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최민자, 일상이라는 바다에서 언어를 건져 올리다
문학인 신문 2023. 6. 26.
최민자 수필가의 글을 읽노라면, 바다에서 일하는 어부가 떠오른다.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자 말이다. 그는 일상이라는 바다에서 한눈팔지 않고 언어를 낚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투망은 싱싱한 어획물로 넉넉하다. 무엇보다 그 보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눌 줄 안다. 독자는 그의 노고 덕에 수필 본연의 맛을 음미한다. 촘촘하게 짠 직조물 같은 문장에서 독서의 희열을 느끼고, 성찰이 담긴 내용으로 사유하는 즐거움을 알아간다.
-《손바닥 수필》(연암서가, 2022.)이 꽤 알려졌더라고요.
"2012년에 첫 책이 나오고 10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3쇄를 찍었어요. 그래봤자 아직 만 권도 안 팔려나갔지만요. 수필이 소설이나 시에 비해 마이너 장르이긴 하잖아요. 피천득 선생님 이후 한국 수필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아직도 크게 다가가지 못하는 듯해 안타까운 면이 있어요."
-메이저 출판사에서 출간했더라면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책을 낼 때마다 일반 독자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메이저 출판사에 편지를 써서 파일을 첨부해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중하게' 거절당했어요(웃음). 제 글을 알리고 허명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수필도 읽을 만한 글'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는데... 역량 부족이지요. 수필이 신변잡사에서 출발하지만, 신변잡기는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는 게 일관된 제 생각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수필이 장르적 한계가 있는 듯해요.
"요즘 좋은 글을 쓰는 수필가들이 많으니까 우리 수필이 대중에게 시나 소설처럼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문학이 일상이라는 바다에서 언어라고 하는 지극히 성글고 조악한 투망으로 건져 올리는 어획물 같은 것이라면, 수필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연안 바다에서 잡히는 소형 어종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멸치나 새우, 전갱이 같은 것들이 원양의 대어들보다 맛이 모자라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더 익숙한 감칠맛으로 다양한 요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처럼 좋은 글이란 장르의 문제가 아닌 요리법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수필이 시 같다는 말씀 들으시죠? 시를 쓰신 적이 있나요?
"선집 포함해서 지금까지 나온 작품집이 일곱 권 정도인데, 두 번째 책 《꼬리를 꿈꾸다》부터는 대충 짧은 글 위주로 많이 써 와썽요. 시를 좋아하고 습작을 해보긴 했지만, 대학 때 학보에 한 번 실린 이후로 지면에 발표는 안 했어요. "시는 춤이요, 산문은 산보"라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지만, 저는 몸치라 그런지 춤보다는 산보가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시를 좋아해 많이 읽는 편이고 그쪽으로 오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저는 감성적인 면보다는 성찰이나 사유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날선 직관, 말랑말랑한 감성, 달팽이의 더듬이보다 민감하고 사슴의 뿔보다 거추장스러운 자존심을 받쳐 들고 세상과 한 판 붙어보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멸종되지 않고 지구 어느 모퉁이에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게 구마울 때가 있다. 넘치거나 또는 모자라거나-철인과 광인, 연인과 시인은 근본적으로 한 통속일지도 모른다. 어떤 제국에도 복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눈매 깊고 말씨 순한, 지난 세기의 유민 같은 시인들을 만나면 술 한 잔 정중히 대접하고 싶다.'(《손바닥 수필》 <시인들> 중에서)
-책에 시간 이야기가 많아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삶보다는 보이는 세계 이면과 배후에 대한 궁금증, 존재와 근원에 대한 탐색 같은 것이 늘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서사적 얼개로 엮어가는 스토리텔링보다는 대상이나 사물에 더 천착하게 되고... 요즘에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주어진 시간을 어느새 탕진하고 있어서인지..."
'밤의 휘장을 찢어 햇덩이를 꺼내고 침묵을 휘저어 소음을 흩뿌리는 시간의 영묘한 연금술에 고요는 난폭하게 유린될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제 꼬리를 물고 맴을 도는 태극처럼 제자리에서 순환할 뿐, 시간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손바닥 수필》 <시간의 환생> 중에서)
-대놓고 울지는 않지만, 행간에서 슬픔이 느껴져요.
"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쓰는 게 수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가장 깊은 곳의 이야기는 쓸 수 없는 게 수필이기도 해요. 수필은 허구가 아니어서 형상화에도 한계가 있는 데다가, 내 문학적 욕구 때문에 주변을 다치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결국 쓸 수 있는 이야기들, 깊은 심연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소소하고 미미한 이야기로 변죽이나 울릴 뿐이지요."
'침대 모서리에 초승달로 잠든 여자, 휘어진 칼처럼 단호한 적막의 둘레가 쓸쓸하다. 둥근 등뼈로 돌아눕는다는 것은 누구하고도 공유하지 못할 슬픔 하나 가슴팍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거덜 난 꿈이나 축축한 후회, 삭히지 못한 원망 같은 것이 기억의 오지에 나뒹굴고 있다는 뜻이다. 풍화되지 못한 슬픔의 흰 뼈가, 삭지도, 녹지도 않은 뜨거운 얼음이 늑골 아래 서걱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만삭의 어둠 둥글게 껴안고 모로 누운 여자의 그림자 뒤로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열사흘 달빛 푸싯푸싯 젖은 날개를 뒤친다.'(《사리에 대하여》 <달밤> 전문)
-하루 중 글 쓰는 시간은요?
