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의 춤추는 수녀 '취포"
나는 몇 해 전 월요일 밤을 늘 기다리곤 했다
월요일 밤이면 한 티브이 프로그램이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족 리포트]
전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사는 우리 한국인들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인데 세계 각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삶을 위주로 지구촌에
흩어져 있는 코리언들의 열정과 사랑의 삶을 다룬 기획물이었다
필리핀 농촌마을의 이장님과 부녀회장의 이야기..
마다가스카르섬의 상록수라는 이름의 네 명의 수녀 이야기
칠레의 의사.. , 캐나다 이민자들의 수호천사
이집트 빈민가의 기적을 이룬 사람.. 등등
농촌재활운동, 의료봉사, 선교봉사 등등 갖가지 삶의 형태들이 월요일
밤이면 날 티브이 앞으로 끌어 들여 한번씩 내 코를 시큰하게 만들어
주는 까닭에 난 늘 월요일 밤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정말 커다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 제목은 이랬다..
- 짐바브웨의 춤추는 수녀님 -
짐 바브웨는 1500만 국민 중에 4 만 명만이 백인인데 그들이 경제의 80% 이상을
장악한 관계로 원주민들은 극빈에 시달리는 나라이다.
인구의 75%(2001년 11월 현황)가 실업자일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불안정한 나라로.
국민 세 명 중 한 명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으며,
최근 들어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헌데 희한한 것은 그런 곳에 수녀가 갔으면 선교와 물질구호 등의 봉사활동을 해야 하련만
그녀는 '춤봉사'를 한다고 한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의 얄팍한 뇌는 티브이를
시청하면서 깨어나고 있었다.
어설픈 고정관념으로부터..
짐바브웨에서 춤추는 수녀의 이름은 '이정미'라고 했다.
그녀가 가 많은 사람들이 행하듯 빵을 나누지 않고 춤을 추게 된 것은
자신이 지닌 재산이 빵이 아니라 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대학에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전공한 춤꾼이었다.
그가 일반 대중 무대에 서서 자신의 솜씨를 뽐내는 삶을 거리에서 가난한
이들과 춤을 나누게 된 이력 속에는 부산의 한 빈민지역에서 만난 소녀아이
와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수녀가 되기 전, 그는 도시빈민선교회에 소속되어 부산시 청학동에 있는
해돋이 공부방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그 때
공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한 여자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늘 자신에겐
아무런 꿈이 없다라고 하였다. 평생 가난하게 사는 자신의 부모처럼
자신도 그런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공주가 이정미 수녀와
함께 생활하며 제법 춤을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공주는 이정미 수녀의 손을 잡더니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나도 언젠가는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칠 거예요."
이정미 수녀는 지금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작은 손을 통해
수녀에게 전해져 오던 것은 공주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 뒤 그는 수녀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1996년에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수많은 수녀회 중에서 그가 유독 그 곳을 선택한 까닭은 모든 인종, 문화, 종교
그리고 그들의 생존방식을 존중하며 진보적으로 활동하는 메리놀수녀회의
취지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그녀는 필리핀에서 2년 동안 어학연수와 봉사활동을 한 뒤
미국으로 가 메리놀 수녀회에 입회한 뒤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가 수녀가 되면서 춤을 출 수 있을 거라고는 꿈도 못 꾸었어요.
아니, 오히려 춤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헌데 진취적인 메리놀 선교회에서 그녀는 다시 춤을 추게 되었다
예전 보다 더욱 아름다운 춤을 추게 된 것이다..
작은 모임에서부터 시작하여 미사 때마저도 그는 춤을 추게 되었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주변 수녀님들의 도움으로 뉴욕 다운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7개의 나라중에 '짐바브웨'를 택해서 날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춤을 가르쳐
현실의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 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발레 등을 배워 현실벌이에
동참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처음 이것을 누가 들으면 절대 이해가 안 간다고 할 것이다. 너무 가난한
그들에게는 지금 당장 빵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헌데 얼핏 이해가 안가는 이 행위가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선교라고 하면
먼저 빵을 떠올리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짐바브웨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처음 그녀의 춤에 시큰둥했던 짐바브웨 사람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그녀와 함께 춤추면서 새로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와 춤을 추는 가운데 일상 삶의 수고로움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만났고,
함께 어우러지는 행복을 느꼈으며 춤 속에서 미래를 보면서 즐거워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춤과 노래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요. 춤을 추던
제가 춤에 익숙한 그 곳 사람들과 어울려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그는 '댄스 아웃리치 프로그램(National Ballet of Zimbabwe 산하)'의 책임자로서
빈민지역과 학교를 순회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수녀가 성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춤을 무기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춤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불과 2년여의 짧은
시간 속에.. 춤의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리고 티브이를 보다가는 그냥 잘 넘어 가나 했더니 기필코 내
콧등을 시큰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춤을 배우는 한 아이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새 엄마는 모두 에이즈로 사망하였고
할머니만이 세 아이랑 달랑 남아 손바닥만한 땅의 옥수수 농사로 연명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절망의 아이에게 춤과의 만남이 삶의 새로운
기쁨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
장애아들의 춤 놀이를 보다가는 기어이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난 예전에 청각장애아들과의 만남으로 그애들의 손으로 부르는 노래와
시각 장애아들의 악기 연주 등도 몇 번 관람한 기억이 있었지만 신체
장애아들의 춤사위에 대해서는 정말 생소했다..
