:15).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구주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양무리"(벧전 5:2)를 치면서 "식탁을 돌봐야" 한다. 그는 자신이 먹이는 양무리의 "감독자"라도(행 20:28)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들을 지배하려"(벧전 5:3) 하면 안 된다. 현대 근본주의 침례교인들이 가진 사상 가운데 "목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목자는 회중들의 모든 행동을 지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명분은 목자가 회중을 마귀에게서 지켜야 하는 책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겠지만(혹은 하지 못할 수 있는데! 최소한 답을 얻으려면 어디서 알아봐야 되는지는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고 또 여러분의 행동을 지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성경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분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여러분이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떤 직장을 가져야 하는지, 어디에 거주할지, 어떤 자가용을 살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를 용서해 주게"(참고. 눅 14:18-19). 목회자의 권위는 영적인 권위이지 육신적, 사회적 권위는 아니다. 또한 목사가 가진 모든 권위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목사도 신자의 최종 권위가 될 수는 없으며 성경만이 최종 권위이다.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 이 "몸값"이라는 단어는 누군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것이 구속의 교리이다: "값을 주고 되산다." 그렇다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누구로부터 값을 주고 죄인을 되사는 것인가?"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부분에서 혼동하고 있다. "몸값"은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 아니다. "마귀"가 "사망의 권세"(히 2:14)를 가졌고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구약의 희생제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었다. 주께서는 출 12:13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그 피를 보면 너희를 지나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제공하셨고(사 53:11) 신약에서는 그것을 "화목제물"(롬 3:25; 요일 2:2, 4:10)이라 부른다.
45절의 "많은"은 딤전 2:6에서 "모든"으로 확인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우리[즉 신자들]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 여러분이 이 말씀의 뜻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 국한시키려 한다면 벧후 2:1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을 향해 가는 구원받지 못한 거짓 교사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어떤 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치르신 구속의 효력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값을 치르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칼빈의 "제한적 속죄"는 완전히 허튼소리이다.
46 그리고 그들이 여리코에 갔더라. 주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여리코에서 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 소경 바디매오가 대로에 앉아서 구걸하더라.
47 마침 그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지르기 시작하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니
48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더라. 그러나 그는 더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더라.
49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라.”고 명하시니, 제자들이 그 소경을 불러 말하기를 “안심하고 일어나라.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니
50 그가 겉옷을 던져 버리고 일어나 예수께로 오더라.
5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니, 그 소경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더라.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시니, 그가 즉시 보게 되고 그 길로 예수를 따르더라.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렀다. 가다라의 마귀들린 광인들의 경우와 같이 마태복음은 두 소경을 제시하지만(마 20:30) 마가는 그 중 한 소경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5:2 주석을 보라). 성경에서 소위 "모순"을 찾아내는 배교한 비평가들은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여리코를 나가신다고 서술했으나(마 20:29; 막 10:46) 누가는 주께서 여리코로 들어오고 계셨다고 진술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의문을 해결할 간단한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여리코 성읍이 둘이라는 것이다: 한 여리코는 여호수아가 파괴시킨 그 성읍을 아합왕의 치세 동안 재건한 여리코이고(왕상 16:34) 다른 여리코는 헤롯 때 세운 로마식 성읍인데 원래의 여리코보다 1마일 정도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식 여리코를 떠나(마태와 마가) 로마식 여리코(누가)로 들어오셨는데 그때 바디매오를 만나셨다.
이제 이 본문은 구원의 놀라운 모형이 되는데 재림 때의 유대인들에게나 교회시대의 죄인들에게나 마찬가지이다. 47절에서 메시야의 칭호인 "다윗의 아들"이 사용되는 것을 보라. 따라서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이 주께 돌이키는 사건의 모형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가 영적 소경인 상태이다(롬 11:25). 물론 개개의 유대인들은 교회시대 동안 그리스도를 믿기도 하고, 그래서 롬 11:25에서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되었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재림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고(슼 12:10) 그 민족 전체가 그리스도께 돌아온다(롬 11:26).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 바디매오는 이 시대 잃어버린 죄인들의 모형이 되기도 하는데 그들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에 의해 눈이 멀었고 자기 의의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채 살고 있다(50절 참고. 사 64:6).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질렀다. 혹자가 말하기를 복음 증거란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로 가면 좋은 음식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눅 18:13에서 세리가 했던 말도 그와 같았다.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소위 "죄인의 기도"(영접 기도)라는 것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구령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들 가운데 "죄인의 기도"가 "행위"에 속하고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엡 2:8-9).
물론 영접기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는 것이 맞는데, 이는 여러분이 그러한 기도를 하는 의도가 하늘나라와 지옥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주기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영접 기도의 자리에 놓는다면 지옥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식사 기도"나 "잠자기 전 기도"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면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참고. 고전 15:17).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기도한다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다.
