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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쓰고 극장에 간다
간다
주인공이 멀리서 걸어올 때, 끓는 물속에 막 던져진 계란 흰자 같은 담배연기가
담배연기가
흐른다
흐른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있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일들이 있어서
나는 나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가지 않은 곳을 갔다 오고
우산을 들고 있다고 중얼거리지 않으면 감쪽같이 우산은 사라져
우산처럼 사라져
혼자서, 극장의 어둠 속에 남는다
비 온 뒤 돋아나는 독버섯처럼
대사가 시작되면,
아는 이야기를 알려고
마음처럼
사는 이야기를 살려고, 극장에서는 우산을 접고
본다
스크린 가득 비가 내리지만 아무도 우산을 펴지 않는다 아무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산처럼, 비 오는 이야기에 젖고 있어서
비처럼
흐르는, 극장의 어둠 속에는 영화 속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 것 같아
팝콘이 떨어지면 떨어진 곳에서 희뿌옇게 일어서는 것들
채도가 낮은 어둠을 조용히 솎아내며
사람이 되는,
사람이었던 사람이
같은 말을 영원히 반복하는 영혼이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보인다, 한 사람이 된 어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우산을 펴고
우산처럼,
마음을 쓰고 집으로 간다
비 오는 날 어둠은 비가 쓰고 온 우산처럼 구석에 버려져 있다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비와 약속한 사람들은
아무도 늦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있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센서등마저 꺼지면
어둠 저편에서 대사가 들린다, 팝콘 좀 줘
조용히 해!
곧 시작해
내 머리의 암실에서 누군가 내 생각을 환풍구로 돌리며 담배연기 같은 하루를 흘려보낸다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를 냈다. 백석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노작문학상, 시작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