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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1서의 말씀 2,3-11>
사랑하는 여러분,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4-5)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루카 2,27-28)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여기서 세 가지를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루카 2,27)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부추김 받고 있는지요?
성령에 이끌려 다니는지요?
혹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쫓아다니지는 않는지요?
대체 나는 지금 무엇에 깨어있는지요?
영의 움직임인지요?
아니면 내 마음의 움직임인지요?
그러니 자신이 무엇에 기대어 있는지?
무엇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둘째,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루카 2,27-28)
그런데 지금 내 팔에 무엇을 안고 있는지요?
아기예수님인가요?
아니면, 다 큰 자기 자신인가요?
혹 한 팔에는 아기예수님을, 다른 한 팔에는 자기 자신을 안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공동체와 형제들을 안고 있기는 하는지요?
그래서 누구를 찬미하고 있는가요?
아기예수님인가요?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요?
그러니 진정 나는 지금 누구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셋째, 시메온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나의 눈은 대체 무엇을 보고자 찾아 헤매는지요?
어디를 향하여 있고,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요?
타인들인가요? 자기 자신인가요?
아니면, 진정 하느님인가요?
혹 겉의 화려함만 바라보고 탓만 하는 세속의 눈인가요?
속을 꿰뚫어보고 찬미와 영광을 노래하는 맑고 순수한 영의 눈인가요?
혹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희미해져가고 늙어가는 육체의 눈인가요?
아니면, 늙어갈수록 맑아져 가는 영의 눈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눈(관점)을 내려놓으면 신비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맑은 영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처럼 열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상의 눈이 열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다른 사람이 짓다 만 건물을 내가 마저 완성하고, 다른 사람이 찬 골이 골대 맞고 튀어나온 것을 내가 집어넣는 것처럼 결핍이나 결함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완성하는 그런 뜻일까요?
하느님의 사랑은 충만하여 그 한 방울로도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아무 결함이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씨로 치면 열매를 맺는 것,
약으로 치면 병이 낫는 것,
말씀으로 치면 들은 대로 실천하는 것,
사랑으로 치면 사랑이 거부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것,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씨를 소중히 여겨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까지 맺는 것,
하느님께서 주신 약을 소중히 여겨 매일같이 빠트리지 않고 먹어 병이 낫는 것,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할 뿐 아니라 실천까지 하는 것,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것보다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일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이 많으시겠지만, 저의 경우 제 딴엔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에겐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사랑이 불완전하여 사랑의 말이 충고가 아니라 잔소리로 받아들여지고, 강요로 받아들여지곤 하는데, 제 사랑에 가난과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달리 말하면 제 사랑에 욕심이나 교만의 불순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불완전할 리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 욕심과 교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랑의 불완전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사랑보다 다른 사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사랑이 아닌 벌로 오해하기 때문이거나,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욕심과 교만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거나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세상 욕심과 교만을 비우는 것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는 첫걸음이겠습니다.
그런 다음 세상 욕망을 하느님 갈망과 이웃 사랑의 열망으로 바꾸는 다음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과 교만을 우리 안에서 비우는 것도, 욕망을 갈망과 열망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은총이 필요한데, 은총이 필요하다는 겸손한 의지를 우리가 지닌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햇빛처럼 우리의 의지를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한 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기다림이 컸으니 그를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품에 안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세상 구석구석)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 보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9-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빛이신 주님은 이웃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관상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을 보는 기도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관상 기도에서 ‘거둠의 기도 – 고요의 기도 – 일치의 기도’라는 세 단계를 말합니다.
거둠의 기도는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에서 다른 세상 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분의 자취가 있는 곳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 거둠의 기도가 불가능합니다.
고요의 기도는 마치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시듯 그 기다림이 끝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성령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고 인내롭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이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다림의 대명사가 나옵니다.
바로 시메온 예언자입니다.
그가 기다릴 줄 알았던 이유는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루카 2,25-26)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셨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던 것입니다.
관상 기도는 물론 묵상 기도에서도 기다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나로부터의 정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해 본인 스스로 제사를 지내어 결국 그 이유로 왕권을 잃게 됩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알게 하여 주도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드리게 만듭니다.
기다림이 주제인 대표적인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어느 한적한 시골 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들은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봅니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그 모든 노력은 고도가 오면 기다림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루 해가 다 지날 무렵, 그들의 기다림에 한계가 왔을 때 나타난 것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의 전갈을 알리는 소년입니다.
소년은 고도가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란 전갈만 주고 갑니다.
그러던 중 포조와 럭키를 만납니다.
포조는 주인이고 럭키는 포조의 줄에 목이 메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노예입니다.
며칠 뒤에 눈이 먼 상태로 포조가 럭키를 끌고 갑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며 그 넘어진 주인 포조를 일으켜 세워주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소년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전갈을 남깁니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립니다.
