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곳에서
시 34:12-2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톨레레게를 통해 우리의 삶속에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나길 바랍니다. 지난 주 부터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어에 담긴 감성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하늘의 신비와 삶의 고뇌가 맞닿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의 첫머리는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장수하며 좋은 날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며 시작됩니다.
저는 16살이 되던해에 기타를 처음 잡아봤는데, 그때 클래식 기타를 한달간 배운게 지금까지 기타를 그나마 좀 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클래식 기타로 완주하게 된 첫 곡이 ‘즐거운 나의 집’이란 곡인데 지금도 악보는 볼 줄 몰라도 손이 기억하는 대로 완주하는 몇안되는 곡입니다. 이 노래는 집집마다 초인종 소리도로 그음율이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가사를 살펴보면 이곡은 참 신앙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 날 오라 하여도 / 내 쉴 곳은 작은 집 /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 길이 쉴 곳도 / 꽃 피고 새 우는 집 /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 즐거운 나의 벗 집 / 내 집뿐이리
노랫말에는 내 집이 즐거운 곳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우리 집이, 그리고 우리 가정이 그렇듯, 하나님의 마음이 그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할 몫입니다.
●즐거운 곳을 찾는 마음
좋은 날 보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재미있다, 즐겁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람은 크고, 성취는 적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잘 사는 비결은 어쩌면 욕망의 그릇을 줄이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릇은 큰 데, 채워지는 것은 적으니까 우리는 늘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고 삽니다. 이마에 내 川 자 대신 마음에 내 '川' 자를 그리고, 생명의 흐름을 타고 살면 인생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삶의 무게를 줄이지 못하니,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통해 쓰디쓴 인생살이를 망각해보려 합니다.
제가 사는 서대문에는 많은 술집들이 즐비합니다. 이상하게 휴일은 한산하지고 장사가 잘 안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월요일이 시작되면 술집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보일 정도로 만석입니다.
직장생활의 무게를 해소하는 곳이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 겁니다. 역사적인 명소나 관광지에서나 술판, 춤판이 벌어지고, 나중에는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재미를 찾는 방식이야 다양할 수 있고, 사는 게 오죽 재미없고 팍팍하면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장면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낍니다. 마음의 짐을 털어버리는 방법이 저것 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좀 심심하게도 살 줄 알아야 하는 데,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헌장을 외우며 사는 것 같습니다. '나는 시시때때로 즐거워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외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다 보면 깊어지고, 무르익을 틈이 없습니다. 즐거움의 두레박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기보다는, 자기 속 깊은 곳에 두레박을 내리우면 어떨까요? 자신의 내면의 심연에서 무궁무진한 참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외적인 즐거움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해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요4:32) 하셨습니다. 그 양식을 알고, 그 양식에 맛 들여야 합니다. 그게 즐거움의 비결입니다. 그 양식과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문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한 말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 참 간단하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마디나 하며 살까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우리가 하는 말을 원고지에 옮기면 적어도 50매는 넘을 겁니다. 하루에 하는 말을 시간으로 환산해보면 적어도 두 시간 가까이는 될 겁니다. 굉장합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어 그날 한 말을 떠올려 보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말이 인격의 중심에서,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 말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을 함부로 부리며 삽니다. 말이 헤프면 정신은 공허해집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인데,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올가미가 되어 마음을 죄어오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보여줄 수 없어서 그렇지 우리 몸과 마음에는 누군가의 말로 인해 입은 상처자국이 얼마나 많습니까. 값어치를 잃은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말들에 제 값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그처럼 힘이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말로서 무엇을 창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말은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합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의 지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인격을 조용히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말은 상처를 입히거나 아름다운 것을 죽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다'라 하신 말씀과 만나 갈릴리 사람 시몬은 새로운 역사의 초석이 되었고,
'오늘 내가 당신 집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하신 말씀과 만나 삭개오는 회개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신 말씀과 만나 막달라 마리아는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선한 말이며 거짓 없는 말입니다.
