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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여름이었다. 이현필 선생께서 나를 찾으셨다. 화학산 각시바위로 가라고 지시하셨다.
李空 이세종 선생의 생애와 정신
임락경
1963년 여름이었다. 이현필 선생께서 나를 찾으셨다. 화학산 각시바위로 가라고 지시하셨다. 산길로만 30리는 올라가야 했다. 그곳에 최창익이라는 청년이 기도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각시바위까지 가 보니 방 안에서는 일어설 수도 없는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면적이었다. 성경과 찬송가만 가지고 갔다. 이곳에서 매일같이 성경만 읽었더니 15일에 한번쯤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최창익 형님이 무슨 공책 한 권을 읽으라고 주신다. 공책 표지에는 ‘거울’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작은 글씨로 ‘이세종 선생님의 생애와 가르침’이라고 적혀 있었다. 공책 한 권의 내용이었다. 이세종 선생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는 출판할 형편이 안 되어 동광원 식구들이 한 권씩 필사해서 가지고 다닌 것이다. 역시 나도 그곳에서 시간이 있어 필사를 했다. 약 30m 거리를 두고 무덤이 하나 있었다. 이 무덤이 누구의 무덤이냐고 물었더니 이세종 선생님의 무덤이라고 했다. 화학산 각시바위 부근의 작은 집은 이세종 선생이 기도하시다가 임종하신 곳이었다.
이세종 선생의 생애와 가르침이라는 공책을 토대로 엄두섭 목사님께서 집필하시어 나온 책이 곧 <호세아를 닮은 성자 - 도암의 성자 이세종 선생의 일대기>(은성출판사)다. 내가 옮겨 적었던 공책과 <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인용해서 내가 바라본 이세종을 다시 교계에 알리고자 한다. 호세아를 닮은 성자는 엄두섭이 본 이세종이고, 임락경이 바라본 이세종은 다르기 때문이다. 장사 목적이 아니니 판권이나 저작권에 대한 사전 허락 따지지 말았으면 한다. 이세종 선생님 정신에 위배된다.
한국적 신학, 토착 신앙, 한국적 토착 기독교를 말하려면 내가 알기로는 이세종 선생님을 먼저 소개해야 한다. 이세종 선생은 겸손한 마음으로 본인을 스스로 공(空)이라고 칭하고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셨다. 주로 이공이라 함은 이세종 선생을 칭한 것으로 읽으면 된다.
어릴 적에 성탄절이 가까웠을 무렵 꿈을 꾸었다. 내가 이스라엘 예수가 탄생하는 곳에 가 있었다. 아기 예수를 직접 보고 경배하고 있는데 때마침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다. 박사들의 복장을 보니 한복을 입고 계셨다. 내가 꿈에 그들에게 박사님들은 한국에서 오셨느냐고 물으니 역시 한국에서 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지 외국식보다 한국적인 정신과 신앙과 생활 풍습이 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신앙인들도 한국적인 신앙인이면 더욱 좋고 성인들도 한국적인 성인들이 마음에 들고 본받고 싶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 천민으로 태어나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없이 자라난 예수가 오늘날 한국에 태어났으면 어떤 삶을 사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금 생각한 것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줄곧 해 온 생각들이었다.
가령 예수의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라’는 말씀도 그 때 그곳은 눈이 오지 않는 지역이고 세례 요한이 산꿀과 메뚜기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내일 일을 염려 안 해도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한국은 눈이 오고 겨울이 있는지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겨울에는 메뚜기가 없고 우리나라에는 산꿀이 귀해서 값이 비싼 귀한 약재였고, 지금도 그렇다. 지금도 더운 지방에 가면 산꿀도 흔하고 양봉 꿀은 설탕 값이나 꿀 값이나 같다. 예수가 오늘 한국에 같이 사신다면 내일 일을 염려하라고 하셨을 테고 추운 겨울 무사히 넘기려면 빨리 무연탄 300장과 쌀 1가마 준비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한국에 예수 같은 분이 어디 계실까 하는 생각에 찾아 나선 곳이 동광원이었고, 그 당시에 훌륭하신 분이 이현필 선생이었다. 그분보다는 이세종 선생이 어른이셨으나 그분은 나와 시대적으로 맞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예수처럼 살다가 돌아가셨다. ‘거울’이라는 공책을 읽고 또 읽어 언젠가는 세상에 소개하려 했으나 나보다 한 세대 앞서 사신 엄두섭 목사님이 30여 년 전에 이미 소개하셨다. 그 분은 호남에서 이세종 선생님과 같은 시대에 사셨으나 만나보지는 못하셨다. 뒤늦게 자료를 정리하여 소개하신 것이다. 그전에는 이세종 선생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최근에 교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고 이 분의 신앙과 생애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바라본 이세종 선생을 소개하려 한다.
