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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보름째 찾아뵙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는데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삼진이냐? 우리 하남에 왔다.”
“아, 오셨군요. 지난주에 간다고 해 놓고 못가서 죄송해요. 제가 내일 새벽에 갈게요.”
“바쁜데 무리는 하지 마라. 그냥 하남에 왔다고 알려 주는 거니까.”
그러나 나는 안다. 그게 보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큰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간 지 석 달이 되었다. 큰형은 하남에서 멀지 않은 남양주에 산다. 6 년 전, 그러니까 어머니가 팔십 중반을 넘어섰을 때 큰형은 형제들로부터 이제는 부모님을 모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런 눈치를 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 누가 모시네, 마네 그런 신경 쓰지 마라. 아직까지는 내가 아버지에게 밥을 해 드릴만 하니까. 그게 힘들어지면 이 집 팔아서 실버타운에 들어가 편하게 살테니 너희들은 자주 놀러오기만 하면 된다. 쾌적한 전원에 시설도 좋고 전용병원도 안에 있다니 얼마나 좋으냐.”
아닌 게 아니라 소파 옆 탁자에는 고급 실버타운을 소개하는 팜프렛이 놓여 있었다. 두 분이 이미 실버타운 알아보고 계셨다는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두 분이 모두 정신이 온전할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은 말도 안 된다며 귓등으로 들었다.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데 실버타운 아니라 골드타운이라도 그렇지 요양원은 요양원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식들의 눈치를 보시려고 일부러 해 보신 말씀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일이 년이 가고 삼사 년이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 부모님은 6 년 전에 하신 말씀은 까맣게 잊고 계셨다. 그 뿐만 아니라 실버타운 입주비가 그새 많이 올라서 아파트를 판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부모님의 건강은 흐른 햇수만큼 나빠졌다. 재작년에 큰형과 막내가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 진찰을 받았는데 알츠하이머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제는 모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모실 수 있는 사정이 되는 형제는 큰형과 막내 여동생이었는데 가족들과 협의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의 건강이 웬만하셨으므로 형제들은 당번제를 정하여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며 때를 보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20여 년 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작은 형이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나왔다가 밀린 효도를 한다고 넉 달간 부모님을 모셨다. 귀국하기 전에 작은 형은 형제들과 만난 자리에서 더 이상은 두 분만 계시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심각하게 말했다. 막연하게 모셔야 할 때가 되었다고만 생각만 했을 뿐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던 차에 작은형이 한 집에서 살며 두 분의 증상을 겪어보니 생각보다 중증이었던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진행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고 했다. 부모님의 치매증상을 전하면서 작은 형은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큰 형이 서둘러 모시게 된 것이다. 작은 형이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일주일 후 큰 형은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뒤늦게 부모님을 모시게 된 큰 형은 비로소 어깨가 펴졌다. 막내여동생은 큰 오빠가 친지고 아파트경비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더라며 깔깔 웃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랴. 얼마 전에는 나와 통화를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형수가 모시기 전에는 나도 이제 나이 일흔의 할머니라는 둥, 왜 장남만 모셔야 되느냐는 둥 하더니 막상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게 되니까 하루 세끼 뜨거운 밥을 꼬박꼬박 차려드리며 그렇게 잘 하더라는 것이다.
어쨌건 부모님이 큰형의 아파트로 옮기고 나서는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묵직한 마음은 가벼워졌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하루는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별로 탐탁해 하지 않는 목소리로 마치 고자질 하듯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얘, 여긴 감옥 같애. 22층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콩알만 해. 누가 데리고 나가기 전엔 방안에만 있어야 하는구나. 하남에선 창문 열고 바깥도 내다보고 점심때는 노인정에 가서 밥도 먹고 노인들과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게 뭐냐? 하루 종일 꼼짝도 못하고.”
