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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생지도(養生之道)
양생하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마음과 몸을 함께 다스리며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 습관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養 : 기를 양(食/6)
生 : 날 생(生/0)
之 : 갈 지(丿/3)
道 : 길 도(辶/9)
1. 웰빙의 시대에
오늘날은 가히 웰빙 지향의 시대이다. 사람마다 건강과 장수에 관심이 많다. 방송국마다 건강 관련 프로그램은 필수이며 신문마다 건강 관련 기사는 단골 메뉴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건강 관련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많은 정보를 모두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무척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정보보다 정선된 실천일 것 같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도 건강과 장수는 가장 바라는 소망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동쪽으로 사람을 보냈으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양생지도(養生之道)를 찾고 논하였던 것 같다. 사람 목숨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으며 건강하게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누가 뭐래도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의술을 발견하고 환자를 치료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건강하게 살다가 아름답게 죽는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며 알고는 있으나 실천이 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또 잘못 알고 잘못 실천하므로 오히려 건강과 장수를 해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약을 부정도 남용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의약이 넘치는 시대에 어떤 이는 약을 남용하고 어떤 이는 편집되게 약을 과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활 습관이 아닐까?
동서고금의 건강 관련 고언(苦言)들을 보면, 양생지도(養生之道) 즉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이 있다. 그것은 마음과 몸을 함께 다스리며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 습관을 가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양생지도(養生之道)를 소개하였는데 홍만종도 뒤지지 않는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양생(養生)하여 수(壽)를 기르는 방법 10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2. 홍만종이 말하는 양생지도(養生之道) 10句
怒甚偏費氣(노심편비기)
思多太損神(사다태손신)
노여움이 심하면 편벽되어 기운이 상하고, 생각이 많으면 정신(영혼)이 손상된다.
神瘐心易役(신유심이역)
氣弱病相引(기약병상인)
정신(영혼)이 병들면 마음이 고단하고, 기운이 쇠약해지면 병이 저절로 새겨난다.
勿使悲歡極(물사비환극)
當令飮食均(당령음식균)
슬퍼함과 기뻐함을 지나치게 하지 말고, 당연히 마시고 먹는 것을 고르게 해야 한다.
再三方夜醉(재삼방야취)
第一戒朝嗔(제일계조신)
두 순배 세 분배 거듭하여 밤 술에 취하지 말고, 제일 경계하여야 할 것은 아침에 노여워하지 말라.
夜靜鳴雲鼓(야정명운고)
晨與嗽玉津(신여수옥진)
고요한 밤이라도 구름에 북을 울리듯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맑은 물에 입 씻으라. (양치질하라)
妖邪難犯巳(요사난범사)
精氣自全身(정기자전신)
요망하고 간사한 내 몸 범하지 못하게 하려면, 정신과 기운을 다해 내 몸 온전히 하라.
若要無諸炳(약요무제병)
常須節五辛(상수절오신)
만일 그대 모든 병이 없기를 바라거든, 모름지기 항상 매운 것을 절제하라.
安神宣悅樂(안신선열락)
惜氣保和純(석기보화순)
정신(영혼)이 편안하면 즐겁기 마련이니, 기운을 아껴야만 화락함을 보전할 수 있다.
壽夭休論命(수요휴륜명)
修行本在人(수행본재인)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을 명이라고 하지 말라. 닦고 행하는 것이 모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若能遵此理(약능준차리)
平地可朝眞(평지가조진)
만일 이런 이치를 능히 따라 한다면, 땅에 살면서도 가히 참된 세상(옥황상제)을 알현할 수 있으리라.
이는 모두 10구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10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하기가 어렵다. 각자는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한다. 위에 제시한 건강하게 오래 사는 방법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살펴보자.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며 어떤 이는 그냥 내 멋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라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오만과 편견의 발로일 것이리라. 그뿐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인 실천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위에서 홍만종이 첫 번째로 강조한 것이 노여움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트레스 관리이며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를 내면 상대방에게 스트레스를 주지만 정작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바로 화를 내는 당사자이다. 만약 화를 내고도 스스로 그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사이코패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천향대학 의과대학 교수이며 순천향대학병원 소화기 내과 전문의인 박상흠 교수가 그의 저서 '건강을 위한 마음경영 4단계'에서 건강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마음경영이라고 하였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양산하는 환자는 그 어떤 치료에도 효험이 없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화병은 신도 다스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화병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출발한다. 노여움이 심하면 편벽되어 마음과 기운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편벽된다는 것은 마음과 기운이 한쪽으로 쏠리어 정신적 신체적 기능이 균형을 잃고 극도로 저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怒甚偏費氣).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 잡념 즉 고민이다. 세상의 온갖 번뇌가 온몸과 마음을 휘감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신이 손상되고 손상된 정신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온몸에 대한 통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思多太損神). 따라서 함부로 화를 내는 일이야말로 건강을 해치는 제일 해로운 것이 된다.
두 번째로 정신이 병들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노여움을 멀리하고 맑은 마음과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신이 병들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피로하게 되고 기운이 쇠약해져 저절로 병이 든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노여움에 빠지면 마음이 편벽되어 마음과 몸의 균형이 깨어져 온몸이 아프게 되는 현상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神瘐心易役, 氣弱病相引).