이세종은 1883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서 나셨다. 천태산(天笞山)이라는 곳인데 한쪽에서는 같은 산을 두고 개천산(開川山) 이라고도 한다. 이 산골짜기에서 나셨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시고 형님 밑에서 자라셨다. 3형제 중 막내셨다. 일찍부터 머슴살이를 하는 것으로 그분의 인생살이가 시작된다. 그것도 살던 집에서 20리(8km)나 떨어진 곳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보면 공부할 기회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는지 한글은 깨우치셨다. 28살 때부터는 남의 집 머슴이지만 양자 겸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체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힘은 장사였다. 아무도 들지 못하는 큰 돌이 있는데 그이만 들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힘 겨루는 데 쓸 큰 돌을 정자나무 밑에 두었다. 힘이 센 이가 있던 돌을 들 수 있으면 내다 버리고 다른 더 큰 돌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보다 더 힘센 이가 있다면 그 돌보다 더 무거운 돌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이세종은 마을에서 아무도 들지 못하는 큰 돌을 무릎까지 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사진 한 장도 남겨놓지 않았으나 그를 본 사람들은 풍채 좋고 인물도 잘 생겼다고 한다.
성격은 정직하고 솔직하고 급하고 세차서 한 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만금이 생긴다 해도 마다했다. 그리고 한 번 결심한 일은 기어코 해내는 성격이셨다. 가령 오늘은 나무를 일곱 짐 하겠다고 결심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어이 해 내고 마는 성격이셨다. 그가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성격이 인색했다. 공동 작업을 하다가 흰 쌀밥을 싸 가지고 와서 먹을 때 곁에서 좀 나누어 먹자고 하면 “내가 땀 흘려 번 쌀을 내가 먹지, 누구를 주느냐”고 하면서 혼자 먹을 만큼 인색한 사람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른 말 잘하면 싫어한다. 그러나 허튼 소리 하지 않고 책잡힐 일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재치도 있고 장난 끼도 남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친구들과 밤에 모여 어느 집 잔치에 돼지 다리 걸어 놓은 것을 훔쳐올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무도 나서지 못했으나 그가 가서 훔쳐 왔다. 장난이 지나쳐서 모두 걱정을 하니 다시 갖다 놓고 오기도 했다.
일을 얼마나 부지런히 했는지 지게를 너무 져서 지게 목발이 닳았는데 어린 아이가 질 수 있을 만큼 짧게 닳았다. 부지런히 일해서 재산을 모아 논밭을 마련해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게 되었다. 머슴살이를 해서 집도 마련하고 형편이 나아지니 그리워하던 형님을 자기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시도록 해서 형님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형님 생활도 나아지자 30살에 16살 어린 14살짜리 소녀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결혼식은 못하고 살게 된다. 신부 이름은 문순희였다.
이때는 장리쌀 제도가 있었는데 논문서, 밭문서를 맡겨 두고 벼를 밥그릇으로 빌려 가는 것이다. 그런데 정한 때까지 빌린 것을 못 갚으면 그 논밭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이러한 논밭을 밥그릇배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10년 각오하여 돈을 모으고 장리 놓고 거둬들이고 하다 보니 그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돈도 모으고 부자가 된 이후에는 노동도 중지하고 반대로 머슴도 두게 되었다. 이제는 마당 쓰는 일마저 머슴에게 시키고 깨끗한 옷 입고 그 시절에 제일 좋다는 옥양목 두루마기도 걸치고 으스대며 사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딸이 없었다. 무당에게 의지하니 산당(山堂)을 지어 공을 들이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무당 말 대로 산당을 짓고 공을 들이기로 했다. 집터를 잡는데 무당이 “나 따르라, 나 따르라”하며 손뼉을 치면서 앞서 가면 그도 같이 손뼉을 치면서 따라갔다. 그러다가 무당이 쓰러진 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명당이라 하여 그 곳을 산당 터로 잡았다. 그런데 무당이 잡은 터의 일부가 남의 소유였다. 땅 주인은 엄청나게 비싼 값을 불렀지만 정성을 드리려는 마음으로 이세종은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고 샀다. 원래 우리 선조들은 제사 지낼 제물을 비싼 것으로 준비하되 아무리 비싸도 값을 깎으면 안 된다는 제사 범절을 중요시했다. 이공 역시 제사를 지낼 터를 사는데 그렇게 한 것이다. 산당은 3층으로 지었는데 그곳은 시야가 트이고 계곡 물도 좋은 곳이었다. 산당을 지을 때도 지극한 정성을 드렸다. 산당 터를 닦는 기간에는 상가(초상이 나면 3년 동안은 상복을 입고 제청을 마련하여 아침·저녁으로 제를 지내는 집)에서는 연장을 빌려오지도 않았다. 일하러 오는 인부들에게도 일일이 물어서 만약 상가에서 빌려 온 연장으로 일을 했다면 그 흙을 다시 파서 버리고 그 사람은 그날 돌려보내기도 했다.
