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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민수기의 말씀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천주의 모친 대축일>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또한 새해 첫 날, 모든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대축일을 축하드리며, 세배도 드립니다.
“축복의 멋진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모후이신 마리아)의 신비를 잠깐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시는 일’, ‘인간이 하느님을 낳은 일’, 곧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우선 낳은 아기가 ‘하느님’이라는 신원의 정체성을 드러내줍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줍니다.
동시에 그 어머니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을 말해줍니다.
이에 교회는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그리스도는 참된 ‘하느님’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호칭을 직역하면, ‘하느님의 어머니’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Θεο(하느님)+τοκοσ(아기를 낳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동급인 신적인 존재이거나 또는 하느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이 아니며, 혹은 성부 하느님의 어머니도 성령의 어머니도 아니며, 단지 인간이자 피조물이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성자의 어머니’를 뜻하며, 성자의 강생을 비추어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오랫 동안 기다려 온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시는 분’, ‘다윗과 같은 임금으로서의 메시아’로 드러납니다.
곧 예수님은 ‘새 다윗 임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다윗 왕가의 자손’(마태 1,1)임을 밝히며, 마리아는 ‘임마누엘의 어머니’(마태 1,6)로 증언됩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왕실의 모후’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다윗 왕조의 임금인 예수님의 어머니’라면, ‘왕의 어머니인 여왕 혹은 모후’로 부르는 것이 합당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서구 근대의 왕국에서 ‘여왕’이라는 호칭은 왕의 아내를 지칭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여왕’ 혹은 ‘왕비’란 왕의 아내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태후’ 혹은 ‘모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왕의 어머니는 ‘모후’로서 영예를 누리며 공경을 받았으며, ‘왕관’을 쓰고 ‘왕 오른편에 놓인 왕좌’에 앉아 왕과 함께 다스렸고, 왕에게는 가장 유력한 ‘전구자’ 역할을 하였습니다(1열왕 2,13-18),
따라서 마리아가 ‘그리스도 왕국의 모후’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모후’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마땅하며, 또한 임금이신 예수님께 우리를 위해 ‘전구’해주시도록 기도드리는 것도 합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마리아를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는 전통은 ‘그리스도 왕국의 천상 모후’라는 마리아의 정체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마리아 공경’과 ‘하느님 흠숭’의 차이점을 드러내줍니다.
곧 마리아를 공경하고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되,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마리아를 흠숭하고 숭배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우상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레미아서(7,17-18)에 나오는 ‘하늘여왕에게 과자를 만들어 바치고,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경’과 ‘흠숭’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흠숭’의 본질은 희생제사였습니다,
곧 공경하고 간청을 드리고 찬가를 드리는 것은 영웅이나 위인들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 있지만, 희생제사는 오직 하느님께 유보된 것이었습니다.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에서 특별한 공경으로 당연히 공경을 받으신다.
사실 오랜 옛적부터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로 공경을 받으시고, 신자들은 온갖 위험과 곤경 속에서 그분의 보호 아래로 달려 들어가 도움을 간청한다.
... 공경은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그대로 온전히 돈독한 것이지만, 강생하신 말씀과 똑같이 성부와 성령께 보여드리는 흠숭의 공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또한 그 흠숭을 최대한 도와준다.”
(971항)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예배’와 ‘흠숭’은 무엇보다도 ‘성찬례의 희생제사’를 바치는 것이며, ‘성찬례’는 오직 하느님께만 바쳐집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곧 ‘모후’로 공경하지만, 결코 마리아를 하느님처럼 ‘흠숭’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의 결정적인 차이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님의 축일을 축하드리며, 새해 축복을 빕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 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온갖 좋은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니
저희가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새 시대를 열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그 은총의 완성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축일의 이 예물 기도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잘 담고 있습니다.
전부터 새해 첫날을 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의 한 실마리가 풀린 것도 같아 기쁘기도 합니다.
