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사우(金師禹)가 졸(卒)하엿다. 김사우는 자(字)를 근보(勤父)라 하고, 경상도(慶尙道) 상주(尙州) 사람인데, 무과(武科) 출신(出身)으로 관직(官職)을 거듭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이르고, 나가서 충청도 수군 안무 처치사(忠淸道水軍安撫處置使)가 되었다. 때마침 그 해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김사우가 부지런히 사졸(士卒)들을 구휼(救恤)하고 바다의 소금을 구워서 이익을 보게 하여 병영(兵營)에 수년의 비축(備蓄)이 있었고 뒤에 체환(遞還)되었다. 또 판회령부사(判會寧府事)로 나갔는데, 때마침 조정(朝廷)에서 변방 추장(酋長)의 목을 베었으므로 여러 부락의 야인들이 원망하고 수천 명을 모아서 장성(長成)을 헐고 돌입(突入)하였는데, 김사우가 앞장 서서 결투(決鬪)하여 20여 급(級)을 사로잡기도 하고 베기도 하였다. 임금이 가정 대부(嘉靖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고,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그 공을 정표(旌表)하였으며, 경진년에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제수하였다. 아직 회령에서 돌아오기 전에 야인(野人)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숙주가 김사우를 머무르게 하여 함께 일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깊이 들어갔을 때에 적이 밤을 타서 병영을 침범하고 혹은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요격(邀擊)하였는데, 김사우가 전후(殿後)에서 혈전(血戰)하여 사로잡고 목벤 것이 매우 많았다. 이 공(功)으로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올려서 제수하고, 노비(奴婢)를 하사하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전임(轉任)하였다가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에 제수하였다. 명년(明年)에 병(病)으로 소환되었는데, 임금이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이를 치료하게 하여 은고(恩顧)가 심히 두터웠으나, 드디어 병으로 사직하고 상주에 돌아가 졸(卒)하니, 나이 50이었다.
김사우는 여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며, 독서(讀書)하여 대의(大義)를 통(通)하였으므로 당시의 무신(武臣)으로서 최상(最上)이었다. 성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공정하여 사람들의 탐오(貪汚)하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반드시 면전(面前)에서 이를 공박하고, 혹은 규제(規制)하여 구휼(救恤)하지 아니하였다.
시호(諡號)를 장절(莊節)이라 하였는데, 적(賊)을 이기고 의지가 강한 것은 장(莊)이라 하고, 청렴한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 극기(克己)하는 것을 절(節)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