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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捨我相(자사아상)-아상(我相-나를)을 내 스스로 버리니
逈脫煩惱(형탈번뇌)-마음 괴로움에서 멀리 벗어났고
自拘慾心(자구욕심)-욕심은 자기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니
體輕下心(체경하심)-마음을 내려놓으니 체중이 가볍다
농월(弄月)
귀하고 감사한 여생 위해 생불(生佛)을 모셨다 !
먼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는 김동리의 단편 소설 “등신불(等身佛)” 줄거리를
말하고자 한다.
필자의 고향 진주부근 사천시 곤명면(昆明面) 용산리(龍山里) 봉명산(鳳鳴山) 다솔사(多率寺),
필자의 어린 시절 봄 소풍은 항상 다솔사(多率寺가 정해진 곳이었다.
필자의 다솔사 소풍시절
이곳에는 1930년~40년 사이 만해 한용운(韓龍雲)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 항일(抗日)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근거지였다.
다솔사(多率寺) 주지이며 경남대학교 전신인 해인대학교 설립자인 최범술(崔凡述),
김동리의 형님인 동양철학의 대가이며 광복후 문교부장관 유네스코 한국위원을 지낸 김법린(金法麟), 김동리(金東里)등 문단의 거성(巨星)들이 모여서 항일을 논하는 사찰이었다.
그리고 필자에게 붓글씨를 가르쳐준 도연(陶然) 김정(金正)스승님도 다솔사를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현재 다솔사(多率寺)의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은 도연(陶然) 스승님이 85~7세 때인가 쓰신 것으로 기억된다.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도연(陶然) 선생
아래는 김동리의 수필집에 있는 회고(回顧)다.
【1937년 가을인가, 38년 봄인가, 만해 한용운선사가 다솔사(多率寺)에 왔을 때의
일이다. 연락을 받고 다솔사로 달려갔다. 절 큰방에는 만해와 내 형님(김법린),
주지 최범술씨가 앉아 있었다. 만해(萬海)가 무슨 이야기 끝에
“범부,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焚身供養)한 분이 있소?” 하고
형님(범부 김법린)에게 물었다.
“형님이 못 보신 걸 난들 어떻게 알겠소” 형님의 대답이었다.
“분신공양(焚身供養)이 뭡니까?” 내가(김동리) 물었다.
최범술 주지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심한 충격 을 받았다】
※분신공양(焚身供養)-소신공양(燒身供養)과 같은 말로
자기 몸을 불에 태워 부처 앞에 바침.
【머리 위에 벌겋게 단 불덩어리 향로(香爐)를 쓰고 합장한 채 자기 몸을 스스
로 불태워 성불(成佛)에 이른다】는 이야기.
김동리는 몸에 소름이 끼치고, 아래턱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고 수필집에서 회고했다.
그 충격은 가슴속에 20여 년간 똬리를 틀었고,
결국 1961년 11월 “사상계”에 “만적”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가슴속 멍울을
풀어냈다.
이것이 “등신불(等身佛)” 이다.
김동리가 등신불을 집필한 다솔사 안심료(安心療)
다솔사(多率寺) 요사채(寮舍寨) 안심료(安心療)
다솔사 안심료(安心療)는 만해(萬海)가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였던 곳이며
김동리의 단편소설 등신불의 산실(産室)로 알려져 있다.
■등신불(等身佛)
※아래 요약된 “등신불(等身佛)”내용 중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원문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알기 쉽게 필자가 편집(偏執)을 하였다.
등신불(等身佛)은 중국 양자강(揚子江)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이름이다.
나(김동리?)는 이 등신불 불상에 대해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는다.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淨願寺)라는 먼 이역 중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었는지를 이야기 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태평양 전쟁)으로 끌려 나간 것은
1934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중국 남경(南京)에 도착되었다.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인도지나나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어림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남경에 머물수록 그만치 우리의 목숨이 더 연장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교체부대가 하루라도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빌고 있었다.
실상은 그냥 빌고 있는 심정만도 아니었다.
이 기회에 나는 꼭 나의 목숨을 건져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런 기회를 위하여 미리 준비(조사)까지 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 학자로서 일본에 와 유학을 하고 돌아 간 대정대학 출신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해 둔 것이 있었다.
