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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이미 이 사람 배 속에는 애도 있고요.”
아들의 말에 부모님은 뒷목을 잡았습니다. 해외 유학까지 보내 가며 애지중지 키운 귀한 아들이, 하필 주방에서 일하던 하녀랑 결혼한다니요. 아들과 하녀는 집안도, 배경도, 학력도, 종교도 모두 달랐습니다. “결혼하면 분명히 넌 불행해질 거다.”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남자를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결국 남자는 “말씀드렸으니 그런 줄 아시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카미유 피사로(1830~1903)의 가족과 사랑, 그림 이야기.
부모님이 왕따인 탓에 부유한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들은 피사로와 형제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사로는 저소득층 흑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에 갔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피사로에게 많은 선물을 남겼습니다. 자신감, 서로 다른 모습과 환경의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너그러운 포용력, ‘강철 멘탈’ 같은 것들을요.
피사로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회사를 잘 경영했습니다. 돈도 잘 벌어서, 열두 살을 맞은 피사로를 프랑스의 유대인 기숙학교에 거뜬히 유학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대 중반 태어나고 자란 중남미 지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 겁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 기술이 발전하면서 바다를 건너는 배의 성능이 좋아졌고, 이 때문에 무역선들은 굳이 세인트 토마스 섬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목적지로 직행할 수 있었습니다.
섬의 경제가 쇠퇴할 게 뻔한 상황에서, 피사로의 아버지는 사업의 거점을 프랑스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피사로에게도 나쁠 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6년이나 학교에 다녔으니 프랑스에는 익숙했고, 파리는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으니까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파리에 도착한 피사로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 만에 스물 아홉살의 나이로 당시 최고 전시회인 살롱에 풍경화를 걸 만큼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피사로가 평생의 사랑을 만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상대는 어머니가 고용한 주방 하녀, 줄리 벨리. 하지만 피사로가 결혼을 선언하자 부모님의 분노는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녀라는 신분, 별 볼 일 없는 시골 출신이라는 점, 유대교가 아닌 가톨릭 신자라는 점 등 마음에 안 드는 게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피사로는 꿈쩍도 하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피사로의 이런 결정은 모두 부모님이 뿌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원하는 걸 밀어붙이는 뚝심은 부모님의 유전자 덕분. 신분 차이를 신경 쓰지 않는 포용력은 어린 시절 흑인 하층민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키운 거니까요.
확실히 피사로와 줄리는 많이 달랐습니다. 피사로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프랑스, 영어, 스페인어, 덴마크어 4개 국어를 할 줄 알았고, 그림 외에도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줄리는 프랑스 시골의 농부 집안 출신으로, 그녀가 아는 세상은 고향인 부르고뉴와 하녀로 일했던 파리가 전부였습니다. 읽고 쓰는 것만 겨우 할 줄 알았고요. 하지만 둘의 금슬은 더없이 좋았습니다
모네와 세잔을 비롯해 미술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도 기존의 미술에 지루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의 그림은 ‘인상주의’로 불렀습니다. 그 중심에는 풍성한 수염과 온화한 눈빛을 가진 피사로가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개성 강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성질이 괴팍하고 더러운 이들을 한데 묶는, ‘큰형님’ 역할을 한 게 피사로입니다. 화가들이 싸울 때마다 이를 뜯어말리고 달래는 것도 피사로의 역할이었습니다.
여러 불행이 그를 덮쳤습니다. 1870~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전쟁 때 그가 20년간 그린 작품 1500점가량이 사라진 건 특히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피사로는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피사로의 집은 프러시아군의 숙소 겸 창고가 됐습니다.
군인들은 피사로의 작품을 바닥 매트나 진흙을 닦는 걸레, 마구간 깔개로 써버렸고, 가치를 알아본 군인들은 작품을 훔쳐 갔습니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피사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마을에 돌아왔더니 이웃집 아줌마들 앞치마가 엄청 화려하더라. 자세히 보니 내 그림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거였어. 한 아줌마 앞치마에 내 서명이 있는 걸 보고 알았지.”
전쟁이 끝나도 어려움은 계속됐습니다. 피사로의 청년 시절부터 중년이 끝날 때까지 그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피사로는 생활비가 너무 급해 그림을 헐값에 팔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머리를 좀 써서, 그림을 살 수 있는 추첨권을 일종의 복권처럼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 장 판매한 후 당첨자에게 그림을 넘기기로 했지요. 하지만 추첨권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추첨을 통해 당첨된 건 어린 소녀. 하지만 그 소녀는 뜻밖의 말을 꺼냈습니다.
