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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유쟁비(君有爭妃)
군주에게는 간언하는 왕비(王妃)가 있어야 한다.
君 : 임금 군(口/4)
有 : 있을 유(⺝/2)
爭 : 다툴 쟁(爫/4)
妃 : 왕비 비(女/3)
한 집안이 잘되려면 가장이 성실해야 한다. 하지만 성실한 가장도 때로는 욕심이나 독단, 순간적인 판단의 잘못으로 곤란에 빠지기도 하고 집안이 기울게도 한다. 그래서 집안이 잘되려면 가장이 성실해야 함은 물론 그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이 성실해야 한다.
위에서 '성실하다'는 것은 마음과 행동이 절도에 맞고 부지런하다는 것과 가족 간의 소통이 원활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충고와 받아들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한 가장에게도 간언하는 현명한 아내와 자식이 있어야 실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훌륭한 가장의 뒤에는 현모양처가 있었다.
여기서 현모양처라는 말의 의미를 곡해해서는 안 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잘못 이해한 현모양처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잘 받드는 것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현모양처에는 아내가 가정에서 가사를 현명하게 처리함은 물론 남편의 하는 일에 관여할 일과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며, 남편의 일에 진심 어린 간언으로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를 비롯한 동양의 철인들은 부유쟁자(父有爭子), 부유쟁부(夫有爭婦)를 강조하였다. 오늘날 남녀 평등사회에서는 부유쟁부(夫有爭婦)를 넘어 아내에게 간하는 남편을 의미하는 부유쟁부(婦有爭夫)도 의미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한 가정도 그런데 국가는 어떠하랴. 한 나라가 잘되려면 군주에게는 군유쟁신(君有爭臣: 간언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만 아니라 군유쟁비(君有爭妃: 간언하는 왕비가 있어야 한다)도 중요하였다.
아내와 남편, 국왕과 왕비의 관계는 '잠자리 정'이라 하여 감성적인 관계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내와 왕비들은 '잠자리 정치'로 자기의 욕망이나 뜻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절대권력의 국왕에게 군유쟁비(君有爭妃)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 간언하는 아내나 왕비를 둘 수 있음은 남편이나 군주의 마음이 열려있고 아내와 왕비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왕비는 국왕의 사랑을 계속 얻을 수 있어야 간언도 통할 수 있다. 그 계속된 사랑을 얻으며 간언할 수 있는 왕비야말로 현명한 왕비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왕비를 둔 국왕은 현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당 태종이 그런 인물의 하나였다.
역사가들은 당 태종 이세민을 유비의 덕과 조조의 지략을 모두 겸비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천하의 지략가이자 덕인이며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당나라를 건설하는데 일등 공신이자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였다. 그가 쓴 정치의 요강인 '정관정요'는 오늘날까지 전하는 명저이다. 그런 당 태종에게는 '장손 황후'라는 현명한 비(妃)가 있었다. 장손 황후는 평생 학문 탐구와 근검절약, 충정 어린 간언으로 태종을 보필했다고 전한다.
장손 황후는 수나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던 서기 61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나라의 장군인 장손성(長孫晟)이고 어머니는 고경덕(古敬德)의 딸인 고씨 부인이다. 그녀에게는 장손행포(長孫行布), 장손향안(長孫恆案), 장손안업(長孫安業), 장손무기(長孫無忌) 등 4명의 오빠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수나라에서 권세를 자랑하던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장손 황후는 어린 시절 잠시지만 고난을 겪었다. 어머니 고씨가 장손성의 두 번째 부인이었기에 서기 609년 아버지 장손성이 죽자 장손안업(장손안업은 둘째 아들인데, 집안을 통솔했다. 이유는 맏아들 장손 행포는 604년 수양제의 동생 양량 陽諒의 반란에 맞섰다가 죽었다)은 고시 부인과 함께 고사렴(고씨 부인의 오빠)의 집으로 쫓아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외로운 어린 시절은 그녀를 매사에 조심하고 사유하는 습관을 지니게 했는지 모른다.