나는 감추어둔 작은 쪽지에서 “남경 진기수(陣奇修)”란 이름을 발견했을 때,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낯선 중국에서, 더구나 나 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 출신 학병으로써,
그를 찾고 못 찾고 하는 일은 곧 내가 죽고 사는 판가름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우리 부대가 앞으로 사흘 이내에 남경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
조마조마한 고비에 정심원(靜心院--남경에 있는 중국인 불교 포교당)에 있는
포교사(布敎師)를 통하여 진기수씨가 남경 교외의 서공암(棲空庵)이라는 작은 암자에 독거(獨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내가 서공암(棲空庵)에서 진기수시를 찾을 때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 합창을 올리며 무수히 머리를 수그림으로써 나의 절박한 사정과
그에 대한 경의를 먼저 표한 뒤 솔직하게 나의 처지와 용건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처음 보는 타국 청년,
그것도 중국의 적군인 일본 군복을 입은 나에게 그러한 협조를 쉽사리 약속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약간 찡그러지며 입에서는 곧 거절의 선고가 내릴 듯 한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한 흰 종이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 폈다.
그리고는 바른편 손 식지 손가락 끝을 입으로 깨물어서 살을 떼어낸 다음
그 피로써 다음과 같이 썼다.
“願免殺生 歸依佛恩(원면살생 귀의불은)”
“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
나는 이 여덟 글자의 혈서를 두 손으로 받들어 그의 앞에 올린 뒤, 다시 합장을 했다.
이것을 본 진기수씨는 분명히 얼굴빛이 달라졌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진기수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따라 오게”
나는 곧 그의 뒤를 따라 갔다.
깊숙한 골방이었다.
진기수는 나를 그 컴컴한 골방 속에 들여보내고 자기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조금 뒤 그는 법의(法衣중국 승려복) 한 벌을 가져와 방안으로 드밀며,
“이걸로 갈아입게” 하였다.
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사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가슴 속을 후끈하게 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간소한 저녁상이 들어왔다.
내가 빈 그릇을 문밖으로 내어놓자 밖에서 진기수씨가 어떤 늙은 중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 분을 따라가게. 소개장은 이분에게 맡겼어.
큰절(本刹)의 내법사 스님한테 가네”
“……………”
나는 무조건 네, 네, 하며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살려 주려는 사람에게 무조건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길은 일본 병정들이 알지도 못하는 산속 지름길이야.
한 백 리 남짓 되지만 오늘이 스무 하루니까 밤중에 달빛도 좀 있을 게구……
그럼…
불연(佛緣) 깊기를...
나무관세음보살.”
그는 나를 향해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
나는 목이 콱 메여 옴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돈 채 나도 그를 향해 합창을 올렸다.
어둡고 험한 산길을 경암(鏡岩나를 데리고 가는 늙은 중)은 거침없이 걸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 가며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정원사 산문 앞에 닿았을 때는 이튿날 늦은 아침녘이었다.
경암은 나를 데리고, 청정실(淸淨室)이란 조그만 현판이 붙은 조용한 집 앞에 와서
기척을 했다.
방안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키가 큰 노승이 미소 띤 얼굴로 경암과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노승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자리 앉기를 권한 뒤,
경암이 내어 드린 진기수씨의 편지를 펴 보았다.
“불은(佛恩)이로다.”
※불은(佛恩)-부처의 거룩한 은혜(恩惠)
편지를 읽고 난 노승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노승이 이 절의 주지를 지낸 원혜대사(圓慧大師)로 진기수씨의 법사(法師)스님이란 곧 이분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원혜대사의 주선으로 그가 거처하고 있는 청정실 바로 곁의 조그만
방 한 칸을 혼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그 방으로 인도해 준 젊은이는 원혜대사의 시봉(侍奉)이었다.
“저와 이웃이죠.”
그리고 자기 이름을 청운(淸雲)이라 했다.