세상이 세상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할 때 우리는 교회 달력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기념하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새해가 아니라 새 시대이어야 하고, 우리에게는 새해가 열리는 정도를 넘어 새 시대가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해가 열리는 것의 의미는 잘 알겠는데 새 시대가 열렸다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성탄 신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이신 분이 이 세상에 탄생하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신화하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연결 고리가 되시고, 그 중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십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심으로써 당신은 천주의 어머니가 되시고, 당신의 아드님처럼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여신 겁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연결하면, 하느님이신 분이 성모의 아들이 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종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시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종일 뿐 자녀가 아니었으며, 하느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를 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상속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옛날에 정실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종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종의 자식으로 아무런 상속을 받지 못하던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런데 이 새 시대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고작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가 아니라 새 시대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작년에 못 이룬 또는 작년에 실패한 것을 올해는 이루고, 지금까지 하지 않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올해 시작하는 그런 정도를 넘어, 죄의 종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는데, 새해를 맞아 이 새 시대의 삶을 본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민수기의 말씀처럼 자신이 복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이 되는 사람, 악마의 자식처럼 입에서 저주나 욕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늘 축복을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해에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신명 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
(신명 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 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니, 따르는 자체가 복입니다.
복은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 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화려함이 아니라 내면의 충만함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길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목자들이 구유에 누운 아기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감당하는 분이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삶의 여정에 주어지는 모든 일에 곰곰이 되새기며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발아래 굳건히 자리를 함께하며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 3,9)
그런 의미에서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끝까지 흔들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성모님께 청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시편 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놓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활용하지도 않으면서 남과 비교하고, 남의 탓을 하는 가운데 받은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는 세속적인 복을 찾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중에 가장 큰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와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23년의 사목중심을 “더 큰 사랑으로!” 정하였습니다.
1. 기쁨 전하기 2. 봉사하기 3. 일치하기
더 큰 사랑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신앙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해 희생 봉사해야 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은 새해의 첫 날이고 그만큼 큰 은혜의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이란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벅찬 기쁨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니,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새해의 첫 날부터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교의는 네스토리우스 주교가 성모님은 그저 인간 예수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해야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라 하느냐는 주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단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불과 나무처럼,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숯불은 나무와 불이 서로 다른 두 본성이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숯불은 숯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그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벌을 줄, 그런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부모의 지위까지 올려주실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신의 죄를 그대로 짓는 것입니다.
밀가루까지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신성은 우리 인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진심이 될 수 없습니다.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 자국을 가친 채 도시로 이사 온 그레이스는 친구들에게 ‘괴물’이란 놀림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상처 받아 울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 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 얼굴에 생긴 상처는 하느님께서 네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표징이란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말을 믿었고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잘생긴 남학생과 결혼하여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나는 괴물이야!’라고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고 하느님은 될 수 없다고 믿으며 같은 인간으로서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올라가신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말이 될까요?
성모님은 지금 인간이 어떤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아수라’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인육까지 먹는 사람이 생길 정도의 기근이 들었을 당시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길에 쓰러진 사람의 고기까지 먹습니다.
아기도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으며 자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이 눈에는 모든 사람이 고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때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스님과 한 여인입니다.
스님은 제발 인간이 되라며 자기 팔을 잘라줍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아수라는 인육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해준 여인이 굶어 죽어가자 말을 죽여 고기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고기가 인육인 줄 알고 죽기까지 먹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수라는 굶어 죽으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는 여인과 자기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팔까지 자른 스님에 의해서 이제 타인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셨습니다.
모기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면 아수라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공경이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품은 여인이요, 하느님을 낳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믿으신 분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으로 공경한다고 하는 거짓 기도를 하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성모님>
아기 예수님의 복된 성탄 팔부 축제 기간 중에 갑작스레 어머니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린 대축제 기간이라 직천당하셨을 것이라는 덕담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워낙 황급히 떠나시는 바람에 미처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해 황망하고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이젠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희미하게나마 당신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살짝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시더군요.