셋째, 슬퍼함과 기뻐함은 때로는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 또한 지나치면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한다. 슬픔에 너무 빠지면 이 또한 마음과 몸을 편벽되게 하고 균형을 잃게 한다. 또 술을 지나치게 가까이하게 될 수 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은 망가진다. 기쁜 일도 마찬가지다. 좋은 일이 생겨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놀면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에너지가 고갈되고 모든 생활의 균형이 깨어진다(勿使悲歡極).
축제에 너무 깊이 빠지면 죽음도 따르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공자도 논어에서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몸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樂而不淫, 哀而不傷/ 論語 八佾)'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슬픔과 즐거움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은 자기를 지키는 것임과 동시에 세상을 올곧게 하는 길이다.
넷째, 당령음식균(當令飮食均) 즉 당연히 먹고 마시는 것을 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장 실천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입맛에 맞는 음식만 찾기 마련이며 맛있는 음식은 과식하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피하기 쉽다. ‘모든 환자는 편식한다’는 말이 있듯이 특히 편식과 폭식이야말로 가장 나쁜 식습관이며 병을 부르는 행위이다. 편식과 폭식의 주요 원인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섯째, 재삼방야취(再三方夜醉) 즉 두 순배 세 분배 거듭하여 밤 술에 취하는 일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생활을 깨뜨린다. 여기서 두 순배 세 분배는 오늘날 말하는 2차 3차 술자리를 말하기도 하고 끝이 없이 술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성인병이 많은 것 역시 이 두 순배 세 분배의 술자리 때문인지 모른다.
옛날과 비교하여 오늘날은 밤이 짧다. 옛날에는 어두워지면 모두 불을 꺼야 한다. 그때부터 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기가 발달하여 밤에도 환하다. 그래서 밤에도 활동한다. 활동하는 밤은 밤이 아니다. 밤에 술자리 활동으로 밤을 새우는 일도 발생한다. 그러면 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침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면 아침에 노여워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여섯째, 제일계조신(第一戒朝嗔) 즉 제일 경계하여야 할 것은 아침에 노여워하지 말라고 한다. 아침에 노여워하면 종일 간다. 종일 가면 종일을 망친다.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하루를 망친다.
아침은 경건하고 경쾌하게 출발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망치는 원인은 무엇일까? 어젯밤을 밤답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젯밤을 충분하게 휴식하고 편안하게 보낸 사람은 오늘 아침에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
어젯밤에 두 순배 세 순배 술을 나눈 이유가 무엇일까? 개인의 술 습성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슬퍼함과 기뻐함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며 몸과 마음과 생활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 야정명운고(夜靜鳴雲鼓) 즉 고요한 밤이라도 구름에 북을 울리듯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고요한 밤은 적막하다. 적막하면 외롭고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 온갖 상념이 몸과 마음을 휘감는다. 고요한 밤일지라도 초연할 줄 알아야 한다. 초연하지 못하면 감상에 빠지고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여덟째, 신여수옥진(晨與嗽玉津) 즉 새벽에 일어나서 맑은 물에 입 씻으라고 한다. 이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양치질을 하라는 것이다. 양치질하는 일은 밤새 입안의 쌓인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이며 상쾌한 아침을 맞는 비결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에도 의학적으로 매우 권장하는 일이다.
아홉째 몸은 간사하고 요망하다. 그래서 온갖 사소한 일에도 반응하여 즐거워하고 힘들어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신과 기운을 다해 몸을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절제할 줄 아는 일이며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다. 그래서 정기자전신(精氣自全身) 즉 정신과 기운을 다해 내 몸 온전히 할 것을 강조한다.
열 번째, 약요무제병(若要無諸炳) 상수절오신(常須節五辛) 즉 만일 그대 모든 병이 없기를 바라거든 모름지기 항상 매운 것을 절제하라. 맵고 짠 것을 피하여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도 모든 의사가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맵고 짠 음식을 멀리하기가 쉽지 않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매운 음식이 대세로 유행하기도 했으며 단계적 매운맛을 정해 놓은 식당에서 친구들끼리 먹기 대회를 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유행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유행이 세상과 목숨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안신선열락(安神宣悅樂)이다. 정신(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마음이 편안하면 자연스럽게 즐겁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하여 즐거우면 기운을 아낄 수 있다. 그 기운을 아기면 화락함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그것을 오래 보전할 수 있다(惜氣保和純).
사람들은 오래 살고(壽) 일찍 죽는 것(夭休)은 정해진 하늘의 명(命)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닦고 행하는데 달려 있으니 명도 이에 따라 달라진다(修行本在人). 그러니 이러한 이치는 깊이 깨닫고 능히 따라 한다면(若能遵此理)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참된 세상에서 옥황상제를 알현(朝)할 수 있을 것이니 신선처럼 살게 될 수 있으리라(平地可朝眞).
종합하여 홍만종은 '양생하는 방법으로 욕심을 줄이는 게 제일이고 도가의 근본은 성내고 노여움을 타지 않는 것이 으뜸(養生之道 節慾爲上, 道家第一義 令人小嗔怒)'이라 하였다. 위와 같은 홍만종의 건강 비법에는 도가적인 모습이 많이 담겨 있다.
