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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주변국의 문화에 영향 받은 구약
고대 니느웨(Nineveh)의 궁전터에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 BC 669~629)의 왕립 도
서관이 발굴 되었다. 그곳에서 영국의 레이야드(Layard)가 1848~1876년에 에누마 엘리쉬(E
numa elish)점토판을 발굴했으며, 라삼(Rassam)이 1853년에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를 발굴 했다. 그 외에도 그곳에서 부조와 약 25,000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고 출
토된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보관 되게 된다.
이곳의 유물들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고대 최초로 최대의 도서관을 세우고 그의 서기관들과 관
리들을 고대의 여러 도시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바벨론, 구다, 니플, 악카드, 에렉 등지에 파
견하여 기록물들을 수집하여 보관한 것들이다. 1862년에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이 서판의 내용을 공표함으로써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BC 2000년경에 이룩된 것이라 하는데 각기 시대가 다른 별도의 이야기들
을 한 사람의 인물인 길가메시에 통일시킨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길가메시서
사시 Gilgamesh Epoth 항목]
이것은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불리며,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시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
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
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수메르의 자료에 의하면 길가메시는 우루크 제1왕조 제5대 왕이
었으나 뒤에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부조(浮彫)와 원통(圓筒), 인장(印章) 등의 미술작품에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도 수메르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길가메시보다 앞선 홍수 설화
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BC 1967년 또는 BC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수 기록(니
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B
C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흽쓸었다. 홍수가 흽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께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라는 뜻은 "태초
에"(When above)라는 뜻이다.
아시리아를 포함한 바빌로니아 신화에 관하여 오늘날 알 수 있는 것은 주로 BC 7세기의 아시
리아 후기의 문헌에 의한 것으로, BC 18세기의 바빌론 제1왕조로부터 그다지 멀리 거슬러 올
라가지는 않는다. 즉, 거의 모든 신들 및 신화가 BC 25세기 무렵의 수메르 시대까지 소급한다
는 것은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주신(主神) 마르둑과 아시리아의 주신
아슈르를 제외한 많은 신들이 수메르식(式) 이름과 함께 셈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로마의
신들이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볼 수 있다.
▶ 구약의 천지창조와 바빌론의 신화 비교
창세기의 태초 이야기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여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바빌론의 창조신화 '에느마 엘리쉬'(Enuma elish)는 바빌론판 창조신화이다.
이 신화는 먼저 우주 창조 신화로 부터 시작된다.
태초에 티아맛(Tiamat)과 아프수(Apsu)라는 한 쌍의 우주신이 있었다.
티아맛은 여성신이며 바다의 짠물을, 아프수는 남성신으로서 강에서 흐르는 단물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두 신 사이에서 먼저 라흐무와 라하무의 한쌍이, 그 뒤에 안샬과 키샬이라는 다른
한 쌍의 신이 태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신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모든 것의 시초인 신이 바다와 강물의 신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천지창조 이
전에도 물은 애초에 존재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도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기전에
수면위에 운행했다는 구절로 볼 때, 창세기는 에누아 엘리쉬와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어 졌다
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신들이 많아지자 신의 세계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중, 바다의 여신 타마앗 여신
과 그의 내연의 남편 킨구(Kin-gu)가 마루둑을 죽이려 전쟁을 벌였으나, 마루둑의 승리로 끝
을 맺었고 반역자 킨구는 처형을 당한다.
마루둑은 타아맛의 시체로 천지를 창조한다. 마루둑은 티아맛의 시체를 머리에서부터 쪼개어
두 동강을 낸후, 그 윗 몸체를 휘어 둥근 하늘을 밑에 있는 부분으로써 땅을 만들었다.
또 그는 하늘에 자신의 집을 짓고 나서 여러 별을 지었으며, 달력도 제정했고, 북극성을 제자
리에 두었고, 달과 해가 운행할 길도 잡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복할 점은 창공을 만든 뒤 그곳에 별, 태양, 달을 세우고 이를 절기와 날을 세는 징표
로 삼았다는 것과 아래의 물을 모이게 하여 육지와 바다가 생기게 했다는 것 역시 구약과 똑같
다는 점이다. 또, 구약의 창세기는 물을 혼돈, 흑암, 즉 테홈(Tehom)이라 하여 마루둑에게 전
쟁을 걸어온 바다의 여신 티아맛과 그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여호와가 혼동속에
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마르둑은 자신과 함께 싸워준 여러 신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인간을 만
들어 신을 섬기도록 작정했다. 지혜가 많은 에아(Ea)는 킨구의 몸에서 피를 뽑아 진흙을 개어
인간을 창조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킨구의 피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인간
의 본질의 일부는 반란을 일으킨 악한 신에게서 유래되었는 원죄론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
은 성악설의 시작이기도 하다. 죄를 지어 사형당한 신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점은 "살의
혼은 피에 있다"는 레위기 17장 11절의 피에 대한 관념과 일치한다. 이러한 피와 관련된 인간
의 원죄론은 유대인들의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려서 하는 번제의식(또는 '속죄례')라는 종교적
관습에 영향을 끼친 듯하며, 이것은 나아가서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속
죄 신학으로 발전했다. 구약의 번제의식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크나큰 영향을 준 것이다.