장례 절차가 다 끝나고 마지막 가시는 길 화장장 가족 대기실에 홀로 앉아있는데...어머니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애야! 그동안 나 때문에 애썼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제 또 다른 어머니께서 네 엄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돈보스코께서도 엄마 잃고 슬퍼 울부짖으며 오라토리오에 살러 들어온 가엾은 아이들을 볼 때 마다, 당신의 크고 따뜻한 가슴에 그들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했습니다.
“애야!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저기 저분 보이지? 앞으로 저분,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네 어머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그러니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만사 제쳐놓고 성모님께 매달리거라.”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제 나이를 만만치 않게 먹은 저도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이토록 큰데, 부모를 일찍 여윈 열두 서너 살 아이들, 열여덟 열 아홉 청소년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찢어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오늘따라 많이 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그럭저럭 통제가 되더니, 모든 예식이 끝나고 홀로 남으니 갑작스레 큰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더군요.
주체할 수 없는 폭풍 눈물을 닦느라 혼났습니다.
엄마를 일찍 여의고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큰 구멍이 나 있는 분들, 그 큰 구멍으로 불어오는 삭풍에 언제나 마음이 시리고 휑한 분들, 오늘 천주의 모친인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현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극심한 고통과 상처에 힘겨워할 때, 외로움과 절망감에 허덕일 때,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힘겹게 살아오신 한해였습니다.
잘 견뎌내시고 극복하셔서 오늘 이렇게 또다시 한해와 작별하고,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새로운 한 해를 축복하시고 필요한 은총 베풀어주시며,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오늘 복음에서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은 앞의 10절-12절에 있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소식을 가리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루카 2,10-12)
예수님은 ‘구원자’이신 분이고, ‘주님’이신 분이고, ‘그리스도’이신 분입니다.
이 표현들을 하나로 합하면,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다윗 고을’은 베들레헴입니다.
천사가 베들레헴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윗 고을’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즉 구세주”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아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무렵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서 태어난 아기들이 더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다른 아기들 말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으라는 뜻입니다.
‘표징’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은 “메시아는 ‘낮은 곳’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그래서 왕족들과 함께 있었다면,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구원하신다는 말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면 ‘낮은 곳’에 있는 예수님에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예수님이 ‘높은 곳’에 계신다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높여서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어려운 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면 ‘낮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상류층 사람들만 상대하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교회 밖으로 밀어내게 되지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면 상류층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가서” 라는 말은 목자들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기뻐했다는 것은 갈망하면서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에는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가 없고 목자들의 이야기만 있는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만 있고 목자들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렸다는 점과 메시아 강생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는 점과 메시아를 찾아갔다는 점에서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은 ‘같은 심정’으로 ‘같은 일’을 한 사람들이고, 두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헤로데 같은 자들은 기뻐하지는 않고 두려워했습니다.
“찾아냈다.” 라는 말은 목자들이 여러 곳을 다니면서 찾았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도 그 무렵에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이 더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뒤에 ‘메시아 강생 소식’이라는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들이고, 그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알린 ‘첫 증인들’입니다.
왜 그들이 선택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루카 2,14).
목자라는 직업 때문이 아니라...
복음서에는 없는 말이지만, 그 목자들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외양간의 주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산모를 위해서 외양간 겸 숙소로 사용하는 자기들의 동굴을 내주고, 들에서 야영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태어날 아기가 특별한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 실천과 하나입니다.
목자들이 첫 증인으로 선택된 것은 그들의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이 하느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라는 말은 요셉과 마리아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더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가족들과 친척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등록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친척들도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방을 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출산하는 마리아 곁에 요셉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목자들의 말을 듣고 놀랐을 것이고,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지는 않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깊이 묵상했다.’ 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온 삶으로 받아들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축복 받은 인생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빛살을 지어내신 빛의 창조주 구유도 마다않고 누워 계시네,
일찍이 성부 함께 하늘 내신 분 아기로 모친 품에 안기셨도다.