고도가 도대체 누구일까요?
작가도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만약 알면 책에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타라공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고도가 오리라는 약속을 믿고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포조와 럭키는 내가 주도적이건, 혹은 끌려다니건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도대체 그렇게 살면 뭐가 좋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이 오기를 4천 년이나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이 정화되었습니다.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성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이는 세가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기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믿음에서 옵니다.
두 번째는 나 자신에게 기다려도 시간 내에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능력이 있음을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는 결단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본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것 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분명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놀이에서 놀이하는 사람은 술래의 목소리와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준비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나는 모른다는 믿음 때문에 생깁니다.
사울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다릴 줄 모르는 게 문제였습니다.
기다릴 줄 몰랐던 이유는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더 믿었기에 기도와 제물을 바침이 의미를 잃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다릴 줄 알기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제물을 잘라놓고 하느님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아브라함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제물을 불사르는 성령께서 그에게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관상 기도는 내 안의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집중하는 시간, 곧 ‘거둠의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고요의 기도’입니다.
고요의 기도는 평화가 오는 시간입니다.
기다리던 분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기다림을 통해 성령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평화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평화가 옵니다.
성령은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이에게 오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다음엔 ‘일치의 기도’입니다.
다시 그리스도께서 보이시지 않고 그분의 ‘뜻’이 남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이 되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뜻으로 나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을 때는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무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안에 들어가면 ‘하나’가 되어 상대를 볼 수 없습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태중의 예수님을 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의 뜻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기도입니다.
관상 기도는 항상 이 세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심을 믿고, 그분의 현존에 집중하며 기다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기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을 위해 가장 완전하신 분이셨습니다.
믿고 기다리고 기도함이 나를 온전히 정화했다면 그분이 분명 나를 사로잡을 고요의 기도로 올라가게 하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
예수님의 일생은 첫 출발점인 탄생에서부터 고통스런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고 지속적인 하향성의 생애였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지극한 자기 낮춤과 겸손의 연속이었습니다.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작은 인간들 사이로 육화 강생하신 대사건인 성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릴 뿐입니다.
이왕 태어날 것, 저 같았으면 멋진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구중궁궐 속 따뜻하고 안락하고 넓은 방에서, 주변 사람들의 큰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즘 저는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어촌에 살면서 외풍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강풍이 불고 강추위가 밀려오면 아무리 난방을 해도 효과가 미미합니다.
방에 누우면 외풍까지 느껴져 코가 시릴 정도입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방 한 칸조차 마련하지 못해, 외풍 정도가 아니라 찬바람이 숭숭 아무런 여과 없이 들어오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가난하고 겸손한 탄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유다 관습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주님께 봉헌하는 예식에 참여하십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바친 예물을 보십시오.
산비둘기 한 쌍,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참으로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큼지막한 황소나 잘생긴 숫양이 아니라 고작 비둘기였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탄생이요 봉헌 예식이었습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메시아께서 너무 부유하거나 거창한 모습으로 등장하시면 가난한 백성들이 기가 죽을까 봐, 작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시메온의 예언>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처음 알려 준 이는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를 만나고 계시를 들은 일은 성모 마리아 혼자만의 체험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계시가 그것으로 끝났다면, 마리아 혼자서 증언해야 하는, 무척 외롭고 힘든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을 통해서 그 계시가 진리이며 마리아의 믿음과 응답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뒤에는 목자들을 통해서, 또 동방 박사들과 시메온 예언자를 통해서 또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은 ‘예수님의 복음’이 마리아 한 사람의 체험으로 시작되어서 여러 사람의 증언을 거쳐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확산된 과정입니다.
사적인 일에서 공적인 일로, 한 지역에서 온 세상으로...
그 일에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루카 12,3)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초대이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신앙인은 ‘듣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들은 것을 믿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 다음에,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와 목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났고, 엘리사벳과 시메온의 경우에는 ‘성령의 힘’이 작용했는데,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천사가 나타났든지 성령의 힘이 작용했든지 간에 그 일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할 때, 천사가, 또는 성령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시메온의 입장에서는 평생 갈망하면서 기다리던 메시아를 직접 만났으니,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 종교와 참 신앙을 찾아 헤매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시메온과 같은 심정이 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라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이기도 하고, 감사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보다’ 라는 말은 ‘구경하다’가 아니라, “나에게서 이루어지다”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구경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고, 내가 구원에 참여하고 내가 구원을 받아야만, 그것이 진짜 구원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증언이기도 하고, 앞으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이라는 말은 루카복음에서는 처음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말입니다.
시메온은 ‘예언자’ 라고 공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고, 그의 예언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한 일입니다.