롬 10:13에 언급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고자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때에(롬 10:9-10) 자신의 믿음을 입술을 통해 외적으로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이 무엇을 간절히 얻고자 할 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막 1:40의 문둥병자는 정결하게 되기를 원했다. 수로페니키아 여인은 예수께서 그녀의 딸을 구해주실 것을 간청했다(7:26).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요청했다. 기도가 구원의 필수 요소는 아닐지라도 구원을 바라는 간절함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여러분은 죄인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올 때 주께서 매정하게 뿌리치시리라 생각하는가? "주여, 저는 제가 지옥에 가야 마땅할 죄인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제 죄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제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그를 살리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그 분의 의만을 신뢰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시고 저의 죄들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건데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신 그분께서 이런 기도를 하며 나아오는 죄인을 내치실 것 같은가?
나는 어떤 형제들이 영접 기도를 남용하면서 구령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회중 가운데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회중을 "재생 타이어"로 만드는 행위의 변명거리는 되지 않는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일부 목사들이 그들의 구원을 가짜라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더라 그러나 그는 더 크게 소리질러."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자 할때 세상은 그를 비난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수로페니키아 여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입을 닫지 않았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끈질긴 간청"(눅 11:8)이라는 것이다. 바디매오는 이 세상 부스러기를 얻기 위한 구걸을 멈추고 자신을 진정 도와주실 수 있는 그 한 분에게 나아갔다.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라.”고 명하시니...안심하고 일어나라.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니"(49절). 칼빈주의에 대해 한 방 먹이는 내용이 이 본문에 나오는데 이번에는 "무조건적 선택"에 대해서이다. 예수께서 먼저 이 소경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소경이 먼저 주를 불렀다. 칼빈주의자는 엡 1:4로 가서 선택은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구절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건너뛰어 버린다. 창세기 1:1 이전에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았다. 성령께서 구원받는 순간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 이전에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 안에 존재할 수가 없으며(고전 12:13)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구원받을 수 없다(롬 10:9-10; 엡 2:8-9). 선택은 미리 아심을 조건으로 하며 미리 아심은 여러분이 복음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성령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는 사건에 근거한 것이다(벧전 1:2).
바디매오는 "겉옷을 던져 버리고"(50절) 예수께 나아왔다. 이것은 죄인이 자기 의(사 64:6)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얻는 하나님의 의"(롬 3:22)를 받아들이는 것의 모형이 된다. 51절에 보면 바디매오는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인정받는다(52절). 전에 말했듯이 믿음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분이 구원하신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눈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치유를 하실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약 2:19)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보내신 그 분을 믿어야 한다(요 3:16).
"그가 즉시 보게 되고"(52절). 즉각적인 치유였다. 주님의 치유는 사람들의 이마를 손바닥을 치는 연극적 행동이나 사회자의 시계를 귀먹은 사람 귀 뒤의 뼈에 대고 진동을 느끼게 해서 마치 치유받은 듯 착각하게 만들거나 소경으로 하여금 천 와트짜리 무대 조명을 올려다 보게 함으로써 그가 밝은 빛을 느끼기 때문에 치유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들거나 그 어떤 "불발"이나 "반복된 실패"가 아닌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였다. 바디매오는 "즉시" 치유받았다. 구원은 "과정"이 아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구원받는다. 성화는 평생 걸리지만 구원은 즉각적이다.
"그 길로 예수를 따르더라." 젊은 부자 관원이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바디매오는 해냈다(21-22절). 왜 이런 차이가 있었던 것인가? 바디매오가 버려야 했던 것은 그가 소경일 때 입고 있던 더럽고 낡은 옷 한 벌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젊은 부자 관원은 보다 많은 소유물이 있었고 그것들로 인해 그는 저주받은 길로 갔다.
내가 구원받을 때 나는 자신의 옛 것을 쉽게 버릴 수 있었다. 내가 포기해야 했던 유일한 것은 주정뱅이의 삶이었고 그 삶은 나를 일찍 죽게 만들고 간음과 음행에 빠지게 만들며 내 가정을 망쳐놓는 그러한 삶이었다. 내가 댄스 밴드에서 드럼 연주를 했던 술집, 재즈바, 클럽, 싸구려 주점들은 내가 고수하고 살아야 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초신자 과정을 밟고 있었던 카톨릭 교회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덕적인 삶, 교육, 높은 소득, 좋은 집과 자동차,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 같은 것들은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 있어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마가복음 11장
1 그후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주께서 제자들 가운데 둘을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고 하면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즉시 그 사람이 그것을 여기로 보내리라.”고 하시더라.
4 그리하여 그들이 가서, 사거리 문 밖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더라.