“저 혹시…. 그림 대신 크림빵으로 주시면 안 되나요?”
결국 피사로는 없는 돈을 털어 소녀에게 크림빵을 사 줬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로 어려우면 좌절해서 작업을 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분노를 표출할 법도 한데, 피사로는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피사로는 계속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항상 온화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의 구심점으로 계속 활동하며 8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화가가 된 게 이를 방증합니다.
동료 화가들은 그를
“아버지 같은 존재”(세잔)
“돌한테도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남자”(메리 카사트)라 했습니다.
(메리카사트는 어제 올린 글에서 비혼주의 시누이로 나오는 화가ㅋㅋㅋ반갑네)
당시 피사로가 집에 갖다줬던 돈은 80프랑. 지금 화폐가치로 치면 약 70만원에 불과한 돈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결코 굶지 않았습니다. 카미유가 남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평소에 맨발로 다니거나 나막신을 신고 다녀. 하지만 아이들은 내 아내가 텃밭을 가꾸고 닭과 토끼를 키우는 덕분에 배불리 먹는다네.”
줄리가 맨날 피사로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림이 안 팔리면 집집마다 찾아가서라도 직접 팔란 말이야!” 이렇게 피사로에게 방문판매를 시킨 적도 있었지요. 물론 이런 방법을 써도 그림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한 점도 못 팔고 돌아온 피사로가 의기소침해져서 아들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너네 엄마는 그림이 진짜 팔릴 거라고 생각해서 나를 보낸 걸까?”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피사로의 집에서는 항상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돈은 못 벌지만 마음은 따뜻한 피사로, 헌신적이고 억척스러우면서도 현명한 줄리는 환상의 콤비였으니까요. 피사로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줬고, 다 함께 가족 신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피사로의 세월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피사로의 그림은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합니다. 그 모든 시행착오가 그의 그림에 깊이와 완성도를 더해줬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들은 말했습니다. “피사로의 그림은 전보다 더 세련되고 미묘해졌으며 구성도 단단해졌다.” 피사로 자신도 노년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작업한 뒤에야 비로소 나만의 방향을 찾았다네.”
평생 고생한 피사로의 아내도 마침내 편하게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노년의 피사로는 각지로 여행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줄리도 여행에 함께했지요
편안한 노년을 보내던 피사로는 190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들에게 적잖은 유산도 남겨줄 수 있었고, 줄리는 1926년까지 살며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았습니다.
서양 미술사에 남긴 유산은 훨씬 더 컸습니다. 세잔은 피사로를 기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사로에게 배웠습니다. 피사로는 최초의 인상파 화가입니다.” 그의 말대로였습니다. 고흐와 고갱, 세잔, 쇠라 등 근대와 현대를 잇는 위대한 거장들이 모두 그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피사로라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는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그 성격 안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뚝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뚝심으로 그림과 가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지켜냈습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끝없이 그리며 자신을 단련한 것도,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훌륭한 아내와 결혼한 것도,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거나 피해를 주지 않은 것도 훌륭한 인성과 삶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사로는 결국 승리를 거뒀습니다.
피사로의 그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이런 매력과 부드러운 시선이 작품에 잘 묻어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첫댓글 포타같다
참개비
피사로그림은 항상 쌀쌀하면서도 따뜻한느낌이있는데 이런 삶을 살았었구나 글이넘좋다
ㅠㅠ
정말 사랑으로 살아야지
너무 좋은 글이다,,,그림 관련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고마워~덕분에 잘 읽고 가
넘 좋다
여시 덕에 좋은 글 읽고 가!
몰랐던 호ㅏ가 한 명의 인생을 통으로 알게됐네 글 고마워 여시!
그림 안팔릴 때 진짜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ㅠ
와 나 유명 예술가 남자 중에 이렇게 나름 가정에 충실한? 케이스 처음 보는 거 같아 글 읽는 내내 나까지 마음이 따뜻해지네 좋은 글 고마워!
피사로 그림 좋아...일생이 그림하고 비슷하네
좋은 글 고마워
와.. 너무 좋은 사람이자 예술가였구나 ㅠㅠㅠ
그림도 인성도 좋은데 멋진 인생을 사셨구나..! 여시덕에 좋은 화가 알게됐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