장손 황후는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행실에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12세가 되었을 때 2살 위인 이세민과 혼인하였다. 617년 시아버지 이연이 어지러운 수나라의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날이 갈수록 세력이 강해지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다. 여기에는 이세민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연은 1년 만에 혁명에 성공하여 618년에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혼란한 정국을 평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둘째 아들인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당시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맏아들인 이건성을 압도했다. 그래서 형제간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때 장손 황후는 시아버지를 정성껏 모시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후계자의 구도에 위험을 느낀 이건성이 넷째 동생인 이원길과 합세하여 이세민을 제거하기 위해 습격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은 미리 알아차리고 626년 7월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이고 태자가 되었다. 당고조 이연은 현무문의 변이 있고 2달 후 이세민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세민이 당 태종에 즉위하고 장손 황후는 황후가 되었다. 이때 장손 황후의 지략과 내조가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세민과의 사이에서 장손 황후는 세 아들과 세 아들을 낳았다. 그중 맏아들인 이승건(李承健)은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승건은 뒷날 유명한 당 고종이 된다. 장손 황후는 자식 교육에도 철저하였으며 특히 학문탐구와 근검절약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는 황태자 이승건이 황궁에 물건이 부족함을 탓했다. 그래서 유모에게 황궁 소비품들을 더 구비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을 안 장손 황후는 황태자를 불러 타일렀다. "지금 황태자가 태자가 걱정하여야 할 것은 학문을 게을리하여 덕과 명예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황궁에 물건이 적다고 왜 걱정하는가." 그래서 이승건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더욱 학문과 수련에 매진했다고 한다.
장손 황후는 화를 잘 다스리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자신을 받들던 시녀들에게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밝은 낯빛으로 충고하며 깨우치도록 했다. 그러나 태종 이세민은 다혈질적이고 예민하여 화를 자주 냈다. 당 태종이 이유 없이 시녀들과 환관들에게 화를 내면, 장손 황후는 곁에서 보다가 그들을 감금하고 심문하도록 했다. 시간이 지나고 황제의 화가 풀리면 황제에게 그들을 변호하여 부당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종 황제에게 역사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화를 다스리게 했다.
장손 황후는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덕과 배려를 잊지 않았다. 후궁들이나 시녀들이 병이 들면, 스스로 문병을 하였으며, 자기의 물건을 주어 그들의 치료에 보태도록 했다. 그래서 궁중의 모든 후궁과 시녀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장손 황후는 정사에도 자신이 관여할 일과 관여하지 않을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특히 정사에 관한 한 태종에게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간혹 태종이 황후에게 골치 아픈 정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황후의 생각을 물었지만 장손 황후는 그것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적절하게 거절하였다.
그녀는 외척 세력의 관리에도 솔선하였다. 하루는 태종 이세민이 장손 황후의 오빠인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 장손 황후는 좋아하기는커녕 "장손씨 집안사람은 덕이나 자질이 부족합니다. 다만 저의 덕으로 높은 지위와 많은 녹봉을 받게 되었으니 망하는 길도 얻는 것만큼 쉬울 것입니다. 폐하께서 장씨 집안을 지켜주시려거든 그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며 나서서 말렸다.
그러나 태종은 627년에 공신인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았다. 장손무기는 장손 황후의 말대로 방탕한 기질이 있고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태종은 1년 뒤에 장손무기를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도 장손 황후의 간곡한 간언이 있었다.
장손 황후는 정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충심을 다한 간언으로 황제에게 감동을 주었다. 유명한 간언이 있다. 태종 재임 기간에 위징(魏徵)이란 늙은 승상이 있었다. 위징은 젊은 시절도 곧은 관리였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태종에게 곧은 소리를 했다. 태종은 그런 위징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번은 궁정 회의에서 돌아온 태종이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황후에게 말했다. "내가 저 늙은 위징을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두어 골치가 아픕니다."
황후가 그 사연을 묻자 태종은 말했다. "그놈의 늙은이가 어전회의인 공개석상에서까지 나의 결점을 들추어내면서 망신을 주고 있소."
그 말을 들은 장손 황후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곧장 침실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조용하고 웃는 낯빛으로 태종의 화를 달래면서 신하의 예를 다하여 말했다. "예로부터 현명한 군주 밑에는 정직한 신하가 있다고 했습니다. 위징이 직언을 하는 것은 폐하께서 어진 분이라는 것을 아시고 선정을 베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여 위징같은 신하를 두었다는 것은 폐하께서 현명하신 명군이심을 세상이 인정하는 일입니다. 부디 살피소서"
태종은 황후의 태도와 간언에 놀라 바로 화를 풀고 위징을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끝까지 신임하면서 정사를 논의하고 맡겼다.