이제야 빛과 구원 탄생하시니 어둔 밤 사라지고 죽음 없도다
마리아 낳은 아기 하느님일세 오너라 만민들아 그를믿어라."
아침 성무일도 시 찬미가가 아름다워 두 연 추가합니다.
새해에는 제 나이 우리 나이로 75세가 됩니다.
하느님 집에 귀가할 날이, 그리운 하느님 얼굴을 뵈올 날이 가까워졌다 생각하니 마음에 기쁨이 번집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영원한 기쁨에 참평화요 참행복입니다.
오늘 202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 첫날부터 하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내리는 날입니다.
저절로, “평화의 모후여, 감염병과 전쟁,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이 땅을 위해 평화를 빌어주소서” 기도하게 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어머니께 전구를 청하게 됩니다.
정순택 천주교 서울 대교구장 2023년 새해 메시지 다음 성구도 절실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 5,9)
평화의 축복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해 모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겹고 은혜로웠는지요!
해마다 부를 때 마다 감동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화살기도 노래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어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저에게는 지난 2022년 한해도 크나큰 축복의 해였습니다.
오늘도 밤12:30분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듯이, 지난 한 해 역시 이런저런 사유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든 1년 365일 매일 밤 1시 전후로 일어나 그날 강론을 한결같이 써올려 나눴다는 것은 무엇보다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2023년 올해는 물론 남은 생애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매일 강론에 산책시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 매일미사를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도 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온통 향년 95세로 돌아가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선종에 즈음하여 교회 각층 지도자들의 찬사 말씀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치 축제와도 같은 죽음이란 느낌과 더불어 새해 교회에 주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축복의 죽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찬사를 소개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바로 베네딕도 교황님의 열쇠말이셨다.”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휘하에 계실 때는 신앙의 수호자”
“포도밭의 겸손한 일꾼”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를 말씀하신 분”
“교회내의 참 주요한 인물”
“부드러운 아버지의 모습”
“신사이자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도”
“슬픔과 더불어 감사를 드린다.”
“충실한 종”
“친절한 교황”
“위대한 교황”
“교회를 섬기는데 최고의 하느님의 사람”
“그분의 교황직 사임은 거룩하고 겸손한 행위”
“박물관의 조각이 아닌 하나의 관례(institution)인 분”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은 분”
정말 고전적인 분이자 교회의 사람, 성인이신 교황님이셨습니다.
새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축복의 죽음 선물이란 믿음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은 출력한 수십쪽의 교황님에 대한 기사를 읽을 계획입니다.
살만한 인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축복의 선물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하는 것은 수도원 십자로에 있는 예수 성심상 사진과 더불어 보내는 문자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정말 축복기도 바치는 마음으로 드리는 축복인사입니다.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축복주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하느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성탄의 축복이 참 고맙고 기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을 찾았던 목자들이 받은 축복을 전해 줍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참 좋은 응답이 하느님 찬양과 찬미입니다.
정순택 대주교님의 성탄 새해 축복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보이는 인간으로 나타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이제는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극히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더러운 마구간에 오시니, 누추한 곳이 거룩한 곳으로 변하였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생의 신비와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은총 충만한 새해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새해를 맞이한 성탄 축복이 얼마나 큰지요!
작년 12월28일은 교회학자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의 서거 400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날 교황님은 수요일 알현 강론에서 성탄 축복에 관한 일련의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자신의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자신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처럼 소유적이 아니고 이기적 사랑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순수한 선물이자 순수한 은총이다.
그것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 우리의 선익을 위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소유의 완전한 포기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거친 구유의 침대는 부드러움과 거침, 사랑과 슬픔, 감미로움과 조잡함을 연결한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함과 검소함안에서 기쁨의 축제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직 우리의 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 탄생하신 성자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의 축복에 이어 성령의 축복입니다.
