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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정시대 純淨時代 원문보기 글쓴이: 淨傳
제11강 4성제와 12인연[四諦十二因緣]
여기에서는 출세간의 수행과 공부 요령을 말하고 있습니다.「4성제」와「12인연」, 이 두 가지는 모두 소승 수행자들의 수행 방법입니다.
1) 4제(四諦)
「제(諦)」: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리, 즉 진실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으로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네 종류가 있으며, 세간의 인과와 출세간의 인과를 말합니다.
「4제」란 고ㆍ집ㆍ멸ㆍ도(苦集滅道)입니다.
「고(苦)」:「몸과 마음으로 업을 갚으며 근심과 속박으로 번뇌에 핍박당한다[身心酬業, 患累逼惱]」는 말은 6도 중생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인생의 의의, 인생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업을 갚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을 현재에 갚는 것이지요. 선업을 지었으면 선보를 얻고 악업을 지었으면 악보를 받으며, 빚을 받아내고 빚을 갚고 은혜에 보답하고 원한을 갚는 일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일생 중에 업을 벗어 버리고 역경이 와도 순순히 받아들이며[逆來順受] 초월하기를 구하므로, 인생에 의의가 있습니다. 만약 일생 중에 맺힌 업을 풀지 못한다면 생사의 윤회를 초월할 수 없는데,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절대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 유혹되지 마세요. 세간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사람이 태어나 하는 일 가운데 세 가지 썩어 없어지지 않는 일은 공을 세우는 일[立功]과 덕을 세우는 일[立德], 그리고 말을 남기는 일[立言]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래 이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주에서는 매일 같이 별들이 폭발을 합니다.
어디 물어 봅시다. 그 역사라는 것이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가짜입니다. 진짜가 아니지요. 오직 명심견성만이 진짜이고, 다른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그러니 가짜에 미혹되지 마세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무시 겁 이래로 우리는 자신을 잃고 세세생생 모두 가짜 노릇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까지 왔는데도,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요.
지금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온 종일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합니까? 5계 10선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합격점을 받겠습니까? 만약 합격하지 못하면 바로 3악도에 갑니다. 사람 몸을 얻지 못하여 생이 거듭될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러니 반드시 깨달아서 자기에게 참된 일[眞事], 자기에게 큰 일[大事]을 해야 합니다.
어떤 망상도 하지 말고 성실하게 염불해야 합니다. 뜻과 길이 같은 도반들이 함께 모여서, 만약 기회와 인연이 닿으면 도량을 세우고 법을 펴서 중생을 이롭게 하여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업을 갚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런데도 우리 자신은 여전히 업을 바꿀 줄 모르니, 이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근심과 속박으로 번뇌에 핍박당한다[患累逼惱]」: 이 말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일생 동안의 느낌이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이는「세간과(世間果)」를 말합니다. 먼저 과(果)를 말해야 이해하기 좋은 것이, 지금 당장의 느낌이기 때문에 우리가 친밀하게 체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集)」: 과가 있으면 반드시 인이 있는데, 집이 바로 원인입니다. 과보는 어디에서 올까요?
「미혹을 일으켜 업을 지어서 고통을 불러 모은다[起惑造業, 招集來苦]」: 이 말 속의「혹ㆍ업ㆍ고[惑ㆍ業ㆍ苦]」라는 세 글자가 바로 6도 윤회의 원인이며 6도 윤회의 이치입니다. 6도 윤회는 어째서 있는 걸까요? 미혹을 일으키고 업을 지어서 고통을 받는 겁니다. 고통을 받고도 또 미혹하며, 미혹하여 다시 업을 짓고 다시 고통을 받으니, 영원히 이렇게 윤회하는 겁니다. 이것이「세간인(世間因)」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응지(應知)」: 세간의 괴로움의 결과[苦果]를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응단(應斷)」: 괴로움의 과보[苦報]를 불러 모으는 업의 원인을 마땅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끊을 수 있다면 당연히 이 고통을 받지 않고 윤회를 초월하게 됩니다. 고집(苦集)이라는 이 두 가지는 세간의 인과이며, 이것은 진제(眞諦)입니다.
아래의 두 조항은 출세간의 것입니다. 출세간에서도 역시 먼저 과를 말했는데, 과는 무엇입니까? 멸(滅)입니다.
「멸」: 번뇌를 멸하고 생사를 멸하는 것입니다.「맺은 업이 이미 다하여[結業已盡]」다 멸한 것입니다.
「생사의 얽매임이 없다[無生死累]」: 열반과 적정(寂靜)과 원적(圓寂)은 모두 멸(滅)의 의미입니다. 혹업고(惑業苦)를 제거해 버리고 삼계 6도의 생사윤회를 초월하는 것이지요. 이것이「출세간과[出世果]」입니다. 과보에는 당연히 업인(業因)이 있게 마련인데, 인(因)은 바로「도(道)」입니다. 도의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정식 수행과 보조 수행을 함께 닦으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正助雙修, 能至涅槃]」: 열반은 바로 앞에서 말한 멸(滅)입니다. 열반은 범어이며, 공덕원만, 청정적멸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앞에 나왔던 불교의 대의 3구절을 가지고 말한다면,「스스로 그 뜻을 청정하게 하라[自淨其意]」는 말은 정수(正修)로, 선정[定]을 닦고 지혜[慧]를 닦는 일입니다.