나는 방 한 칸을 따로 쓰고 있었지만 결코 방안에 들어앉아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나를 죽을 고비에서 건져 준 진기수씨와 원혜대사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예불을 끝내면 청운과 함께 청정실 안팎과
앞뒤의 복도와 뜰을 먼지 티끌 하나 없이 쓸고 닦았다.
다른 스님들을 따라 산에 가 약도 캐고 식량 준비도 거들었다.
청운에게 중국어도 배웠다.
졸음이 와서 견디기가 어려울 때는 밖으로 나와 어정대며 바람을 쐬곤 했다.
그러는 동안 으례껏 가는 곳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금불각(金佛閣)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 법당 구경을 먼저 했다.
내가 법당에서 얻은 감명은 우리나라의 큰 절이나 일본의 그것에 견주어 그렇게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었다.
기둥이 더 굵어도 그저 그렇고, 불상이 더 큰 것도 놀랄 정도는 아니요,
그 밖에 채색이나 조각에 있어서도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더 정교한 편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내가 특이하게 생각 하게 된 것은 금불(金佛)을 구경한 뒤였다.
금불각 속에 모셔져 있는 등신불(等身佛)을 보고 받은 깊은 감명이 그 절의 모든 것을, 특히 법당에 모셔져 있는 위의 큰 세 불상을,
거룩하게 느끼게 하는 어떤 압력 같은 것이 되어 나타났다고나 할까.
추녀와 현판을 모두 돌아가며 도금(鍍金)을 입히고 네 벽에 새긴 조상(彫像)과 그림에 도금(鍍金)을 많이 써서 금빛이 현란했다.
나는 속으로 그 아끼고 위하는 것이 보나마나 대단한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청운이 중국어를 가르쳐 주려고 왔기에,
“저 금불각이란 게 뭐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물어 보았다.
“왜요?”
청운이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구경 갔더니 문을 안 열어 주던데,”
“지금 같이 가 볼까요?”
“뭘, 다음에 보지.”
“담에라도 그럴 거예요, 이왕 맘 난김에 가 보시구려.”
청운이 은근히 권하기에 그를 따라 나갔다.
이번에는 청운이 숫제 금불각을 담당한 노승에게서 열쇠를 빌어 와서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채 그도 합장을 올렸다.
나는 그가 문을 여는 순간부터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그가 합장을 올릴 때도
그냥 멍하니 불상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선 내가 예상한 대로 좀 두텁게 도금을 입힌 불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그러한 불상(佛像)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향로(香爐)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臺)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었다.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게 석대를 쌓고 추녀와 현판에 금물을 입힌 금불각 속에
안치되어 있는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불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나 할까,
너무도 거리가 먼, 어이가 없는,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불상(佛像),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香爐)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懊惱)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적도 상상 한 적도 없는 그러한 가부좌상(跏趺坐像)이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미묘한 충격을 나는 어떠한 말로써도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처음 보았을 때 받은 그 경악(驚愕)과 충격이
점점 더 전율(戰慄)과 공포로 변하여 나를 후려갈기는 듯 한 어지러움에
휩싸일 뿐이었다고나 할까.
곁에 있던 청운이 나의 얼굴을 들아다 보았을 때도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정강이와 아래턱을 그냥 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佛像)도 아니야!)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나의 목구멍은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도 새어 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내가 청운과 더불어 원혜대사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스님은,
“어저께 금불각 구경을 갔었니?”
물었다.
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참배했었다고 대답하자 스님은 꽤 만족한 얼굴로,
“불은(佛恩)이로다”
했다.
나는 맘속으로 그건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깨달았으나 굳이 입을 닫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스님(원혜대사)은 내 맘속을 헤아리는 듯,
“그래 어느 부처님이 제일 맘에 들더냐?”
물었다.
나는 실상 그 등신불(等身佛)에 질리어 그 곁에 모신 다른 불상들은 거의 살펴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른 부처님은 미처 보지도 못했어요.
가운데 모신 부처님이 어떻게나 무, 무서운지,”
나는 또 아래턱이 덜덜덜 떨리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원혜대사는 말없이 나의 얼굴(아래턱이 덜덜덜 떨리는)을 가만히 건너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나는 지금 금방 내 입으로 부처님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왜 그런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한 듯한 야릇한 반발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아니었어요.
