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살인 - 4
그는 알고 있었다. 청와대 경제 수석 비서관이며 한국의 손꼽히는 재벌 노범호의 사위 허열을
더구나 공안 검사로 일찍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치안국장은 물론
내무부 장관까지 일사천리로 올라갈 인물인 이 젊은 검사를
담배를 바닥에 내버리고 달려와 그 앞에 부동 자세로 섰다.
"성동서 수사계장 이종웅입니다."
조금 전의 순경처럼 수사계장 이종웅(李鍾雄)이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였다.
"앉으시오, 이 계장."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마치 훈련병처럼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나무토막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이 계장이 서지아 사건을 맡았소?"
"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소?"
"알고 있습니다, 허열 검사님!"
"좋소. 할 얘기가 있으니 나를 서장실로 안내하시오."
"알겠습니다."
다시 고함 소리가 들려 왔고, 이 계장은 스프링이 튀듯 뛰어나가 수사과 사무실 문을 열었다.
허열이 천천히 그를 따라 나섰다.
성동 경찰서 서장실의 문이 비죽이 열렸다.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던 서장이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이종웅 수사계장 뒤에 한 젊은이가 서 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장의 시선이 수사계장에게 옮겨 갔다.
"뭐야, 급한 일인가?"
이 계장이 허열을 세워 놓고 서장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였고,
서장은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 소파 상석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여기 앉으시죠, 검사님.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이봐, 이계장. 커피."
"아닙니다."
허열이 소파의 상석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서장과 이 계장을 옆에 앉혔다.
소문으로만 수없이 들어 오던 허열을 만나게 된 서장은 흥분해 들떠 있었다.
대전 지방에서 영전되어 부임한 지 채 한 달도 못돼 이런 거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허열이 테이블 위의 담배를 집어 들자, 서장이 재빨리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 주었다.
"서장님, 서지아라는 여자 교통 사고 사건, 보고받으셨죠?"
"아, 네. 보고받았습니다. 뺑소니차에 희생된 모양입니다만 .. 아무튼 제 관내에서 발생된 사건이니만큼 책임지고 "
"수사과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네, 마침 경찰 대학에서 교육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실 말씀이 계시면 제게 하시죠. 계장도 있고 하니."
"잘 들으시오. 일급 비밀이오. 서지아를 희생시킨 건 뺑소니차가 아니라 당국입니다.
국가 문제가 걸려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합니다. 형식적인 수사를 하다가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시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가 개입한 사건이니 지시 사항에 차질 없도록 하시오."
서장과 수사계장은 아직 무슨 말인지 똑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허열은 아무렇게나 둘러 대며 거짓말을 했다.
"서지아는 종로 1가 스타다스트 호텔 스타 바의 여주인입니다.
정부 모 고위층 인사에게 접근하여 기밀을 빼내 일본 조총련에 넘기려다 적발되었소,
정식으로 기소하면 여기에 연루된 고위인사의 책임 문제도 있고,
또 야당에서 들고 일어나면 정치 문제로까지 비화될 우려가 있어 교통 사고로 위장해 처치해 버린거요."
"알겠습니다.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까짓 여자 하나 죽은 보잘것 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흔한 교통 사고에,
사고 차량은 뺑소니로 처리되어 있다. 뺑소니차를 잡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그 정도의 비난쯤 받는 건 또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청와대나 정보부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는 일이다.
서장과 수사계장이 현관까지 따라나와 허열을 배웅했다.
허열은 다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 신문이 다소 문제를 제기하겠지만, 그것도 큰 문제는 될게 없다.
어디론가로 피신해 있을 동대문파 건달 변달수를 잡아 들여 강간죄로 서너 달 집어넣었다 꺼내 주면 된다.
문제는 백수웅이다.
서지아가 사고로 죽은 것이 보도된다면 그 죽음의 원인을 백수웅은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 것이며,
미친 놈처럼 펄펄 뛸 것이다.
이 마지막 카드를 무기로 녀석을 반드시 옭아 맬 것이다.
서지아가 시체로 발견되던 3월 28일 화요일 저녁.
허열은 최일우와 가까스로 퇴원한 남성우 두 수사 요원과 중앙정보부에서 새로 파견된 요원 두 명,
그리고 행정 연락관, 모두 다섯 명을 모아놓고 결전의 지침을 하달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잠입한 지도 어느 새 3주가 흘렀다.