불편한 게 과연 그런 것들뿐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의 틀니문제(어머니는 틀니를 뺀 상태의 모습을 친자식에게도 절대 보여주려 하지 않으셨다.)라든가 20년 가까이 고생해 오신 아버지의 전립선염으로 인한 문제(아버지는 80세 되던 해에 전립선 수술을 했는데 15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배뇨가 통제되지 않았다.)말고라도 소소한 문제들이 많을 것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오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 오붓이 살아오신 햇수가 삼십 삼년이다. 그런데 이제는 키워 온 자식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니 얼마나 불편할까. 큰형이 아무리 잘 모신다고 해도 삼사십 년 이전처럼 대가족시대의 위엄 있는 어른이 되기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부모님은 애시 당초 그런 권위보다도 두 분만의 자유로운 삶을 희망하실 터이다. 큰형이나 큰형수가 집을 비우면 커다란 아파트는 고층감옥일 뿐이다. 단지 내를 산책하고 싶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가 겁이 날 것이며 현관문을 여는 것은 물론 잠그는 것도 자신이 없을 것이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어머니는 하남에 살 때 일요일마다 다니던 성당을 생각해 내셨다. 굳이 하남 성당에 가셔야 될 이유는 없지만 어머니는 하남성당을 가겠다고 하셨고 큰형은 토요일 저녁에 부모님을 하남아파트로 모셔다 드렸다.
큰형은 부모님이 형네 아파트에서 가끔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운동 삼아서라도 또 기분전환삼아서라도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십 여 년 쌓아온 이웃들과의 관계유지도 부모님께는 소중하지만 형수에게도 적당한 휴식이 필요할 것 아닌가. 형네 아파트를 벗어나면 얻는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은 다른 자식들을 골고루 볼 수 있다는 것. 장남의 아파트로 들어 가버리니까 다른 자식들이 마음을 놓았는지 자주 오지를 않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남에 가면 딸들과 막내아들이 알아서들 오는 것이다.
큰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간 후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여동생들은 부모님이 일주일에 이삼일 하남으로 와계시자 다시 바빠졌다. 하남에 와계신 동안에는 식사문제를 해결해 드려야 했지만 가스는 제대로 잠그는지, 약은 때맞춰서 드시는지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사는 두 여동생이 고생을 한다. 멀기도 하려니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이른 아침에 다녀오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우리 하남에 와 있다. 바쁜데 신경 쓰지 마라.”
이 말은 이제 올 때도 되지 않았니? 라는 뜻이다. 이 말도 효과가 없을 때는
“얘, 너 혹시 오늘 온다고 하지 않았니?”
이쯤 되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이렇게 귀여운 어머니를 꼭 안아드리고 싶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분은 베란다에서 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손을 흔들자 두 분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손을 흔드신다. 도착 십 분전쯤 산보준비하고 계시라고 전화를 드렸을 때부터 기다리고 계셨을 것이다.
허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휠체어에 앉혀드리고 아버지가 밀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휠체어에 타실 때 손수 밀어드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미는 것을 언짢아 하셨다. ‘동네사람들 보시우, 아들이 와서 운동도 시켜주구 해장국도 사준다우’ 이렇게 자랑하고 싶으신 건지 아니면 아버지가 미는 게 안쓰럽고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버지에게 휠체어를 밀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운동량이 워낙 모자라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운동을 하게 하려는 뜻도 있지만 사이좋게 해로(偕老)하시는 모습을 자랑하려는 마음도 있다.
시청공원에 가서 운동을 시켜드리고 단골해장국집에 들러 돌솥설렁탕을 시켰다. 한 그릇으로 두 분이 반씩 나누어 드신 지 이미 오래됐다. 오늘따라 아버지는 음식이 나오기 전인데 김치며 깍두기를 맛있게 드신다. 어머니는 어제까지 괜찮았다는 잇몸이 아파 음식을 잘 씹지 못하겠다며 깍두기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연신 어이 시원해, 어이 시원해, 하며 드신다. 국물까지 깨끗하게 드신 아버지는 활짝 웃으시며 내게 물으셨다.
“얘, 이게 이름이 뭐냐? 나 이런 건 처음 먹어본다.”
“아니 이건 삼진이가 올 때마다 사드리는 건데 뭘 처음 먹는다구 해요?”
아버지는 요즘 어떤 음식도 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라고 하다가 어머니께 지청구를 들으신 후에야 입을 다무신다. 맛있게 드신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일 아닌가. 점심으로는 우거지해장국을 포장했고 저녁엔 빵을 드시겠다고 해서 빵집에 들러서 먹고 싶은 빵을 고르시게 했다. 오늘 부모님의 식사는 준비 완료다.
이제 나는 일터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갈 채비를 끝내고 어머니께 여쭈어 본다.
“그래 몇 시 미사를 가실 거예요?”
“글쎄 아홉시 미사를 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안 가신다고 버티니 어떡하니? 벌써 삼주나 빠졌단다.”