나도 그곳에 가 보았는데 그 집터는 깊은 산속이라 바위가 많이 있고 흙이 모자라는 곳이었다. 집 지을 흙이 부족하면 본인 논에서 파다 지었다고 하는데 거리가 3km정도는 되는 오르막길이었다.
산당의 1층은 반지하로 하고 2, 3층은 지상으로 칠성각(七星閣)을 경내에 지었고 그 안에는 제단을 쌓고 12개의 상을 차렸다. 집 지은 재료는 일체 새것으로 하고 유리는 가까운 곳에 없어 멀리 광주나 목포에서 구해다 사용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니는 때가 아니었다. 거리만 해도 30km는 더 되는데다 도로가 험하고 요즘처럼 굴이 있는 도로가 없이 전부 구불구불한 비포장 산길이다. 건물 내부는 벽지를 붙일 필요가 없이 모두가 좋은 판자로 치장했다.
산당 마당에는 샘을 3층으로 팠다. 상탕, 중탕, 하탕으로 상탕은 깨끗한 음료로 쓰고 중탕은 채소를 씻거나 그릇을 씻고 하탕은 빨래를 하거나 집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목욕실도 만들었다. 우리 선조들은 제사 때마다 언제나 목욕을 하고 나서 지내는 것이 예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연못을 따로 파고 유산각을 지었다. 연못에는 잉어와 여러 가지 물고기를 길렀다. 산당의 정원에는 기화요초를 구해다 심었다.
지금 그 건물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차도 없고 길도 훨씬 험했을 것인데 건물 짓는 데 필요한 흙을 지어 날라다 지었다. 거기에 제사를 지내기에 편리하도록 수도 시설을 만들고 아름답게 마당 조경까지 갖추었으니 이만하면 신당 짓는 데 얼마만큼의 정성을 들였는지 생각해 볼 만하다.
이세종은 이곳에서 무당과 함께 살면서 매일같이 12상을 차려 놓고 정성 드려 제사하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모두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가까이 사는 이들은 언제나 떡과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산당 집은 밤낮 대문을 닫고 있어 꼭 볼일이 있는 사람 외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이런 세월을 보내던 중 바라던 아들을 낳기는커녕 딸도 못 낳았다. 더욱이 이세종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는데 이러다 죽지는 않을까 하고 있던 차에 무당이 그보다 먼저 죽게 되었다. 하늘같이 믿었던 무당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자기의 극진했던 정성이 모두가 허사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세종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제자들 간에도 추측이 엇갈린다. 산당에서 신의 현시(顯示)를 받고 나서 전라북도 김제 만경의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찬송 소리를 듣고 찾아들어가 성경책을 빌려 레위기를 읽어보고 자기가 섬겼던 제사의식과 너무나 흡사해서 예수를 믿었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은 광주에 가다가 논에서 일하는 농부가 목청껏 찬송을 부르기에 따라 불렀으나 잘 부르지 못했다. 그 무렵 광주의 기독교 학교인 숭일학교에 다니는 학생 두 명에게 찬송가를 배우다가 성경도 읽고 예수를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산당 공사를 맡은 목수가 이전에 방산교회를 지은 목수로서 예전엔 신자였다고 한다. 그는 산당 공사 일을 할 때 “이렇게 공을 들여 지으려면 예배당이나 짓지” 하면서 일하는 동안 가끔씩 찬송가를 부르면서 일을 했다. 이세종은 찬송가를 자주 들었고 그 목수에게 신약성경을 빌려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 나주읍에서 이사 온 가정이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예수 믿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묵혀 놓은 성경을 받아 읽고 예수 믿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어떻든 공통점은 누구에게 전도받아 믿기 시작한 신앙생활이 아니고 혼자서 성경책을 구해다가 읽어 가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듣기로는 신약성경을 먼저 읽고 나서 구약성경을 구해 보았다고 한다. 신약 먼저 읽고 시작한 믿음과 구약 먼저 읽고 시작한 신앙생활은 너무나 다르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민족을 선택해서 복을 주신다고 한다. 그래서 구약을 먼저 읽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아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도 잘 벌고 건강하고 자식도 잘 된다는 신앙관을 갖게 된다. 반면에 신약을 보면 예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갖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신약을 먼저 읽은 신자들은 예수처럼 살고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고 어렵게 살면서도 천국의 소망을 갖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세종이 성경을 읽어 보니 구약에 있는 제사법과 본인이 산당에서 지냈던 제사법과 같은 점이 많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모두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고 잡신에게 드리는 제사임을 알게 되었다. 