홍만종은 생전에 학문의 다양성을 강조하여 유학 중심의 조선 사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홍만종이 도가를 연구하고 도가적인 사상을 가진 데는 그의 귀양살이도 영향을 끼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밝힌 건강 비법은 오늘날에도 상당한 의미가 있으며 그 중심에는 마음 관리가 우선이다.
3. 건강을 위한 마음경영 4단계
다시 박상흠 교수의 위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박상흠 교수가 위의 책에서 강조하는 마음경영의 키워드는 지(知) 관(觀) 공(空) 통(通) 이다. 여기서 첫 번째 지(知)는 노자의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다. 소우주로서의 인간의 몸의 평화(건강)는 궁극적으로 마음의 다스림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곧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 했듯이 자신을 잘 알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경영의 두 번째 관(觀)은 심칠정지부심(審七情之浮沈)하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감정이 뜨고 가라앉음을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모든 환자는 상처받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상처받은 마음은 생활과 몸의 균형을 깨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감정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
환자(患者)에서 환(患)자의 의미는 근심 걱정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꿰멜 관(串)자에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자는 상처받은 마음을 꿰매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암 발생에 심리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 '칼 사이먼튼'의 '마음의 술'에는 암 환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에서 겪는 고립과 무시, 절망의 감정 등이 크게 작용한다고 했다. 따라서 스트레스나 소외감은 마음이 겪는 변비이며 마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주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흐름이 원활한가 정체되어 있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경영의 세 번째인 공(空)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무엇을 비울 것인가? 욕심과 좋지 않은 감정을 비우는 것이다. 그는 '마음(감정)의 변비를 해결하면 황금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황금은 건강과 행복이다. 밤새워 술을 마시는 것도 감정(즐거움과 슬픔)을 비우지 못한 탓이다.
그것들은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좋은 일이지만 잘못 발휘되면 몸과 마음과 생활을 망친다. 특히 좋지 않은 기억은 해롭다. 따라서 ‘기억을 비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는 지름길인 '세상을 향한 이해'를 생활화하고 내관(內觀)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힘을 기르며, 상대방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마음에 쌓인 감정을 분출하므로 마음속의 찌꺼기를 비우라고 주문한다.
마음경영의 네 번째인 통(通)은 모든 곳으로 통하도록 마음을 열라는 것이다. 통(通)은 사통팔달이다. 그러려면 막힘이 없어야 한다. 막힘이 없애려면 비워야 한다. 모든 마음의 상처의 근본 원인은 '3S'에 있다. '3S'는 정체(Stasis), 긴장(Stress), 차폐(Shielding)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해소하고 뚫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혜로운 반전을 이룰 것을 주문한다.
그 지혜로운 반전은 첫째, '감사합니다'의 생활화이다. 감사합니다는 건강을 보장하는 마법 같은 주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몸을 많이 움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편안하고 덜 움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편안한 만큼 건강은 나빠진다. 따라서 몸은 움직이는 것만큼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웃음을 생활화 하라고 한다. 웃음은 자율신경을 조절하여 '3S'를 해소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넷째는 받아들이기 연습을 하라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 긍정이며 자기 존중감을 가지라는 의미가 된다.
4. 1t의 생각보다 1g의 실천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래서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즉 천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행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존 듀이도 '모든 일에 중요한 것은 1t의 생각보다 1g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것 나도 다 알고 있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사람은 아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실천 의지가 깃든 앎이다.
지금은 수많은 건강 상식과 정보가 넘친다. 다른 분야의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제는 잘못된 지식과 정보다 그만큼 넘친다. 하여 달리 오늘날은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알아도 잘못 알고 있거나 각자의 편견으로 예단하기 때문에 잘못 실천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건강도 마찬가지이리라. 홍만종의 양생지도 10구(養生之道 10句)가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양생지도(養生之道)
장자(莊子)는 중국 전국시대(BC 403-221) 송나라 몽 출신의 저명한 중국 철학자로 제자백가 중 도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노자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본명은 주이다. 후세에 노자와 함께 부를 때 노장이라 부른다. 장자는 만물 일원론을 주창하였다. 양생주편(養生主篇)이다. 즉 자연을 거스르지 말고 무리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한 양생법이다.
전국시대 양(梁)나라 문혜왕의 요리사 가운데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소를 잡고 해체하는 솜씨가 능란해서, 손으로 소를 꽉 잡고, 어깨로 받치고, 발을 굳게 디디고, 무릎을 구부리면서 놀라운 솜씨로 소를 잡았는데, 그때 나는 소리가 상림지무(桑林之舞)와 경수지회(經首之會)에 들어맞았다 한다. 상림지무와 경수지회는 옛 음악을 말한다.
양문혜왕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기술이 어떻게 그런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때 포정은 "제가 추구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에서 시작해 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문혜왕이 감탄하며 "정말 굉장하구나 재주라고는 하지만 명인이 되면 이 정도까지 된단 말인가!"고 했다.