매주 성당오신다고 형의 집을 빠져 나오시면서 막상 성당은 건너뛰는 게 절반은 넘나보다. 문득 성당을 핑계로 형의 아파트를 탈출하는 두 노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성당에 안 가시면 덩달아 안 간다. 아니 아버지가 못 가게 하기도 하지만 아버지 혼자 두고는 불안해서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은 갑시다. 그렇게 자꾸 빠지면 어떡해요. 하나님이 좋아 하시겠냐구요.”
그러나 아버지의 대꾸가 걸작이다.
“아, 조금 있으면 직접 뵈러 갈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아버지의 마지막 친목회
6년 전 부모님 댁에서 가까운 곳에 살 때다.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아버지가 모임에 가셔야 하는데 바쁘지 않으면 모시고 다녀와 주었으면 하셨다. 어머니가 약속이 있을 때는 아버지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동행을 해주셨다. 약속장소 근처에서 혼자 식사를 하시고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같이 들어오시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모임이 있을 때는 어머니가 시간을 보내기가 애매했으므로 큰형이나 내게 모시고 다녀오게 했다.
노인들이어서인지 약속은 점심으로 잡혀 있었다. 나는 시간에 맞춰서 부모님 댁으로 차를 몰고 갔다. 90객들의 모임은 어떨까? 약주는 많이 드시지 못하시겠지만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실까가 궁금했다. 아버지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서 술친구가 많으셨다. 중학교에 다닐 때의 어느 일요일, 어머니가 작은 형과 나를 불러 아버지의 친구 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한 게 기억난다. 오전에 친구 댁에 놀러가셨는데 저녁이 되도록 귀가를 하지 않는다며 걱정하고 계셨다. 한 시간쯤 후에 양조장을 하신다는 친구 댁에 도착해 보니 두 분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위에 큰 대자로 누워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멍석 한 가운데 개다리소반 밑으로 소주병이며 막걸리 병이 즐비했다. 형제가 양쪽에서 부축해 낑낑거리며 모시고 왔던 일은 아버지의 낭만과 우정을 떠올리는 즐거운 추억 중에 하나다. 아버지의 친구 중에서는 오래 사신 편인 그 분은 8년 전 쯤에 돌아 가셨다. 아버지의 70대 중반만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분들이 가끔 모이셨고 우리 집에도 놀러 오셨는데 모이기만 하면 온 집이 들썩거리도록 유쾌하게들 노셨다. 그 분들은 어머니나 우리들이 있건 말건 질박한 육두문자를 주고받아서 어머니를 질색하게 만들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 욕설을 들을 때마다 흉내를 내며 킬킬거리곤 했다. 항상 정장차림의 깔끔한 이미지였던 아버지가 그렇게 흐트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누이동생들에게는 늘 자상했지만 아들들에겐 엄격하셨던 아버지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예외여서 무등도 태워주고 용돈도 주시곤 했던 것이다.
오늘은 교육공무원을 같이 지냈던 동료들의 모임이라 들었다. 열 세분 모두들 80중반은 넘어섰고 90줄을 넘긴 분도 아버지를 포함해 두 분이라 했다.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을 해서 아버지를 방에 모셔드리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안에서 식당을 보니 한두 분씩 들어가는 노인들은 분명 아버지 친구들이겠지 싶었다. 어쩌면 하나 같이 지팡이를 짚었는지.
나는 옆 식당에 가서 된장찌개를 먹고 차로 들어가 기다렸다. 전화를 몇 통화하고 나니 무료했다. 커피 생각이 나서 아버지의 친목회가 열리고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모임이 있는 방 아래엔 구두가 십여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눌까? 커피를 뽑아들고 방 앞에 식탁에 앉았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아, 그 사람은 마누라가 목욕탕에서 넘어졌대. 요즘 운신을 못해서 대소변을 받아낸다는구먼."
"쯧쯧 그 나이에 넘어졌으면 고생깨나 하겠는걸."
“최 교장은 아들 하나 있는 게 이민을 갔다나? 부인이 골골해서 집 팔아서 요양원으로 들어가겠다는군.