다리 하나가 없는 아이, 두다리가 없는 아이, 한 팔이 없이 태어난 기형 장애아들...
짐바브웨는 장애아를 낳으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그냥
갖다 버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아이들은 전부 고아인 셈이다..
헌데 그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뒹굴고 있었다.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며 ..
원, 투, 쓰리, 포.(그곳의 주요 공용어는 영어이다) 수녀의 구령에 맞춰 나름
대로의 최고의 몸짓으로 환상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진실로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다간 그만 또 눈물 한 방울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 아이들은 그녀가 수녀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이정미 수녀가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말한 적도, 굳이 선교를 하려고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메리놀 수녀회는 그곳의 환경 문화 생활습관을 그대로
인정하는 가운데 봉사함을 기본원칙으로 하기에 수녀복도 따로이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누구인지도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곳 사람들과 아이들은 그녀를 그냥 "취포"라고 부를 뿐이다..
취포란 그곳 말로 '신이 내린 선물 '이란 뜻이다..
그래, 이정미수녀는 거기서 신을 억지로 들이대 가리키는 사람도
아니고 빵만 놓고 가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아무런 격이 없이 함께 나눔으로
현실의 힘들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게하고 웃음을 잃은 장애아들에게
웃음을 주고, 놀이가 없어 일찍 성에 몰입해 에이즈 및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휴식과 놀잇감을 준 낯선 나라에서 온 천사 같은 사람
그랬다. 그녀는 분명 신의 선물 "취포"였다...
안데스의 미사중 '소망의 빵'
Anne Marte Silnning & Skruk
이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나의 보잘 것 없는 고정관념이
형편없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겼다..
그동안 쉽게 사랑이 제일 필요한 것이라고 외치며 입에 달고 다녔건만 막상..
내 앞에 펼쳐진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춤도 좋지만 먹을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부끄럼을 범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가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취포'가 된 것은 결코 그녀의 춤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춤이든 무엇이든 그녀는 그곳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뿌려댓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번은 그곳 몇 가족들과 공원에서 만나 친목을 즐기기로 하였다..
허나 약속 된 가족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잠을 줄여 음식을
준비했던 그녀의 머리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한 가
족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들은 장소를 잘 못 알아 다른 곳에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음식과 휴식을 배풀고 싶었던
그녀는 조촐하게 한 가족과의 나눔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 곳에 온 후로 늘상 겪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도 '취포'는 웃고 있었다..
짐바브웨의 춤추는 수녀 - 취포의 이야기
그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시작 되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을 모아 놓은 가운데 그녀는 옥색 한복을 곱게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곤 사람들 앞에서 서서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국적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손은, 그녀의 허리는
그녀의 발은 우리의 가락과 우리의 몸짓을 밟아 내고 있었다..
서서이..
그렇게. 취포의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의 춤을 그네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마감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취포 의 춤
줄 것이 없다하고 더가진 후 나눈다고
이런저런 생각많아 온갖 핑계 많을 때에
취포는 홀홀단신 오지의 땅 날아가선
시름, 번뇌 다던지고 휘영휘영 춤춘다네
허식 치레 다 벗고서 너울너울 춤춘다네...
- 산수재 혜랑 -
베품이란 진정 어떤것일까요?
사람들은 베품이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고민하고 망설일 적에...
한 여인은 몸뚱아리 하나 들고 거침없이 날아가서 함께 놀고 춤추면서
선물하나 받았으니
- 신이 내린 선물 '취포'가 되었습니다..
산수재 가는 길에 혜랑 이었습니다..
그대 어느 곳에 계시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