상에서 자손을 두는 일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더 나은 일임을 깨닫고 산당에 꾸려 놓은 모든 제물을 불살랐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이 40세쯤이었는데 세례는 등광리에서 같이 예수 믿던 이상목 씨와 함께 노나복 선교사에게 받았다. 그 무렵 오복희라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광주 이일학교 출신이었고 순회 전도사로 등광리에 갔다가 이세종이 세례받는 자리에 참여했다. 그는 먼저 신앙생활을 했으나 이세종의 참 신앙생활에 감동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세종의 생애에 대한 증언을 한 사람들 중에 제일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나도 오복희 전도사님과 가까이서 멀리서 함께한 시절이 오래였다.
이세종은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나 혼자서 자문자답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성경을 보면 눈으로만 읽지 않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데에서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예부터 내가 느끼기에는 성경을 볼 때 주석을 보지 않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주석을 보면 예수를 편리하게 믿는데 있는 그대로 믿으면 피곤하고 힘들다). 주석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와 진리의 말씀을 신학자들을 따라서 오역하기가 일쑤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복음과 멀어지기 쉽다.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삶으로 옮기면 다르다. 말 그대로 가난해지면 복이 있을 것이니 옷이 두 벌이면 한 벌을 없는 이에게 나누어 주고 떡이 두 개 있으면 하나를 없는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 그래서 어떤 머리 좋은 사람들은 말씀을 그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뜻을 해석하는 데 더 힘을 기울인다. 가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복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한다. 여러 가지 언어로 살펴보고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해서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한다. 그렇게 주석을 따라가다 보면 말씀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삶이 피곤하고 힘들지는 않다.
참 제사를 누구에게 드려야 하는지 깨달은 뒤로부터 이제는 정성껏 지어놓은 산당이 예배당이 되고 유산각은 성경 공부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도처로서 유산각만한 곳이 없었다. 이웃 마을 젊은이들까지 찾아와 매일 성경 공부도 하게 되었고 그에게 공부한 젊은이들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우선 어릴 적부터 혹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이나 빚진 것이 있으면 서너 배로 갚았다.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대로 전도에 힘썼다. 전도하다 밥을 굶을 때도 많았다. 십자가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한번 전도하러 갔다가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줄곧 다녔는데 같은 집을 짚신 세 켤레가 닳도록 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전도해도 효과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전까지 이웃에게 덕을 베풀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성미 급하고 냉정하고 구두쇠 노릇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전도를 받아들기 시작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심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우선 남의 콩밭에서 콩잎이라도 뜯어먹었던 기억이 나면 콩밭 주인을 찾아가 잘못을 빌고 변상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가 얼마나 인색하게 돈을 모았는지 돈놀이를 해서 당시 백 마지기(6만㎡) 가까이나 되는 토지를 소유하였고 흉년이 들면 논문서 밭문서를 가지고 와서 쌀을 사 가게 했는데 한 사람의 토지를 헐값으로 쳐 주어서 50두락(한 두락이 두 마지기니 오십 두락은 백 마지기고, 한 마지기가 약 200평이니 2000여 평의 땅에 해당한다)을 한꺼번에 사들이기도 했다. 앞서 말한 밥그릇배미 대접배미가 바로 쌀을 밥그릇으로 한 그릇 또는 한 대접 주고 논 한배미를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토록 일제 초에는 장리쌀 제도가 무서웠고 정치제도가 부자가 돈 모으는 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8·15 이후 5·16 이전까지 즉, 내가 어릴 적 장리쌀 제도가 이러했다. 