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은 6.25남침,31명 김신조일당 청와대 침투,푸에블로호 납치,주문진간첩선
침투 사건,북괴간첩 문세광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1968년 11월2일 북한
무장공비경북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지구에 침투,북한의 음흉한 흑심이 발견된
남침용땅굴,1976년 8월 18일 판문점 UN군에게 도끼만행사건, 아황산 폭파사건,
김연희(KAL)보잉 707편 폭파사건등 크고 작은 수많은 만행 왜? 사과 는
왜 안하는가?
북한 세습 정권의 멈출수 없는 도발은 권력자들이 명줄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3대째 이어진 세습정권의 약탈(掠奪)습성도 변하지 않는다
950년도 6.25 남침 전쟁도 김일성의 사상 대결과 김일성 자신이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인민)들을 노예로 만들어다스리고 싶은 야욕에서 비롯된 한반도
의 비극을 대를 이어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키면서 악의적인 도발로 이어져 갔다.
이런 과정속에 김씨 가문의 대를 이은 아들(김정일)과 손자(김정은)등은 김일성의
유지를 받든다'며 신격화 작업을 하는 과정에 체제 대결을 펼치며 왜곡시킨 북침
주장을 내세웠고, 백두혈통 운운하며, 혈족들에게 복종과 충성심을 심어 줬다.
이렇게 간택된 북한 체제를 움직이는 북의 권력자들은 권력의 맛에 길들어 지며
독제자 눈 맞추기에 혈안이 되면서~~
인민군 군부를 장악한 김정은 독제자의 좌지우지에 한건 하려는 맹종군부의 도발
충성심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덧에갇인 김정은의 입지가 진퇴양난(進退兩難)을
격게되자, 전쟁불사를 외치면서 남북접촉의 당위성도 진실을 왜곡시켰다.
북한의 준'전시상태 선포를 한 대표적 "도발" 이력서를
사설한다면
인터넷 자료 켑처사진.
1968년1월21일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 31명이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서울의
자하문을 통과하다 불신 검문중 기관총을 난사해 검문 중이던 종로 경찰서
최규식총경이 순직하고 공비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고 2명이도주해 전
군이 경계태세를 유지하면서 생포된 공비 김신조의 진술로 북한 124 군부대 소속
으로 진술한 것이다.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의 임무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 31명의 임무
는 박정희목아지 땔 임무라고 답했다.
소름끼치는 독설에 북한 인민들과 인민군은 독제자에게 길들여진 "승냥이"의
모습에서 측은한 감정마저 솟았다.
북한 해군이 공해상의 미해군 비무장 정보 수집함을 전투기
를 동원해 납치했다.
납치된 푸에블로호는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연합뉴스 켑처사진.
1968년1월25일 북한은 공해상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던 비무장 푸에브로 정보함
을 납치해 전쟁위기를 자초하자북한과 미국은 28차례 협상 끝에 김일성의 사과와
승무원 82명의송환과 시신1구를 송환 하는데 합의하고 선체는 북한이 몰수하는
것으로 종결시킨 북한은 인민들의 반미 감정을 쇠뇌시키는 전용의 활용 가치
를 극대화시켰다.
1968년 3월16일 강원도 주문진 어선 통제 초소에 무장공비 수명이 새벽1시에
나타나 경비중이던 강관수 순경을 죽이고 달아나면서 주문진 수상 검문소에
나타나 "우리는 인민 유격대다`라고 소리치고 반항하는 강순경을 칼로 죽였다.
이들이 타고온 간첩선이 북평 북쪽1.2㎞ 지점에서 교전이 일어나 간첩선이
발사한 82미리 무반동포 민간인 이대진씨 일가족 5명이 허무하게 사망시킨
북한의 도발에 대해 우리국민들은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인터넷 켑처사진)
1968년 11월2일 북한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지구에 나타
난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북한 발전 책자를 나누어주며 "인민유
격대"에 가입`하라며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일보 지면 사진.
이들의 만행은 평창군 산간 마을에서 이승복(10세)어린이가 "나는 공산당
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다,처참한 죽음을당했고, 주민의 신고를 접수한 군경은
향토예비군을 동원하여 31명의 무장공비 사살과 2명의 공비를 생포하면서
이 사건을 연말에 종결시켰다.
그러나 어느 미디어 잡지는 조선일보 `이승복 기사는 "오보"라며 기자는 현장에
없었고,이승복 군의 형도 만나지 않았으며, 조선일보 보도는 추측과 문장력
으로 쓴 작문 이라며 김대중 정부 출법과 더불어 서울시청·부산역 광장에서'오보
전시회'를 열고 조선일보는반공호"를 만들기 위한 소설을 섰다'는 주장에
법정 다툼이 일기도 했다.
결국 2006년 형사심판 최종심에서 '이승복 기사는 사실 보도로 김주언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김종배 편집장은 조선일보에 5백 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
하면서 이승복 어린이의 "공산당이 싫어요"의 진실 게임을 재확시킨 일도 북한의
쇠뇌공작에 걸려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인사라는 생각을 지울수없다.
1972년5월2일 북한을 방문(이후락)한 안기부장에 의해 7.4 남북공동 성명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됐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 정보부장.(인터넷 켑처사진)
남북공동 합의안은 6개항으로 1.외세의 의존과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 돌발적 군사적 사고방지를 위한상호간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에
상설 직통전화 가설.
3.남북 적십자회담 적극협조,4.상대방에 대한중상비방,무장도발 포기,5.남북
간 다방면의 교류,6남북 조절위원회 구성등의 발표에 기뿐마음을 감추지 안았다.
이런 합의 정신에 따른 남북간 회담에서 장소,일시,의제,절차 등에 합의한 역사
적인 이산가족 만남이 성사됐다.
