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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효사 원문보기 글쓴이: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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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간조선
먼저 간 그녀를 그리는 한 남자의 축원이다. 북한산(北漢山·836m)의 옛 절터 아래 개울가 작은 돌에 적혀 있다. 근처에서 서늘하면서도 훈훈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는 이유다. 경기도 고양시 북한동 중흥사지를 지날 때 유심히 살펴봄 직하다. 그는 북한산 산신이 그녀의 영혼을 보살피리라 믿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북한산 신령은 경황이 없다. 대신 중흥사(重興寺)의 호국승 혼령들이 그녀의 영가를 위무하고 있다. 조선 숙종(肅宗) 때의 중흥사 부설 북한산성 총섭(摠攝) 소속 스님들이다. 군복무하듯 중흥사를 본부 삼아 북한산성을 지키던 승려 겸 병사였다. 당시 승병 한 분이 “우리는 이런 일에 워낙 이골이 난 중들이라…”면서 중흥사의 비밀을 귀띔했다. ‘(북한)산성을 지키는 것은 대외적 명분이었을 뿐 북한산을 차지하려고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희생당한 삼국시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 진짜 임무였다’는 요지다. 국가에 위난이 닥치면 불경을 접고 창을 드는 무술승, 소림사 권법승쯤으로 속단하고 대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품으로 깃든 영가를 스님들에게 맡길 만큼 북한산신은 지쳐 있다. 서울 외곽순환도로 공사가 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람에게는 개발이지만, 산신 처지에서는 봉변이다. 깊은 산중을 포기한 채 산신이 산 아래로 내려와 여염집에 주저앉는 기현상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산의 모습은 해당 산신의 외모를 빼닮는다. 화강암 준령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어우러진 북한산의 신은 사람으로 치면 얼짱, 몸짱이다. 머리와 수염은 새하얀데 핑크빛 얼굴은 주름 한 줄 없이 팽팽하기만 하다. 북한산은 큰 산이다. 서울 도봉구,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와 경기 고양시까지 안고 있다. 나이는 1억5000만살이나 된다. 백운대 병풍암, 동장대, 대동문, 보현봉, 형제봉, 구준봉, 북악산, 인왕산, 무악재, 안산(연세대 뒷산)까지가 북한산신의 관할구역이다. 바위 봉우리 사이의 효자리, 북한산성, 구천, 우이동, 정릉, 구기, 평창 계곡 역시 북한산의 이름 아래 청량함을 더 하고 있다.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 꼭대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누구나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라는 말을 떠올린다. 앉아서 1000리, 서면 1만리를 보는 도인의 경지에 들었다고 착각할 법도 하다. 도봉산, 수락산, 북악산, 불암산, 아차산, 청계산, 남산, 남한산, 관악산, 소요산, 운악산, 명지산, 화악산, 축령산, 화야산, 용문산, 감악산, 그리고 한강과 강화도, 영종도가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탄성이 절로 난다. 북한산은 서울을 수호하는 산이다. 산신도 이 점을 아주 자랑스러워 한다. “삼국시대부터 서울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쌈박질을 해대더니, 이제는 서울을 떠나지 못해 안달이냐”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은 수도를 옮길 때가 아니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북한산, 즉 서울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가며 일진일퇴했다. 힘을 키워 북진하던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서기 137년 북한산에 성을 구축했다. 만주대륙으로 뻗어가던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도 북한산만큼은 놓치기 싫었다. 북진과는 별개로 남진해 백제의 북한산성을 함락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할 정도로 애착이 컸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북한산 주인은 신라다. 24대 진흥왕(眞興王)은 몸소 북한산을 찾았고, 이를 대내외적으로 도장 찍듯 기념한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다. 즉위 16년째인 서기 555년 북한산 순행 직후 세운 비석이다. 국보 3호라 오리지널은 중앙박물관에 모셔뒀다. 북한산에 있는 비는 모조품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말고도 경남 창녕과 함경남도 황초령, 마운령 등 4군데서 발견됐다. 창녕은 신라의 마당이나 다름없고, 함남은 대륙을 겨냥한 신라의 웅비욕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중간지점의 북한산 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서울을 중심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뜻이다. 1500년 전 신라는 벌써 북한산의 영기(靈氣)를 간파하고 있었다. 