쌀 1가마를 봄에 빌려 가면 가을에 추수해서 2가마로 갚아야 한다. 이자가 100%다. 그것도 1년 후가 아니다. 3월에 빌려 가면 10월에 갚으니 6개월이나 7개월이다. 연 이자가 100%가 아니라 200%인 것이다. 그것도 그 해 못 갚으면 그 다음해에 4가마로 갚아야 한다. 또 못 갚으면 그 다음 해 8가마를 갚아야 한다. 내 아버지가 먼 친척집 아저씨에게 1가마 빌려다 먹고 3년 후에 8가마 갚는 것을 보고 자랐다.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수시로 자녀들에게 말씀하셨고 내가 쌀을 지어다 주기도 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내 어릴 적보다 이자 놀이가 더 성행했던 그 시절에 이세종은 합법적으로 재미나게 재산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를 믿고 보니 재산을 모을 때 전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굶주리게 하고 심지어 생명을 담보로 해서 모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장롱 속에 깊이 간직한 논문서, 밭문서(등기문서)를 가지고 와서 빌려 주었던 돈을 받지 않은 채 등기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때는 지금 같지 않고 등기부 등본만 가지고 있으면 그대로 소유가 넘어가는 때였다. 문서를 맡기고 빚 내간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옛소! 당신 문서 도로 받으시오. 빚진 것 모두 탕감해 드리니 그냥 없는 것으로 합시다”하면서 돌려주었다. 그 다음으로는 빚진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다 모아 놓고 그들이 써 놓고 간 차용증을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불살라 버리고 없었던 일로 하자면서 다 정리해 주었다. 이제 마을 안에 그에게 빚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된 것이다.
이세종은 도암면사무소를 찾아가 논 두 마지기를 맡기면서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는 데 써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면사무소 직원은 그 논을 자기 논으로 만들고 말았다. 후에 이 일을 알고 난 이세종은 사람의 탐욕은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제하는 방법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는 구제를 하되 자기 집에 찾아와 구제를 청하는 이들에게 하고 자기가 친히 대하는 이들에게 하였다. 친척들은 약간의 토지나 집을 마련해 주었다. 또 기술이 있는 이들은 이발 기구나 목공 연장 같은 것을 사 주어 살아가도록 해 주었다. 외출할 때는 언제나 걸인들이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할 돈을 따로 헝겊에 싸 가지고 다니다가 만난 사람이 구제할 사람이면 주저하지 않고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다녔다.
세금 통지서가 나오면 언제나 세금을 먼저 냈다. 나랏돈은 제일 먼저 나라에 바쳐야 한다고 했다. 가을 추수를 하면 지출 순서를 정한다. 첫째 복음 전도비, 둘째 세금, 셋째 남에게 갚을 것, 넷째 구제비, 다섯째 접대비(인사 차림)로 책정했다. 그는 재물을 양심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고 나서 여윳돈이 남는다면 그것으로 생활하고 없으면 굶는 한이 있어도 이처럼 돈을 써야 한다고 하셨다. 구제할 때는 자기가 쓸 돈 중에서 구제를 해야 참 구제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구제를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 다 쓰고 남아야 구제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준 것도 자기가 입다가 해어진 옷을 준 것은 참 동정이 아니다.
이세종이 신앙심이 복받쳐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나이 어린 불쌍한 거지를 만나 돈 얼마를 주었다. 그리고서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남루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눈에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그래서 다시 그 거지를 찾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다니다 해질 무렵에 원적골에서 거지를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거지를 붙잡고 “당신께 좋은 일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꾸어 입으면 어떻겠소!”라고 말하고 거지가 입은 다 떨어진 옷과 자기가 입은 새 옷을 바꾸었다. 거지의 체격이 이세종과 같지 않아 옷이 너무 작고 남 보기에 우스운 모습이 되었다. 이 꼴을 본 조카들이 너무나 창피해서 이런 꼴로 마을에 가면 우리까지 수치스럽다고 야단을 쳤다. 이세종은 해가 질 때까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어 있다가 어두워져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마을에 들어갔다.
임락경 시골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