정혜(定慧)가 정식 수행[正修]인 것이지요. 계는 수행을 돕는 것으로,「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말은 보조 수행[助修]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강령으로 말하는 것이고, 실제의 수행에서는 아주 복잡합니다.
《화엄경》에서 보면, 선재동자의 주된 수행[正修]은 염불 법문, 즉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었고, 최후의 결과로 보현보살께서 10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왕생 하기를 인도하셨습니다. 선재동자는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이 법문을 주된 수행[主修], 정식 수행[正修]으로 삼았고, 이 법문을 통해 염불삼매를 성취하고 정등정각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량한 법문을 보조 수행[助修]으로 삼았는데, 그 중에 53참(參)이 있습니다. 많은 선지식을 참방하여 자기의 정혜를 성취한 것이 보조 수행이었던 것이지요. 이 보조 수행이란, 선덕을 만나면 참선을 배우고 밀종의 상사(上師)를 만나면 주문을 배우는 따위의 일이 아님을 여러분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랬다가는 큰 일 납니다. 그래서는 어느 하나도 성취할 수 없게 됩니다.
이른 바 참방이라는 것은 이들 선지식을 가까이 하며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수행 방법을 보며 자기의 지혜를 높이는 것이지, 절대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바른 수행[正修]을 파괴한다면, 보조 수행도 없어져서 정(正)과 조(助)의 양쪽을 다 잃게 됩니다.
스스로 반드시 여여하게 동요되지 않아야만 참학(參學)할 자격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보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여 지혜를 키우며, 비록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한 마디 아미타불만 끝까지 염송하기를 절대 변치 않는다면, 진정으로 도움이 됩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선정에 도움이 되고 분명하게 보면 지혜에 도움이 되어서, 정과 혜가 모두 닦아집니다.
참학은 결코 불문 중의 다른 종파, 다른 법문의 대덕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별로 숫자가 많지 않지요. 사실 세간의 갖가지 직업군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들이 모두 다 53참입니다.
이들 사람과 일들을 보면서, 마음으로 분명하게 이해하면 지혜가 자랍니다. 비록 보더라도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선정의 공부[定功]가 커집니다. 수행이란, 6근이 6진의 경계에 접촉하는 그곳이 바로 도량이며, 이 도량에서라야 비로소 무상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정식 수행[正修]이란 자기가 선정한 전공 법문입니다. 초발심에서 시작하여 무상도에 이를 때까지 결코 바꾸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조 수행[助修]이란 박학다식을 말하는데, 박학다식한 속에서도 절대 영향은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남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박학다식은 자신의 정혜를 성취하는 것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면 선정을 얻었는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보고 모든 것을 다 들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라야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자기에게 지혜가 있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다 보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묻지 않을 때에는 마음이 깨끗하게 아무 것도 없으나 누군가 질문을 하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절대 자기의 청정심을 방해하지 않지요.
6근이 6진을 접촉하는 자리에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훈련을 하여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말을 여의고[離言說相] 문자를 떠나며[離文字相] 마음의 반연을 여읜다는[離心緣相] 말이지요. 일을 겪으며 마음을 단련하고, 사람들과 온갖 일들 속에서 단련하여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는 보살의 대도량입니다. 홍진이 도량이지요. 보살은 홍진 속에 피는 연꽃과 같아 한 티끌에도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정식 수행과 보조 수행의 두 가지 수행[正助雙修]을 알아서, 진정으로 이 의미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도(道)」는 도리이고 방법입니다. 세간을 초월하여 생사를 끝내는 이론과 방법입니다. 무량법문이니 8만 4천 법문이니 하는 것들을 이 한 글자 속에 다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고집멸도는 소승, 즉 성문승(聲聞乘)을 말합니다. 사실 고집멸도는 불법의 근본 교의(敎義)여서, 대승과 소승에 다 통하는 것입니다.
옛날 천태지자(天台智者) 대사가 지은 37도품(道品)의 제1과목인 4념처(念處)에 대한 작은 책이 있습니다. 4념처는 지혜를 얘기하는 것으로, 우리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입문하여 수행하고 공부하는 처소입니다. 우리가 관조라는 말을 하는데, 4념처가 바로 기본적인 관조법이지요.