5 그때 거기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나귀 새끼를 푸니 무슨 짓이냐?”고 하자,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허락한지라,
7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니 주께서 그 위에 타시더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입성"으로 알려진 장면이다. 주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신다. 이것은 슼 9:9에 나오는 바(마 21:5; 요 12:14-15을 보라) 재림 때 있을 메시아 예언의 성취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복음서 시대 당시 초림과 재림은 함께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인데 행 7장까지는 그 두 사건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창 49:11을 보라. 그 예언은 슼 9:9보다 1,170년 앞서고 막 11장보다 1,722년 앞선다.
"그의 어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그의 나귀 새끼를 선별한 포도나무에 매며...." 여기에 슼 9:9의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가 등장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입성에 대한 예언인데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을 한번 보라.
"...그의 옷들을 포도주로 빨고 그의 의복을 포도의 피로 빨았도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묘사인데 재림 때 주의 옷은 "포도즙틀을 밟는 자"(사 63:1-3)처럼 원수들의 피로 적셔진다.
초림과 재림이 한 구절에 함께 등장하는데도 그 두 사건의 구분은 단지 쉼표 하나 뿐이다. 만일 초림 당시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재림은 승리의 입성이 있고 나서 7년 내에 이뤄질 수도 있었다.
마 11:29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유"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슼 9:9에서도 주를 그렇게 소개한다. 그리스도 당시에 나귀와 노새는 짐을 나르는 데 쓰이는 격이 낮은 짐승이었지만 구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귀와 노새는 이스라엘의 재판관들과 왕들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었다(판 10:4, 12:14; 삼하 13:29; 왕상 1:33, 38, 44). 따라서 주께서 자신의 탈것으로 이 짐승을 고르신 데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이 오셔서 왕국을 수립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벳파게와 베다니"(1절)는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에 있는 마을들이다. 그 마을들은 유대인이 안식일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이동할 수 있는 제한 거리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눅 24:50 참고. 행 1:12). 베다니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살던 마을이다(요 11:1). 독자는 본문에서 "올리브 산"이라는 단어를 볼 때 즉각 그것이 재림과 연관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예수께서 민족들의 군대에 침공당한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려 재림하실 때 먼저 당도하시는 곳이 그 산이기 때문이다(슼 14:1-4).
올리브 산이 재림의 유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께서 제자들 가운데 둘을 보내시며"(1절)를 보라. 이것은 모형적으로 계 11장의 두 증인을 가리키는데 그 둘은 막 9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변형 사건 때 등장하기도 한다.
이제 1-2절에서 예수께서는 소위 "전지하심"으로 알려진 자신의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신다. J. 버논 맥기는 이 장면이 그리스도의 전지하심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이 전체 일들이 "미리 준비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청취자들의 마음에 의문을 품게 한다. "본문은 자연적인 설명으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기적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자연적인 설명"을 가져온 출처가 무엇인가? 그 근거는 성경이 아니다! 그는 순전히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RSV을 발행하는 NCC 소속 자유주의자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8:31과 9:31을 읽고도 그리스도의 지식에 대해 "자연적인 설명" 어쩌고를 주워섬기고 있겠는가? "럭크만, J. 버논 맥기가 자유주의자란 말인가요?"라고 여러분은 물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J. 버논 맥기가 구원받았으며 "선하고", "경건하며", "헌신된" 보수주의-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간혹 구원받지 못한 자유주의자, 말하자면 스튜어트 커스터와 흡사한 말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6:14-15 주석을 보라).
"본문에서 기적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언급에 대해 나는 과거 밥 존스 대학의 내 지도 교수들 중 하나가 백보좌 심판석에 등장할 "책들"(계 20:12)이 반드시 실제적 책들일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말을 했을 때 내가 내가 그 교수에게 해준 말과 같은 말을 돌려주고 싶다. 나는 "그렇다면 그것들이 진짜 책들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여러분은 학자들이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을 높일지 폄하할지 선택할 기회를 받을 때, 얼마나 자주 그들이 후자를 택하는지 아는가? 행 4:27, 30에 쓰인 헬라어 단어 pais는 "아들"(KJV - "child"), 혹은 "종"을 의미할 수 있는데 현대역본 번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손상시키는 번역 쪽을 선호한다. 히브리어 문법의 규칙상 단 3:25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할 때 번역자들은 느부캇넷살의 사고방식을 멋대로 추측하면서 "신들의 아들"이 여기에 더 적합한 번역이라 주장한다(다니엘서 주석서 3:25 주석을 보라). NIV을 만들어낸 복음주의자들과 NASV을 만든 근본주의자들은 사 14:12을 번역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을 동격으로 만드는 번역을 택했다(참고. 계 22:16). J. 버논 맥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평범한 인성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가르쳐야 할 때 자기 생각대로 인성 쪽을 택했다.
본문은 주께서 잃어버린 죄인을 구원하시어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에 대한 모형적 사건이다. 먼저 여러분이 이 나귀 새끼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2절). 그렇다면 이 나귀 새끼는 야생이었고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성경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 대해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나도"(욥 11:12)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이 나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형인데 그는 누구도 타본 적 없는, 즉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와 같다.