우리는 녀석을 체포하거나 사살해 버릴 여러 번의 기회를 포착하고도 번번이 놓쳐 버리는 실수만 거듭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 2-3일이 최대 고비가 될 것이다. 내일 아침 신문에 서지아의 최후가 일제히 보도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수웅은 미친 늑대처럼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될 것이다. 그 자를 처리할 가장 좋은 기회다.
목숨은 각자가 책임져라. 그 자를 사살하거나 체포하는 자는 국가에서 엄청난 대가를 제공할 것이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무기 휴대와 실탄 장전에 만전을 기하고 안전 사고에 주의하라.
이번에도 녀석을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허열도, 남성우도, 최일우도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백수웅에게서 목숨을 건져 낸 남성우는 더욱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서지아를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게 했다가는 반도 호텔 전체를 폭파시키겠다던
백수웅의 협박은 절대 협박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내게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목숨을 걸자. 어차피 인생은 도박이니까.
만일 녀석만 처치하게 된다면 내 인생은 하루아침에 달라지게 될 것이다.'
남성우도 다른 요원들처럼 권총을 꺼내 손질했고, 탄환을 장전 시켰다.
허열의 말대로 2-3일이 최대 고비가 될 것이다.
허열과 남성우 등 특수대 요원들이 부산을 떨어 대며 백수웅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간,
백수웅은 그린파크 호텔에서 정장으로 갈아 입고 거리로 나섰다.
1972년 3월 28일 밤 10시. 이 시간,
그는 사직 공원 정문 앞에서 서지아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굳이 오토바이를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객실을 나가기 전 온양 관광 호텔로 전화부터 걸었다.
그 곳에 숨어 있는 임꺽정파 보스 변달수를 처리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호텔 교환을 통해 변달수와 가까스로 연결이 되었다.
"서울이다. 별일은 없겠지?"
"네, 별일 없구말구요. 서울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그는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커지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 해결되었어. 남성우 형님이 바빠서 내가 대신 연락하는 거다.
동대문으로 복귀하라. 뒷일은 형님이 모두 책임질 것이다. 그럼 그만 끊는다."
백수웅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늦어도 내일은 복귀할 것이다,
변달수! 남성우는 그냥 돌려보냈지만, 서지아를 겁탈한 그 녀석 만큼은
도무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녀석 고환이라도 잘라 버리겠다고 맹세했다.
거리로 나섰다. 밤공기가 제법 훈훈했다. 봄 기운 감촉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오늘 밤 서지아를 만나면 할 말이 있다. 자신을 잊어 달라는 것이다.
자칫하면 지아까지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서지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 자신감을 갖는 데도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그
녀가 자신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백수웅에게는 감동적이었다.
말 한 마디 붙일 곳 없는 천하의 외톨이 신세를 생각한다면
서지아에게 결별을 선언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고통을 받는다는 건 성격이 허락지 않았다.
그녀를 이유 없이 고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기억해 주고 사랑해 준 것만으로 나는 만족해.
더 이상 그녀를 괴롭게 해서는 안 돼. 떠나는 거야. 그녀로부터 영원히 떠나는 거라구. 진작 그랬어야 하는 건데
남성우에게 협박을 해 두었으니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 테고 '
백수웅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지아가 허열의 음모로 무참히 희생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체가 흉한 몰골로 경찰 병원 영안실에 있는 것도 모른 채,
백수웅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사직 공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백수웅을 태운 택시는 미아리, 돈암동, 혜화동을 거쳐 마침내 사직 공원 정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백수웅이 차에서 내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 시간 10분 전이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간이 될 때까지 공원 안을 거닐었다.
지난 3월 7일(1972년), 대마도를 거쳐 부산 해운대로 잠입한지도 어느 새 3주가 흘러갔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나 흥분해 들떠 있었음을 깨달았고, 마음 속 깊이 뉘우치고 있었다.
그가 흥분한 것은 당연했다. 뼈아픈 8년의 외국 생활 방랑 끝에 밀입국했으니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한국 땅덩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몰아 초토화하고 거기서 새 조국을 창출해 보겠다던 의지도
남성우나 노범호, 허열 등의 등장으로 잠시 흐트러졌던 것이다.
