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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陽西面) 도곡리(陶谷里)에서 박순형(朴淳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하였고, 형인 박동원(朴東元)은 1894년 식년생원시(式年生員試)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호는 근곡(槿谷)이고, 필명으로 근곡생(槿谷生), 근생(槿生) 혹은 근(槿)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94년 경 서울로 이주하여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종로 누하동(樓下洞)에서 살았다. 5세에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3세에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양사동소학교와 관립고등소학교 및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학하였다.
근대교육을 접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만세운동 당시 북감리교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기독신보사의 서기와 주필로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기독신보(基督申報)〉 창립멤버로서 서기(편집위원)로 취직하였다.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으로 발행하였는데 당시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언론매체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신보>는 일제강점기 초기 한국인의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민족 언론이었다. 그는 시, 시조, 산문, 감상록 등의 문학작품과 취재기사 및 사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배재 시절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도 활동하였다. 그 무렵 그는 정동 제일교회 출신의 최병헌·현순·손정도·이필주 목사 등과 교류하면서 민족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국제정세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1919년 1월경 그는 신문을 통해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는 깊이 공감하였다. 그는 이런 기회에 조선도 일제 통치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 박희도를 통해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됐다.
그해 2월 20일경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가 종로2가 <기독신보> 사무실에 들렀다. 그는 박희도와 대화중에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조선독립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박희도는 그 자리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서로 공감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희도는 기독교 측 인사들의 연락책을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월 27일 박희도가 그를 찾아왔다. 당일 낮 12시에 이필주 목사 집에서 총독부에 건의할 서류에 서명을 할 예정이니 참석하라고 일러주었다. 그 시각에 맞춰 이필주 집으로 갔더니 박희도, 이갑성, 함태영, 최성모, 오화영, 이승훈 등이 모여 있었다. 그를 포함해 참석자 모두 그 자리에서 총독부에 제출할 건의서에 첨부할 문건에 서명 날인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막차로 33인 대열에 오른 셈이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박희도가 당일 밤 8시에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모임에는 서명자 대다수가 참석하였는데 박동완도 참석하였다. 당초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는 탑골공원이었다. 그러나 자칫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3월 1일 그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일제 관헌에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1919년 만세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15일과 20일 사이에 기독신보사에서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만세운동에 관한 분위기를 파악하였고 2월 27일 박희도로부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은 직후 곧바로 이필주의 집에서 개최된 회합에 참가하였다.
이승훈(李昇薰)·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독립선언서의 초안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 청원의 초안이 심의되었으며, 참석자들은 문안이 완성되면 서명할 수 있도록 인장(印章)을 함태영에게 맡겼다.
2월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개최되었던 회의에도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만세운동의 거사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꾸는 것과 일정 등을 논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서 손병희 외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하고 붙잡혔다.
재판 과정에서 만세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명확히 피력하였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을 합병했다고 하지만, 조선이 독립을 바라고 있다면 일본은 한층 더 나은 동양평화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 주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청원서를 미국대통령과 열국(列國)의 대표자들에게 보낸 것에 대해서도 열국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다만 3월 1일의 독립선언을 통해 조선이 이미 독립했음을 알리는 통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욱이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 재판장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 4일 오전 풀려났다.
그는 또 대외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1923년 YMCA 이사로 취임하여 소년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그해 1월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회 제1회 총회에서 백관수, 이갑성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5년 3월에는 전(全)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의 서무부 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신보>에는 1924년 5월까지 근무하였다. 그해 7월 기독교 월간지 <신생명(新生命)>의 주간으로 옮겼다. 이 잡지는 외국 선교사들이 독점해온 기독교 문서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에서 출자한 창문사(彰文社)에서 발행하였다. 편집노선은 종교적으로는 진보적, 사회적으로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져 결국 이듬해 4월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한때 서울 동소문 안에 '경성공업사'라는 회사를 차려 한동안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계 등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그는 기독교계 비밀결사체인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로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의 집에서 결성됐다. 그는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이갑성 등과 함께 창립멤버로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는 1938년 5월 안재홍 등 간부 회원 6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신흥우 등 대다수 간부는 일제에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당시 박동완은 미국에 체류하고 있어서 소위 '흥업구락부 사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재만동포 구호사업에 앞장
3.1혁명 후 일제의 문화통치 전략으로 국내의 민족진영은 전선이 분열되었다. 특히 자치론·참정론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민족진영 내부는 분화하였다. 이때를 기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1927년 2월 신간회를 발족시켰다. 사상 첫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는 출범 직후부터 국내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박동완은 조만식, 유억겸, 이갑성, 이승훈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총무간사를 맡아 실무를 챙겼다.