1974년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된 국립국장에서 청중석 뒤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발사한 총탄에 영부인육영수 여사가 머리를 관통한 흉탄에 절명
했고,합창단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숨지면서 우리들의 안보관이 달라졌다.
이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인터넷 켑처 사진)
재일교포 조총련계 밝혀진 범인 문세광은 74년5월에 북한 왕래 공작선 만경봉호에서
박대통령의 저격지령을 받고권총은 일본 경찰서에서 훔치고 여권도 위조한 것으로
밝혀져,일본인이 개입된 의구심에 한일관계도 악화돼 갔다.
1974년11월15일 군사분계선 남측을 순찰하던 병사들은 지표의 증기를 발견하고
온천수를 발견 했다는 농담 속에선임하사 구정섭 중사가 월남전의 동굴작전의
경험에서 체험한 느낌에 토굴작업을 시작하자,이를 지켜보던 북한군 초소에서 약
3분간 3백 여발의 기관총 난사로 1시간15분 동안 간혈적인 교전이 일어 나기도 했다.
북한의 음흉한 흑심이 발견된 남침용 땅굴에 놀라움과 공포심은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다.
문공부 보도국 사진과 자료사진.
1978년10월17일- 1974년4월15일 고랑포 땅굴발견 이후 제3 땅굴은 74년 9월에 귀순한
김부성(39)의 제보로 발견된 이 땅굴은 지하 73㎡ 높이와 폭이 각각 2㎡로 무장병력
3-4 대열이 통과 할수 있는 수도권을 노린 회량용 땅굴이다.
북한이 파들어 온 땅굴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통일촌에서 3.5km로 서울까지
4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잊고 싶어도, 잊을수 없게 북한은 도발을 계속 이어갔다.
문공부 보도국 사진과 자료사진.
1976년8월18일 판문점 UN군 공동경비 구역내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장교 2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무자비하게 살해 당한 사건으로
남과북의전운이 최악의 상태로 치닫자 김일성의 사과로 일단락됐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짖을 저지른 북한은 시기심(猜忌心) 때문이다.
조선일보 신문사진.인터넷 켑처사진.
1983년10월9일 버마(미얀마)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고 서남아 순방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살해할 목적으로 버마국부아웅산 묘소 지붕위에 북한 특공대원 2명이
설치한 폭탄 테러에 17인의 각료가 희생된 현장 증거사진을 29년만에 공개
한 사유도 대외비에 묶겨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87년11월29일 북한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을 기내에두고 내린 시한 폭탄에 대한항공(KAL)보잉 707편
탑승객 115명이 버마 영공에서 공중 분해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북한 김정일의 지시로 대한항공의 폭파를 자백한 김현희의 기자회견
(인터넷 켑처사진)
이들의 탑승을 추적하다 체포한 바레인 당국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김현희,김승일 신변을 인도하면서 밝혀낸 증거물인암호문과 독극물 켑슬 등과
자살한 김승일의 사체와 함쎄한국에 인도하자, 전세계는 충격과 분노로
북한을 성토했다.
조사를 마친 김현희는1988년 1월15일 내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돌아가신 분들과 가족
들을 생각하면 죽고 싶은 심정 이라며 울먹이는 모습을 시청하던 국민들은 치를 떨면서
북한의 잔인성에 할말을 잃었다'했다.
남북간 화해의 장이 열리면서 우리국민들도 들뜬 기분에 흡족한 마음을 주고 받았다.
1991년9월17일에 남북이 분단된 이후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은 46년만에
유엔총회에서 정식회원국으로 승인되면서 동년 12월13일에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남측 정원식 국무총리와북측 정무원 연형식
인민공화국 총리가 합의서를 교환하고 서명했지만,북한은 이를 남측탓 이라며
폐기시켰다.
인터넷 켑처 자료사진.
1993년3월12일 북한은 국제원력(IAEA)기구의 "핵"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핵확산 금지조약
(NPT)탈퇴를 선언하면유엔의 인권 결의안 채택을 비난하며 핵을 이용한 북·미 수교를 위해
일괄타결 하자며 한·미 연합훈련인 팀스피르트 훈련중단 요구를 하는 등 억지 논리를 펼치
는 북한의 갈지자 행보에 우리정부의 대북정책도 맞장구 치며 따라 갔다.
이런 가운데 1994년 5월에 북한은 식량난 위기를 겪으면서 7월8일 김일성의 급사로 7월25일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을 연기한다`며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한국 정부에 통보해 오자, 우리
정부는쌀15만 톤을 인도주의 측면에서 지원했다
인터넷 켑처사진.
1998년6월16일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 회장이 소 501마리를 몰고 방북한 정회장은
또다시 소500 마리를 몰고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면담을 하고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키고
3차례 방북을 통해 서해안 공단 개발에도 성과를 올렸다.
이런 속에서도 북한의 대남 도발은 그칠 마음이 없었다.
북한군 유고급 잠수함이 우리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예인됐다.인터넷 켑처사진.
998년6월23일 북한군 유고급 잠수정이 남한 꽁치 어선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우리 해군함정
이 예인하고 보니침투 공작조 9명 모두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7월11일 강화도 앞바다
무장간첩선 지휘관 문책인사도 단행했다.
이날에 방북했던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귀환했지만, 북의 잠수함 사건에 묻힌 현대의
성과는 이목을 끌지못했다.
해군은11월에 여수앞 바다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을 바다에 수장시키면서 군의 체면
은 그나마 유지됐다.
역지사지,진퇴양난에 딱 어울리는 정부의 미온적인 대북정책에 우리 기업인과 국민들도
소신없긴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갑질에 대항하려는 투지가 부족한 것같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