부처님의 상호(相好) 같지 않았어요.”
나는 전신의 힘을 다하여 겨우 이렇게 말해 버렸다.
“왜, 머리에 얹은 것이 화관(花冠)이 아니고 향로(香爐)라서 그러니?
그렇지, 그건 향로(香爐)야.”
원혜대사는 조금도 나를 꾸짖는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그러한 불만에 구미가 당기는 듯 한 얼굴이었다.
“…”
나는 잠자코 원혜대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청운이 두어 번이나 나에게 눈짓을 했을 만큼 나의 두 눈은
스님을 쏘아 보듯 하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하면 부처님이 아니고 나한(羅漢)님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나한님도 머리 위에 향로를 쓴 분은 없잖아.
오백나한(五百羅漢)중에도,”
나는 역시 입을 닫친 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러나 원혜대사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지, 본래는 부처님이 아니야. 그러나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게 됐어.
본래는 이 절 스님인데 성불(成佛)을 했으니까 부처님이라고 부른 게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스님은 말을 마치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나도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청정실로 건너 올 때 청운은 나에게 턱으로 금불각 쪽을
가리키며
“나도 첨엔 이상했어, 그렇지만 이 절에선 영검(靈劍)이 제일 많은 부처님이라고.”
“영검(靈劍)이라고?”
나는 이렇게 물었지만 실상은 청운이 서슴지 않고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말에
더욱 놀랐던 것이다.
조금 전에도 원혜대사로부터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때까지 나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습관화된 생각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청운은 계속해서 들려주었다.
스님의 이름은 잘 모른다.
당(唐)나라 때다.
일천수백 년 전이라고 한다.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成佛)을 했다.
나도 청운에게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란 말을 들었을 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잇달아 눈을 감고 합장을 올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의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염불이 흘러 나왔다.
아아, 그 고뇌! 그 비원(悲願)!
나의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번져 나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는 발작과도 같이 곧장 염불을 외었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오.
그 뒤에 여러 번보고 나니까 차츰 심상(尋常)해지더군.”
청운은 웃으며 나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심상(尋常)-대수롭지 않고 예사롭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아무래도 석연치 못한 것이 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成佛)을 했다면 부처님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부처님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모든 불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은 거룩하고 원만하고
평화스러운 상호(相好)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가까운 부처님다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금불각의 등신불(等身佛)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
고뇌(苦惱)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 한 얼굴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큰 깨달은 보다도 그렇게 영검(靈劍)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의 머릿속에서는 잠시도 이러한 의문들이 가셔지지 않았다.
더구나 청운에게서 소신공양으로 성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금불이 아닌
새까만 숯덩이가 곧잘 눈에 삼삼 거려 배길 수 없었다.
사흘 뒤에 나는 다시 금불을 찾았다.
사흘 전에 받은 충격이 어쩌면 나의 병적인 환상 까닭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과, 또 청운의 말대로 “여러 번” 봐서 “심상(尋常)해”진다면 나의 가슴에 사무친 “오뇌(懊惱)와 비원(悲願)”의 느낌의 감각도 다소 무디어지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문이 열리자, 나는 그날 청운이 하던 대로 이내 머리를 수그리며 합장을 올렸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눈까풀과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내가 눈을 떴을 때 금불(金佛)은 사흘 전의
그 모양 그대로 향로(香爐)를 이고 앉아 있었다.
거룩하고 원만한 것의 상징인 듯 한 부처님이 상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가부좌상 임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전날처럼 송두리째 나의 가슴을 움켜잡는 듯 한 전율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나의 가슴은 이미 그러한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으로 메워져 있었고 또,
그에게서 “거룩하고 원만한 것의 상징인 부처님의 상호”를 기대하는 마음은 가셔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청운과 더불어 원혜대사에게 저녁 인사를 갔을 때
스님은 나를 보고,
“너 금불을 보고 나서 괴로워하는구나?”
했다.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너 금불각에 있는 그 불상의 기록을 봤느냐?”
스님이 또 물으시기에 내가 못 봤다고 했더니, 그러면 기록을 한번 보라고 했다.