말들에 제값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침묵을 연습해야 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각광받고 주목받는 시대지요, 말을 잘하기 위해 스피치학원도 꾀나 잘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입니다. 들은 대로, 있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고 해서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말을 자꾸만 덜어낼수록 우리말은 진실해집니다. 말을 자꾸 덜어내야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옛 말에 깨끗하고 고요함이 세상을 바르게 만든다(청정위청하정, 淸靜爲天下正)이라 했습니다. 거짓말은 매끄럽고 달콤합니다. 반대로 참 말은 어눌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힘이 있습니다. 악한 말과 거짓말을 버려 우리 영혼이 깨끗하고 고요해질 때, 기쁨의 샘물이 우리 속에서 솟구쳐 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인생을 즐겁게 보내는 두 번째 비결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만 억제해도 우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늘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서서 살아갑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우리 삶을 결정합니다. 테니스 경기를 보면 선수들은 서브를 하기 전에 몇 개의 공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두 개를 골라내고는 나머지는 볼보이들에게 넘겨줍니다. 그 동작이 참 멋있습니다. 저는 아가시라는 선수의 동작이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선과 악을 이렇게만 골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악을 버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것은 소중합니다.
우리가 악을 버려야 하는 까닭은 악행이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속이고, 불쾌하게 하고, 빼앗고, 상처를 입히면 기분이 좋던가요? 그렇지 않지요? 악을 행하는 것은 악행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괴롭히는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악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 21절은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이 유쾌한 일이 아닌 데도 우리는 때론 악행을 저지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선을 행하려는 마음보다 커질 때 우리는 악행에 빠집니다.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일수록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이를 배려할 줄 모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의그릇은 점점 작아집니다. 선을 행하는 인간 본래의 능력이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악인들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에 남을 빠뜨리려고 파놓았던 함정에 빠져본 적이 없으신가요? 내 뜻을 이루었다 싶은 순간, 몰락이 시작되는 것을 우리는 최근의 정치상황을 통해서도 보았습니다. 원숭이도 제 꼬리를 밟고 넘어진다는 말처럼 이해에 따라 처신하는 자들의 마지막은 늘 같습니다.
물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늘 평안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하지만 낙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장애물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우리와 하늘을 잇는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 악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고, 건짐을 받은 사람입니다. 힘써 선을 택하십시오. 그것 자체가 복입니다.
●평화를 찾는 사람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일상 가운데서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몇 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 보십시오. 들이마시는 숨결을 누리고, 내쉬는 숨결을 누려 보십시오. 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숨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들숨에 임재를 날숨에 감사를 담아 숨을 누리는 것은, 우리 속에 기쁨을 영접하는 작은 노력입니다. 그런 후에 자신에게 '나는 평화롭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은 평화의 하루를 시작하는 경이로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촛불이 일렁이는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 우리 마음은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누가 약을 올리거나, 부당한 일을 하면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하고 주문을 외다시피 해보아도 어느 순간 감정이 둑을 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화를 상대방에게 쏟아냅니다.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는 까닭은 화를 끝내 참지 못한 자책감까지 그에게 덮어씌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평안해질까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있으면 평화는 없습니다. 집착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리진 않을까,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늘 긴장상태이고,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십시오. 아니, 모든 일속에 하나님을 초대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인생이 한결 가볍고 쉬워집니다. 욕망이 일으키는 번뇌도 사라집니다. 굳이 남에게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품으신 큰 뜻에 함께하니 이길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음이 평화로울 때 우리는 굳이 남에게 이기려고 혈안이 되지 않습니다. 형이 기어코 동생을 이겨먹으려고 하는 데서 감정이 상하고 싸움이 납니다. 져 줄 수 있는 것은 어른뿐입니다. 져 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평화는 총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총칼로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곳에는 원망과 저주가 끊이기 않습니다. 조금 형편이 나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양보하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게 져 주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남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오늘 본문대로 행하십시오. 메뉴 판을 읽는다고 배가 부르지 않듯 듣는데서 멈추지 말고, 말씀대로 삶을 움직여 보십시오. 말을 아끼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화평을 추구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부터 우리 색동교회의 성도들이 있는 곳마다 깨끗함과 고요함에서 비롯된 참된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말들에 제값을 찾아주지 못한 저를
돌아보며 침묵하고 인내해보기로
다짐해봅니다
전도사님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