기술에서 도로 나아간다는 것은 형이하에서 형이상으로, 물체를 다루는 손에서 마음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 과정을 포정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처음으로 소를 잡았을 때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소 전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소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낍니다. 감각기관으로 파악하기를 그치고 온몸이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몸'으로 번역한 '신(神)'은 마음까지 포함한다. '내경'에서 신은 기(氣)를 통어(通御)한다고 했거니와, 온몸의 기가 신에 의해 통어됨으로써 신체 각 부분의 기능적 활동을 넘어 온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곧 기술을 넘어 도로 나아간 경지이다.
감각을 통한 지각과 신체적 훈련, 물체에 대한 경험이 오랫동안 성숙하면 급기야는 정신적 차원으로 상승하게 되고(여기에서 정신이란 본래의 한의학적, 기학적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物)과 심(心)의 경계가 없어져 혼연일체의 상태가 된다. 그때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나 계산, 분석 등을 넘어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사물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로의 상승은 또한 기술의 초월뿐만 아니라 사심(私心 또는 邪心)의 초월도 요구한다. 즉, 몸이 점차 대상과 합일해가는 과정 못지않게 마음의 때를 씻고 사물을 순수하게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달인, 예술가, 신의 경지에 도달한 전문인이라 할 것이다.
莊子 內篇 第3篇 養生主 第2章
양생의 비결은 무위자연의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02.庖丁解牛(포정해우) : 백정의 소 잡는 법도 (2/6)
庖丁為文惠君解牛(포정위문혜군해우)
手之所觸(수지소촉)
肩之所倚(견지소의)
足之所履(족지소리)
膝之所踦(슬지소기)
砉然嚮然(획연향연)
奏刀騞然(주도획연)
莫不中音(막부중음)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合於桑林之舞(합어상림지무)
乃中經首之會(내중경수지회)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 되었으며,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文惠君曰(문혜군왈):
譆(희)! 善哉(선재)!
技蓋至此乎(기합지차호)
문혜군이 말했다.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註)
○ 庖丁(포정) : 소 잡는 사람, 곧 백정(白丁). 孟子(맹자) 萬章(만장) 下 廩人繼粟(늠인계속) 庖人繼肉(포인계육)의 포인(庖人과 같다.
庖(포)는 포인(庖人)이고 이름이 丁이라는 견해(陸德明, 成玄英)가 있고 또 그것이 통설이지만 人과 丁은 모두 부역(賦役)에 동원되는 장정(壯丁)을 헤아리는 단위로 쓰이므로 굳이 따르지 않았다. 韓元震은 "포정이 소 잡는 일을 빌려 연독위경(緣督爲經: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의 입장)의 뜻을 비유한 것이다(借丁之解牛 以喩緣督爲經之意)"라고 풀이했다.
○ 文惠君(문혜군) : 가공의 인물로 누구를 빗대서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崔譔과 司馬彪 등은 양혜왕(梁惠王)이라고 했지만 兪樾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근거가 박약하다고 보고 따르지 않았다.
○ 手之所觸(수지소촉) : 손으로 쇠뿔을 잡음. 맨 처음에 손으로 쇠뿔을 잡고 소를 제압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所(소)에 대해서 赤塚忠은 '書經' 牧誓 편의 '너희들이 힘쓰지 않으면 너희들 몸에 죽음이 있을 것이다(爾所弗勗 其于爾躬有戮)'의 所와 같은 용법으로 보고 '만일~한다면'의 뜻으로 보았는데, 論語 雍也 편에도 '내가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버릴 것이다(予所否者 天厭之)'에서 所가 같은 용법으로 쓰인 용례가 있으므로 따를 만하다. 이 견해를 따르면 이하의 문장은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를 소에 기대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 肩之所倚(견지소의) :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함. 곧 소의 머리나 몸통을 어깨에 기대게 한다는 뜻이다.
○ 膝之所踦(슬지소기) : 무릎을 세워 소가 움직이지 않도록 누름. 踦(기)는 기울여 세운다[傾側]는 뜻이다.
○ 砉然嚮然(획연향연) : '획획' 하는 소리가 울림. 砉然(획연)은 소의 가죽과 뼈가 서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司馬彪)를 나타낸 의성어. 嚮然(향연)은 울리는 소리.
○ 奏刀騞然(주도획연) :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남. 奏(주)는 움직여 나간다는 뜻인데 칼을 쓰는 움직임이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하다는 뜻에서 절주(節奏)의 奏를 쓴 것이다. 騞(획)은 앞의 砉(획)과 같은 발음이지만 砉보다 더 큰 소리(崔譔)를 나타내는 의성어이다.
○ 合於桑林之舞(합어상린지무) :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됨. 상림의 무악은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음악(司馬彪).
○ 中經首之會(중경수지회) :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음. 中은 앞의 合과 같이 꼭 맞는다는 뜻. 經首(경수)는 함지악(咸池樂)의 악장(樂章) 이름(向秀, 司馬彪). 함지(咸池)는 황제(黃帝)가 만들고 뒤에 요(堯)임금이 증수(增修)하여 상제(上帝)에게 기우제를 지낼 때 연주한 音樂으로 전해진다(池田知久). 會는 음악의 절주(節奏), 곧 박자.
○ 譆(희) : 아! 감탄하는 소리(李頤).