나는 스님께 합장하고 물러나와 곧 금불각으로 올라갔다.
금불각의 노승이 돌함(石函)에서 내어 준 폭이 한 뼘 남짓,
길이가 두 뼘 가량 되는 책자다
두터운 표지 위에는 금글씨로
“만적선사소신성불기(萬寂禪師燒身成佛記)”라 씌어 있었다.
표지를 젖히자 그 위에 사연은 금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萬寂法名俗名曰耆姓曹氏也金陵出生父未詳母張氏改嫁謝公仇之家仇
有一子名曰信年似與耆名十有餘歲一日母給食干二兒秘置痢信之食
耆偶窺之而按是母貪謝家之財爲我故謀害前室之子以如此耆不堪悲懷
乃自欲將取信之食母見之驚而失色奪之曰是非汝之食也何取信之食也
信與耆默而不答數日後信去自家行蹟渺然耆曰信巳去家我必携信然後
歸家卽以隱身而爲僧改稱萬寂以此爲法名住於金陵法林院後移淨願寺
無風庵修法干海覺禪師寂二十四歲之春曰我生非大覺之材不如供養吾
身以報佛恩乃燒身而供養佛前時忽降雨沛然不犯寂之燒身寂光漸明忽
懸圓光以如月輪會衆見之而震感佛恩癒身病衆曰是焚之法力所致競擲
私財賽錢多積以賽鍍金寂之燒身拜之爲佛然後奉置干金佛閣時唐中宗
十六年聖曆二年三月朔日】
【만적(萬寂)은 법명(法名)이요, 속세이름은 기(耆), 성은 조(曹)씨다.
금릉(金陵)서 났지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 장(張)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했는데 사구(謝仇)에게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을 신(信)이라 했다.
나이는 기(耆)와 같은 또래로 둘 다 여나믄 살씩 되었었다. 하루는 어미(장씨)가
두 아이에게 밥을 주는데 가만히 독약(毒藥)을 신(信)의 밥에 감추어 넣었다.
기(耆)가 우연히 이것을 엿보게 되었는데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사(謝)씨 집의 재산을 탐냄으로써 전실 자식인 신(信)을
없애려고 하는 짓이라 하였다.
기(耆)가 슬픈 맘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신(信)의 밥을 제가 먹으려 할 때 어머니가 보고 크게 놀라 질색을 하며 그것을 빼고 말하기를,
“이것은 너의 밥이 아니다. 어째서 신(信)의 밥을 먹느냐” 했다.
신(信)과 기(耆)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뒤 신(信)이 자기 집을 떠나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기(耆)가 말하기를
신(信)이 집을 나갔으니 내가 반드시 찾아 데리고 돌아오리라 하고
곧 몸을 감추어 중(僧)이 되고 이름을 만적(萬寂)이라 고쳤다.
만적(萬寂)은 처음에는 금릉에 있는 범림원에 있다가 나중은 정원사 무풍암으로 옮겨서, 거기서 혜각선사에게 법(法)을 배웠다.
만적(萬寂)이 스물 네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본래 도(道)를 크게 깨칠 인재가 못되니 내 몸을 소신공양(燒身供養)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과 같지 못하다 하고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치는데,
그 때 마침 비가 쏟아졌으나 만적의 타는 몸을 적시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불빛이 환하더니, 홀연히 보름달 같은 원광(圓光)이 비치었다.
모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불은(佛恩)을 느끼고 모두가 제 몸의 병을 고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만적의 법력 소치라 하고 다투어 사재를 던져 새전(賽錢)이 쌓여졌다.
새전(賽錢)으로 만적의 탄 몸에 금을 입히고 절하여 부처님이라 하였다.
그 뒤 금불각에 모시니 때는 당나라 중종 십 육년 성력(聖历연호) 이년 삼월 초하루다.】
내가 이 기록을 다 읽고 나서 청정실로 돌아가니 원혜대사가 나를 불렀다.
“기록을 보고 나니 괴롬이 덜하냐?”
스님이 물었다.
“처음같이 무섭지는 않았읍니다마는 그 괴롭고 슬픈 빛은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일이야, 기록이 너무 간략하고 섬소(纖疏)해서……”
했다. 그것이 자기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한 말씨였다.