1.「받는 것이 고통임을 관조한다[觀受是苦]」: 지혜로 관찰해 보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은 고통이며 즐거움이 아닙니다. 현재 누리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도되고 미혹된 것입니다. 그건 고통이 잠시 떠나있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고통이 방금 떠났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무덤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하지요. 그걸 여러분이 아직 깨닫지 못했기에 아직도 아주 즐겁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생일을 맞으면 축하를 하지요? 사실 축하할 게 어디 있습니까? 무덤을 향해 하루하루 가까워지는데, 무슨 축하할 일이 있나요? 정말 전도된 것이지요. 지혜가 없어서 말입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뛰어나셔서 이 사실의 진상을 명확하게 보셨습니다. 하루하루 무덤에 접근하지만 중생이 미혹되고 전도되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몸은 온 몸이 다 병인데도, 그래도 치장을 하고는 아주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병은 배고픔과 추위의 병입니다. 날이 추울 때 옷을 많이 입지 않으면 얼어서 못쓰게 되고,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면 배고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세 끼 식사는 약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배고픈 병을 치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받는 것은 고통이 확실합니다.
2.「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관조한다[觀身不淨]」: 우리의 이 몸은 청정하지 않습니다. 불경에서 말하는 36가지 부정(不淨)한 물건이 이 몸을 만들었으니까요.
3.「마음이 무상함을 관조한다[觀心無常]」: 이 마음이란 망령된 마음이어서 금방 동쪽을 생각했다가 바로 서쪽을 생각하며, 하루 온종일 제멋대로 허튼 생각을 합니다. 만약 마음이 언제나 한 가지만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선정을 얻은 것이지요. 한 문(門)에 정(定)해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상(常)이지요. 우리는 하루 온종일 망상을 피웁니다.
4.「법에 내가 없음을 관한다[觀法無我]」: 나[我]란 주재한다는 뜻이며 자재하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법에는 주재함이 없고 자재하지도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인들 불로장수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인들 해마다 이팔청춘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자신이 자신을 주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혜의 관찰로, 이렇게 관찰할 수 있다면 바로 깨닫게 됩니다.
지자대사는 4념처를 아주 상세하게 풀이해 놓았지요. 장ㆍ통ㆍ별ㆍ원(藏通別圓)의 4교(四敎)에 모두 4념처가 있으나, 네 가지 염처의 경계가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4교에도 4성제가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장교(藏敎)의 4성제, 즉 소승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통교(通敎)에도 4제가 있고 별교(別敎)에도 4제가 있으며 원교(圓敎)에도 4제가 있으니, 자세히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3전법륜(轉法輪)」: 이는 부처님 교육의 선교방편으로,「시ㆍ권ㆍ증[示勸證]」의「3전(轉)」입니다.
「시(示)」: 지시인데, 근성이 영리한 사람은 듣기만 해도 바로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께서「이것은 고통이며, 핍박하는 성질이다[此是苦, 逼迫性]」라고 하시고,「이것은 집이니, 고통을 불러오는 성질이다[此是集, 招感性]」라고 하여 느낌을 불러 모으는 고통의 과보[苦報]를 말하시고,「이것은 멸인데, 증득할 수 있는 성질이다[此是滅, 可證性]」라고 하시며,「이것은 도인데, 닦을 수 있는 성질이다[此是道, 可修性]」라고 하신 것은 모두 성체(性體)로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상(上)」근기의 사람은 듣기만 하면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권(勸)」: 중간 근성의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비록 듣기는 했지만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마이동풍일 겁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권유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 주어야지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에게 들려주려는 말이니, 특별히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그리고 권유의 말을 더해야지요.
예를 들면 “이는 고통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는 말 같은 것이지요. 표의 풀이에 보이는 응지(應知)ㆍ응단(應斷)ㆍ응증(應證)ㆍ응수(應修)는 모두 수행을 권유하는 말입니다. 이것은「중간[中]」근성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므로 뜻이 더욱 친밀합니다.
「증(證)」: 근성이 좀 열등한「하(下)」등 근성의 사람은 비록 권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거든요. 우리 모두가 다 ‘해낼 수 있는 걸까?’생각하지요.
부처님께서는 말후(末後)에 직접 몸으로 설법하시어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시며 증전(證轉)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당신 자신을 예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고(苦)이지만 나는「이미[已]」알았고 이것은 집(集)이지만 나는「이미」끊었다고 말입니다. 이 뜻은 “내가 알았으니 너도 알 수 있고, 내가 끊었으니 너도 끊을 수 있으며, 내가 증득하였으니 너도 역시 증득할 수 있으며, 내가 닦았으니 너도 역시 닦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세 번을 권합니다. 한 번 하고 또 하고, 두 번 하고 다시 세 번을 하는 것이지요. 세 번을 권했는데도 만약 그래도 안 움직인다면 부처님도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세 번 권하는 사이에 돌이킬 수 있다면 불보살은 반드시 오십니다. 세 번 권해도 돌이키지 않으면 불보살은 오시지 않습니다. 오신다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괜히 헛걸음만 하고 입만 아프거든요. 우리는 이것을 3전 4제 법륜(三轉四諦法輪)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