사적인 장소에서 개인적으로 전해지던 복음이 이제 공적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라는 말에서 ‘다른 민족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즉 하느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계시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으로 해석됩니다(요한 1,4).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고, 앞장서 가시면서 우리를 데려가시고, 우리가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인데, ‘걸어가는 일’ 자체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사드리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도 사도들도 성모님도 모두 유대인들이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한 민족을 증오하고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놀랐다는 말은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세주” 라는 말에 놀란 것으로 해석됩니다.
34절-35절에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예수님과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실 일의 결과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이고,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자들’은 결국 ‘박해자들’이 될 텐데, 그들 때문에 성모님도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고통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희생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난다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을 못 받을 사람이 드러난다는 뜻인데, 심판보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과 성모님의 희생 덕분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빛 속의 정주(定住) 생활 - 사랑의 계명 준수>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시편 96,1)
오늘 제1독서 요한1서 말씀은 그대로 복음에 대한 주석이 됩니다.
요한1서의 사랑의 계명 준수의 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성 시메온입니다.
성 시메온이야말로 한결같이 빛 속에서 정주의 삶을 살았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정주, 빛의 정주에 충실했던 성 시메온은 우리 정주서원을 살아가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강론 시 인용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여기 수도원에서 어떻게 무슨 재미, 무슨 맛,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느냐는 신자들의 물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뿐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의 답변은 똑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맛, 기쁨, 재미로 살아간다.
찬미 맛, 말씀 맛, 기도 맛으로, 즉 하느님 맛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하느님께 맛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아라’는 시편 말씀도 있지 않나?
환경은 물론이지만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도 날로 좋아져야 한다.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힘이다.
관계의 힘이다.”
바로 이런 정주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시메온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빛 속에서 사랑의 정주에 항구했던 시메온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그대로 성령의 사랑, 성령의 위로, 성령의 빛 속에 한결같이 의롭고 독실하게 정주의 삶을 살았던 시메온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성령께 감사해야 하고, “오소서, 주 성령님”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 정주의 삶의 내용은 제1독서 요한 1서가 잘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위로’에 대한 교황님의 좋은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위로는 영성생활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영적 위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볼 때, 심오한 내적 기쁨의 체험이다.”
이런 하느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또 위로를 체험하며 정주의 삶에 항구했던 예루살렘의 성 시메온이며, 이는 우리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정주의 삶에 충실할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위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1서의 말씀은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실질적 도움이 됩니다.
온통 사랑의 계명 준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의 정주에 온통 힘을 다하라는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말씀은 옛계명임과 동시에 새계명인 형제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우리 정주의 삶과 직결됩니다.
예루살렘의 시메온 역시 이런 형제 사랑의 계명에 충실한 정주의 삶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은 사랑의 빛, 생명의 빛인 참빛입니다.
다음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 신선한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새삼 사랑도 부단힌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아니 사랑뿐 아니라 모든 수행 덕목이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내적자유와 내적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수행의 부단한 영성훈련없이는 참자유도 참평화도 참기쁨도 없습니다.
결코 값싼 자유, 평화, 기쁨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의 빛입니다.
형제 사랑을 선택하여 적극적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랑의 정주, 빛 속의 정주생활의 됩니다.
미움에 눈멀 때 캄캄한 어둠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미움이요 이보다 불행한 정주생활은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 성탄 다음날 저녁식사 시 로마 유학중인 엘리야 수사와 여기 수도형제들과의 하나하나 화상 통화 시 화기애애했던 모습과 음성들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형제애가 가득 담겼던 표정이요 음성들이었고, 이 또한 적극적 사랑의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정주, 인내의 정주에 항구할 때, 때가 되면 시메온처럼 위로의 주님을 만납니다.
마침내 예수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바치는 시메온입니다.
이 또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의 노래입니다.
우리 아나뷤의 후예들인 가톨릭교회의 수도자들이, 신자들이 잠자리에 들기전 끝기도 마지막에 부르는 시메온의 찬가에 이은 성모 찬가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날마다 끝기도 시 ‘시메온 찬가’와 ‘성모 찬가’만 정성을 다해 노래해도 복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슬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29-32)
말 그대로 사랑의 정주에 항구했던 시메온에 주신 축복이요, 동시에 정주의 삶에 충실한 우리 믿는 이들에게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시메온과 함께 주님과의 만남을 기뻐하는 이 거룩한 위로와 평화의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시편 96,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영속성을 보여주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루카 2,22)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루카 2,23)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
(루카 2,24)
아기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율법에 기록된 것을 이행하기 위함이지요.
율법은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삶의 근간이고 정체성이며 이정표입니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
(루카 2,27)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영에 활짝 열린 그가 비로소 구원자 아기를 만나고, 알아보는 영광을 얻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2)
메시아를 기다리며 어둠을 견뎌온 이스라엘에 놀라운 보상이 주어집니다.