인간을 만든 뒤에 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법석대며 축하했다고 기록되어져있다. 이것은 창세기
의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고 난후에 휴식을 취하고 안식일을 정해 거룩하게 했다는것과 일치
한다. 즉, '안식일'의 발상도 바빌론과 수메르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의 유래를 창세기에서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한 후에 휴식한 것에서 그 기
원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로린슨이 판독한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제7일은 마르둑과 자르파니트의 축제일이다. 그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의 목자는 연
기나는 숯불 위에 구운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라. 그 몸에 겉옷을 갈아 입지 말 것이요 깨끗한
것을 입지 말지니라. 그는 희생 제물을 드리지 말지니라. 병거를 탄 왕은 달리지 말 것이요. 그
는 승리를 말하지 말 것이라. 선견자는 거룩한 곳에서 신탁을 말하지 말라. 의사는 환자 위에
그 손을 얹지 말 것이요, 악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느니라. 밤에 왕은 마르둑과 이슈타 앞에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며 관제(灌際)를 부을지니라. 그의 손을 쳐드는 것은 그 때에 그 신들에
게 기뻐함이 될 것이라." [Rawlinson's Cuneiform Inscription of Western Asia Ⅵ, 2nd ed.,
pl. 32, lines 28-38]
아카드어 '샤파투'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행하는 종교일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라는 단어와 유사성을 띄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정결례를 행하
는 '샤파투'는 "신의 심장이 쉬는날"이라고 해석했다. 즉 신이 쉬는 날이 안식일인 '샤파투'였
고, 유대인들은 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샤바트'라고 부른 것이다.
또 다른 점토판인 지우쑤드라의 엔키와 닌후르사드의 신화에서도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유사
한 신화가 발견된다.
태초에 낮과 밤이 생기고 해(年)가 결정된뒤 큰 신이 생겨나고, 그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뒤 기본적인 세상의 질서가 정해졌다. 태초의 낙원인 딜문(Dilmun)은 순결하고 찬란하며 성스
런 땅이었다. 엔키(Enki)에 의해 축복받아 달콤한 물이 넘쳐흘렀으며,풍성한 개펄과 야자나무
로 채웠다. 동쪽에 자리잡은 에덴에는 물이 붇거나(riese) 범람하는 강이 하나 있었는데, 티그
리스,유프라테스 강과 더불어 4대강을 형성했다. 그곳은 또한 푸르게 우거져 나무들에는 열매
가 가득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강바닥을 파서 그 흙으로 강둑을 쌓는등의 고된 노역에 시달리던 작은
신(神)들이 불평 하기 시작했고, 지혜의 신인 엔키를 저주하며 급기야 연장을 파괴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잠에 빠져있는 엔키에게 어머니 남무(Nammu)가 아들을 깨운다.
"여전히 누워 있느냐? 이런데도 너는 잠자고 있느냐?....너의 재간으로 신들을 대신할 것을 만
들어 그들의 노역을 풀어 주어라."
엔키는 그의 어머니인 남무의 조언으로 인해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그
는 우선 점토를 빚어 출산의 모신들을 창조하고, 그녀들과 의논한 끝에 인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능력이 서려있는 '이름있는 피' 가 필요했다. 엔키
는 반란을 일으킨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 웨일라(We-ila)를 잡아 죽인 후, 그 피를 점토와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awila : 아윌라)이라는 단어는 웨일라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한다. 엔키
는 일곱 명의 출산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창조한 후, 인간들에게 대신 노역을 맡겼다.
지우쑤드라에서도 에누마 엘리쉬와 같이 반역한 신의 피로써 인간을 창조했다고 나온다.
또, 지우쑤드라에서는 그동안 신학적으로 의문점이었던 이브의 갈비뼈 탄생에 대해서 의문을
풀어줄만한 단서가 등장한다.
엔키와 닌후르사그(Ninhursag)의 사이에서 여덞종류의 식물들이 태어났는데 엔키가 자식들인
식물을 먹어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저주를 받은 엔키는 먹어 치운 각 식물에 대해 하나당 하나
씩의 상처를 입었다. 엔릴과 여우는 엔키 대신에 그 저주를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엔
키와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자식들 여덟을 낳았고 그들이 각각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의 갈비뼈를 치료한 딸을 닌티(Ninti)라고 불렀는데 달(months)의 여왕이고, 갈비뼈의 부인,
또는 생명을 주는 여인이란 의미이다. 수메르어로 '티'란 말은 '갈비뼈'와 '생명을 주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상은 이브에게로 이어진다. 창세기에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
로 만들어지고 그녀의 이름인 하와 또는 생명(living)과 관련 있다.
흙으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 자체가 애초에 원죄(반역자 신의 피로써 창조되었다는)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의 다양한 창조신화에서 발견된다.
또,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메르어로 갈비뼈가 생명을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일 것이다.
바빌론 유수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바빌론 사람들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역시 수메르신화의 태초의 낙원 딜문과 유사하고, 그 이름 또한 수메르어
명사인 '간즈 에덴'(ganz eden:들판의 일궈놓은 밭)에서 나왔다. 수메르어 보통명사가 창세기
에서는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창세기의 뱀이 사악한 동물이라는 관점도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당시 그곳의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된다.
길가메쉬 신화(The Epic of Gilgamesh)에서의 뱀은 영생할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 버린 악
한 동물로 묘사 되어진다.
이 신화는 친구 엔키두(Enkidu)가 죽게 되자 우룩 나라의 왕 길가메쉬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
린다. 길가메쉬는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죽지않는법(不死永生)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후, 만슈라는 산에 도착한 길가메시는 대홍수 때에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는 우트나피스팀이
라는 전설적 인물을 찾아간다.