지금은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남북 회담의 진척 상황 정보였고, 그리고 회담 장소의 기밀 탐지였다.
만일 서지아 사건만 아니었다면 다른 각도에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아까운 시간을 남성우나 서지아 때문에 허비했던 것이다.
론 자신을 체포하려는 허열 검사의 특별 수사대가 '벽'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들의 손아귀를 피해 그냥 잠적해 버리면 그뿐이다.
8년 전 자신을 고통의 회오리로 몰야넣었던 남성우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토록 흥분해 들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되도록이면 침착해지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서지아와 결별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허열이 자신을 체포하려는 특수 임무를 띤 정보 요원이라는 것도 이제는 모두 알아 냈지만,
지난 세월 때문에 엄숙한 조국의 미래를 팔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복수는 크게 한꺼번에 해 버리자.'
그렇게 다부지게 결심한 것이다.
어느 새 시간이 흘러 서지아와의 약속 시간이 5분이나 지났다.
그는 공원을 벗어나 정문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중앙청을 지나 사직 터널에 이르는 길은 아직 가로등 공사가 끝나지 않아 어둡고 캄캄했다.
오가는 차량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이따금 어둠을 갈라 놓아 반사되는 빛이 있기는 했지만,
많지않은 주택과 공원의 숲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몇몇 데이트족들이 공원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약속 시간인 10시를 지나 20분, 30분이 되도록 서지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0분이 되면서부터 백수웅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3월 8일 밤 10시 정각 사직 공원 정문 앞에서 도킹을 말해 주었다.
약속 시간을 잊을 서지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초조했고, 초조는 불안한 예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혹 서지아에게 무슨 변이라도?'
경찰이나 다른 수사 기관으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지아다.
지난 며칠 사이 또 어디서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 남성우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지아에게 보복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늦는지도 모른다.
어느 새 40분이 또 훌쩍 지나가 버렸다.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틀림없이 사고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 녀석이 기어이?'
10시 50분이 되자, 백수웅은 기어이 사직 공원을 떠나 종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스타 바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왔지만, 스타 바는 여전히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묻혀 있고,
호텔 앞에는 당분간 휴업이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두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사직 공원을 향해 뛰어갔지만,
서지아가 손 흔들며 기다릴 턱이 없었다.
그는 어둠속에서 잔뜩 버티고 선 채 캄캄한 하늘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설마 지아까지 버리는 건 아니겠지요. 조금 전 나는 자질구레한 복수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내가 당한 8년의 그 고통스러웠던 세월도 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아가 그들에게 또다시 치욕적인 일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나는 반드시 보복할 겁니다.
이건 하늘에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거는 약속이며 맹세입니다."
남성우를 손아귀에 잡아 놓고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 낸 것도,
수사 본부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면서도 포기한 것도,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더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제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다짐한 인내에도 한계는 있다.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일 지아에게 사고가 생긴다면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11시 20분까지 가슴 죄며 기다리던 백수웅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다.
길고 긴 1시간 20분이었다.
그의 감정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팽팽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인가 꼭 터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다시 우이동 그린파크로 돌아올 때,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허열의 집을 노려보았다.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화산의 불길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네가 노범호 사위라고? 두고 보자. 내 자신과 노옥진을 잃게한 두 원수!'
그린파크 호텔로 들어선 백수웅은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경이 예민해져 갔다.
'도대체 지아는 어찌 된 것일까.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했다면 다행이지만
아, 옥진, 노옥진은 지금 어디 있을까.
이 백수웅이가 이런 몰골로 서울에 나타난 걸 알기나 하고 있을까.
나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하긴 8년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까지 나를 기억하고 기다린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새벽 3시까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백수웅은 호텔 종업원을 불러 양주 커티 삭을 한 병 주문했고,
안주도 없이 반 병이나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그리고 침대에 거꾸로 처박힌 채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을 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파 왔고, 빈 속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쓰라려 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객실을 빠져나와 로비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그는 우선 배부터 채웠다.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린 그는, 이제는 일과가 되어 버린 듯 신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특별한 정치적 이슈는 없었다. 독재자라고 외국에서는 떠벌려 대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으로 국민들을 잘 요리하고 있었고,
김종필 국무 총리는 최각규(崔珏圭) 경제 팀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이후락 정보부장에 대한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북쪽 박성철과의 회담 준비에 골몰할 것이며,
언론이나 국민을 따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근로자의 날(현 노동절, 3월 10일)을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관광 노동 조합 위원장 이용준(李龍俊)의 인터뷰 기사가 나 있었다.