“퇴직금 받아서 사업자금 보태줬다던 그 아들이 이민을 간대? 쯧쯧.”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딱하긴 마찬가지였다. 모임에 나오지 못한 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누구는 얼마 전에 상배를 했고, 누구는 자식을 앞세워 보낸 후 며느리 보기가 미안해서 빨리 죽고 싶다는 둥 모두가 어두운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모인 분들의 연세를 생각해 보면 기쁜 내용보다는 슬픈 내용이 더 많을 것이 아닌가. 다치고, 아프고, 죽고, 여의고, 등등
1시 반이 안 됐는데 끝나는 눈치였다. 열두시 모임이었으니까 한 시간 반이 걸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분기별 모임이라는데 그렇게 하실 말씀들이 없었을까? 일어나는 움직임이 느껴져서 먼저 일어나 주차장으로 갔다.
앞장 서 나오는 아버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가자.”
“네. 재미 있으셨어요?”
“재미는 무슨 재미가 있겠니? 맨날 아프고, 죽고 그런 얘기들만 하는데.”
“…….”
“이젠 이 모임에 나오는 것도 눈치가 보여. 회장이라서 억지로 나오긴 하는데 올 때마다 한두 명씩 못 와. 아프거나 죽은 거지. 오늘도 두 사람이 못 왔더라. 다음에 내 차례인가 싶구.”
“……”
뜬금없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죽마고우 집 마당에 큰대자로 누워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 집으로 찾아온 친구들과 육두문자로 질박한 농을 주고받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아버지를 모시고 모임에 다녀 와 달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날이 아버지의 마지막 친목회였나 보다.
어머니의 기억
부모님이 감기로 고생하신다고 해서 식전에 막내 여동생 집으로 문병을 갔다. 부모님은 큰형의 칠순 잔치 이후 거처를 막내 여동생 집으로 옮겼다. 동생은 아침을 차리느라고 바빴고 부모님은 TV를 보고 계셨다.
정전60주년 특집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당시 종군했던 기자들과 UN군으로 참전했던 외국인들이 출연해서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당시를 회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들의 회고담을 열심히 듣고 계셨다. 요즈음의 아버지의 상태가 저런 이야기를 이해하실까? 나는 고개를 외로 꼬고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찬을 준비하던 막내여동생이 나의 그 모습을 보았는지 내게 슬쩍 귀띔했다.
“왜? 열심히 보시는 거 같지? 그런데 보는 게 보는 게 아닌 것 같애. 수십 년 반복되어온 몸의 기억에 순응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침식사를 기다릴 때엔 신문을 본다든지 TV를 봐야 한다는 거지. 무슨 내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한번은 신문을 보시는데 페이지를 넘기거나, 자세를 바꾸질 않으시더라구.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관찰을 해보니 한 시간째 같은 면인 거야. 직접 모시면서 지켜보니까 일어나면 화장실을 가고, 세수를 하고 그리고는 거실에서 신문을 보다가, 다 봤다고 생각되면 TV로 아침뉴스를 보시는 거지. 내가 밥을 다 차린 후 ‘아침 드세요’라고 하면 식탁으로 와서 식사를 하시는 이런 일상적 행동들이 어떤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생 반복되어온 학습의 결과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 말을 하는 막내여동생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과연 그런 것인가? 내가 분가하기 전에 아버지는 이른 아침 마루에서 신문을 보셨다. 내가 곁에서 신문을 들여다보면 다 읽은 페이지를 내게 “엣다”하며 넘겨주시곤 했었다. 그러면 나도 아버지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신문을 보곤 했었는데.
나는 슬픈 심정이 되어 아버지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좀 어떠신 것 같냐고 물었다. 최근에 부모님댁에 다녀오자마자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드렸는데 5분도 안 돼서 왜 전화를 해서는 왜 전화를 하지 않느냐고 꾸짖은 적이 있어서다.
“엄마? 요즘 우리가 아버지에게만 신경을 쓰느라고 엄마한테는 소홀해서 그렇지 은비아빠 얘기로는 치매가 무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네.”
“그러게. 그러신 것 같았어.”
그때 어머니가 내 쪽을 보며 크게 말했다.
“저 때 말이다.”
나는 바로 ‘네~“라고 대답하며 어머니의 곁으로 뛰어갔다. TV 화면엔 남부여대의 피난민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저 때, 네 아버지는 나라를 지켜야한다며 느 외삼촌과 같이 제2국민병으로 자진 입대를 했고 나는 친정식구를 따라 피난을 갔단다. 준비를 하느라고 너희들에게 옷을 입히는데 할머니가 씨를 다 말릴 작정이냐며 제대로 걷지 못하는 너는 당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하시지 뭐니.”