가까스로 우트나피스팀에게 영생할수 있는 비법을 듣게된 길가메쉬는 회춘하는 신통한 풀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길가메쉬는 바닷속에 들어가 그 풀을 뜯어 가지고 물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몇날 동안 길을 가다 한 곳에 맑은 연못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메쉬는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연못에 몸을 씻기로 생각하고 그 약초를 연못가에 놓아 두었다. 그런데 그 연못에서 살던
한 뱀이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뭍으로 나와 순식간에 그 풀을 훔쳐 먹고는 껍질을 벗고 사라졌
다. 그래서 길가메쉬는 영생의 기회를 뱀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한편,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원주형 도장에 눌려 찍혀진 부각에
는 거룩한 나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데, 왼편사람 뒤에는 뱀이 유혹하는 장면
이 나온다. 대영박물관측에서는 이 유물에 '하와의 유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홍수신화의 원조
대홍수 신화의 기본 구조는 신들이 인간을 징계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키고, 그중 현명하고
선한 인간이 미리 그 일을 알고 대비해 살아 남는다 라는 스토리가 많다.
구약의 홍수 신화와 서아시아의 홍수 신화는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수메르에서 대홍수 이전까지 10명의 아눈나키들(엘로힘들)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하는데, 창세기에서도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 아담부터 시작하는 10명의 계보가 등
장하는 것을 들수 있을 것이다.
수메르의 홍수신화에는 전설적인 연대인 24만 1,2000년간에 걸친 최초의 8왕의 지배에 뒤이
어 "홍수가 대지를 덮었다"는 설명과 함께, 그 수메르의 98왕들의 명부가 남아 있다.
수메르의 지우쑤드라(Ziusudra) 홍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도시들이 세워지고 난 후 신들을 위해 노역을 하던 인간들은 노역의 대가로 곡식을 배급 받으
며 살아가고 있었다. 노동은 과하고 배급은 적게 나와서 인간들은 이전의 작은 신들처럼 불만
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들의 불평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신들은 쉴 수가 없었다. 결국 신들의
회의에서 최고신인 안(An)과 엔릴(Enril)은 인간들을 쓸어 없애자고 제안하게 된다.
상당히 제멋대로인 최고신 엔릴에 비해, 훨씬 침착하고 냉정한 지혜의 신 엔키는 인간을 구원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엔키는 올바르게 사는 왕이자 제사장인 지우쑤드라의 꿈에 나타
나 신들의 결정을 알려주고 배를 만들어 온갖 생명의 씨앗과 동물들을 싣도록 지시하였다.
이윽고 거센 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일곱 날 일곱 밤 동안 홍수가 땅 위를 휩
쓸었다. (40일 낮 40일 밤 홍수에 시달렸다고 기록한 창세기와 유사하다)
드디어 물이 빠지며 태양이 떠오르고, 태양신 우투는 배 속으로 따뜻하고 밝은 빛을 비추어 주
었다. 지우쑤드라는 비둘기와 까마귀를 날려 보내서 육지가 드러났는지 확인하게 한다. 그리
고, 지우쑤드라의 방주는 니실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 산 꼭대기에 배의 밑바닥이 닿아서 배가
움직이지 않게되었던 것이다.
안(An)과 엔릴(Enril)은 지우쑤드라가 살아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엔키는 지우쑤드라
왕을 변호해주었다. 안과 엔릴은 그를 받아들이고, 인간 종자가 다시 세상을 채우는 것을 허용
한다. 그리고 지우쑤드라 왕은 신들과 같은 영원한 목숨이 상으로 주어지고 거룩한 도시 딜문
에서 살게 되었다.\
비슷한 홍수신화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바빌로니아의 대홍수 신화도 수메르(지우쑤드라의 홍수이야기)에 기원을 두
고 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수메르 등에 의해서 공유 되었기 때문에
신들의 이름이나 내용이 겹치는 경우가 있어 글들이 다소 혼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엔릴, 벨, 엔키, 에아, 마르두크의 이야기와 닌마, 닌후르사가, 닌키, 닌릴의 이야기는
각각이 부분부분 겹치는 경우가 있어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
아카드의 문헌에는 홍수 이야기가 두가지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우타나피슈팀이 주
인공이지만 또 다른 신화에서 원초의 기근과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아트라하시스였다.
천지창조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영생을 찾아 여행을 나선 길가메시는 대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트나피스팀에게 영생의 비결을 묻기위해 찾아간다. 길가메시의 홍수신화는
우트나피스팀이 길가메쉬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홍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엔릴 신이 인간을 완전히 멸하려고 홍수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지만, 에아 신은 종인 우트나피
스팀에게 "집을 헐고 배를 한척 만들어라", "재산을 버리고 배를 만들어라", "재물을 단념하고
생명을 건져라", "모든 씨받이 생물을 배에 태워라"고 비밀스레 알려주었다고 한다.
우트나피스팀은 작업을 시작하여 다섯날에는 배의 골격이 세워졌고 그 배를 6층으로 만들었
다. 우트나피스팀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뒤 배는 어느덧 완성되어 물 속으로
진수시켰다. 그리고 그의 재산인 금과 은과 그의 모든 식구들과 친척들, 기술자들, 그리고 들
짐승과 야생 동물들, 모든 동물을 태웠다.