고려 시절 북한산은 잠시 인간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한 덕이다. 물론 안식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조선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가 북한산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부터다. 각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두 왕은 북한산으로 피신했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전투에서 인조의 군대는 청나라 침략군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 봉림대군(鳳林大君), 3남 인평대군(麟平大君),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판서 이명한(李明漢), 그리고 ‘삼학사(三學士)’로 유명한 홍익한(洪翼漢·사헌부 장령), 윤집(尹集·홍문관 교리), 오달제(吳達濟·홍문관 부교리)가 청나라의 볼모 신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청으로 끌려가던 김상헌은 벽제에서 북한산을 향해 이렇게 읊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북한산이 삼각산(三角山)과 동의어임을 입증하는 시조다.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옛 국망봉, 799.5m) 등 북한산의 암봉 셋은 안정적으로 정립(鼎立)해 있다. 통일로를 따라 구파발로 진입할 때 눈앞에 펼쳐지는 북한산, 동부간선도로에서 의정부 쪽으로 가면서 보는 북한산은 삼각산이라는 이름 그대로다. 나무의 기세가 충만해 번영과 희망을 낳아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을 수 없는 효종은 북한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청으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바로 효종이다. 절치부심 끝에 유비무환의 적격지로 북한산을 지목했다. 1659년 북한산에 안가(安家)를 차렸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패닉 룸’의 철옹성을 북한산에서 찾았다.
당시 효종의 지시로 북한산성 요새를 처음 기획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혼백은 요즘도 날이 좋으면 북한산에 들른다. “임란이어처(臨亂移御處·전쟁발발시 왕의 피란처)로 북한산을 택했는데, 효종대왕 당대에는 계획만 하다 말았고 숙종 임금으로 내려가서야 비로소 성을 쌓았다”고 회고한다. 바로 북한산성이다. 숙종 때 귀양살이를 한 한이 풀리지 않은 듯 우암은 효종을 ‘대왕’, 숙종을 ‘임금’으로 칭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산 속으로 옮긴 한양’이었다. 문 14개, 연못 26개, 우물이 99개나 됐다. 문수봉 남장대, 노적봉 북장대, 대동문 동장대 등 전투 지휘본부격인 장대(將臺)도 3곳을 가동했다. 대동문, 대남문, 대서문 등 산성의 대문 명칭은 유사시 임시수도가 북한산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양의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의 앞뒤 글자만 바꿨을 따름이다. ‘하늘이 내린 안전한 산’이라는 믿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은 이토록 의미심장한 산이다. 돌산이지만 나무(木)의 기세가 충만한 북한산의 땅기운은 번영과 희망을 낳는다. 그렇다고 북한산 자락에 거주하면 누구나 발복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게는 도리어 해를 입힌다. 특히 평창동이 정치와 상극(相剋)이다. 북한산에서 뻗은 암반을 깎아낸 터에 지은 집에 사는 정치인은 엄청난 수맥의 파괴력과 바위의 살기 탓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산의 돌들이 날아가 꽂히는 형세가 적용되는 곳이 평창동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정치인에게서 온화한 마음이 나올 수 없다. 정계에서 대성코자 한다면 한남동이 바람직하다. 한강이 팽이처럼 돌면서 순행, 기가 운집되는 동네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지키는 최적의 산이 북한산이다. 북한산이 버티고 있기에 서울은 천혜의 요충지가 됐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이 일찌감치 역사로 기록한 교훈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왕사(王師)는 도선(道詵)이다. 그는 고려의 수도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국운을 800년으로 계산한 승려다. 그러면서도 도선은 북한산(北漢山, 836m)이 영 마음에 걸렸다. 개성 동남향에 저 멀리 솟아 있는 북한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도적의 깃발처럼 삼각뿔 모양이라 400년이 흐르면 고려의 운세가 북한산으로 옮겨가겠구나”라며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삼각뿔’은 물론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그래서 도선은 비방을 썼다. 북한산 기운이 개성까지 침투하는 것을 막고자 들개 형상 75개를 만들어 동남쪽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북한산의 막강한 기(氣)를 개떼가 막아낼 리는 만무했다. 800년 고려의 수명이 475년으로 줄어든 배경에는 북한산이 있다. 