그때의 이야기를 하시려나보다. 그때 외삼촌이 걷지도 못하는 막내놈을 데리고 가면 고생이라고 그냥 두고 가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말씀은 외삼촌은 아버지와 입대하셨다지 않은가.
“아니, 어머니. 제가 알기로는 외삼촌이 저 놈까지 고생스럽게 어떻게 데리고 가냐며 그냥 두고 가라고 하셨다면서요,”
“외할아버지 형제분이 많잖니. 피난 갈 때였다면 셋째 외할아버지가 왔다가 할머니 말씀을 거들었을 거야.”
“그랬구나. 난 여태 외삼촌이 그러신 줄만 알고 미워했었는데. 그래서요.”
“그러니 너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지.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안 되니까 할머니랑 시댁식구들 일부는 남았었거든. 인숙이는 옥분이라는 먼 친척 누나에게 업히고, 양 손에는 성진이, 승진이를 잡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가는 거야.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연신 뒤를 돌아봤어. 대(代)가 끊기면 안 된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또 그 말씀이 틀린 말씀도 아니고…….
어머니는 마치 지금 피난을 가고 있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산소 옆에 포대기채 싸서 버린 아기도 봤고, 누군가 버리고 간 재봉틀을 주워들고 가다가는 무거워서 다시 버리고 가는 사람, 별에 별 사람들을 다 봤지. 며칠 만에 충청도 진천 어느 농가 담배건조실에 짐을 풀고 잠을 자려니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구나. 마냥 손가락을 빨 줄밖에 모르는 네 생각에 밤을 하얗게 새고 새벽에 식구들 몰래 나와 다시 서울 쪽으로 걸었단다.”
“혼자서요?”
“아니야. 외숙모도 두고 온 아이들 걱정으로 안절부절 못했지. 그래서 같이 갔어.
거기가 어디라고 여자 혼자 가겠니? 단출하게 혼자만 가면 그렇게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인숙이랑 형들은 다시 또 다 데리고. 모두들 증조부모 모시느라 우리 애들 봐줄 형편이 안 됐거든. 그나저나 그때는 너희들 누구하고도 안 떨어지고 그냥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 하룻밤 만에 다시 인숙이는 업히고 형들은 양손에 잡고 올라간 거야. 그때 신발이나 벤벤했니? 발은 까져서 피는 나고, 아프고. 멀리서 쿵, 쿵 포 쏘는 소리는 나고. 얼마나 걸었는지 몰라. 그래도 그렇게 며칠 걸으니 뚝섬 벌판이 나오더라. 저 멀리 사람들이 하얗게 내려오는데 중간에서 민메기(面牧)사람들을 만났지. 서로 사람들 소식을 주고받다가 우리더러 왜 올라오느냐는 거야. 중공군이 벌떼처럼 밀고 내려온다고 해서 도망가는 건데. 그래서 널 데리러 간다는 얘길 했지.”
막내가 요프레를 가지고 와서 잠시 이야기는 중단됐다. 옛날 일을 이렇게 기억하시는 걸 보면 아직은 괜찮다 싶었다. 우리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지도 모른다. 요프레를 다 드셔서 나는 뒷말을 재촉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또 망우리까지 가신 거에요?”
“아니! 그랬더니 그 사람들 말이 저 뒤에서 망우리사람들을 본 것 같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듣자마자 앞으로 가면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렸지. 글쎄 저만치 네 고종, 강규형이 너를 업고 오는 게 보이더구나. 먼발치에서도 업힌 채 엄지를 빨고 있는 게 너구나 싶더라. 한달음에 달려가 너를 끌어안고 그냥 엉엉 울었어.”
“나도 웁디까?”
“네 녀석이 울긴 뭘 울어? 눈만 꿈벅꿈벅하고 있더라.”
어머니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육십 몇 년 전 뚝섬벌판에서 기적처럼 만난 ‘눈만 껌벅거리던 막내아들’을 보는 눈빛이 저랬으리라. 어머니의 그윽한 눈빛에 예순일곱의 나는 순식간에 세 살짜리 아이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져서 “엄마야~”하며 품에 바짝 파고들었다.
“이 녀석아 떨어져. 감기 옮는다. 아버지 고생하시는 거 봐라.”
“괜찮아요. 그깟 감기 나한테 다 줘버려요.”