○ 技蓋至此乎(기합지차호) :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蓋를 일반적으로 '개'로 읽으면서 뜻은 '대개' '어쩌면' 등으로 읽어 왔으나 蓋는 盍과 통용하는 글자(따라서 음도 '합'). 盍(덮을 합)은 보통 何不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何故(어떻게)의 뜻으로 쓰였다(方勇‧陸永品). 孟子의 경우에도 梁惠王 上의 蓋亦反其本矣(합역반기본의: 어찌하여 근본을 돌이켜보지 않는가), 公孫丑(손손축) 下의 蓋大夫王驩(합대부 왕환), 滕文公(등문공) 下의 蓋祿萬鍾(합록만종) 등에서 종종 蓋자가 盍자와 통용되는데 필사의 오류로 인한 듯하다.
庖丁釋刀對曰(포정석도대왈):
臣之所好者道也(신지소호자도야)
進乎技矣(진호기의)
始臣之解牛之時(시신지해우지시)
所見无非牛者(소견무비우자)
三年之後(삼년지후)
未嘗見全牛也(미상견전우야)
方今之時(방금지시)
臣以神遇(신이신우)
而不以目視(이불이목시)
官知止而神欲行(관지지이신욕행)
依乎天理(의호천리) 批大郤(비대극)
導大窾(도대관) 因其固然(인기고연)
技經肯綮之未嘗(기경긍경지미상)
而況大軱乎(이황대고호)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인데,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경락(經絡)과 긍경(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註)
○ 進乎技矣(진호기의) : 손끝의 기술에서 더 나아감. 進은 나아갔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기술의 차원을 넘어 도의 경지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뜻이다. 郭象은 "단지 도리를 기술에 붙인 것일 뿐이지 좋아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直寄道理於技耳 所好者 非技也)"라고 풀이했다.
○ 始臣之解牛之時(시신지해우지시) : 처음 신이 소를 잡을 때. 포정이 처음 소를 잡기 시작했을 때를 뜻한다.
○ 所見無非(全)牛者(소견무비우자) : 눈에 보이는 것이 온전한 소가 아님이 없음. 처음에는 소가 하나의 완전한 물체로 보였기 때문에 칼날이 지나가야 할 틈, 곧 자연의 결[道]이 보이지 않고 완전한 소만 보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칼을 대야 할지 몰랐다는 의미. 全자는 소가 뼈와 살, 근골 따위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물체로 보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른 판본에는 全자가 빠져 있지만 趙諫議 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郭慶藩).
○ 三年之後(삼년지후) 未嘗見全牛也(미상견전우야) :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가 보이지 않게 됨. 소가 하나의 연속적인 물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근골과 뼈, 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칼날이 지나갈 틈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초연히 태극(太極)을 이해하여 눈에 소 전체가 없게 되네[超然會太極 眼底無全牛)"라는 詩句에 보이는 全牛도 장자의 이 글에서 딴 것이다. 全牛가 없다는 뜻은 天理(자연의 결)가 보였다, 道가 텄다는 뜻이다.
○ 官知止(관지지) :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춤. 官(관)은 감각기관(感覺器官). 知(지)는 감각기관에 근거한 지각 능력.
○ 神欲行(신욕행) : 신묘한 작용이 움직임. 神欲(신욕)은 신묘한 욕망(欲望)‧의욕, 신묘(神妙)한 작용(作用), 천연(天然)의 신기(神技) 등을 의미한다. 앞의 以神遇 而不以目視를 일반화하여 표현한 말이다.
○ 依乎天理(의호천리) : 천리(天理)를 따름. 천리(天理)는 天然(自然)의 결. 곧 道를 의미한다. 成玄英은 天然의 주리(腠理)로 풀이했다.
○ 批大郤(비대극) : 커다란 틈을 침. 批(비)는 격(擊)으로 치다는 뜻(陸德明). 郤(극)은 隙(극)의 假借字로 근골(筋骨)이 연결된 부위의 틈새를 의미한다(方勇‧陸永品).
○ 導大窾(도대관) :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임. 導는 도도(導刀)로 칼을 움직인다는 뜻. 窾(관)은 구멍, 곧 빈 공간. 成玄英은 ‘뼈마디의 틈새[骨節空處]’로 풀이했다.
○ 因其固然(인기고연) : 본시 그러한 바를 따름. 固然(고연)은 고연지리(固然之理), 곧 소가 본래 이루어진 이치를 따른다는 뜻. 앞의 ‘依乎天理’와 같은 맥락이지만 依乎天理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원리로서의 道(자연의 결)를 따르는 것이라면, 여기의 固然은 소라는 구체적인 대상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개별화된 결[理]을 의미한다는 점이 다르다. 결국 천리에 의해 소가 조합된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조합의 역순을 따라 소를 해체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技經肯綮之未嘗(기경긍경지미상) : 경락(經絡)과 긍경(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음. 郭象은 "기술의 신묘함이 항상 칼날을 틈새에서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작은 장애에도 걸린 적이 없다(技之妙也 常遊刃於空 未詳經槩於微碍也)"고 풀이하여, 기경(技經)을 기술이 베풀어지는 것, 걸리는 것[經槩]으로 보았는데, 이 견해를 따르면 "(칼 쓰는) 기술이 긍경(肯綮)에 걸린 적이 없다"로 번역해야 한다. 곧 技未嘗經肯綮이 倒置된 표현으로 본 것이니, 이것이 통설이다. 肯(긍)은 뼈에 살이 붙어 있는 부분(陸德明), 綮(경)은 (살과 힘줄 따위가) 엉켜 있는 부분(司馬彪).