장손 황후는 만성적인 천식에 시달렸다. 634년, 황후의 천식은 매우 악화되었다. 황제는 황후를 살리기 위해 의사를 부르고 심지어는 불교와 도교의 승려까지 동원했다. 필요하다면 사면령까지 내려 그들을 동원했다. 장손 황후는 자신의 치료를 위해 내리는 잦은 사면령이 부당하다고 간언하면서 그들의 치료를 거부하였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도 태종에게 간언하였다. "생전에 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주시옵소서. 제가 죽으면 무덤에 높은 봉분을 쌓는 일로 백성의 노동력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하지 마소서. 군자를 가까이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소서. 항상 충언을 들으시고 아첨을 멀리하소서. 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아들과 딸들을 부르지 마시옵소서. 그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면 저도 슬퍼질 것입니다. 부디 성군이 되소서. 이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태종의 온갖 정성에도 불구하고 장소 황후는 2년 뒤인 636년에 죽었다. 장손 황후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여 살아생전에 30여 권의 여칙(女則)을 남겼다. 당 태종은 그것을 읽은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며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태종은 말했다. "내가 궁궐에 들어갈 때마다 날마다 들을 수 있었던 황후의 충언을 들을 수가 없구나. 나는 나를 도와줄 사람을 잃었으니 즐거움이 없구나." 실제로 황후가 죽고 난 후 태종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질 못하고 방황하였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한다. 장손 황후는 죽은 후 문덕순성황후(文德順聖皇后)에 봉해졌다.
간언에는 그 방법이 참 중요하다. 잘못을 면전(面前)에서 낯을 붉히면서 화를 내듯이 지적하면 상대는 속으로는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더 큰 화를 낼 수 있다. 간언은 장손 황후가 조복으로 갈아입고 신하의 예를 다하며 하듯이 상대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은유적으로 할 때 효과가 있다.
그리고 간언하는 사람이 상대의 일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많으면 간언은 받아들여지기 곤란하다. 간언하는 자의 절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간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자세이다. 여기에는 평소에 쌓여있는 사랑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장손 황후의 삶을 보면 현모양처의 표상이다. 당 태종 이세민이 정치를 바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장손 황후의 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손 황후의 생애와 간언을 보면 최고 통치자의 아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
그녀의 삶은 덕과 인격의 삶이었으며 근검절약과 백성에 대한 사랑이 넘쳤다. 특히 친정 오라버니들의 관직 등용을 스스로 물리칠 정도로 매사에 신중하였으며 자기 절제가 강했던 인물이다.
장손 황후의 간언은 매우 치밀하고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방법도 다양하였으며 간언을 할 때 절대로 황제에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역사적 이야기나 성인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대통령, 지방자치 단체장, 국회의원 등이 측근, 친척들을 기용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대통령 부인의 말과 행동, 주변 인물을 두고 말이 참으로 많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경기지사였을 때 부인의 법인카드 불법 사용 의혹과 과잉 의전 논란은 수사대상에 있다.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 나아가 국회의원 등 모든 정치인의 부인들이 장손 황후의 생애와 간언을 보면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를 깨달았으면 참 좋겠다. 군유쟁비(君有爭妃)이다. 통유쟁부(統有爭婦: 대통령에게는 간언하는 부인이 있어야 한다)이다. 모든 정치인에게도 검소하고 절제할 줄 알며 간언하는 아내(남편)가 있어야 한다.
군유쟁신(君有爭臣)
임금에게는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
익주목(益州牧)인 유장(劉璋)은 조조와 장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형주에 있는 유비를 불러들여 이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이에 장송(張松)이 법정(法正)과 맹달(孟達)을 추천하고 유장은 이들을 사자로 삼아 유비에게 보낸다.
장송과 법정, 맹달은 일찍부터 유장이 익주를 다스리기에는 무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비가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권(黃權)과 이회(李恢), 왕루(王累) 등은 유비를 불러들이는 것은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주는 것이라며 적극 반대하였다.
마침내 유비는 유장의 요청으로 군사를 이끌고 익주로 향하였다. 유장은 각 현에 공문을 보내 유비군에게 전량(錢糧)을 공급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부성(涪城)으로 나가 유비를 영접하려고 하였다.
