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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3-24 사랑으로 2006. 1. 1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1)할찌어다
오늘이 1월 1일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이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린도전서를 2005년 2월 첫 주에 시작하여 오늘까지 11개월이 걸렸습니다.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길고 오래 걸린 것은 그만큼 교회 안에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문제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능력이지 구원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뛰어난 것으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자랑들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믿는 자기까지 자랑하고 내세우고 하였기에 온갖 문제들이 다 터져 나왔습니다.
그 문제들이 파당의 문제였습니다. 음행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세상의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결혼과 이혼의 문제,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심, 성찬의 문제, 은사들의 문제,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등의 문제들이 산적하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라 새것이라고 하여도 이미 옛날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럴 것이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지음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당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까? 13절을 봅시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선다는 것은 그저 믿습니다! 하면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무엇이 믿음인지 분별을 하고 바른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위에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다. 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합니까?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고 노래합디다.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의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들이 사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깨어서 믿음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지 않기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파당이 생기는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왜 파당이 생기는 것입니까? 자기가 옳다고 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옳고 그름만 분별하여 시비만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파당이 생기에 되면 사생결단으로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온갖 것을 다 동원합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다 동원하면서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주장 속에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 우리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10명이 모이면 열개의 파당이 생기고 100명이 모이면 백 개의 파당이 생긴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말인지 아닌지 시험해보는 방법은 깊게 이야기를 나누어보세요! 결국은 다 제각각 생각들이 다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바냐서를 수요일 저녁에 보고 있는데 2: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앗수를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유다를 심판하시고 주변나라들까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데 왜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가 그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다 이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우상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자기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사랑입니다. 은사를 사용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지식을 사용하여도 자기를 사랑하여 나오는 것들이기에 다 덕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하는 몇 사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18절입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아가야 지역의 전도의 첫 열매인데 이 스데바나가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와 함께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함께 왔는데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의 부족한 것을 채웠다고 합니다. 이들의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행한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게 될 것입니다.
19-20절에서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그 집에서 모인 것입니다. 이들이 고린도교회에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도 서로 거룩하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이런 사람들이 성도를 섬기고 자기의 집을 성도들이 모임의 장소로 내어놓고 하는 일들이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시기질투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하는 것 자체가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왜 그런지 다음의 말씀을 봅니다. 21-22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친필로 쓰는 부분인데 그중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함부로 아멘하기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동안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엇을 할 때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여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인간이 다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종교이며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파성당의 벽에 대한불교 조계종 자비사에서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 합니다’ 하는 현수막을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석가탄신일에는 성당에서 보내겠지요!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셔서 메시아를 보내셨는데도 그 메시아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지는 않아도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고 여기는 것이 추기경의 이야기였으며 세상의 종교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고린도전서 16:22절의 말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는 말씀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부 목사 때에 같이 있었던 다른 부 목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였을 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하며 화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지워버릴까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 아들 앞에 모든 무릎이 꿇는 것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형벌에 보내심으로 또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러느냐고 우리가 물을 처지가 못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에 그런 질문 자체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아들을 알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 분을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일이 은혜로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사랑하면서 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하여 교회오고 나를 사랑하여 헌금하고 나를 사랑하여 무엇을 하였다면 그것은 저주를 받는 것임을 꿈엔들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인생을 무엇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살아왔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살아온 모든 세월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온 것입니다. 연애를 하여도, 결혼을 하여도, 직장을 선택하여도, 교회를 선택하여도, 모두가 자기 사랑이 우선이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여 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고린도 교회의문제가 아니라 우리교회의 모든 문제들도 결국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기에 나오는 문제들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께서 임하십니다. 언제 오신다는 것입니까? 2천년 전에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안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2천 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부터 이 세상은 심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미 종말의 세상인 것입니다.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철저히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왔기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주일학교 교사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9장으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입고나갈 세마포 옷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옷을 직조하는 실이 옳은 행실이라고 하면 과연 지금까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공과공부를 준비 해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옷을 입혀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가 바로 나의 저주임을 아십니까? 그것을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더욱더 자신의 죄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고 뿌리 깊은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거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용서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