○ 大軱(대고) : 커다란 뼈. 軱(고)는 휘어진 큰 뼈로 여기에 부딪치면 칼날이 파손된다(郭象, 向秀).
良庖歲更刀(양포세경도) 割也(할야)
族庖月更刀(족포월경도) 折也(절야)
今臣之刀十九年矣(금신지도십구년의)
所解數千牛矣(소해수천우의)
而刀刃若新發於硎(이도인약신발어형)
彼節者有間(피절자유간)
而刀刃者无厚(이도인자무후)
以无厚入有間(이무후입유간)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회회호기어유인필유여지의)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시이십구년이도인약신발어형)
(포정이 또 대답했다)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보통의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그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註)
○ 良庖(양포) : 솜씨 좋은 백정. 보통 백정보다 솜씨가 뛰어나지만 아직 道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백정을 말한다.
○ 歲更刀(세경도) :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꿈. 司馬彪는 "해마다 칼을 새로 만든다(歲歲更作)"고 풀이했다.
○ 割也(할야) : 살코기를 베어 냄. 곧 칼날이 틈새로 지나가지 못하고 고기를 직접 베기 때문에 칼날이 손상된다는 뜻. 司馬彪는 "칼로 살코기를 베기 때문에 해마다 칼을 새로 만든다(以刀割肉 故歲歲更作)"고 풀이했다.
○ 族庖(족포) : 보통의 백정. 族은 衆과 같다.
○ 折也(절야) : 뼈를 침. 곧 칼로 뼈를 치기 때문에 칼이 쉽게 망가진다는 뜻. 郭象은 "뼈를 건드려서 칼이 부러진다(中骨而折刀)"고 풀이하여 折자를 칼이 부러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兪樾은 割과 折이 모두 칼을 쓰는 것을 표현한 對句임을 들어 折을 折骨로 풀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견해가 타당하다.
○ 十九年(십구년) : 장자에 나오는 19년은 단순히 산술적 의미의 햇수라기보다는 한 가지 道를 터득하는데 걸리는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 若新發於硎(약신발어형) :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함. 發(발)은 撥의 假借字로 꺼내오다는 뜻. 宣穎은 發을 磨로 풀이하여 숫돌에서 갈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音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무리하다. 朱桂曜나 王叔岷 등은 硎(형)을 型으로 보고 칼틀에서 칼을 새로 만든 것 같다는 뜻으로 보았지만 여기서는 포정의 칼날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硎을 본래 글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 彼節者有間(피절자유간) 而刀刃者無厚(이도인자무후) :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은 두께가 없음. 節(절)은 골절(骨節)로 뼈마디. 間(간)은 뼈마디 사이의 빈틈. 無厚(무후)는 칼날이 점점 얇아져 끝부분에 이르면 두께가 없음을 논리적으로 규정한 말.
○ 以無厚(이무후) 入有間(입유간) :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감. 칼날을 뼈마디 사이의 빈 공간에 밀어 넣는다는 뜻. 無厚(무후)는 무후지물(無厚之物)로 칼날을 말하고, 有間(유간)은 有間之處로 뼈마디의 틈새를 지칭한다.
○ 恢恢乎(회회호) : 넓고 넓어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모양.
○ 其於遊刃(기어유인) : 游刃(유인)은 칼날을 움직임.
雖然(수연) 每至於族(매지어족)
吾見其難為(오견기난위)
怵然為戒(출연위계)
視為止(시위지) 行為遲(행위지)
動刀甚微(동도심미)
謋然已解(획연이해)
如土委地(여토위지)
提刀而立(제도이립)
為之四顧(위지사고)
為之躊躇滿志(위지주저만지)
善刀而藏之(선도이장지)
(포정이 또 대답했다)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켜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그 상태로)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스르륵 하고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칼을 닦아서 간직합니다."
文惠君曰(문혜군왈) 善哉(선재)
吾聞庖丁之言(오문포정지언)
得養生焉(득양생언)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道)를 터득했다."
(註)
○ 每至於族(매지어족) : 매양 뼈와 근육이 얼키고설킨 곳에 이를 때마다. 族(족)은 ‘뼈와 근육이 얼키고 설켜 있는 곳’으로 周易 同人卦의 '類族辨物(族을 분류하여 사물을 분별함)'의 族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 見其難爲(견기난위) : 그것이 처리하기 어려움을 앎. 難爲(난위)는 칼을 대기 어렵다는 뜻.
○ 怵然爲戒(출연위계) : 두려워하면서 경계함. 怵然(출연)은 깜짝 놀라는 모습. 여기서는 두려워하는 모습. 곧 정신적인 긴장 상태를 나타낸다.
○ 視爲止(시위지) :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함. 止(지)는 다른 데로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대상물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는 뜻. 郭象은 "다시 다른 사물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不復屬目於他物也)"고 풀이했다.