에아가 우트나피스팀에게 선실문을 닫으라고 명령한다. 번개와 폭풍과 함께 갑자기 닥쳐온 홍
수에 신들마져도 전율케 만들었다. 홍수는 6일간 계속 되다가 7일째에는 멈추었고 해가 떠올
랐다. 우트나피스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배는 '이시르' 산에 멈추었다. 홍수가 그친지 7
일째 되던 날 그는 비둘기와 제비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새들은 되돌와 왔다. 이번에는 까마
귀를 날려 보냈는데 까마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홍수가 끝난 것을 알게된 우트나피스팀은 모든 생물들을 사방으로 놓아주고 난 다음에 제사를
드리면서 술을 부었다고 한다. 제사가 시작되자 신들이 떼거지로 몰려왔는데, 신들은 갑자기
세상을 멸망시킨 엔릴신에게 불평을 쏟아놓는다. 그 자리에 엔릴이 나타나 배를 보자 "아무도
멸망을 피할수 없었을 텐데 누가 살아 남았느냐?"면서 화를 냈다. 그러나 에아 신은 "어찌하여
이처럼 무차별하게 홍수를 일으켰습니까? 죄인에게 죄를 묻고 홍수 대신 사자나 늑대나 기근
을 보내어 인류를 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제거하지 마소서" 라고 말
하면서 우트나피스팀을 변호해 준다. 그러자 엔릴은 뉘우치면서 인간인 우트나피스팀을 신들
과 같이 만들어 준다.
이상이 지우쑤드라 홍수신화와 길가메시 신화의 대략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신화들을 토대로 구약속의 신화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궤변논자들
이 의외로 많다. 그들이 주장이 왜 궤변인지는 다음글에 기록했으니 필독해 보라.
▶ 비슷한 신화가 오히려 성경 신화의 실존을 증명해 주는가?
성경보다 훨씬 오래된 주변국의 신화가 오히려 노아의 방주와 같은 성경 신화가 실존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있다.
심지어 창조과학회 조차도 필자가 제시한 신화들과 함께 중국과 아시아 등지에 존재하는 홍수
신화까지 들먹여서 노아의 방주를 입증하려한다.(도데체 창조과학회는 과학하는 곳인가? 고
고학을 하는 곳인가? 과학이라는 이름을 내걸 자격도 없는 싸구려 궤변논자들이다.)
그러한 주장들이 얼핏보면 정말로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창조과학회의 주장
에 대해 목사들과 신학생들의 방관하는 죄가 크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신학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주장은 감히 할수도 없다. 아니, 신학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버린다.
첫째, 비신학적으로도 그들의 주장은 궤변일 수밖에 없다.
만약 모세가 실존했다면 그는 BC 1290 ~ 1223 무렵의 람세스 2세 때의 인물일 것이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는 억지주장을 편다 하더라도 수메르와 바빌론의 점토판 보다 오
래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점토판중 가장 오래된 것은 BC 2000년경 쯤된다. 즉,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억지주장을 하더라도 구약은 수메르 점토판보다 오래된 것이 아니다.
두번째, 신학적으로도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
신학계에서는 모세오경이 모세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예 포기해 버린지 오래이다. 모
세오경이 모세에 의해 씌여졌다고 믿는 것은 일반 평신도들 뿐이다.
구약성경은 BC 1000경 무렵에 하나둘씩 등장한 전승들이, 바빌론 유수 이후 BC 500년 무렵
에 전해 내려오는 전승들이 문서에 기록되기 시작 한것이다. 게다가 바빌론 유수 당시 유대인
들은 바빌론의 문화를 다수 받아 들였다.
물론, 세계각지에 퍼져있는 유사한 홍수신화에 대해서 우리는 유의해 볼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수메르지역의 신화가 널리 전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바빌론 유수 이후에나 만
들어진 구약으로 무엇을 증거한단 말인가?
인도의 홍수신화의 경우 다른지역으로부터 유입된 것임이 확실시 된다.
인도의 홍수신화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적 기념비인 베다어 성전의 찬양시에서는 하나
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바라문 교의 베다경전은 BC 1500~10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인데, 곧 아리안 족이 아직
도 뉴델리 북쪽의 펀자브 지역에 정착하고 있으나, 아직 남동쪽의 갠지스 강 유역에서 퍼져 나가지
못했을 때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후대에 쓰여진 범어 서적들에게서
는 뚜렷이 눈에 띄는 홍수 설화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 형태들은 세부 사항에서만 약간씩 다
를 뿐이고 일반적으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크게 떠들어 대는 중국 남서부 운남성 롤로족의 홍수 신화의 경우는 중국에 경
교가 수입된 후에 형성된 것이다.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428
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임명됐으나, 교리논쟁에 휩싸
인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패배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결국 네스토리
우스파는 몸을 추스르고 독자적인 교회 전통을 수립해 나갔으며,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7세기
초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이
르렀다. 알로펜을 중심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당 태종
때였다.(이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다) 당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보내 네스토리우스파의 선
교단을 맞이했고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도록 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여러 이
름으로 불렸으나 경교(景敎)로 널리 알려졌다.
홍수전설을 가진 중국의 롤로족은 일반적으로 6일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을 지킨다. 이런 전
설과 풍속모두를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관련시킨 A.헨리 시의 해석이
옳을 것이다. 중국으로 넘어온 경교는 13 세기에는 그 교회가 운남성에 세워졌다. 이때에는 마
르코 폴로가 이 지역으로 여행을 했고 알로펜이라는 경교의 교도가 중국에 도착한 것은 일찍
이 AD 635년이었다고 전해진다.