도선은 또 “왕(王)씨 다음에 이(李)씨가 왕이 되며 도읍은 한양에 정한다”고 고려 왕실에 귀띔한 적이 있다. 화들짝 놀란 고려 왕실은 윤관(尹瓘)을 동원했다. 여진족 정벌로 유명한 장군이다. 윤관은 백악산(현 북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었다. 오얏나무가 일정 크기 이상으로 자라면 베어냈다. 오얏 리(李), 즉 이씨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왕건 곁에 도선이 있었듯이,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의지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당초 개성에서 계룡산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택한 게 한양이다. 한양의 영기(靈氣)를 실사(實査)하는 것은 무학의 몫이었다. 한양을 한눈에 내려다보려고 무학은 북한산, 정확히는 만경대에 올랐다. 한양의 모든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다. 이래서 만경대의 별칭인 ‘국망봉(國望峰)’이 생겨났다. 한양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백운대와 만경대를 지나 비봉에 다다른 무학에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까지 오다’라고 새겨진 돌비석이었다. 도선이 손바닥 드넓은 부처가 되고, 무학이 손오공이 된 순간이다. 도선과 교감해, 만경대 정남향으로 발길을 돌린 무학은 세 줄기 맥이 들 하나로 합쳐지는 곳을 왕궁 터로 잡았다. 고려 시절 오얏나무를 심었던 그 자리, 바로 백악산이었다. 가뜩이나 어눌한 편인 무학의 영가(靈駕)는 요즘도 석가모니 부처와 친견할 때면 아예 말문을 닫는다고 털어놓는다. “도무지 면목이 서지 않아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웠지만, 불교를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자책 탓이다. 한양을 수도로 정한 다음, 무학은 인왕산(仁王山)의 선암을 도성 안으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중이 장삼을 걸친 것처럼 생긴 바위인데 정도전(鄭道傳)이 막무가내로 나오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고백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속셈은 명료했다. 선암이 수도 안에 있으면 불교세상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고 바위 이전을 극구 반대한 것이다. 결국 조선은 정도전의 의지대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를 유지했다. 북한산과 주변 산을 관장하는 산신(山神)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편이다. 선임 산신들이 징계받는 바람에 그리 됐다. 산신들과 대화하다 보면 불경스럽지만 신들이 귀엽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이종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최홍만이 ‘야수’ 보브 샙더러 “귀엽다”고 한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북한산과 인왕산, 도봉산(道峰山)의 전대(前代) 산신령들은 그리스의 신들과 흡사하다. 좋게 말해 인간적이고, 한꺼풀만 벗기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숨기지 못한다. 서울 성북구 미아동 북한산 자락의 거북바위를 둘러싼 영계(靈界)의 진실이 좋은 보기다. 북한산신, 인왕산신, 도봉산신 트리오가 연합해 거북과 싸우는 바람에 거북바위가 생겼다. 서해 용왕의 아들인 거북이 한강을 거쳐 한양으로 상륙, 백성을 혼비백산케 한 뒤 북한산으로 기어들면서 사건은 터졌다. 이 고질라급 거대 거북은 움직일 때마다 북한산의 절경을 흩뜨렸다. 자기네 앞마당이 망가지자 분노한 산신들은 힘을 합해 거북과 충돌, 소란을 빚었다. 산신들은 “수성(守城)”이라고, 거북은 “육지 나들이일 뿐”이라 해명했으나 하늘은 양비론을 적용, 인간세상을 어지럽힌 산신들과 거북을 함께 처벌했다. 거북은 바위로, 산신들은 단풍나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새출발의 희망을 주는 약속의 산
올 추석을 열흘 남짓 앞둔 어느 날, 선량하고 건실한 청년 하나가 이 혼령에게 당했다. 쉬는 날이면 북한산 구석구석을 누비는 게 취미인 그가 착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게 탈이었다. 등산 때마다 눈여겨봐둔 무덤을 ‘후손에게 버림받은 산소’라고 짐작한 청년은 한가위를 핑계삼아 배낭에 낫을 넣은 채 북한산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하등 무관한 남의 묘지를 열심히 벌초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의 결과는 요절(夭折)이었다. ‘선행하면 천벌받는다’는 어불성설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허망한 죽음이다. 잡초를 뽑고 잘라내면서 낫질을 잘 못했는지 묘지의 흙이 튀었다. 흙은 청년의 오른쪽 눈으로 들어갔다. 불고 씻어냈지만 안구가 얼얼하고 뻑뻑한 느낌이 사흘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그래서 안과 치료를 받았고 증세는 호전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벌초 후 꼭 10일째 되는 날 청년은 급사했다. 직접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의사는 선행 사인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다.
