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후반, 청년시절의 박수근(왼쪽)
아내 김복순과의 만남은 운명이자 행운
박수근이 오로지 그림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김복순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김복순을 만난 곳은 양구 북쪽에 있는 금성에서다.
강원도 철원군 금성면은 3.8선이 가로 놓여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지역이다.
이 마을에서 두 집안은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복순은 금성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춘천공립여학교에 진학해 1939년 졸업을 했다.
춘천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박수근은 아버지가 재혼해 살고 있는 금성 집에 왔다가 윗집 처녀를 만나게 된다.
박수근은 (문제의 ?) 빨래터에 가 복순씨를 자세히 보고(먼저?) 아내로 맞기로 결정한다.
복순의 집안에선 춘천의 의사 집안 아들과 약혼을 서둘렀다.
우여곡절 끝에 승낙을 받은 박수근은 경성으로 가 약혼 예물을 준비하는 틈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둘은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김복순은 박수근과 고락을 같이 한 세월들을 일기체로 기록했다.
박수근 사후 여러 평가와 연구가 있었지만 아내의 일기만큼 진솔한 기록이 없기에 자주 인용된다.
‘결혼하고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금강산(내금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의 그 사흘 동안 그이는 하모니카로 반주를 하고 나는 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일이
꿈결같이만 느껴진다. 그 후부터 그이는 ‘선전’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시간씩 그이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그때 내가 모델을 한 건 주로 망질(맷돌 돌리는 일)하는 여인이었다.
처음 모델을 하는 거라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나는 하나님께
'이 작품이 잘 그려져서 선전에 낙선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곤 했다.‘
1941년 제20회 선전에서 부인을 모델로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 입선
도청에서 일하며 화가로 활동한 평양시절
결혼 3개월 만에 박수근은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 되었다.
평소 후원해 주었던 춘천의 도청 사회과장 일본인 미키시가 평양으로 전근하며
박수근을 직원으로 채용한 것이다. 박수근의 평양 생활은 오랜만에 안락했다.
화가로서도 성숙한 시기였다. 휴일이면 평양의 화가들과 어울려 스케치를 나갔다.
일본 유학파들인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등과 함께 ‘주호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1944년까지 매년 동인전을 열었다.
이듬해인 1941년 박수근은 ‘맷돌질하는 여인’을 제20회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경사를 맞는다.
“만삭이 된 몸으로 나는 맷돌질하는 여인 역의 모델로 온종일 앉았다가 저녁때 일어서려면
다리가 온통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그이는 ‘이제 이 작품이 선전에 당선만 되면 당신도 보람을 느낄거요’하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작품이 선전에 입선이 되었다.
이듬해 봄에 첫아들 성소를 낳자 박수근은 아내와 아들 성소를 모델로 한 ‘모자’를 제21회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다.
22회 선전에도 아내를 그린 ‘실을 뽑는 여인’으로 다시 입선했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식민지 조선에도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1944년 장녀 인숙을 낳아 가정은 행복했다. 그러나 전시체제의 사정은 날이 갈수록 각박해졌다.
미국의 폭격이 평양에도 미치게 되자 박수근은 아내와 어린 남매를 금성 본가로 피신시키고
또 다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부인과 관련된 부분을 미리 서술합니다.
51세로 천당이 멀다며 떠난 ‘선한 화가’
박수근에게 전성기는 잠깐에 불과했다. 작품에 전념할 한창나이에 병마가 엄습했다.
일상의 과음이 계속되면서 신장과 간이 나빠져 몸이 부었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했다.
치료비가 없어 악화된 뒤에야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 중에 시신경을 잘라내 실명했다.
이후 짙은 안경을 끼게 됐고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다.
박수근은 한쪽 눈마저 침침해져 가는 악조건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할아버지와 손자'를
생전 마지막으로 제13회 국전에 출품했다.
점점 병이 악화되어 세브란스병원에서 신장염과 간염 진단을 받았다.
1965년에 접어들면서 박수근은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되어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
회복이 어려워 5월 5일 전농동 집으로 퇴원했다.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경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박수근이 세상을 떠난 그해(1965년) 아내 김복순은 어렵사리 남편이 남긴 작품 79점을 모아
10.6 ~ 10까지 소공동의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화가가 살아서는 못 이룬 개인전 ‘박수근 유작전’을 열었다.
그리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완성한 '유동(공기놀이)'을
그해 10월 16일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제14회 국전에 출품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1965년 박수근 유작전에서, '나무와 두 여인,' 소설 ‘나목’속의 그림을
사이에 두고 장녀 박인숙씨와 부인 김복순여사
-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나들이 복이었던 버선발에 흰고무신과 치마처고리,
(아마도 당시 이 여인은 남편 3년 상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