이때 황권과 이회가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이지 말 것을 재차 간청하였다. 특히, 이회는 “임금에게는 간하는 신하가 있어야 하고, 아비에게는 간하는 아들이 있어야 한다”면서 유비를 들어오게 하는 것은 대문에서 호랑이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장은 “유비는 나의 종형인데 어찌 해치겠느냐?”면서 다시 거론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일축해 버린다. 왕루가 죽음으로 간하였지만 유장은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분노하였다. 그리고 부성에서 유비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爭(다툴 쟁)은 ❶회의문자로 争(쟁)의 본자(本字)이다. 손톱 조(爪)와 또 우(又) 그리고 물건을 가리키는 갈고리 궐(亅)을 합친 글자로서, 위와 아래에서 손으로 물건을 잡고 서로 잡아당기며 다툰다는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爭자는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爭자는 爪(손톱 조)자와 又(또 우)자, 亅(갈고리 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爪자는 ‘손톱’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손’의 동작으로 쓰였다. 갑골문에 나온 爭자를 보면 소의 뿔을 놓고 서로 잡아당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소뿔 대신 쟁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서로 다투고 있다는 뜻은 같다. 爭자는 이렇게 무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는 의미에서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그래서 爭(쟁)은 ①다투다 ②논쟁하다 ③다투게 하다 ④간하다(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 ⑤경쟁하다 ⑥모자라다 ⑦차이(差異) 나다 ⑧다툼 ⑨싸움 ⑩어찌 ⑪어떻게 ⑫하소연(딱한 사정 따위를 간곡히 호소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툴 경(競)이다. 용례로는 서로 다투는 중요한 점을 쟁점(爭點), 싸워서 빼앗아 가짐을 쟁취(爭取), 서로 다투어 무슨 사물이나 권리 따위를 빼앗는 싸움을 쟁탈(爭奪), 서로 다투며 송사를 일으킴을 쟁송(爭訟), 서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다툼을 쟁의(爭議), 서로 권리를 다툼을 쟁권(爭權), 앞서기를 다툼을 쟁선(爭先), 우승을 다툼을 쟁패(爭覇), 일을 먼저 하기를 서로 다툼을 쟁두(爭頭), 서로 다투어 토론함을 쟁론(爭論), 같은 목적을 두고 서로 이기거나 앞서거나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겨루는 것을 경쟁(競爭), 싸움으로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을 전쟁(戰爭),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싸워서 다툼을 투쟁(鬪爭), 얼크러져 다툼이나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게 다툼을 분쟁(紛爭), 말이나 글로 논하여 다툼을 논쟁(論爭), 버티어 다툼을 항쟁(抗爭),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여러 패로 갈라져 다툼을 분쟁(分爭),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움을 당쟁(黨爭), 말로써 굳게 간하여 실수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치게 함을 간쟁(諫爭), 앞서기를 다투고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쟁선공후(爭先恐後), 서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다툼을 이르는 말을 쟁장경단(爭長競短),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는 쟁어자유(爭魚者濡) 뼈와 살이 서로 다툼의 뜻으로 형제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툼을 골육상쟁(骨肉相爭),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휼방지쟁(鷸蚌之爭) 등에 쓰인다.
▶️ 妃(왕비 비, 짝지을 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계집 녀(女; 여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짝짓다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己(기, 비)로 이루어졌다. 배우(配偶)의 여성, 왕비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妃자는 '왕비'나 '태자의 아내', '배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妃자는 女(여자 여)자와 己(자기 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하지만 갑골문에서는 己자가 아닌 巳(뱀 사)자가 쓰였었다. 巳자는 웅크리고 있는 태아를 그린 것이다. 여기에 女자가 더해진 妃자는 여자가 태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妃자는 본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아내'를 뜻했었다. 그러나 금문으로 넘어오면서 巳자는 己자로 바뀌게 되었고 배우자가 아닌 황제의 첩이나 태자의 아내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妃(비, 배)는 (1)임금의 아내 (2)황태자(皇太子)의 아내 등의 뜻으로 ①왕비(王妃), 왕후(王后) ②아내, 배우자(配偶者) ③태자(太子)의 아내 ④여신(女神)의 존칭(尊稱) 그리고 ⓐ짝짓다(배) ⓑ배합하다(配合--)(배) ⓒ보좌하다(補佐ㆍ輔佐--)(배)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배우자를 달리 이르는 말을 비우(妃耦), 왕비와 궁녀를 비빈(妃嬪), 왕비로 간택된 아가씨를 높이어 이르던 말을 비씨(妃氏), 임금의 아내를 왕비(王妃), 제왕의 배필을 후비(后妃), 어진 왕비를 현비(賢妃), 선왕의 후비를 대비(大妃), 옥 같이 어여쁜 후궁을 옥비(玉妃), 황제의 아내를 황비(皇妃), 왕비를 봉함을 봉비(封妃), 임금의 정실을 원비(元妃), 왕의 정실인 왕비를 정비(正妃), 왕비에 대하여 임금의 첩을 이르는 말을 방비(傍妃), 아리따운 여자를 원비(媛妃), 부왕이나 모후의 상중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을 일컫는 말을 상중납비(喪中納妃), 왕의, 살아 있는 할머니를 지칭하는 말을 대왕대비(大王大妃), 초나라 왕비가 부符를 지킨다는 뜻으로 명분에 사로잡혀 실實을 잃음을 이르는 말을 초비수부(楚妃守符)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