무덤뿐 아니다. 북한산에는 사람에게 해코지를 서슴지 않는 사기(邪氣)도 똬리를 틀고 있다. 과거 북한산에 편히 오르려고 산길을 새로 낸 권력자가 크게 화를 입은 예가 있다. 피해는 권력자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숱한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에 처해졌다. 길을 닦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버티고 선 커다란 바위를 부순 것이 화근이었다. 사악한 기운과 음기(陰氣)를 누르고 있던 바위를 걷어내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불행이 잇따랐다. 권력자는 정쟁에 휘말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고 장안에는 괴질이 창궐했다. 신과 악령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신은 너그러우나 악령에게 관용이란 기대난망이다. 인간의 공포심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악령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북한산의 매력에 젖어 몰래 야간산행을 하다가 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는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이토록 호오(好惡)가 분명한 북한산의 특징을 역으로 이용하는 ‘강한 인간’들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산의 한 절(寺)에 유독 공을 들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간첩 31명이 북한산을 넘어 청와대 코앞까지 왔지만 박 대통령은 무사했다. 1981년 결성된 민주산악회는 북한산을 수시로 오르내리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북한산 사찰의 카운슬링에 따라 사업계획이 좌우되는 재벌그룹도 있다. 절이 그들을 부른 게 아니다. 스스로 찾아와 필요한 것을 취할 따름이다. 숱한 정치인들이 새 출발의 희망을 안고 북한산을 오르고 있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을 거쳐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 북한산은 새 출발의 의지들로 가득한 약속의 산이다. 북한산(北漢山·836m)은 형이고, 북악산(北岳山·342m)은 아우다. 형은 동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북악산 자체가 못 미더운 것은 아니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왜 동생 밑으로 파고들어 고생을 자초하는지 그저 딱할 따름이다. 북악산은 ‘청와대 뒷산’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뒷산’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수도가 한양으로 정해지자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북악산을 한양의 주산(主山)으로 삼았다. 무학대사(無學大師)의 혜안은 인왕산(仁旺山·338m)을 주산으로 지목했지만 서슬 퍼런 ‘혁명세력’의 뜻을 꺾은 철인은 자고로 없었다. 무학은 신(神)이 아니라 절반은 사람(僧)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무학의 영가(靈駕)는 지금도 안타깝다. 잠시 태평성대가 지속되는가 싶으면 어느새 폭군이 등장하고 ‘맏아들이 왕위를 세습한다’는 원칙이 지켜진 케이스는 선조(宣祖)와 정조(正祖)뿐이며, 살 만하면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조선의 불행을 원천 차단하는 비결을 알면서도 당한 회한이다. “인왕산이 주산이 되면 좌청룡 북악산, 우백호 남산을 거느린 궁궐(경복궁)은 자연스레 동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관악산이 내뿜는 불기운도 막아냈을 것”이라며 못내 아쉬워한다. 훗날 흥선(興宣) 대원군이 광화문에 해태상이라는 방화막을 세웠을 만큼 관악산의 화기(火氣)는 드세다. 정도전의 기세는 무학대사만 누른 게 아니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계의 수장인 하륜(河崙)은 조선의 대궐터로 서대문 밖의 무악벌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서교동, 연희동, 동교동 일대다. 최규하(崔圭夏·서교동), 전두환(全斗煥·연희동), 노태우(盧泰愚·연희동), 김대중(金大中·동교동) 등 대통령 넷을 배출할 만큼 땅기운이 강력한 지역이다. ‘경복궁을 남향으로 틀거나, 무악벌에 지었더라면…’ 식의 역사 가정은 무의미하나 영계(靈界)에서는 정도전을 ‘왕따’시키고 있을 정도다. 북한산의 세력권인 북악산 앞마당의 경복궁과 청와대는 터가 몹시 불길하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다. 1398년 태조 7년 방원의 난이 서곡이다. 방원은 경복궁에서 정도전을 참살했다. “정도전이 태조(太祖)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여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살해하려 했다”는 핑계였다. 