앨라배마주 윙에 사는 한 농부가 내게 말하기를 야생 나귀는 세상에서 가장 고집센 짐승이라고 했다. 그들은 밤에 숲 속을 달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의 어미들 중 일부는 야생 나귀이다. 그들 위에 누가 타기 전까지 길들여지지 않으며 채찍질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완고하다(롬 1:32; 살후 2:12). 그들은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데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요 3:19). 그들의 어미가 "야생"에서 왔기에 그들도 "거칠다"(시 51:5, 58:3; 욥 15:14; 요 3:6). 주께서 그들 위에 타시기 전까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주께서 그들 안에 들어와서 운행하셔야 한다(엡 2:12-19).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주의 징계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히 12:5-8).
"풀어서"(2절). 그 나귀 새끼는 묶여 있었기에 주께서 사용하시기 위해 풀려져야 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가 "죄의 종"(요 8:34)이라 말씀하셨고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요 8:36)고 말씀하셨다.
"끌고 오너라." 마 21:2은 이런 내용을 추가한다. "내게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2장의 중풍병 걸린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베드로가 구원받은 방식도 그랬는데 그의 형제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니"(요 1:42)였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할일은 죄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눅 14:16의 그 주인이 "성대한 저녁"을 마련하고 종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빨리 성읍의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불구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이리로 데려오라....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눅 14:21, 23).
막 11장으로 돌아가서: "만일 누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느냐?’고 하면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말하라"(3절).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닌가? 어떻게 길들여진 후에도 멍청하고 고집세며 채찍에 맞아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그런 짐승이 주께 필요할 수 있는가?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 중 하나가 자급자족이다. 여러분은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없이도 잘 사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일 모든 사람을 없애 버리신다 해도 그 사건이 하나님을 한치도 바꿔놓을 수 없다. 그때도 주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이나 나같은 불경스런 탕자를 필요로 하신다는 말인가? 내 말은 주께서 구약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설령 굶주릴지라도 네게 말하지 않으리니 이는 세상과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기 때문이라"(시 50:12). 신학적으로 말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지만 주께서는 우리 같은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을 쓰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형제여, 그것은 은혜이다. 그것은 우리의 장점이나 지성, 혹은 능력이나 "연줄", 그 외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이 자비롭고 사려깊지 않으신가(시 8:4)? 주께서는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우리를 내버려두시어 우리가 언약과 약속들로부터 이방인으로 남아있게 두실 수 있었다(엡 2:12). 그러나 그 대신 주께서는 자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 마음을 만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나는 네가 필요하다." 솔직히 나는 이런 일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 천한 짐 싣는 짐승을 취하시어 그것을 심판과 전쟁의 도구로 삼으실 수 있다. 솔 6:13에 보면 주께서 재림 때 주와 함께 오는 성도들을 이렇게 묘사하신다: "그것은 마치 두 군대를 합친 것 같도다." 그 두 군대 중 하나는 "흰 말들을 타고"(계 19:14) 내려오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다른 하나는 "흰 나귀들"을 타고 오는(판 5:10) 구약 성도들이다.
사랑하는 형제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롬 8:19). 지금은 여러분 자신이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어느날 여러분은 자신의 구주처럼 변모될 것이다(요일 3:2; 롬 8:29). 그 숫나귀는 어느날 전쟁이 나서는 준마가 될 것이다.
4절에서 그 나귀가 매여 있는 장소가 "사거리 문 밖"인 것을 보라. 이것이 어떤 교훈을 주는가? 예수께서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길이 광대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마 7:13)라고 하셨다. 구약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이니라"(잠 16:25).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 이 길이다. 이 길은 무신론, 불교, 카톨릭, 힌두교, 희랍 정교회, 프로테스탄트, 진화론, 마호메트교, 도덕주의자, 탕자들, 중산층, 상류층, 계층 없는 자, 지성인, 문맹자, 그 외 자기 의에 의존하며 그 길을 통과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을 포용한다.
이제 두 번째 길이 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그 길은 "좁은" 길이고 "소수"만 그곳으로 들어간다(마 7:14). 그곳으로 가는 자가 심히 적은 이유는 그들이 먼저 자기 의를 버리고 다른 분의 의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롬 10:3-4; 딛 3:5). 이 길은 너무 좁아서 한 명씩만 지나갈 수 있다(딤전 2:5). 여러분은 마리아, 마호메트, 교황, 성 베드로, 달라이 라마, 마더 테레사, 조로아스터, 부처 혹은 다른 "신"과 함께 이 길을 갈 수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요 14:6).
그 두 길은 한 "문"에서 만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문이라.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받을 것이며"(요 10:9). 여러분이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 하면 여러분은 "도둑이요 강도"(요 10:1)가 된다.