“그렇지만 천 이백 년도 넘는 옛날 일인데 기록 이외에 다른 일을 어떻게 알겠읍니까?”
또 내가 물었다.
이에 대하여 원혜대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산(절)에서는 그것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러니까 그만치 금불각의 등신불에 대해서는 모두들 그 영검을 두려워하고 있는 셈이라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원혜대사가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물론 천이백 년간 등신금불(等身金佛)에 대하여 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원혜대사가 간단히 정리한 이야기다.
만적이 중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대개 앞의 기록과 같다.
그러나 그가 자기 몸을 불살라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동기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다른 이야기가 몇 있다.
그것을 차례로 쫓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만적(萬寂)이 처음 금릉 법림원에서 중이 되었는데 그때 그를 거두어 준 스님에
취뢰(吹賴)라는 중이 있었다. 그 절의 공양을 맡고 있는 공양주 스님이었다.
만적(萬寂)은 취뢰(吹賴) 스님의 상좌로 있으면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취뢰 스님이 그에 대한 일체를 돌보아 준 것이다.
만적이 열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가 법림원에 들어온지 오년 뒤, 취뢰 스님이 열반하시게 되자 만적은
스님(취뢰)의 은공(恩功)을 갚기 위하여 자기 몸을 불전(佛典)에 헌신할 결의를 했다.
만적이 그 뜻을 법사(법림원의) 운봉선사(雲峰禪師)에게 아뢰자 운봉선사는 만적의
그릇(器) 됨을 보고 더 수도(修道)를 계속하도록 타이르며 사신(捨身)을 허락지 않았다.
※사신(捨身)-보은(報恩)을 위하여 속계(俗界)에서 살을 찢거나 불에 지지고,
팔을 끊거나 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불문(佛門)에 들어가는 수행(修行)
만적(萬寂)이 정원사의 무풍암에 해각선사를 찾았다는 것도
운봉선사의 알선에 의한 것이다.
그가 해각선사 밑에서 지낸 오 년간의 수도생활이란 뼈를 깎고 살을 가는 정진이었으나 법력(法力)의 경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만적(萬寂)이 스물 세 살 나던 해 겨울에 금릉 방면으로 나갔다가
전날 열 세 살 때 어머니 장(張)씨의 미움으로 집을 나간 사신(謝信)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는 이 사신(謝信)을 찾아 역시 집을 나왔다가 그를 찾지 못하고 중이 된 채 어느덧 꼭 삼십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다시 만난 사신(謝信)을 보고는 비록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린
만적(萬寂)으로서도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착하고 어질던 사신(謝信)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고,
사신(謝信)은 문둥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적(萬寂)은 자기의 목에 걸렸던 염주를 벗겨서 사신(謝信)의 목에 걸어 주고
그 길로 곧장 정원사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만적은 화식(火食)을 끊고 말을 잃었다.
이듬해 봄까지 그가 먹은 것은 하루에 깨 한 접시씩뿐이었다
(그때까지의 목욕 재개는 말할 것도 없다).
※화식(火食)-불에 익혀 만든 음식
이듬해 이월 초하룻날 그는 법사 스님(운봉선사)과 공양주 스님 두 분만을 모시고
취단식(就壇式)을 봉행했다.
먼저 법의(法衣)를 벗고 알몸이 된 뒤에 가늘고 깨끗한 명주를 발끝에서 어깨까지
전신에 감았다.
그리고는 단(壇)위에 올라가 가부좌(跏趺坐)를 개고 앉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그가 염불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곁에서 들기름 항아리를 받들고 서 있던
공양주 스님이 그의 어깨에서부터 기름을 들어부었다.
기름을 다 붓고, 취단식이 끝나자 법사 스님과 공양주 스님은 합장을 올리고
그 곁을 떠났다.
기름에 젖은 만적은 그때부터 한 달 동안(삼월 초하루까지) 단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부좌를 갠 채, 합장을 한 채, 숨 쉬는 화석(化石)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례에 한 번씩 공양주 스님이 들기름 항아리를 안고 장막(帳幕)
(흰 천으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와서 어깨에서부터 다시 기름을 부어 주고 돌아가는 일밖에 그 누구도
이 장막 안을 엿보지 못했다.