이어 세자 방석(芳碩)을 귀양 중 죽이고 방번(芳蕃)마저 없앤 뒤에야 태종 이방원은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복궁은 유흥과 탐욕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뒤 방치돼 있다가 고종(高宗) 즉위 후 대원군(大院君)의 주도로 대대적인 중건 공사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국고가 바닥나고 숱한 인명이 희생되니 원성이 높아졌고 결국 대원군 퇴진의 주요 사유가 됐다. 청와대는 경복궁 내전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의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19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를 세웠다. 6년 뒤 일본 총리대신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할 때까지는 청와대 터의 저주(詛呪)를 알지 못했다. 일본의 젊은 장교들이 사이토의 목을 잘라 살해한 ‘2·26 사건’이 터진 것은 사이토가 청와대 터에 관저를 올린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일제시대 조선총독들의 최후는 예외없이 비참했다. 미나미 지로는 2차대전 전범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54년 병보석됐으나 다음해 사망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1급 전범 구이소 구니아키는 복역 중 옥사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암살 당했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수감됐으며,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아들을 감옥에 보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도 같은 꼴을 당했다. 청와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투명하고 당당한 처신이 필요하다. 조선의 왕은 노란 곤룡포(袞龍袍)를 입지 못했다. 오행상 동쪽은 파랑, 남쪽은 빨강, 서쪽은 하양, 북쪽은 검정, 가운데는 노랑이다. 천지의 가운데인 중국(中國)에만 허용된 컬러가 노랑이었다. 중국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동방이다. 따라서 파랑이 제색이다. 또 기와색이 파랗다고 청와대다. 무지의 소치인 동시에 사대(事大)와 모화(慕華)의 잔영이라 할 만하다. 청와대의 현 주인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노랑을 좋아해 그나마 다행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마지막 날인 11월 19일,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에서 참가국 우두머리들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두루마기 색깔로 노랑을 택했다. 넥타이까지 노란 걸로 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파랑,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잿빛을 골랐다. 2년 전에도 노 대통령은 노랑이었다. 당시 태국 APEC에서 누런 빛이 도는 태국 전통 옷을 입었다. 노 대통령의 상징 컬러와도 같은 게 노랑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일었던 ‘황색 돌풍’의 주역이 바로 노무현 후보였다. 옷 색깔은 곧 그 사람의 현재 심리와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황색은 사계절과 권력욕 등을 뜻한다. 아울러 노랑은 흙을 의미하므로 나무, 물, 돌 등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할 것은 수용해야 옳다. 북한산을 오르내리면서 아무런 신비체험을 못한다면 계룡산이나 지리산, 태백산으로 발길을 돌려봄 직하다. 북한산은 개인의 기복(祈福) 신앙처로 적합지 않다. 국운을 좌우하고 각계 최고권력자의 운명을 예고하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북한산의 한 사찰은 무학대사의 X파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무학이 직접 작성한 이 비밀문서는 북한산 승려에서 승려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양이 서울로 바뀌고, 서울이 격동하는 순간순간을 목격하면서도 여전히 꼭꼭 숨어있는 비결(秘訣)이다. 고려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조선의 탄생과 몰락을 예견했듯이, 조선 왕사(王師) 무학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본다. 수도와 조국의 번영을 바라는 국민으로서의 상식(常識) 이면에서, 온갖 불합리와 갈등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꿈은 새록새록 피어나게 마련이다. ‘청와대-북악산-북한산’은 한 개 라인이다. 북한산은 보고 있다. 북한산은 알고 있다.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