"셀마-몽고메리 행진"(흑인 참정권 요구 행진 - 1965)을 돌아보면 카톨릭 교회엣 나온 어떤 검은 망토 쓴 패거리들이 그 유색인들로부터 유익을 얻으려 시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제들 중 한 명이 시위대 중에서 경건한 인상의 침례교회를 다니는 한 흑인 집사(다년간 집사직을 맡아온)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떤 교회 출신입니까?"
그 흑인 집사가 말했다. "침례교회입니다."
카톨릭 신부가 말했다. "당신은 잘못된 교회에 속해 있군요.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열쇠들을 주셨어요. 당신은 그 열쇠들이 있는 교회로 가야 합니다."
그 늙은 흑인 크리스찬이 대답했다. "웃기지 마세요, 신부님, 나는 그런 열쇠들 따위가 불필요하답니다. 나는 그 문을 통과했어요!"
나는 카톨릭 교회가 갖고 있는 어떤 "열쇠들"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문 자체를 이미 통과했다. 그 신부가 열쇠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그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언제든 "초장"(요 10:9)을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예수께 끌고 와서...주께서 그 위에 타시더라"(7절). 이것이 "목표"인데 예수께서 그를 움직이시는 것이다. 주께서 고삐를 쥐시면 어디든 그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휴 파일 목사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거주자(Resident)는 대통령(President)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이신 분을 소유했다면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보좌는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휴 파일은 그 이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분 마음에는 보좌와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좌에 앉으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시면 여러분이 십자가에 달려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하고(8:34 주석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운전석"에 앉으셔야 한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더라.
9 사람들이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10 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의 조상 다윗의 왕국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더라.
8절의 "겉옷을 길에 펴"는 행위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그것은 고위 관원을 환영하는 표현 방식이다. 오늘날 이것은 "레드 카펫"이라는 대접 방식으로 남아 있다. 이 의식은 높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물을 영접하는 의식이다. 그 유대인들은 슼 9:9의 그 왕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시다는 것을 즉각 알아챘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교사들은 해석의 "궤도"를 이탈해 버리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자신의 왕국을 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이 승리의 입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도를 오판했다고 말한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보통 주의 초림에만 제한해 적용하며 무천년 및 후천년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초림과 재림 모두에 적용한다. 마지막 관점은 성경의 3/4을 부인하는 주장이다. 구약 성경의 주제는 왕과 왕국이다. 예수께서 초림 때 성취하신 예언들의 숫자보다 네 배나 많은 예언들이 재림 때 성취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 예언들을 교회에 적용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성경을 왜곡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벧후 3:16).
이전에도 여러번 말했지만 사도행전 7장 이전까지 초림과 재림은 한 시대에 성취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모든 일들이 한번에 몰아치고 있었다. 왕이 오셔서 왕국을 인수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위이다. 관건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을 어떻게 맞아들일 것인가였다(마 23:37; 눅 13:34; 요 19:14-15; 마 27:22). 복음서 당시에 유대인들이 주를 거절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눅 23:34). 그래서 그들은 행 2, 3, 4, 5, 6, 그리고 7장에서 두 번째 기회를 받았다. 산헤드린이 결의하여 스테판을 죽였을 때 왕국의 도래는 먼 훗날로 연기되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신비"인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영적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하고 그 사실이 계시된 시점은 행 7장 이후였다(엡 3:3-6).
오순절 성령 강림 당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우리의 죄들"(참고. 고전 15:3-4)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을 설교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들이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제거된다는 말 대신(골 2:11-14)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워지리라"(행 3:19-21)고 언급된 이유가 그것이다. 죄들에 대한 피의 대속이라는 주제가 행 7장 이후에야 설교에 등장한 이유가 그것이다(행 8:28-35 참고. 사 53:10).
"겉옷을 길에 펴"는 행위가 가진 두번째 상징적 의미는 왕에 대한 복종이다. 그 유대인들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왕께서 밟고 지나가시도록 깔았다. 이것은 철저한 굴복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그리스도의 행로에 깔았을 뿐 아니라 "나뭇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았다(8절). 여기서 "strawed"(깔더라)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그들이 길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나뭇가지를 흩어놓았다는 것이다. 보다 현대적 철자법에 따르면 strewed가 될 것이다. 요 12:13은 그 "나뭇가지"가 "종려나무 가지들"이었다고 알려준다. 여기서부터 "이스터" 앞에 오는 "종려주일"이라는 명칭이 나오게 되었다. 종려나무 가지들은 승리를 나타내며(계 7:9) 그것은 재림과 관련되어 있다(레 23:40 참고. 슼 14:16-18). 그렇다면 그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정복 군주로서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9-10절은 시 118:25-26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호산나"는 시 118:25의 "지금 구원하소서"와 같은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시편 구절이 메시아 관련 구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수립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그 사실은 명확하다("주의 이름으로 오는 우리의 조상 다윗의 왕국은 복이 있도다" 10절; 참고. 눅 1:32).