그런데, 조금 후에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또 하는 거였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봤다. 순서며 지명이며 사람들의 이름이며 거의 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찌나 천연덕스럽던지 차마 '조금 전에 했잖아요.' 라면서 말허리를 자를 수 없었다. 아니, 마음을 바꿔서 연신 맞장구를 쳐드렸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신비로운 것이다. 60여 년 전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그 이야기를 방금 했다는 사실은 기억을 못하니 말이다. 어머니가 세 번째를 되풀이 하는 중에 막내여동생이 ‘다 차렸으니 오시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몇 번이라도 하셨을 것이다. 열 번인들 못 들어 드릴까. 영영 헤어질지도 몰랐을 자식이 지금 품안에 있음에랴.
어머니는 이제 또 나를 두고 먼 길을 떠나셔야 할지 모른다. 어머니가 그 옛날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왔듯이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나는 어디로 찾으러 가야 한단 말인가.
나를 울려주는 봄비
너는 온다더니 언제 오는 거니? 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등에 딱지가 졌는지 근지럽다.
그 소리를 떨쳐버리려고 새벽같이 하남으로 갔다. 9호선, 7호선, 9301번 버스로 갈아타가며 덕풍시장에서 내렸다. 길 건너 ‘24시 ○○해장국’ 간판이 보였다. 근처에 여러 식당 중 유독 북적거리는 걸 보고 그 집으로 갔다. 7시도 안됐는데 손님이 제법 많다. 우거지가 들어간 뼈다귀 해장국을 삼 인분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깍두기에 포기김치, 송송 썰어 놓은 파, 공기 밥까지 모두 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이제는 밥하는 것도 힘들어 하시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모두 담긴 검정비닐봉투는 꽤 묵직했다. 과일가게에 들러 포도를 한 상자를 샀다. 들고 가기 좋게 비닐봉투에 넣어달라고 했다. 해장국 봉투와 포도봉투를 양손으로 들어보니 들 만 하다. 그러나 걷자면 20여분은 걸릴 것이고 거기다 빗방울이 후두득 떨어지기까지 한다. 아침하지 말라고 전화까지 해 놓았으므로 기다리실 것이었다. 서둘러야겠다 싶어서 길가에 서 있는 택시로 가서 문을 열었다.
“저어기 H아파트인데 비는 오고 짐은 무겁고. 미안하지만 좀 타고 갑시다.”
수더분해 보이는 기사가 씩 웃는 것이 타라는 표정이다. 타자마자 그는 큰길을 놔두고 시장골목으로 과감히 좌회전을 한다.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바쁘단 핑계로 어쩌다 새벽에 잠깐 다녀간답니다. 아흔 넘은 부모님들 두 분을 그렇게 놔두고 있으니 맘이 늘 편치가 않아요.”
걸어가도 좋을 곳을 택시를 탄 것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듯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지껄인다.
기사가 말허리를 끊었다.
“202동이시죠?”
“네? 그걸 어떻게?”
“2층엔가? 3층에 사시고요”
“네에, 맞아요.”
“제가 그 동 14층에 살아요.”
“아하. 이런 우연이…….
“두 노인네가 맨날 손잡고 다니시잖아요.”
어쩐지 행선지를 듣자마자 큰길을 마다하고 시장골목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틀더라니.
내가 아침을 차리려 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마다하셨다. 아버지 목소리는 밝고 힘차다. 당신 손자들 이야기만 나오면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 하신다.
“그래그래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그랬지. 허허 녀석 참.”
아버지가 말 하느라 해장국이 줄어들지 않자 어머니는 왜 이렇게 안 먹느냐며 역정을 내신다.
“삼진이 얘기 듣는 게 좋지. 밥이야 매일 먹는 거. 허허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자주 올게요.”
“바쁜데 무리해서 올 것은 없고 전화라도 가끔 해라. 아버지가 이젠 아흔 일곱이셔.”
어머니의 말씀이다.
아버지가 따라 나오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라신다.
“에이 2층인데요. 그냥 걸어갈게요.”
“이 녀석아 타고 내려가. 넘어지면 오래 고생한다. 너도 육십이 넘었어.”
아버지 막무가내에 할 수 없이 버튼을 눌렀다.
