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고, 또 겸손해라.
“늘 제멋대로 탐욕, 분노, 질투, 교만. 방종으로 명예와 이익을 구하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쓸데없는 말로써 천하의 일을 의논한다. 또는 계율을 지키는 덕도 없으면서 함부로 신도의 보시布施를 받아들이고, 남의 공양供養을 받으면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이처럼 그 허물이 한량없거늘, 어찌 덮어두고 슬퍼하지 않겠는가?“
고려 중엽을 살았던 큰 스님인 지눌의 글이다. 집권세력과 결탁하여 방대한 토지와 많은 노비, 그리고 강력한 승병까지 거느리고, 세속을 벗어날 것을 역설하면서도 세속의 영광과 향락을 마음껏 누린 불교지도자들을 비판한 글이다.
오늘날에도 일부 종교에 그와 비슷한 성직자들이 많이 있다. 교회나 절을 대물림하지 않나, 사고팔지를 않나, 마치 자기 것처럼 누리고 살다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도,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사업상으로 이윤이 많이 장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서 불성을 찾아야 한다.“ 지눌의 말이다.
”자기 마음이 진정한 부처인 줄 모르고, 자기의 성이 진정한 불법佛法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불성을 구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劫이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면서 뼈를 두드려 골수를 꺼내며, 피를 찔러 경을 베낀다 해도, 모래를 삶이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헛수고만 하는 것이다.“
지눌의 말에 의하면 자기 마음에서 불성을 찾을 수 있고 수행 역시 누구나 혼자서도 할 수있는 것이다. 많은 경전을 읽거나 연구를 할 수 없는 일반 백성이라도 참다운 수행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악을 끊으면서도 끊은 것이 없고, 선을 닦으면서도 닦은 것이 없어야 진정한 닦음과 끊음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만일 이와 같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아울러서, 온갖 행行을 함께 닦으면, 어찌 이것이 헛되게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다만 문자나 찾는 미친 지혜에 견주겠는가?“
지눌의 글이다.
말이 그럴 듯해서, 혹은 용모가 훤칠해서 그 사람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종교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더욱 그렇다. 국회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자치의원들도 그 권위가 하늘을 찌르니, 힘없고 빽 없고 정도를 지키 살려는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다.
예전에 존경받던 종교인들 같이 그런 사람들에게 경종을 올리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나와서 길 잃은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만 허전할 뿐이다.
문득 그 허전한 마음으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배우기 위해서는 인간은 겸손해야만 하는 거야.
그러나 인생은 위대한 교사敎師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2024년 8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