그러나 그 구절이 인용되면서 어떤 부분이 빠졌는지 보라. 시 118:26 - "우리가 주의 집에서부터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의 "번영"은 그리스도께서 눅 19:42의 "너의 화평에 속한 일들"이라 말씀하신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것들이 너의 눈에서 감추어졌느니라"(눅 19:42)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승리의 입성의 모든 "왁자지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마 23:37) 모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의 집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축복하지 않았다. 주께서 비둘기 판매상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 또한 성전에서 쫓아낸 것이다(15-18절). 그래서 성전은 주의 집이었으나(17절) 유대인들의 집으로 바뀌었고(마 23:38) 군중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주를 축복하긴 했지만 주께서 가져오시고자 했던 그 왕국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해 미뤄지고 말았다. 유대 민족 전체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이 있도다"(마 23:39)라고 외치는 시점은 재림 때이고 그 이전까지 그들은 민족적으로 주를 만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나니 저녁 때가 된지라, 주께서 열둘과 함께 베다니로 가시더라.
12 그 다음 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주께서 시장하신지라
13 저쪽에 잎이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에 무언가 있을까 하여 가 보셨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으니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이라.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시기를 “이후로는 영원히 네게서 아무도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을 듣더라.
11-12절은 복음서들이 왜 유기적으로 서로 관련 있는지 보여준다. 마가복음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마태복음에도 나오지만 마가복음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수난주간"이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있었던 주의 각 일자마다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기술되어 있지 않다. 마가복음은 "성금요일"이 헛소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1.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일요일이다. 주께서는 성전으로 들어가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가서 유숙하셨다(11절).
2. 그리스도께서 월요일에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신다(12절). 가시던 중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다(14절).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주께서는 성전 정화를 하셨다(15절). 주께서는 월요일 저녁에 예루살렘을 떠나신다(19절).
3. 주께서는 화요일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셨다(20절). 11장의 나머지 부분 전체, 또한 12, 13장이 화요일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14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틀 후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14:1). 그렇다면 수요일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은 후인(14:12) "예비일"(15:42)이 된다. 따라서 15:42의 "안식일"은 매주 있는 안식일이 아니라 "특별 안식일"(요 19:31 참고. 레 23:5-7)이 된다. "성금요일"은 틀렸고 주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날은 수요일이 맞다.
11절과 19절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저녁에 떠나시는 것을 보라. 주께서는 베다니로 가셔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와 함께 유숙하시거나(11절 참고. 요 12:1) 혹은 올리브산의 야외에서 취침하기도 하셨다(눅 21:37). 복음서 기록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밤을 보내셨다는 기술이 없다. 그런 일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없을 것이며(사 12:6, 23; 렘 3:17; 욜 3:21; 슼 2:10) 그때는 예루살렘이 "여호와 삼마" - "주께서 거기 계시다"(겔 48:35)가 될 것이다.
13절에서 내가 "무화과나무 잎새 요소"라 부르는 것이 나온다. 그것은 실체 없는 거짓 고백이다. "haply"(혹시)라는 표현은 "어쩌면"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지하심의 능력을 쓰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고 주께서는 "무화과의 때가 아직 아"님에도 자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열매를 찾으셨다. 그때는 아직 여름 무화과가 익는 철이 아니었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종종 전년도 가을에 설익은 무화과가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아 다음해 봄에 익은 채 달려있는 경우가 있었다. 또다른 가능성은 겨울 무화과의 끝물 열매가 남아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열매들은 3월에 수확하곤 했다. 어느 쪽이든간에 무화과나무에 잎이 보인다는 것은 열매가 달려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벌링거가 짚어냈듯이 무화과 열매는 잎사귀와 함께, 혹은 그 이전에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권리가 있으셨다.
이 본문의 영적 적용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눅 13:6-9에서 하셨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에덴 동산에서 무화과 잎은 자기 의를 상징한다(창세기 주석서에서 3:7 주석을 보라). 이스라엘은 의를 소유하지 못했으면서 자신이 의롭다는 고백을 했다(롬 10:3).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서 의를 구하셨으나 찾지 못하셨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을 때(롬 10:3-4) 그들은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 백성을 저주하셨고 그들은 다음 2천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 재림 때 오신 주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솔 2:10-13 참고. 겔 37:1-14).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오자,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을 내어쫓기 시작하시고,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자리를 뒤엎으시더라.
16 또 누구든지 성전 안에서 어떤 기물도 옮기지 못하게 하시고
17 가르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기도의 집이라고 불리리라.’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하시니
18 서기관들과 선임 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를 죽일까 하고 기회를 엿보더라. 그들이 주를 두려워함은 모든 백성이 주의 교리에 놀랐기 때문이라.
19 저녁이 되자 주께서 성읍 밖으로 나가시더라.