관광 사업가로 위장한 백수웅은 관광계 동향과 전망 기사를 빠짐없이 읽어 갔다.
정치, 경제면을 읽던 시선이 사회면으로 옮겨 갔다.
"뭐라구? 지아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머리가 옆으로 쓸려 있고 팔과 다리가 엉망이 된 서지아 시체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던 것이다.
27일 밤부터 28일 새벽 사이에 어디선가 교통 사고를 당한 서지아 시체가
뚝섬 유원지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동대문의 뒷골목 단체인 임꺽정파에 의해 윤간당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어 그들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친절한 기사까지 곁들여 있었다.
'지아를 서지아를 틀림없어. 녀석들 짓이야. 변달수는 아니야. 그 녀석이 틀림없어.
남성우, 이 자식. 그래, 지휘자는 허열이고, 허열의 배후는 노범호다.
그렇게 불안하더니 기어이 일이 터졌구나. 지아, 불쌍한 지아. 지아는 내가 죽였어. 내가 죽인 거라구.'
백수웅은 신문을 구겨 들고 객실로 뛰어올라갔다. 이빨을 악물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빨로 악문 입술에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홍건히 괴었다.
"개자식들, 기어이 지아를 희생시켰어, 이젠 용서 못 해. 차례로 복수한다."
남성우를 살려 준 것이 실수였다. 그
정도로 협박해 돌려보내면 죄 없는 서지아를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판이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다는걸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허열, 노범호, 남성우, 모조리 대가를 받을 것이다. 죄 없는 여자를 살해하다니.'
누가 뭐라고 해도 지아는 그들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신도 방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겠지.
탄환을 장전하고 총알을 내 심장에 박으려고 기다리고 있겠지.
천만에, 나는 너희들 생각을 다 알고 있어. 내가 흥분하여 펄펄 뛰며 당장 네놈들 앞에 나타나리라고 믿나?
바보 같은 허열! 나는 기다린다. 너희들이 지치도록. 그 대신 뒤통수를 갈길 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가해 결정타를 먹일 것이다.'
백수웅은 서지아 죽음이 보도된 신문 기사를 손으로 뜯어 입속으로 털어 넣고는 질겅질겅 씹어 댔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불쌍했다. 너무나 불쌍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그녀에게 8년 만에 나타나 겨우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여인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할 만큼 사랑을 베풀어 주지도 못하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는 입 속에서 걸레처럼 해진 신문을 삼키며 불끈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백수웅, 너는 목숨을 두려워하느냐? 아니지. 나는 목숨 따위에 연연해 본 일이 없어.
그렇다면 피의 대가를 치러야지? 물론, 나는 이 복수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왜 지난번에 남성우를 살려 두었는가. 보다 큰일을 위해서였지.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크고 작은 모든 것에 복수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 비뚤어진 나라를 나는 바로잡을 것이며, 손에 묻히는 피는 정당하게 평가받을 것이다.
그럼, 행동에 옮겨야지! 하지만, 경솔해서 실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점심도 저녁도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았다.
그는 들뜬 모습에 비해 놀라우리만큼 냉정하게 생각하고 이성을 수습하고 있었다.
꽃피울 한창 나이에 가버린 지아를 위해 그녀의 몫까지 굵게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흥분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밤 10시가 되었다.
그는 기어이 객실을 빠져나왔다. 캄캄한 하늘에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으흐흐 으흐흐 ' 그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뒷산 숲 속과 찬 하늘을 향해 애절하게 번져 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반도 호텔로 달려가 녀석들과 함께 자폭해 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떨군 채 잠시 호텔 뒤 숲 속을 걷던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래, 녀석들은 오늘 밤 모두 반도 호텔에 모여 있을 거야.
내가 꼭 나타나리라고 계산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내일 새벽에 할 일이 있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걸음을 돌려 객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져온 최신형 플라스틱 가방을 꺼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첫댓글 모두가 너무 불쌍해요..
백수웅이 서지아를 위해 이제 독을 품은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였네요!!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