경교는 원래 로마에서도 추방당한후, 동양으로 건너오면서 토착화가 진행되서 많이 변질되었
으며 결국 소멸되어 버렸다. 또한 마니교 역시 중국에 전해졌다. 돈황을 비롯한 투르크 지방에
서 마니교의 문헌들이 무수히 발견 되었다. 결국, 중국의 홍수전설은 엄연히 경교와 마니교의
영향이다.
이야기가 좀 빗나가겠지만,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일부의 십자가 유물을 가지고 고대한국이 기
독교 국가였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목사가 있다. 이런 궤변논자들은 역사학자들에게 돌맞아
도 싸다. 신라의 고분에서 아라비아 지방의 유리잔이 대량 발굴 되었는데, 그것은 당과 아라비
아와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서 경교가 약간 유입된 것 뿐이지, 경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
린 경우는 어느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번엔 아메리카 대륙에 홍수전설이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아메리카 인디오들과 마야족의 표의문자로 기록된 마야의 고사본의 내용에는 전설의 뮤대륙
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코르테스에 의해 마드리드 도서관에 보관중인 '트로아노 고사
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칸의 6년 11무르크.사크의 달에 무서운 지진이 시작되어 13츄앤까지 쉴세없이 계속되었다.(
마야의 달력에 의하면 3일간의 기간임) 언덕의 나라 뮤대륙은 희생될 운명에 처해있었다. 대
지는 두 번이나 치솟았다가 밤사이 사라졌다. 지하불의 작용에 의하여 대지는 끊임없이 흔들
리고 여러곳이 솟아올랏다 가라앉았다. 땅이 갈라지고 10개의 나라(민족)는 사방으로 흩어졌
다. 그리하여 6400만의 주민은 그 나라와 함께 더불어 침몰했다. 이 책을 쓰기 8060년전의 일
이다." [오카다 히데오/오만한 문명에 대한 경고/ 김도희 옮김/나무생각/P.218]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 있는 우슈말 유적의 신전벽에 이 신전은 우리들 신조의 원조인 뮤 국
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신전의 내부는 뮤 대륙이 있었던 서
쪽을 향하고 있다." [오카다 히데오/오만한 문명에 대한 경고/ 김도희 옮김/나무생각/P.219]
물론, 필자는 전설의 뮤 대륙이나 아틀란티스 대륙이 실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홍수 이야기라고 제시하는 것은 실상 뮤
대륙의 전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디오의 기서 치람, 파람 5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재앙의 전설에 따르면 하늘에서 불과 재가
떨어지고, 하늘에 거대한 뱀이 나타나 뱀의 껍질과 뼈조각이 땅에 떨어지고 난뒤 대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고 한다. 이것은 마야의 뮤 대륙의 비극적인 전설에 영향받은 것에 지나지 않
는다.
하늘에서 불과 재가 떨어졌다는 언급에서 알수 있듯이 지진과 화산폭발, 혹은 운석의 낙하와
같은 대 이변에 의해 대륙이 바다속으로 침몰 되었다는 인디오의 전설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
와 대홍수가 발생했다는 창세기의 홍수전설과는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다시말해 마야족의
뮤 대륙의 전설과 똑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마
야의 전설은 외면하고 인디오의 전설만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나, 노아의 홍수가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
이나 모두 똑같다. 신화를 신화로 보지 못하고 역사로 착각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서,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아틀란티스나 뮤 대륙의 침몰신화는 아예 건드리
지도 않고, 인디오의 전설만을 이용해 먹는다.
이러한 홍수신화 들을 분석했던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져(J. Frazer)의 견해를 올린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홍수 전통들은 이런 유형의 설화가 온 세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중략)....먼저 그들이 발견된 지역들을 간단하게 다시 요약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요약해 본다면 우리가 홍수 전통의 견본들을 발견한 곳은
바빌로니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브리기아, 고대와 현대의 인도, 미얀마,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부, 말레이 반도, 그리고 캄차카 반도등이다. 그러므로 대체적으로 말해서 홍수 전통들은 주
로 아시아 남부에서 우세하게 많고 동아시아와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에는 뚜렷하게 없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이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민족에서서는 내가 아는 한에서 볼때에 어느 한 민족도 그들의 선조들이 옛날
에 남겨 놓은 방대한 문서들 속에 우리가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대홍수, 곧 인류의 전체나 대
부분을 멸망시켰다고 전하는 세계적인 범람의 전설들을 토착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
도 없다는 점이다.
유럽에서는 토착적인 홍수 설화들이 아시아에서보다는 훨씬 더 희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그런 홍수 설화들이 나타났고, 영국 남서부의 웨일즈 지방에서 그리고 발트해 연안의
리투아니아 인들과 루마니아 중앙의 고원지대인 트란실바니아의 집시들과 러시아 동부의
보굴족들에게서 홍수 전통들이 보고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이집트를 포함해서 대홍수의
토착적인 전설들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진실로 명백한 토착설화의 경우는 단 한가지도
아직까지 보고된 것이 없다......(중략)......
우선 두가지를 특별히 분명한 결론으로 지적할 수 있다. 성경에 쓰여진 히브리 인들의 홍수 전승은
바빌로니아-수메르의 원본에서 파생된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하다."