제2독서 갈라티아서에서 바오로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축복이 하느님 자녀로서의 축복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무지의 종이, 죄악의 종이, 탐욕의 종이, 율법의 종이 아니라,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성령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게 하시니 도대체 이 축복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는지요!
정말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주신 축복을 저는 천주교 사제로써 계속되는 성탄 축제중 맞이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자 세계 평화의 날 새해 첫날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께 새해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매일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축복덩어리,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축복 선물을 가득 받으시고 새해에는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말씀과 함께 새해를 엽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갈라 4,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이 여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대히 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십니다.
제게는 축복이 가득한 새해 첫 날의 말씀들이 일제히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인 "기도"를 향하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마리아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처음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천사의 "인삿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하셨지요.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품으셨습니다.
부산하게 말씀을 헤집거나 흩어버리지 않고 그저 침묵 가운데 곰곰이 머무르십니다.
<말씀에 머물러 되새기는 기도>는 말씀이신 분의 현존 안에 온전히 잠기는 기도입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온 존재로 품다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머리가 아니라 영혼이 감지합니다.
말씀이신 분의 정감이 내게 스며들어 당신을 드러내시면, 이내 문자는 사라지고 문자 안에 감추어졌던 주님의 속성, 주님의 마음이 만져집니다.
그 주님과 하나되어 일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기도입니다.
이때는 무얼 바라거나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도 않지요.
그저 그분과 사랑 안에 잠겨 사랑하면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민수 6,27)
다음은 <축복의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백성을 위해 축복을 명하십니다.
타인을 축복하고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직무 사제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하느님의 모상인 모든 사람의 권한이고 의무일 것입니다.
하느님과 마주하여 대화할 때 우리 시선이 자신의 욕망과 안위에만 고착되어 있지 않고 타인의 선과 유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도 진심으로 염려하고 응원하고 있다면,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참 흡족하시겠지요.
축복의 기도는 축복하는 이와 축복을 받는 이, 아버지를 동시에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갈라 4,6)
<성령께 내어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형제라 불러주신 성자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성부 하느님을 향해 힘껏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그 영과 하나 된 우리도 함께 아버지를 부릅니다.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호의가 아니면 우리 힘으로 꿈꿀 수 없는 은총이지요.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26)
사도 바오로는 성경 다른 곳에서도 성령께서 우리 기도를 어떻게 도와주시고 이끄시는지 알려 줍니다.
살다 보면 주님 앞에서 무얼 청해야 할지, 무슨 말씀은 드려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순간도 닥치게 됩니다.
이제껏 청한 내 간구가 과연 아버지의 뜻에 맞는 기도였는지 성찰하게 되면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내 안의 성령께 그냥 맡겨드리면 됩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자유로이 기도하시도록 방해꾼인 내 자아와 욕망은 잠잠해져야 합니다.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루카 2,16)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루카 17,17)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목자들의 말과 행동은 순박한 믿음에서 우러납니다.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은 이 엄청난 신비의 증인으로 채택된 것에 대해 우쭐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들은 바를 보기 위해 서두릅니다.
진위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관상)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가늠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확인 차원이 되어서도 안 되고, 교만의 근거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기도는 그저 믿음이 지시하는 바를 보는 것입니다.
봄!
관상은 우리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게 기꺼이 열어보이시는 은총입니다.
"목자들은 ...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루카 2,20)
목자들은 들었고, 찾아냈으며, 들은 말을 알려 줍니다.
선택된 증인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지요.
자기들의 몫을 다한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자기들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목자들이 돌아간 제자리는 이전과는 다른 목장, 목초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그곳에 찬미와 찬양이 흐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의 결과를 외부에서 찾다가 실망하기 일쑤지만, 실상 기도는 기도하는 이의 내면에서부터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바를 본 영혼은 더이상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 자체, 봄 자체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루카 2,21)
이 이름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가 각각 알려 준 바 있습니다(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는 "주님께서는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천사의 전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성자의 소명이 그 이름 안에 각인된 것입니다.