○ 行爲遲(행위지) : 손놀림을 더디게 함. 손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신중하게 움직인다는 뜻. 郭象은 ‘손을 느리게 움직이는 것[徐其手也]’으로 풀이했다.
○ 謋然已解(획연이해) : 스르륵 하고 이미 뼈와 고기가 해체됨. 謋然(획연)은 고기가 뼈에서 스르륵 하고 떨어져 나오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擬聲語). 成玄英은 '뼈와 살이 떨어지는 소리(骨肉離之聲也)'라고 풀이했다.
○ 如土委地(여토위지) :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음.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인위적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뜻.
○ 提刀而立(제도이립) :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 있음. 提는 擧와 같다.
○ 爲之四顧(위지사고) 爲之躊躇(위지주저) :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림. 곧 對象物인 소와 일체가 된 忘我의 상태에서 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린다는 뜻. 四顧(사고)는 사방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현실 세계에 아직 익숙하지 못해 어리둥절하며 돌아보는 동작을 나타내고, 躊躇(주저)는 머뭇거리며 어찌할지를 모르는 모습으로, 역시 현실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머뭇거리는 동작을 나타낸다. 따라서 四顧와 躊躇는 모두 道의 세계(無念無想의 상태, 忘我放心의 상태)에서 노닐다가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 때, 평소 익숙했던 현실의 모습이 도리어 생경하게 느껴지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滿志(만지) : 제정신으로 돌아옴. 志는 마음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心之所之)으로 忘我의 상태에서는 형성되지 않고 있다가, 道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비로소 형성된다. 郭象과 成玄英 등은 모두 滿志를 "스스로 만족스러워한다(自得)"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적절치 않다.
○ 善刀而藏之(선도이장지) : 칼을 닦아서 간직함. 善刀(선도)는 칼을 씻는다는 의미. 郭象과 陸德明 등은 모두 善을 닦는다[拭]는 뜻으로 풀이했다. 藏(장)은 所定의 장소에 넣어 간직한다는 뜻.
○ 得養生焉(득양생언) : 양생(養生)의 도(道)를 터득함. 得養生之道(득양생지도)의 줄임.
▶️ 養(기를 양)은 ❶형성문자로 飬(양), 餋(양)은 통자(通字), 养(양)은 간자(簡字), 羪(양)은 동자(同字)이다. 養(양)은 뜻을 나타내는 밥 식(食=飠; 먹다, 음식)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羊(양)이 합(合)하여 기르다, 양육하다를 뜻한다. 羊(양)은 양의 고기로, 중국에서는 고급 요리이다. 食(식)은 식사를 하는 일이다. ❷회의문자로 養자는 '기르다'나 '먹이다', '봉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養자는 羊(양 양)자와 食(밥 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글자의 조합으로만 보면 養자는 마치 양에게 밥을 먹이는 모습과도 같다. 그러나 養자의 갑골문을 보면 羊자와 攴(칠 복)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목축업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후에 '기르다나 '번식시키다'라는 뜻이 파생되자 攴자를 食자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養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養(양)은 어떤 명사(名詞) 어근(語根)에 붙어서 남의 자녀(子女)를 데려다가 길러 자기(自己)의 자녀(子女)로 할 때에 그 상호(相互) 관계를 나타내는 데 쓰는 말로 먹을 것을 주다, 양육하는 일의 뜻으로 ①(낳아서)기르다 ②(젖을)먹이다 ③(심어)가꾸다 ④수양(收養)하다(다른 사람의 자식을 맡아서 제 자식처럼 기르다) ⑤봉양(奉養)하다, 공양(供養)하다 ⑥가르치다 ⑦맡다, 관장(管掌)하다 ⑧치료하다, (질병을)다스리다 ⑨취(取)하다 ⑩숨기다, 은폐(隱蔽)하다 ⑪가렵다 ⑫즐기다 ⑬(시간적으로)길다 ⑭다스리다, 수양(修養)하다 ⑮땔나무 산지(山地)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를 양(奍), 기를 육(育), 기를 사(飼)이다. 용례로는 가르쳐서 유능한 사람을 길러 냄을 양성(養成), 길러 자라게 함을 양육(養育), 영양이 되는 성분을 양분(養分), 가축을 기름을 양축(養畜), 인공적으로 길러서 번식시키는 일을 양식(養殖), 닭을 기르는 일을 양계(養鷄), 양아들을 양자(養子), 누에를 기름을 양잠(養蠶), 꿀벌을 길러 꿀을 채취하는 일을 양봉(養蜂), 물고기를 기름을 양어(養魚), 부모의 뜻을 받들어 지극한 효도를 다하는 일을 양지(養志), 양 아버지를 양부(養父), 학문과 식견을 넓혀서 심성을 닦음을 함양(涵養), 식물이나 미생물 따위를 인공적으로 가꾸어 기름을 배양(培養), 휴양하면서 치료하는 것 또는 그러한 치료를 요양(療養),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사람의 생활을 돌봄을 부양(扶養), 범을 길러 화근을 남긴다는 뜻으로 화근을 길러서 걱정거리를 산다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는 말을 양호유환(養虎遺患), 항상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행을 이르는 말을 양지지효(養志之孝), 도를 좇아 뜻을 기르고 시세에 따라서는 어리석은 체하며 언행을 삼가야 한다는 말을 준양시회(遵養時晦), 아침 저녁으로 웃어른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말을 조석공양(朝夕供養), 부담을 가볍게 하여 백성의 힘을 펴게 한다는 말을 민력휴양(民力休養)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이르는 말을 생로병사(生老病死),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생지生知하는 성인을 이르는 말을 생이지지(生而知之),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이르는 말을 생사골육(生死骨肉), 사람이 태어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을 이르는 말을 생삼사칠(生三死七),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져 삶이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생불여사(生不如死),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산 