[James George Frazer / Folklore in the Old Testament Studies in Comparative Religion Legend
and Law / Kessinger Publishing]
말하자면, 홍수설화가 다른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말이다. 그 근원은 바빌로니아 지방이라고
볼수 있겠다.
'새번역성서'의 창세기 입문에서도 창세기가 바빌론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성서의 저자들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대 근동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에집트 그리고 페니키아-가나안 지방의 전통들을 망설임없이 직간접적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
사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발견은 창세기의 첫 부분, 그리고 수메르와 바
빌론과 에집트 중부의 테베 또는 북부 시리아-팔레스티나에 있던 우가릿의 서사시와 지혜문
학과 전례 문서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자리잡
은 지방이 외국 문물의 영향에 넓게 열려있었음을 안다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밖에도
하느님 백성 자신이 자기들의 역사를 통해서 근동의 여러 민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그
러나 고고학의 발달은 동시에, 창세기 앞부분의 여러 장들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수정한 저자들이 기계적인 모방자들이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이야기들을
그냥 가져오지 않고, 자기 민족의 특수한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자료들을 다시 작업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독창성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근
동의 설화들을 이용하여 자기네 신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성서 본문을 그 옛날에 널리 알려져 있던 세상 기원 또는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들
과 비교하는 것은 성서의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학적 증인들 중
에서 여기에서는, '에누마 엘리쉬'라 불리는, 마르둑 신이 이룬 창조에 대한 바빌론의 설화, 바
빌론판 홍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웅 길가메쉬의 모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를 상기
시키는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성읍 주민들이 자기네 신들을 위해서 지은 큰 탑들 등
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 임승필번역 / 구약성서새
번역7-창세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카톨릭에서도 솔직하게 교인들에게 가르켜주는 사실을, 개신교에서는 계속해서 진실을 가린
다. 두산 세계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헤브라이 신화는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신화전승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바
빌로니아의 '마르둑' 신에 의한 천지창조 신화와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 이야기 등 비교신
화학적으로 보면 양자의 소재의 동일성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없다. 처음에 부족신(部族神)이
었던 야훼 신앙은 점차 다신교를 극복하면서 원시신앙도 야훼 신앙의 측면에서 새로 해석하여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헤브라이신화 Hebrew myths 항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속의 신화들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제6장의 성경
속에서의 비과학 파트에서 다시 한번 분석을 하겠다.
홍수신화를 연구하려면 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의 신화를 토대로 연구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수메르신화와 다른 지역의 홍수신화를 가장 늦게 등장한 성경으로 연구를 해보겠
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그것은 마치, 슈퍼로봇물의 원조가 일본의 마징가Z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마징가Z와 그랜다이져같은 비슷비슷한 슈퍼로봇만화 들을 증거로 제시 하면서 로보트
태권V가 현실에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신화를 신화로 보지
않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는 것은, 만화영화속의 로보트 태권V가 현실속에 실존했다고
믿어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에 지나지 않는다.
▶ 모세 탄생 신화의 원조
모세 역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물로 추측되고 있다.
앞부분의 '허구의 구약사'에서 지적했듯이 유대민족의 출애굽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더욱이 모세의 출생신화는 주변국 신화에 영향받은 흔적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바로 아카드
(Akkad)의 사르곤(Sargon)출생 신화이다. 조지 스미스가 발표한 아카드왕 사르곤 1세(BC 24
세기)의 전기를 담은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나는 사르곤이다. 강력한 왕이자 아카드의 군주이다. 나의 어머니는 출생이 미천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아버지의 형제는 산에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도시 이즈피라스는 유프
라테스 강둑에 있다. 미천한 어머니는 몰래 나를 잉태하고 낳았다. 그리고 갈대 광주리를 만들
고 역청을 발라서 새지 않도록 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광주리에 담아 강에 놓았으나 강이 나를
삼키지 않았다. 강은 나를 싣고 떠내려가서 관개를 담당하는 자인 아키에게로 갔다. 아키는 나
를 강에서 들어 올려 자신의 아들로 키웠다. 내가 정원사였을 때 이쉬타르가 나를 사랑 했다."
아카드어로는 샤루킨(Sharru-kin)이라고도 불리는 사르곤(BC 2350∼2295 추정)은 고대 메소
포타미아에서 셈계 통일 왕국인 아카드왕조(BC 2360~2180 추정)의 건국자이다.
사르곤은 아마도 영웅적인 출생과 어린 시절을 가진 것으로 이야기 되었던 첫 번째 바빌로니
아 왕이었을 것이다.
사르곤 1세의 아버지 형제가 산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가 산신(山神)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성경에서 모세가 신의 계시를 받은곳도 산(山)이었다는 것도 무시할수 없을것이
다.
사르곤의 어머니는 아이를 갈대로 만든 바구니에 넣고 강물에 떠내려 보냈다. 물을 담당하는
아키가 그 광주리를 발견하고 사르곤을 자식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를 양육한것은 이쉬타르
여신이었다고 한다. 후일 사르곤이 성인이 되자 여신 이쉬타르는 그를 애인으로 삼음과 동시
에 제사장(임금) 자리에 오르게 했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사르곤의 어머니는 이쉬타르 신전의 무녀(巫女)였으나 잘못해서 임신
을 했고, 신의 벌이 두려워 낳은 아이를 유프라테스강에 버렸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는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이 아이를 구하여 키운 것으로 되어 있다.