"전업 작가도 아니고, 아직도 기왕의 역할이나 노릇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늘 자투리 시간밖에 내질 못해요. 요즘에는 눈도 나빠지고 허리도 안 좋아서 저녁에 침상에 누워 스마트폰 페이스북 같은 데에 짧게 쓰는 정도예요. 25년 가까이 글을 써오면서 저 스스로 항상 아마추어라고 생각했어요. 기껏 몇 년에 한 번씩 책을 내도 종이책의 한계 때문에 읽어주는 이도 많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SNS에서는 문학하고 관련 없는 일반 독자들이 상시 읽어주고 댓글도 달고 하니, 비로소 나도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조사 하나도 신경 쓰면서 퇴고하곤 했는데, 문학이 내게 소통의 방편이고 세상으로 낸 봉창이라면, 좀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웃음)."
-저마다 글로 소통하는 시대인 듯해요.
"맞아요. 21세기가 수필의 시대 산문의 시대가 되고 있는 듯해요. 팬데믹도 그렇고 그 이전부터 이미 세상이 갈수록 파편화되어 사람들은 더 이로워지고 있잖아요. SNS에도 온통 나 외롭다, 나 좀 알아달라, 하는 외침들이 난무하지요. 활자화된 그 말들이 문학이 되지 못하고 일종의 스낵컬처로 소비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이야기하는, '문학동네'가 아니라, '동네문학'의 시대라고, 그런 시대가 이미 와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대형커피전문점이 아닌, 동네 커피집이나 동네 빵집도 좋은 재료, 특화된 자기만의 방식으로 맛집이 될 수 있듯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맛깔나게 제조해 유통하는 시대가 된 거지요."
'엊저녁 욕실에서 비누칠을 하다가 우연찮게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무십코 돌아본 벽거울 속, 뭉게구름 화창한 등판 한가운데에 어스름한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등성이 아래 후미진 골짜기, 허리를 구부려도 어깨를 젖혀봐도 내 손이 닿지 않는 비탈진 벼랑 외진 그늘막에, 출구를 찾지 못한 한 마리 짐승처럼 그곳에 내 외로움이 산다. 나 아닌 타자만이, 오직 그대만이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 조각 쓸쓸한 가려움이 산다.'(《손바닥 수필》 <외로움이 사는 곳> 중에서)
'모여 앉아 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말을 섞지도 얼싸안지도 않고 돌아앉아 버석거려본 것들은 안다. 부딪쳐봤자 상처나 주고받을 뿐이라는 것을. 정 붙이면 안 된다고, 다시 또 나뉘고 헤어져야 한다고, 가슴팍 쪼개가며 배워버린 이별. 부서지고 부서져 존재조차 희미해진 천년의 어느 고갯마루에서 우리 다시 품어 안을 수 있을까. 백골이 진토되어 분별없이 어우러져서라도 한 몸으로 함께 꽃 피울 날 있을까. 모래가 운다. 채송화 한 송이 피워 올리지 못하는 저 쓸슬한 불임의 이름으로 싸륵, 싸륵, 버석거리며 운다.'(《사이에 대하여》 <모래울음> 전문)
-성공하는 수필 쓰기를 위해 조언하신다면요.
"신변잡사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신변잡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턱 하나를 넘어야 해요. 저는 '사람은 다 다르다'에서 '사람은 다 똑같다'로 가는, 그 길목 어느 어름에 문학의 자리, 수필의 자리가 있다고 봐요. 개별적,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어떻게 보편성과 공감을 획득해낼 것인가 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왜 이 이야기를 쓰는가, 독자가 왜 내 이 사소한 이갸기를 시간을 들여 읽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이나 진단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봐요."
-'최민자'처럼 수필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누구누구처럼... 이런 건 애초 권할 만한 작법은 아닌 것 같고요. 저는 수필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정의를 좋아해요. 수필은 한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며 온몸으로 통과해 낸 시간의 온축이니, 저마다 향기와 빛깔대로 최선을 다해 목숨의 진수를 길어 올리는 수밖에요."
최민자 수필가는 《손바닥 수필》에 실린 <진땀>이라는 글에서 "삶은 농담 같은 진담. 목숨은 예외 없는 필패"라고 썼다. 이 얼마나 명쾌한 역설인가. 그가 "사는 일의 시름과 덧없음마저 춤으로 환치할 줄 아는 저 가을 억새들처럼"이라고 담담히 쓴 것처럼 그의 멋스러운 '언어의 춤'이 계속되기를.
최민자
전주에서 태어났다. 1998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하였고, 현대수필문학상, PEN문학상, 윤오영수필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수필집 《흰 꽃 향기》 《꼬리를 꿈꾸다》 《손바닥 수필》 《꿈꾸는 보라》 《사이에 대하여》 등을 출간하였다.
첫댓글 최민자 선생도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니 참 씁쓸하네요. 그래도 좋은 글은 누군가의 가슴에 별로 뜨는 것을~~
귀한 자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