윈도우브러시가 버스의 커다란 앞 유리에 떨어지는 빗물을 부지런히 닦아낸다. ‘삐꺽 삐이꺽’ 그때마다 점점이 맺혔던 빗방울이 쭈르륵 밑으로 쫓기듯 흘러내린다. 빗방울은 2층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드시는 부모님의 잔상처럼 지워졌나 싶으면 또 송글송글 맺히고, 지워졌나 싶으면 또 맺히고…….
아버지의 타임머신
아버지는 요즘 타임머신을 자주 타신다. 둘러보고 싶은 때가 많으신가 보다. 아버지의 타임머신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만든 영화 ‘백투더퓨처’에서처럼 몇 세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생애 중 몇 곳만 뒤돌아 가볼 수 있다. 아버지를 태운 타임머신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아무 때, 어느 곳에나 간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 지금 언제쯤에 계신지 짐작할 수 있다. 방언方言처럼 그 당시에 했었을 법한 말을 하시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버지가 편찮으셨을 때다. 먼저 감기에 걸린 어머니로부터 전염이 됐는지 기침이 심하고 열이 39도, 혈압은 190까지 올라 우리들은 바짝 긴장했다. 병원에선 연세가 너무 높아서 주사를 놓으면 쇼크를 일으킬지 모르니 약을 드시라고 했다. 한증막같이 뜨거운 더위에 체온까지 높으니 얼마나 괴로우실까. 그럼에도 에어컨은 물론이고 선풍기도 틀지 못하게 하셨다. 춥다는 거였다. 틈틈이 찬물로 습포를 해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매제가 아버지 등의 땀을 닦아드리는데 한숨을 내쉬며 그러셨다.
“내가 하는 일도 없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네에?”
“일도 하지 않고 왜 너희들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무슨 일을?”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주고받았다. 내가 말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태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가 무슨 일을 또 하신다고. 말도 안돼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 반론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한숨만 쉬는 것이었다.
문득 몇 달 전에 찾아뵈었을 때 일이 떠올랐다. 아침을 다 먹고 났을 때다. 아버지는 느닷없이 어머니에게 우리가 지금 무슨 돈으로 먹고 사느냐고 물으셨다. 어머니가 ‘당신 앞으로 연금도 나오고 애들이 용돈도 주고 해서 먹고 사는 데에 불편이 없다.’고 대답을 하자 ‘내게 무슨 연금이 나오냐’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아버지의 저 ‘걱정’이 지금 일주일도 더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것 아시죠?”
“그럼, 내가 교장을 했지.”
“총각 때 저어기 경상도 영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사십 몇 년을 교육공무원을 하신 것도.”
“그랬지.”
“봉급봉투 받으면 이거저거 떼는 게 많았잖아요. 그 중엔 나중에 퇴직 후에 돌려받게 될 연금명목도 있었어요.”
“…….”
“그렇게 모인 돈들이 큰 기금이 돼서 연금으로 돌려받으시는 거예요.”
“……, 내가?”
“예.”
“나는 받은 적이 없는데?”
그 때 어머니가 끼어드셨다.
“내가 매달 요 앞에 농협에서 타 오고 있잖우.”
“그래?”
아버지는 갸우뚱하며 미심쩍어 하셨지만 더 이상 뭘로 먹고 사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지나가나보다 했는데 한 시간 쯤 후 아버지는 어머니께 또 물으셨다.
“여보, 애들 등록금은 다 된 거야?”
어머니가 황당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셨고, 나는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아부지…….’
또 아버지의 타임머신은 우리들 대학 다닐 때에 잠시 멈춘 것이다. 더 자세히 따지면 그 때 중에도 오남매의 등록금을 낼 시즌이었나 보다. 다섯 중 셋 이상은 늘 대학생이었을 터이니 일 년에 두 번은 목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맞벌이를 하셨더라도 그 때의 박봉으로는 어림도 없었을 것이어서 따로 대출을 받기 전에는 힘들었을 것이 당연했다. 당시에는 방이 모자라서 아들 중에 막내였던 나는 부모님 방에서 같이 잤다. 나는 그 바람에 부모님이 걱정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새벽에 깨신 아버지 어머니는 소곤소곤 우리들의 등록금, 건강, 진학 등에 대해 상의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그 걱정을 다 들어야 했다. 어쩌다 내가 깨어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일본어로 대화하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어려웠어도 자식에게는 숨기고 싶었는가보다.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많은데 아버지의 타임머신은 왜 하필 그 어려운 시절에 머물렀는가.
첫댓글 아,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에요.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잘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