사르곤의 경우에는 실존인물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탄생신화는 이집트의 호루스 탄생신화에
서 모티브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호루스의 어머니 이시스는 세트의 손길을 피해 광주리에 아
이를 담아 강에 떠내려 보낸다.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 신화는 너무 오래되어 언제부터 시
작된것인지 가늠조차 힘들다.
이렇게 실존인물과 신화가 뒤섞여 버린 사르곤의 전기는 인간인 왕이 신의 혜택을 입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동시에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수단 이었다.
사르곤은 그의 통치 영역을 넓혀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통치했으며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고,
남쪽 아라비아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원정했다고 까지 알려졌다. 그에 대해 쓰여진 전쟁의 왕
이라는 서사시는 수세기에 걸쳐서 유포되고 읽혀지고 복사되어 앗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남쪽 아라비아, 소아시아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바빌론 유수때, 또는 그 이전부터 떠돌아 다
닌 사르곤의 모티브를 유대인들이 모세에게 차용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G. Ernest Wrig
ht / Biblical Archaeology / P. 33~34]
로마의 건국신화인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 형제 이야기도 사르곤의 전기와 같
은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무녀인 레아 실비아(Rhea Silvia) 사이에
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태어나게 되었다. 마르스는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이 아이들을
바구니에 넣어 테베르 강으로 떠내려 보냈고, 늑대 한마리가 아이들을 발견해 젖을 먹여 키웠
다고 한다. 로마의 건국신화는 시기상으로 다소 늦게 등장했기에 사르곤이나 호루스 탄생신화
를 모티브로 삼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모세의 출생이 신화라는 근거는 또 있다. 그것은 이집트의 풍속을 완전히 모르는듯한 공주의
목욕에 언급이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청결 문제에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이집트의 왕족이나 귀
족들은 우물물이나 모래에 거른 물을 채운 개인 수영장에서 목욕을 했다. 왕족인 공주가 진흙
투성이의 나일강가에서 목욕을 했다는 점 부터가 이집트를 잘 모르는 후대의 유대인에 의해
기록 되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2장 10절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에서 유래되었다는 모
세의 이름에서도 의문점이 남는다. 히브리어에서 '모스케'에 가장 가까운 '마케'(mache)는 '끌
어내다'를 의미하는 '마카'(macha)라는 동사의 1인칭 과거 형태이다. 그러면 '모스케'는 '물에
서 끌어내어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 '물에서 다른 사람을 끌어 낸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
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이집트 공주가 어째서 노예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알고 히브리어로 이
름을 지어 주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 한가지 단서가 있다. 히브리어로 '모스케'
(Mosche)라고 불리는 모세의 이름이 고대 이집트어 였다는 설이다.
이집트의 문법형태에서 '메스'(mes) 혹은 '메수'(mesou)는 '아이'를 의미하며 이것은 수많은
이집트 이름들 속에서 발견 된다. 예를 들어 투트메스 혹은 투트모세(투트의 아이), 아메스(아
의아이), 라메스 혹은 람세스(라의아이), 아몬메스(아몬의 아이)등이 그러하다. 모세라는 이름
은 직접적인 혈연 관계를 지칭하던 이집트의 접두어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닐까?
또, 강변 갈대숲의 물위에 왕골로 엮은 요람을 발견한 이집트공주가 한번에 히브리 아이인 것
을 알았다는 것도 의구심이 생긴다. 물론, 할례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할례의 기원은 이집
트이며 당시 거의 모든 이집트 아이들도 할례를 받았다. 아피루인들(유대민족의 시조)이 이집
트에 노예로 있을당시 습득한 풍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혹자는 모세가 이집트공주와 아피루 노예사이에 태어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모세가 실존했는가 허구의 인물인가는 규정짓기 힘들지만, 아피루들의 대이동이 존재
하지 않았고 그와 비슷한 출생신화를 가진 더 오래된 사르곤왕의 출생신화로 미루어 볼 때 성
경속의 모세의 출생비화는 신화적이라고 밖에는 볼수가 없을 것이다.
▶ 구약의 율법과 함무라비 법전
구약은 바빌론 유수때 기록되고 경전화된 것으로 오경에 기록된 율법을 히브리어로는 토라(T
orah)라고 불리우고 있다.
"모세는 계속 위대한 입법자로 여겨졌으나 사실상 십계명은 모세가 태어나기 오래 전 인도와
근동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시행되었던 법률들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법률은 그보
다 700년 전 바빌로니아에서도 시행되었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의 유명한 법전에는
십계명이 빠짐없이 실려 있으며 이 법률들은 그 전에 이미 천 여 년 동안이나 존재했었던 인도
의 리그 베다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김원 / 오안네스/ 도서출판 와우 / P.161]
십계명은 일상 생활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와 도덕의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다. 모세의 이름으로 선포 되었던 대부분의 율법은 후대에 가서 성립된 것이고, 그 율법의 형
식은 다른 고대 오리엔트 제국의 법들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구약의 율법은 함무라비 법전(The Code of Hammurabi: CH)과 유사하다.