본문은 주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두번째 사건이다. 첫번째 사건은 요 2:13-16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복음서에는 성전 정화가 두 번 발생하는데 이 둘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첫번째 성전 정화를 자신의 초림과 연관시키셨고(요 2:19-21) 막 11장 문맥에서 봤을 때 두번째 정화는 주의 재림과 연관된 것이 분명하다. 말라키 선지자가 그리스도께서 왕국에 임하시는 장면을 예언한 본문을 보라.
"그러나 그가 오는 날[재림]에 누가 거할 수 있겠느냐? 그가 나타날 때 누가 서겠느냐? 이는 그가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표백하는 자의 비누[누군가가 곧 정화되어야 한다] 같음이라. 또 그는 은을 정련하고 제련시키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의 아들들[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깨끗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깨끗게 하여 그들로 의로운 제물을 주께 드리게 하리라[구약의 희생제들이 돌아온다 - 골 2:16-17 참고. 겔 40-46장].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예물이 지난날들과 옛적처럼 주께 기쁨이 되리라(말 3:2-4).
이제 15절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점잖은 예수"에 대한 역설적 사실을 보여준다. 주께서는 술집의 기도가 말썽꾼을 주점에서 몰아내듯이 성전 안에 있던 상인들을 "강제 퇴거" 시키신다. 주께서는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발로 차 버리신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날 성전에서 뭔가 카트에 싣고 구입해서 집에 갖고 가려 했다면 날을 잘못 고른 셈이다: "또 누구든지 성전 안에서 어떤 기물도 옮기지 못하게 하시고"(16절). 여러분은 이런 장면의 "그리스도를 닮아" 행동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여러분 안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한번은 내가 라디오 방송에서 주를 두려워함의 열두가지 유익이라는 주제로 성경 강의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를 보조하는 한나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역할은 사회자가 처음 5분 내에 세 번 이상 말이 막히는 일이 발생하여 청중이 구원과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일을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없도록 커버하는 일이었다. 마귀의 세력은 참 멀리까지 뻗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본문을 잘 보라. 이런 행동을 하시는 그리스도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그 그리스도가 맞는가? 여러분의 지역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어떤 부흥사가 찾아와서 교회의 모든 집사들을 내쫓고 교제 테이블을 엎어 버리면서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들을 밖으로 쫓아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그 부흥사를 다음번 "부흥회"에 초대하고 그의 "사역"을 다른 교회들에 추천하겠는가? 여러분은 왜 "서기관들과 선임 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를 죽일까 하고 기회를 엿보"(18절)았는지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데일 카네기의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넓힐 수 있는가" 같은 이론을 따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함과 주의 말씀, 곧 성경의 온전함에 더 많은 관심이 있으셨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느낌" 따위를 신경쓰지 않으셨다.
17절에서 예수께서는 사 56:7을 인용하신다. 그 구절의 문맥은 천년왕국이다. 그때 민족들은 "주의 산에,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사 2:3)는데 모든 이방 민족들의 기도가 주께 상달된다(말 1:11).
17절의 "강도들의 소굴"은 예레미야 7:11에서 인용하신 것이다. 막 11장과 비교해 보면 렘 7장에서 보여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이 하나님의 의보다 자신의 의를 높이는 것은 도둑질, 살인, 간음, 욕설, 우상숭배만큼 사악하다는 것이다(렘 7:9을 보라).
그 서기관과 선임 제사장들은 백성들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성전 안에 벼룩시장을 열었다. 그것은 탐심이었고 성령께서는 "탐심은 우상숭배"(골 3:5)라고 말씀하셨다. 그 우상은 바알이 아닌 맘몬이었다(마 6:24; 눅 16:13).
18절: "서기관들과 선임 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를 죽일까 하고 기회를 엿보더라." 그들은 3:6에서부터 그렇게 하고자 했었다(그 본문을 보라). 이유가 무엇인가? "주를 두려워함" 때문이었다. 주인의 아들이 와서 "포도원"의 소유권을 그들에게서 가져가려 하셨던 것이다(12:1-12).
"모든 백성이 주의 교리에 놀랐기 때문이라." 주의 사역 초창기부터 이런 일이 있었다(1:22과 그 주석을 보라). 이는 주께 특별한 권위가 있었고 그 권위는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갖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지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최종권위였다. 그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말들을 첨가해서 말씀을 무용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들의 권위는 자신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7:6-13 주석을 보라). 현대 기독교 학자들도 다르지 않다.