채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남의 시문을 송두리째 인용함을 이르는 말을 생탄활박(生呑活剝), 나면서부터 알아 쉽게 행한다는 뜻으로 배우지 않아도 사물의 도리를 알아 쉽게 그것을 실행한다는 말을 생지안행(生知安行), 일속을 잘 알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을 그릇 책망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생면대책(生面大責),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뜻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살여탈(生殺與奪), 거듭나서 유전한다는 뜻으로 만물이 끊이지 않고 변해 감을 이르는 말을 생생유전(生生流轉)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道(길 도)는 ❶회의문자로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首(수)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首(수)는 사람 머리와 같이 사물의 끝에 있는 것, 처음, 근거란 뜻을 나타낸다. 道(도)는 한 줄로 통하는 큰 길이다. 사람을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도 길이지만 또 도덕적인 근거도 길이다. ❷회의문자로 道자는 '길'이나 '도리', '이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道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首(머리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首자는 '머리'라는 뜻이 있다. 道자는 길을 뜻하는 辶자에 首자를 결합한 것으로 본래의 의미는 '인도하다'나 '이끌다'였다. 그러나 후에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바른길'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도리'나 '이치'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寸(마디 촌)자를 더한 導(이끌 도)자가 '인도하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道(도)는 (1)우리나라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 예전에 8도이던 것을 고종(高宗) 33(1896)년에 13도로 고쳤고, 다시 대한민국 수립 후에 14도로 정함 (2)우리나라의 최고 지방자치단체 (3)도청 (4)중국 당(唐) 대의 최고 행정 단위. 당초에는 10도로 나누어 각 도마다 안찰사(按察使)를 두었으며 734년에 15도로 늘려 관찰사(觀察使)를 장관(長官)으로 두었음 (5)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6)종교 상으로, 교의에 깊이 통하여 알게 되는 이치, 또는 깊이 깨달은 지경 (7)기예(技藝)나 방술(方術), 무술(武術) 등에서의 방법 (8)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길 ②도리(道理), 이치(理致) ③재주 ④방법(方法), 술책(術策) ⑤근원(根源), 바탕 ⑥기능(機能), 작용(作用) ⑦주의(主義), 사상(思想) ⑧제도(制度) ⑨기예(技藝) ⑩불교(佛敎) ⑪승려(僧侶) ⑫도교(道敎) ⑬도사(道士) ⑭교설(敎說) ⑮~에서, ~부터 ⑯가다 ⑰가르치다 ⑱깨닫다 ⑲다스리다 ⑳따르다 ㉑말하다 ㉒완벽한 글 ㉓의존하다 ㉔이끌다, 인도하다 ㉕정통하다 ㉖통하다, 다니다 ㉗행정구역 단위 ㉘행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길 도(塗), 거리 항(巷), 거리 가(街), 네거리 구(衢), 길 로/노(路), 길 도(途), 길거리 규(逵), 모퉁이 우(隅)이다. 용례로는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든 길을 도로(道路),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도리(道理),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일에 쓰이는 여러 가지 연장을 도구(道具), 도를 닦는 사람을 도사(道士),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 상의 의리를 도의(道義), 일반에게 알리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報道), 차가 지나다니는 길을 궤도(軌道),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효도(孝道), 사람이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정도(正道), 차가 다니도록 마련한 길을 차도(車道), 도를 닦음을 수도(修道),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을 왕도(王道), 바르지 못한 도리를 사도(邪道), 사람이 다니는 길을 보도(步道), 일에 대한 방법과 도리를 방도(方道),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져 백성의 풍속이 돈후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도불습유(道不拾遺),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곧 그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뜻으로 거리에서 들은 것을 남에게 아는 체하며 말함 또는 깊이 생각 않고 예사로 듣고 말함을 일컫는 말을 도청도설(道聽塗說), 길가에 있는 쓴 자두 열매라는 뜻으로 남에게 버림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도방고리(道傍苦李), 먼 길을 달린 후에야 천리마의 재능을 안다는 뜻으로 난세를 당해서야 비로소 그 인물의 진가를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도원지기(道遠知驥), 길에는 오르고 내림이 있다는 뜻으로 천도에는 크게 융성함과 쇠망함의 두 가지가 있다는 말을 도유승강(道有升降),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일컫는 말을 안빈낙도(安貧樂道), 시장과 길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는 뜻으로 이익이 있으면 서로 합하고 이익이 없으면 헤어지는 시정의 장사꾼과 같은 교제를 일컫는 말을 시도지교(市道之交),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김을 일컫는 말을 청빈낙도(淸貧樂道),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너무나 엄청나거나 기가 막혀서 말로써 나타낼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언어도단(言語道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