함무라비 법전은 1901년 겨울에서 다음 해 봄에 걸쳐서 프랑스 학술조사대에 의해 에람(이란)
의 고도 스사에서 발견 되었다. 이것은 높이 2.25미터, 하부의 둘레 약 1.9미터 크기의 흑색
섬록식 돌기둥이며,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이 정의의 신 샤마쉬에게서 법전을 받고 있는 장면
이 조각되어 있고, 그 하부에는 49란, 약 3000행에 걸쳐 쐐기꼴 글자 아카드어로 법전이 아름
답게 새겨져 있다. 쐐기꼴 글자는 각 행이 위에서 아래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샤마쉬
신의 도시 시파르(앗카드의 도시,함무라비의 거성)에 세워진 것을 BC 12세기경에 에람 왕 슈
트르크 나푼테가 바빌론을 침략했을 때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이다.(루브르 미술관 소장)
함무라비 법전은 1902년에 프랑스인 L.V.슈유에 의하여 번역 되었고 현존하는 최고의 성문 법
전으로 여겨져 왔으나 현재는 이보다 앞선 세가지 법전이 발견 되었다.
즉 리미피트 이쉬타르 법전(1947년 발견), 에나국 법전(1947 년), 우르 남 법전(1953년)등의
발견 및 해독에 의하여 세계 최고의 법전이라는 명칭은 빼앗겼으나, 어느것이나 후대의 사본
이며 단편이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함무라비 법전의 지위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법전의 시행 범위가 넓다는 것, 연구가 진보 되어 있다는 것, 동시대
의 법률 문서나 경제 문서가 많이 현존하여 그 시대 상황이 해명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후대에 영향이 컸다는 것 등으로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법제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가
돼 있다.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과 후대의 유대인의 율법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으며, 이것
은 바빌론 유수 당시에 유대민족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정의의 태양신 샤마쉬로부터 내려받았다는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왕의 만년, 즉 메소포타
미아의 통일 직후에 포고된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BC 22세기의 우르 남 법전, BC 19세기
의 이신 왕의 리미피트 법전, BC 18세기의 에나국 법전 및 제반판례등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편찬 성문화 시킨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앞서 등장한는 수메르 법보다도 더욱 조직적이며
도이치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1903~1914년에 앗시리아의 고도 앗슐에서 발견(1920년 공
표)된 BC 15~12세기 무렵의 후세의 앗시리아 법보다 더욱 잘 정리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긴 서문과 282조의 법문과 발문의 세 부분으로 돼 있으며, 전면 211란 중 약
5란이 결손되어 있다. 이것은 에람 왕 슈트르크 나픈테에 의하여 삭제된 것이지만 현재는 여
러 사본에 의하여 그 대부분이 복원되어 있다. 법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민법에 관한 부
분이며, 가족 관계의 법률은 특히 많아서 68조가 있고 법전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된다.
서문에는 신들에 의하여 온 땅의 지배권을 맡은 함무라비 왕이 "정의를 나라 안에 빛내고 강자
가 약자를 학대하지 않도록", "악한 자를 멸망시키기 위하여"이 법전을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
고 있다. 다음에 왕이 국토와 인민의 번영을 위해서 행한 여러가지 업적을 든 뒤에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법률과 정의를 나라말로 규정하고 이것을 포고했
다"고 기록하고 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유명한 복수율 또는 동해 보복법은, 출애
굽기 21장에 "상해가 생겼을 경우에,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
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나 레위기의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그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구절에 잘 반영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0장 22절에서 23장19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법규집은 24장 7절에 의하여 계약서라
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법규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21장 1절 에서
22장17절에 수록돼 있는 민법과 형법은 가나안법을 받아 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계약서의 법형식은 십계명과 같은 단정법과 결의법이 사용된 '...할때는', '만약...하면'하는 조
건에 따라 판결하는 양쪽이 섞여 있다.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민법과 형법(21장2절-22장17절),사회 윤리(22장21-27절,23장1-9절)
,종교적 제 규정(20장23-26절,22장18-20,28-31절,23장10-19절)으로 나뉘어 있다. 민법과
형법에 속하는 제 규정은 금세기 초에 발견된 BC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제2차 대전 후
에 발견된 다른 고전 오리엔트의 제법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계약서에 들어 있는 법의 사회적 배경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훨씬 소박하고 가나안 정착한 이
후의 농경 사회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계약서의 법규는 복잡한 사회 생활 문제를 모두 다루
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BC 30년대 말로 소급되는 법전 계열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아부짤라비크(Abu-Salabikh)에서 BC 2500년경의 점토판이 발굴 되었고, 아답(Adab)
에서 BC 2400년경의 점토판이 발굴 되었다. 이 점토판에 씌어진 내용을 슈루파크(Shuruppak)
의 가르침 이라고 부른다.
아부짤라비크에 발굴된 내용은 수메르의 슈루파크가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형식의 지혜문학서
양식으로 점토판 앞면과 뒷면에 180칸이 넘게 씌어진 작품이다. 수메르 왕 계보에 의하면 슈
루파크의 아들이 지우쑤드라이다.
함무라비 법전보다 오래된 수메르의 슈루파크의 가르침은 구약성경 십계명의 5~10조항의 원
형이 되었으며 "도둑질, 살인, 간음, 헛된 명세, 말다툼,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지어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증거 등을 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과 순서까지
출애굽기 21장 12절부터 23장 8절까지 기록된 율법과 같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법전은 우르 남 법전으로 BC 22세기경의 것이다. 이것은 350년후
에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의 모체가 되었다.
성경속의 홍수설화와 마찬가지로 모세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억지주장을 편다 하더라도
우르 남 법전과 함무라비 법전보다 오래될 수가 없다. 성경이 유대민족의 독창적이었다는 생
각은 이제 버려야 함이 옳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