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죄인은 성당에 다니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저렇게 사는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성당을 나와?”라고 말하는 분을 직접 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쫓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함께 대화를 나눴던 한 청년이 생각납니다. 이 청년은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수감생활도 몇 차례 했었지요.
그런데 세례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점점 전의 자기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 많은 자신이 과연 성당에 다녀도 괜찮은 지를 묻더군요.
솔직히 죄에 대해서 이러한 부끄러움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노의 인상 깊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낙원까지 안내한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왜 낙원까지 안내하는 것인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까지 되어 있다면서 절대로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만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 부끄러움을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면서 표현합니다.
이 부끄러움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끄러움만으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떠했습니까?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이렇게 부끄러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용서받았다는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나의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계속해서 용서하고 계신다는 것, 따라서 죄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면서 힘차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