빛이신 분이 길었던 어둠을 가르며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지요.
그렇다고 구약 시대까지를 어둠이라, 신약 시대부터 빛이라 칼로 베듯 단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은 성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미리 준비하신 구원의 절정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옛 계명과 새 계명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1요한 2,3)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이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준비시키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친히 보여 주신 율법의 완성을 살되, 문자 자체에 매여 있지 않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1요한 2,5)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무르익어오던 율법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정점에 이른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생생히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1요한 2,7-8)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옛 계명과 새 계명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품으신 그 사랑이기에 연속성 안에 있으면서, 율법을 전해 준 모세와 달리 예수님은 당신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새로운 사랑이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요한 2,9)
구원자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분과 제자들에게 살의까지 품습니다.
자신들이 수호해 온 율법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 계명을 대립각에 놓고 배척함으로써 눈을 감아버린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를 가로지르며 유유히 흘러오던 율법의 강물이 비로소 출구를 만나 온 세상을 향해 힘차게 뿜어나오는 완성의 때를 외면한 채 그들은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5)
복음 속 시메온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앞에서 하느님 백성은 옥석이 가려졌지요.
사랑을 사랑으로 보는 이와 위험으로 간주하는 이로 말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우리의 신앙과 사랑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지금 이 세상에도 사랑을 두고 율법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재단하는 눈들이 없지 않습니다.
사랑할 마음은 없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불편해, "젊은 사람이 왜? 멀쩡해 보이는데 왜?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자신의 사랑없음을 율법으로 합리화하고, 행정에 떠넘깁니다.
사랑없음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가는 사랑을 방해하고 차단해서 결국 사랑의 맥을 끊으려는 어둠의 힘이지요.
효율적이고 영리해 보이나 하느님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하느님께서 명하신 그 사랑의 완성임을 받아들이는 이는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이 또 다른 완성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길을 터주지요.
그는 언제라도 사랑의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 영혼을 활짝 열고 이웃과 세상을 살핍니다.
마치 감독의 Q 사인을 기다리며 Stand by 상태에서 대기하는 연기자처럼,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의 법이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통해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되 문자에 매이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자유로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탄은 하느님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모건 프리먼이 설명하는 ‘우리의 우주’를 보았습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태양에서 오는 빛과 에너지를 이용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태양이 보내는 빛은 식물의 광합성으로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를 초식동물이 받아들이고, 초식동물이 받아들인 에너지를 육식동물이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왔고, 태양은 최초의 ‘빅뱅’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성서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계셨고, 세상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내가 숨쉬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은 하느님이 시작하신 ‘빅뱅’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빅뱅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 1장)
하느님의 백뱅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서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종말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 그리고 다시 질서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무질서의 시간을 질서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한 하느님의 개입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보내셨는데, 외아드님을 믿고 따르면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 1장)
지구에서 하루는 24시간입니다.
우리의 뇌세포는 하루 24시간의 지구 시계에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잠자는 세포가 지구의 환경에서 적응하기 쉬웠다고 합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기준은 그러나 지구에서만 적용됩니다.
우리 옆에 있는 ‘금성’은 하루가 243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성에서의 하루는 지구에서 1년과 비슷합니다.
금성은 공전주기와 자전주기가 비슷하기에 매일이 생일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금성은 1년과 하루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시간의 기준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 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주여 당신만은 영원히 계시나이다.”
(시편 90)
오늘 독서는 무질서를 행해서 나가는 시간을 질서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개입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천년은 지나간 어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종말을 향해 나가는 무질서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가는 ‘은총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태양의 빛과 에너지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모두 종말로 향하는 우주의 시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창조의 시간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개미를 쉬지 않고 일하는 성실의 아이콘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개미가 실제로 성실한지, 2002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한 생물학 교수가 90마리의 개미를 3개 조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인공 개미굴에 실험 카메라를 설치해서 개미의 일상을 관찰한 것입니다.
그 결과, 각 조 개미 30마리 중 20%는 일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개미굴 주변만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개미를 ‘게으른 개미’라 지칭했습니다.
이제 연구진은 ‘게으른 개미’들에게 먹이를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부지런히 일하고 있던 개미들이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게으른 개미’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움직이자, 다른 일개미들이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른 개미’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찰을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성실하게 땀 흘려 몸을 움직여 일하면 다 잘살게 될까요?
그런 사람도 필요하지만, 관리자를 비롯한 각자의 역할에 맞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역할을 존중하며 살아갈 때, 균형 있는 발전 속에서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직 말씀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이십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지키고 계셨고, 오늘 성전에 가서 예수님을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보게 된 시메온은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임을 밝힙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각자의 역할에 의해 구원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생활한다면 하느님의 일은 완성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일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의 일을 계속해서 실천해야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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