1921년 기독교계 출판사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가 설립되고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이 출간되자, 기독신보사에서 『신생명』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겨 1925년 8월까지 활동하였다.
『신생명』은 국내에서 주체적인 기독교문화를 만들고자 했던 교계의 인식이 확산되면서 출간된 잡지였다.『신생명』에 「계급투쟁(階級鬪爭)과 사회진화(社會進化)」(1924년 4월), 「그리스도교의 김화력(感化力)」(1924년 11월), 「그리스도 종교와 우리의 사명」(1925년 2월) 등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사회성 짙은 논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또한 1922년 2월 22일부터 1923년 4월 11일까지는 총 17회에 걸쳐 H. V. Dyke의 「The First X-mas Tree」를 『기독신보』에 번역 연재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계급투쟁론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는데, 자본가와 노동계급이 충돌하는 현실사회에서 자본가는 사리사욕을 채우는 불완전한 사회 조직을 변경해야하며, 노동계급은 투쟁으로서 파괴만을 주장하지 말고 이타주의利(他主義)와 상애정신(相愛情神)으로 이상적인 새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금전(金錢)만을 강조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물질주의에 기울어지는 배금정신(拜金精神)의 파문이 신성한 그리스도교회에까지 파급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은 “불철저한 물질생활에 어리석은 노예가 되지 말고 참생명을 위하여 초월적(超越的) 신생활로 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밖에도 『신생명』에 「인(人)의 세력(勢力)과 성령(聖靈)의 세력」·「구약성서에 시(視)한 메시아 강림(降臨)의 희망」·「예수의 탄생하심」·「영혼(靈魂)의 경매(競賣)」·「신년(新年)의 조선 그리스도인」 등의 다양한 글을 기고하였다.
기독교청년회YMCA가 주최하는 일요강화(日曜講話)를 통해서도 애국적인 계몽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2년 10월에는 ‘의로운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1924년 5월에는 ‘우리의 준비’, 1924년 10월에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4년 3월 『동아일보』의 보도로 촉발된 감리교 감독 웰치(Bishop H. Welch)의 친일 발언과 관련하여 그 진상 조사를 담당하였다. 이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웰치감독의 실언문제(失言問題)는 다시 문제될 것이 없음은 이미 각 신문을 통해 보도하였으나 웰치의 답변을 게재했던 신문 등을 당국에서 다 압수하여 일반이 확실히 알지 못하고 묻혀 버렸음은 유감이라고 함으로써 사건의 배후에 일제의 의도적 모함이 개재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1925년에는 미국감리교회가 조선에 대한 선교비 지원액의 4할 정도를 삭감하자, 현재 감리교 교단이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보조를 받고 못 받는 것으로 인해 교회를 문 닫고 전도 사업을 중지한다든지 학교를 폐지하고 교육 사업을 그친다면 무엇으로써 산 신앙이 있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더욱더 선교 사업과 교육 사업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6년 2월 3일에는 노백린(盧伯麟)를 위한 추도회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조직되자 안재홍(安在鴻)·김활란(金活蘭)·유각경(兪珏卿)·조병옥(趙炳玉)·정춘수(鄭春洙) 등 기독교계 인물들과 함께 운동에 참여하여 총무간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개성지회(開城支會) 창립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경성지회(京城支會) 정기대회에서는 임시집행부의 부의장 및 전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평양지회 창립대회에 참가해서는 이관구(李觀求) 등과 함께 본부 대표로서 신간회의 취지에 대해 연설하였으며, 경서지회 설립대회에서는 축사를 하였고 근우회(槿友會) 전국대의원 초청 대회에서는 환영사를 하는 등 기독교세력을 바탕으로 한 신간회의 조직적 확산과 세력의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12월 9일에는 국내에서 결성된 재만한인옹호동맹(在滿韓人擁護同盟)에 참가하여 곤경에 처한 한인들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재만 한인들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재만 한인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부당한 박해와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국내외의 민족운동세력들은 이 문제에 대해 커다란 우려를 표명하였다.