20 아침에 그들이 지나갈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버린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기억이 나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보소서,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나이다.”라고 하니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
23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며, 그가 말한 것들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리스도와 그 일행은 예수께서 전날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버린 것"을 보게 되었다(20-21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보여준다(14절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그 민족이 주의 부활 이후에 주를 믿지 않을 경우 그들이 열매 맺을 수 없게 만드셨다. 주께서는 A.D. 70년 티투스가 와서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제사드렸던 그 한 장소를 파괴하게 만드셨다(신 12:5-14).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을 B.C. 586년에 사로잡혀 가게 하시고 A.D. 70년 후에는 그들의 희생제를 그치게 만드셨다(호 3:4). 그 민족은 자기들이 복음서 시대에 거부한 그 분이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기 전까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까지 유대인들은 민족 전체가 "뿌리로부터 말라 버린"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참고. 겔 17:2, 9-10).
예수께서는 교회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예언적으로 적용하는 것 대신에 본문을 제자들에게 믿음과 기도에 관한 실제적 교훈의 재료로 삼고자 하셨다. 물론 본문을 설명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올바른 관점에 가장 가까이 와 있지만 그들은 적용을 완전히 엉망으로 해 버린다.
이 구절에 따르면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백지 수표"와 같다: "그가 말한 것들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리라"(23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너희 것이 되리라"(24절). 23-24절에서 제시한 기도 응답의 조건은 믿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은사주의자들은 "선포하고 붙잡으라"는 신학에 따라 그들이 믿음이 있는 체 하며 신앙 고백을 한다. 그것은 "긍정적 고백"이나 "믿음으로 말하기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입술로 선포함으로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라" 그런 따위의 말들이다.
이제 23절에서 믿음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의 사례가 무엇인지 보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고."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이다(사 40:3-4; 슼 4:7; 계 6:14). 만일 예수께서 언급하신 그 산이 주의 일행이 거쳐왔던 올리브산을 의미한다면(눅 21:37) 산이 옮겨지는 일은 재림 때 역시 문자적으로 일어날 것이다(슼 14:4). 따라서 사도들의 사역 기간 중에 대환란이 일어났다면 그 일은 사도들에게 문자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마태복음 주석서에서 마 10:23과 그 주석을 보라).
물론 누구든 이 본문을 영적, 교훈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여러분은 주께서 과장법을 쓰셨고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곤란한 일들에 대한 은유로 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본문을 근거로 자신에게 충분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기도가 응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마저도 그가 기도한 모든 것들이 응답되지는 않았다(고후 12:7-9). 성도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고려하지 않고 기도하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힌두교 사원에 성노예로 바쳐진 여자 아이들을 위해 복음을 전한 에이미 카마이클이라는 여선교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어린 시절 갈색 눈을 가졌는데 그녀는 푸른 눈을 원했다. 그래서 어린애 같은 믿음으로 그녀는 주께 푸른 눈을 달라고 기도했다. 물론 그녀는 푸른 눈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그녀는 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도에 선교사로 갔을 때 알게 되었다. 서양 사람인 그녀는 부모들에 의해 힌두교 사제들의 노예로 팔려 사원 매춘부가 된 어린 소녀들을 위해 사원에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인도 여자처럼 보이도록 자기 얼굴을 커피 원두로 거무스레하게 칠했다. 그녀가 "푸른 눈"이었다면 그 변장술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녀가 볼 수 없는 여러해 후의 일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23-24절의 약속을 믿을 수 없도록 의기소침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어떤 일에 대한 확신을 주셨는데 그것이 인간적 견지에서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주께서 불어넣으신 확신이라면 믿고 나아가라.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래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미스 아이린"이라는 이름의 영국 여선교사가 미군과 일본 여자들 사이에 태어난 유기 아동들을 위한 고아원을 개설했다. 그녀는 그 아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거기에 병약한 체질이라 침대에 누워 지내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선교사가 이 본문을 놓고 강의하는 것을 듣고 그 소녀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산을 치워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소녀들이 해변에 놀러갈 때 그녀는 몸이 아파서 갈 수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산을 없애주셔서 자기가 바다를 구경할 수 있게 해 달라 한 것이다.
"미스 아이린"이 소녀에게 예수께서는 문자적 산을 옮기는 것을 말씀하신 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아이는 그 기도를 계속했다. 그녀가 워낙 간절하게 그 기도를 했기에 고아원의 다른 모든 소녀들도 같은 기도에 동참했다. 그후 선교사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모든 소녀들이 그 아픈 아이의 창문 옆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놀랍게도 산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고 아픈 소녀는 바다의 전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산에 무슨 일이 일어난거니?" 선교사가 물었다. "사람들이 불도저들을 몰고 와서 산을 밀어버렸어요." 소녀들이 대답했다. 해안이 침식이 되어 없어지는 것 때문에 시 당국이 그 산을 깎아 토사로 해변을 보강하기로 한 것이다. 산이 옮겨지는 경우는 지진, 산사태, 폭파, 불도저 등의 이유로 가능할 것이다. 누가 이 사건이 그 일본 고아 소녀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여러분이 이런 믿음을 주께 받았기에 기도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기도 응답을 주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하고(잊지 말라!)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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