이렇게 한 달이 찬 뒤, 이날의 성스러운 불공에 참여하기 위하여 산중의 스님들은
물론이요, 원근(遠近) 각처의 선남(善男) 선녀(善女)들이 모여들어,
정원사 법당 앞 넓은 뜰을 메웠다.
대공양(大供養-소신공양(燒身供養)을 가리킴)은 오시 초에 장막이 걷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자기 몸을 불에 태워 부처 앞에 바침.
오백을 헤아리는 승려가 단(壇)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선 가운데 공양주 스님이 불 담긴 향로(香爐)를 받들고 단 앞으로 나아가 만적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와 동시 그 앞에 합장하고 선 승려들의 입에서 일제히 아미타불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만적(萬寂)의 머리 위 향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의 정진으로 말미암아 거의 화석(化石)이 되어 가고 있는 만적(萬寂)의 육신이지만, 불기운이 그의 숨골(정수리)을 뚫었을 때는 저절로 몸이 움칠해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만적(萬寂)의 고개와 등가슴이 조금씩 앞으로
숙여져 갔다.
들기름에 절은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하여 타는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백의 대중(승려)은 아무도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신시(申時) 말(末)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단(壇)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만적의 머리 위로는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염불을 올리던 중들과 그 뒤에서 구경하던 신도들이 신기한 일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만적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원광(圓光)이 씌워져 있었다.
이때부터 새전(賽錢)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 뒤 삼 년간이나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새전(賽錢)으로 만적(萬寂)의 타다가 굳어진 몸에 금(金)을 씌우고
금불각(金佛閣)을 짓고 젓대를 쌓았다.
이렇게 해서 등신불(等身佛)이 탄생 했다.
※새전(賽錢)-부처 앞에 돈을 바침
원혜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맘속으로 이렇게 해서 된 불상이라면
과연 지금의 저 금불각의 등신금불같이 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처님(불상) 가운데서 그렇게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아로새긴
부처님(등신불)이 한 분쯤 있는 것도 무방한 일일 듯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난 원혜대사는 이제 다시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다.
“자네 바른 손 식지를 들어 보게”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이야기해 오던 금불각이나 등신불이나 만적의 분신공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달포 전에 남경 교외에서 진기수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내 입으로
살을 물어 뗀 나의 식지를 쳐들었다.
그러나 원혜대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더 말이 없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이제 그만 손을 내리어도 좋다는 건지 뒷말이 없다.
“……………”
“……………”
어머니 정씨의 반인륜적인 모습에 상처받아 집을 나가 문둥이가 된 신(信),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형제)이지만
자기(만적)와 어머니로 인해 문둥이가 된 신(信)을 위해
부처님에게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불은(佛恩)을 힘입어 해원(解寃)하려는 만적의
등신불(等身佛)은 인간이 선(善)하게 살아야 됨을 말해주고 있다.
■부처님은 문둥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오현(五鉉84세) 대종사(大宗師)는 1932년생으로
현재 속초 신흥사(神興寺) 조실(祖室)로 게신다.
오현(五鉉)스님은 만해 한용운, 법정 스님처럼 문인(文人) 스님이시다.
오현(五鉉) 스님이 어려서 출가한 시절,
산속의 큰 절이라 해도 매우 가난하였다.
시기가 일제강점기라 절에는 가정을 가진 대처승(帶妻僧)들이 절의 재정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흔히 말하는 “이판사판(理判事判)” 즉 이판승 사판승(理判僧 事判僧)이란
말이 나왔다.
대처(帶妻)스님들의 가정생활의 경험으로 절 살림을 잘 꾸려 나갔지만
시대가 어려울 때라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현(五鉉)스님도 배가 고파 중이 되어 절에 들어갔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걸식(乞食 얻어 먹는)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필자 10세 되던 시절에도 아침마다 밥 얻으려 다니고 다리 밑에 잠자던 걸인들이
많았다.
오현(五鉉)스님이 주로 걸식(乞食)을 하러다니는 동네에,
걸식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문둥이였다.