안재홍을 위원장으로 홍명희(洪命憙)·김기전(金起田) 등이 참여한 이 동맹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1월 17일 재만 한인에 대한 박해 실태를 직접 조사하기 위해 봉천으로 파견되었다가 약 3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2월 7일에 돌아왔다.
이동원(李圖遠)과 함께 봉천에 도착하여 만주조선인대회(滿州朝鮮人大會) 상무위원들과 회견하였으며, 중국의 각 책임 당국과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재만 한인 문제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길림지역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돌아와서 재만동포옹호동맹에서는 1928년 2월 13일 보고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본 동맹에서는 재만 한인의 중국으로의 입적(入籍)과 이중국적 해제를 지지한다는 방침 아래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계속해서 동정금을 모금하는 한편, 본 동맹을 지방의 동맹을 구별하기 위해 ‘재만동포옹호동맹중앙부’이라고 개칭하여 전 조선적으로 통일적인 운동을 지속해 나가자고 결의하였다.
한편 기독교계 비밀결사였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핵심 인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신흥우(申興雨)의 집에서 조직된 흥업구락부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회(同志會)의 국내 조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이상재(李商在), 신흥우·구자옥(具滋玉)·유억겸(兪億兼)·이갑성(李甲成)·안재홍·윤치호(尹致昊)·홍종숙(洪鍾肅)·장두현(張斗鉉) 등 당시 국내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흥업구락부는 신흥우와 유억겸이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이승만에게 흥업구락부의 조직 과정을 알렸으며, 민립대학기성운동과 신간회운동 및 YMCA를 통한 기독교농촌운동 등을 통해 조직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1938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 당국이 조선기독교연합회 총무인 구자옥의 가택을 수색하던 중 흥업구락부원 명부 및 그 운동 개황을 기술한 『흥업구락부 일기』를 발견함으로써 흥업구락부의 활동 내용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신흥우·구자옥·이관구·최두선(崔斗善)·홍병덕·정춘수·구영숙(具永淑)·박승철(朴勝喆)·박만규(李萬圭) 등 54명의 회원이 붙잡혀 서대문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1938년 5월 20일 경기도 경찰부장이 작성한 「연희전문학교 동지회 흥업구락부 관계보고」를 보면 박동완이 중요 회원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신간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고 안재홍이 수감되는 등 민족진영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자 1928년 8월 하와이 지역 한인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 떠나자 국내 언론에서는 “조선 사회의 각 방면에서 활동을 많이 했던 박동완이 다수 동지들의 송별 속에 재류 동포의 목사가 되어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미주 하와이 오아후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미술과 수예(手藝)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여자예술학교 졸업생들의 수예품이 미국에 수출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으며, 1931년 6월에는 잠시 국내로 들어와 ‘포와재류(布哇在留) 동포의 근황’·‘인생 생활의 삼요소(三要素)’·‘포와 조선인의 신앙생활’ 등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동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만세운동의 민족대표로서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941년 2월 23일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국내의 가족과 친지들은 유해를 들여와 장례식을 거행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부고조차 낼 수 없었다. 1개월 후 돌아온 유해는 함태영 목사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5월 현재의 서울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