기도는 비록 침묵이나 머무름처럼 정적이더라도 이루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품는 그 자체에 완성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사 말씀들 곳곳에 묻혀 있는 기도의 보물들을 두서없이 꺼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또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올해 우리를 축복 가득한 기도의 곳간으로 이끄시는 듯합니다.
말씀이 기도로 이끄시니 그저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말씀사랑 벗님!
올 한해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23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새로운 한 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은 계묘년 토끼띠의 해입니다.
저는 토끼띠이고 생일은 5월 16일입니다.
토끼가 좋아하는 풀이 자라나는 때에 태어나서인지 크게 부족함은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들과는 원만하게 지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께서는 신앙을 물려 주셨습니다.
어려서 토끼에 대해서 들을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토끼는 잘 뛰는 동물이고, 거북이는 느린 동물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잘 뛰는 토끼는 한참을 먼저 가서 느긋하게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느린 거북이는 쉬지 않고 걸어서 토끼보다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습니다.
새해에는 능력이 있다고 먼저 가기 보다는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쉬는 교우가 있다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이 있다면, 깨워서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면 좋겠습니다.
저도 토끼처럼 자만하지 않고,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겁 많은 토끼’입니다.
어느 날 토끼가 낮잠을 자는데 나무 위에서 도토리가 떨어졌습니다.
겁이 많은 토끼는 지진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물어보니 지진이 낮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물들도 모두 토끼를 따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왜들 그렇게 뛰어가는지 물었습니다.
토끼는 지진이 났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그럼 그 장소에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태산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거짓이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도토리에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아니야 내가 그리스도다!’라며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동요하지 마라.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새해에는 부화뇌동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별주부전’입니다.
용궁으로 갔던 토끼 이야기입니다.
바다에 사는 용왕이 병이 들었습니다.
토끼의 간을 먹으면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북이는 육지로 와서 토끼를 감언이설로 속여서 용궁으로 데려갑니다.
간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토끼는 기지를 발휘하여 간을 집에 놓고 왔다고 합니다.
결국 거북이는 토끼를 육지로 데려다 주었고 토끼는 도망을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유혹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한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사탄들은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술과 도박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재물과 권력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큰 방법은 ‘다음에 하지’라는 생각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나라에서 멀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새해에는 뒤로 미루기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토끼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지능지수로 보는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아보겠습니다.
지능지수 30의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 끼토산
지능지수 5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지능지수 8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죽은 토끼
지능지수 100의 생각 산토끼의 반대말은 바다토끼
지능지수 120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판토끼
지능지수 150의 산토끼의 반대말은 알칼리 토끼
새해에는 우리의 신앙도 성숙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길가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갈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시밭에 떨어지는 신앙이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름진 밭에 떨어져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있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2023년 새해를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023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953년 미국 예일대는 졸업생들에게 장차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3%만이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을 써서 제출했다고 합니다.
97%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거나 생각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했더니, 놀랍게도 3%의 졸업생이 나머지 97%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9년에 하버드대에서도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같았습니다.
3%가 나머지 97%보다 무려 10배나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심리학에 ‘자기실현적 예언 효과’라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발언하면 거기에 맞춰 자신의 태도를 변경하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은 씨가 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이를 말로써 계속 밝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표 자체를 세우지 않아서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면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2023년 1월 1일. 계묘년이 밝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목표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목표, 헛된 목표, 남과 비교하는 남의 목표만을 세워서 자기만의 뚜렷한 목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목표 역시 아들의 목표인 인간 구원에 동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 후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9)
섣부른 판단보다는 늘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과연 어떤가요?
자기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할 것인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의 목표보다 주님과 함께하는 목표를 곰곰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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