그때는 문둥이 걸인이 많았고 때로는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어
문둥이 걸인이 나타나면 겁이 나서 빨리 숨곤 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오현스님은 번번이 그 문둥이만큼 밥을 얻을 수 없었다.
그 문둥이는 샘나게도 밥을 곧잘 얻었다.
글쎄 밥 주는 집에서 문둥이 걸인을 빨리 보내래서인지 아니면 더 불상해서인지는
몰랐지만 오현스님 생각으로는
자신이 문둥이만큼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있어야지요.
에이 빌어먹을 중 때려치우고 문둥이나 될란다!”
배고픈 오현스님은 정말로 문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문둥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문둥이가 밥을 걸식하는 비법(秘法)도 전수받고 그 문둥이와 같이
한 깡통에 밥을 비벼먹고 추운 겨울에는 한 거적더기속에서 같이 껴안고 잤다.
“처음에 이 문둥이는,
요놈 꼬마중놈 어디 맛좀봐라!
너 정말 문둥이가 될래?
하고 참으로 날 문둥이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드라마 “허준”에 보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이 나온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자기 아들에 대하여
“인간 됨됨이가 갖춰지지 않은 자에게는 가르침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친아들을 두고 허준에게 의술을 전수시킨 말이다.
아마 문둥이이가 생각하기를
“요놈은 문둥이가 될 자격이 있는 놈이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오현스님이 진실로 문둥이가 되기 위해 분별심(分別心)을 버렸다는 것을
문둥이가 깨닫게 된 어느 날,
추운 겨울밤을 새우고 일어나보니 그 문둥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는 새벽,
오현스님은 자기 옆에 이슬에 젖은 종이쪽지 한 장을 보았다.
“너는 훌륭한 스님이 될 터이니 부디 성불(成佛)하여라”
아마 이 문둥이도 한하운 문둥이 시인같이 인격 높은 사람이었나 보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사미승 오현은 문둥이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 순간이 바로 오현스님이 불은(佛恩)을 받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순간이었다.
필자가 평생 반려(伴侶)인 아내를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아들과 같이 살고 있다.
혼자가 된 사람은 실감하겠지만
모녀(母女)가 같이 사는 것은 그런대로 무난히 살아가는 것을 보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남자 둘이서 남은 인생을 같이 산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무리 이해심이 많고 아들이 효자(孝子)라도 쉽지 않은 것을 느낀다.
더욱이 사회 현상이 급변하는 시대에
한 세대의 차이는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생활의 가치관이 큰 차이를 나타낸다.
가족이 여러명이 같이 살때는 서로간에 불협화음이 있을때 충격파를 완화시키는
스폰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자둘이만 사는 공간에는 당사자 외는 중재역활을 할 사람이 없다.
예기치 않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순간적인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아들이 불효자라면 아예 작심하고 혼자 살면 되는데
아들 자랑이 아니라 아들 셋이 그런대로 효성(孝誠)스럽다.
같이 사는 큰아들도 마음이 선한 사람이다.
그렇다 !
이렇게 아들과 여생을 같이 사는 것도 감사한 인연(因緣)이다.
내가 변하면 될 것이 아닌가 !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였다.
미아리로 이사 온 어느 날 새벽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
여생(餘生)을 귀하고 감사하게 살라고 나에게 귀한 “생불(生佛)”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내가 저 생불(生佛)을 지성으로 모시면 나에게 불은(佛恩)이 올 것이다.
저 생불에 대하여 언제나 긍정적이고 칭찬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되는 은혜이며 감사인 것이다.
24시간 내 생활자체가 시장보고 음식만들고 빨래하고 독서하고 글쓰고,
인라인타고 역사유적지 탐방하고 잠자고 숨쉬는 것 까지 수행(修行)으로
생각을 바꾸면 부활(復活)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행복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고 현재 내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가를
수행(修行)하는 자세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불(生佛)을 통하여
매일 터득하고 있다.
개안신천지(開眼新天地)라
눈을 뜨니 새세상이 보이는 구나 !
밥맛도 잇고 잠도 잘자니 정말 감사할 일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