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대리민주주의 정치 투표 선거 불참자 거부권 시민권 후보 영구퇴출 실수 허수
☞ 한국 소확행 대막행 거막행 자본교 자본류 자본주의 욕망생산 학부모 자식 학생 교육 갑질(돈질+벼슬질) 공교육 사교육 대리만족 심리
현대 세계에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채택되는 이른바 “민주정치”는 서기전5세기말엽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고 널리 인식된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민주정치는, 정확하게 말되면, 의회제도(議會制度)와 선거제도(選擧制度)를 양대추축(兩大樞軸)으로 삼는 대리민주정치(代理民主政治) 또는 그럴싸한 이른바 대의민주정치(代議民主政治)이다. 심지어 직접민주정치(直接民主政治)였다고 기록된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여자들, 노예들, 외국인들, 토지를 사유하지 못한 성년남자들, 20세미만 남자들을 제외한 오직 성년남성시민권자(成年男性市民權者; 이른바 자유민自由民)들에게만 정치의결참여(政治議決參與)를 허가했으므로 사실상 대리민주정치였다고 단언될 수 있다.
이런 대리민주정치는 명목상 ‘다수의 참정권자(參政權者)들이 자신들의 정치의결권(政治議決權)을 위임할, 위임하고픈, 위임해야 할, 소수의 대리정치인(代理政治人; 대리정치꾼)들을 선거-투표하여 선출하고 각급 의회에 진출시켜 정치의결들을 대행시키는 정치’이다. 그러나 대리민주정치는 실질적으로 ‘참정권자들의 이른바 “민의(民意), 민심(民心), 여론(輿論)” 따위로 통칭되거나 장-장크 루소가 가정한 “일반의지(一般意志)” 따위로 별칭되는 정치의사(政治意思)를 대표한다고 자처하거나 공인되는 소수의 대리정치인(대리정치업자)들이 보유한 정치권력(政治權力)을 다수의 참정권자들에게 행사하는 정치’일 확률이 다분하다.
그런데 이른바 공화정치(共和政治)로도 별칭되는 대리민주정치는 여태껏 군주정치(왕정王政)나 황제정치(제정帝政)나 독재정치와 대비되었다. 하지만 그런 대리민주공화정치(代理民主共和政治)도 언제나 ‘소수의 대리정치인들로 구성되는 의회(입법부)뿐 아니라 또 다른 소수의 대리정치집단들인 행정부와 사법부를 대표하고 통솔하는 대통령이나 총리나 수상(首相) 같은 최종대리정치인(最終代理政治人) 내지 최고대리정치인(最高代理政治人)이 참정권자들의 직접선거나 대리정치인들의 간접선거로써 선출되거나 선임되어 국정과 최고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전담하는 정치’이다.
그러므로 대리민주공화정치도 비록 군주정치나 황제정치나 독재정치와 겉보기로는 상당히 달라보일지언정 정치적 의결과 집행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지도자(政治指導者)를 중시해온 인간정치역사의 맥락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공화주의, 의회제도, 선거제도를 아무리 강조하고 침튀켜 표방하는 대리민주공화정치도 결국 ‘참정권자들이 스스로 보유했다고 믿는 정치적 책임과 권력을 위임할, 위임하고픈, 위임해야 할, 정치지도자를 선출하거나 선임하여 모든 정치적 기대와 희망을 깡그리 그에게 걸어두고, 그가 자신들의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켜주면 그를 찬양하거나 숭배하되 그리하지 못하면 그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정치, 즉 지도자중심정치(指導者中心政治)’의 일종에 불과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대리민주공화정치의 정치지도자는 참정권자들의 정치의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군왕도 황제도 독재자도 민심이나 여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이(差異)는 대리민주공화정치가 왕정이나 제정이나 독재정치보다 민심이나 여론을 더 많이 더 자주 고려하고 반영한다는 데 있는 듯이 보일 따름이다.
물론 이렇게 상승한 민의반영비율(民意反影比率)이나 여론반영빈도(輿論反影頻度)는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결과들일 것이다. 그러나 왕정에서나 제정에서나 독재정치에서도 그랬듯이 현대의 대리민주공화정치에서도 최고정치지도자의 정치적 역할과 정치권력뿐 아니라 그에게 깡그리 걸리는 참정권자들의 기대와 희망도 별로 줄어들지 않는 듯이 보인다. 요컨대, 참정권자들과 정치지도자의 관계가 겉보기로는 많이 변한 듯이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민주적인 혁명이나 개혁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진행되었어도 반드시 지도자가 선출되거나 선임되어 정치를 주도하는 현상만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여태껏 혁명참여자들이나 개혁참여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참정권자는 바로 그렇듯 모든 기대와 희망을 깡그리 받는 지도자에게 자신들의 책임과 권력마저 선거-투표로써 위임했다고 믿으며, 자신하며, 확신하며 그를 찬양하거나 숭배하든지 아니면 비판하거나 비난했다.
더구나 의회제도와 함께 대리민주공화정치를 대변하는 선거제도는 여태껏 이른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회자되곤 했다. 그러나 선거제도는 여태껏 사실상 다수파의 정치적 승리나 우세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은 다수파의 지지를 받은 정당에나 개인에게 헌납되었을 따름이다. 그런 한편에서 흔히 선거결과보다도 선거과정이 중요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과정민주주의자(過程民主主義者)들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과정은 결국 다수결(多數決)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선거는 다수파의 승리나 우세를 확인하고 추인하는 정치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리민주공화정치의 불가결한 민주선거제도 자체가 바로 전체주의와 파시즘(fascism)의 씨앗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것이 언제나 다수파의 우세나 승리를 확인하는 정치제도적 절차라면 비록 선거-투표가 아무리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러지더라도 전체주의나 파시즘을 초래할 가능성을 완벽하게 일축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는, 다수결을 확인하려는 선거제도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성향을 내재한다고 정평될 수 있다.
이렇듯 대리민주공화정치는 현대세계에서 최악의 정치는 아니되 이른바 ‘가장 나쁘지 않은 정치’라고 씁쓸하게 공인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정녕 보유했는지 의심스러운) 정치적 책임과 권한을 소수의 대리정치인들과 최고정치지도자에게 위임해버리는 (더 정확하게는, 위임했다고 믿어버리는) 참정권자-피치자들의 대리정치, 자신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을 깡그리 지도자에게 걸어버리는 참정권자-피치자들의 지도자숭배정치, 잠재적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변질될 수 있는 성질을 내포한 정치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정치역사의 맥락은 여전히 이런 정치를 그나마 가장 나쁘지 않은 정치로 보이도록 윤색하는지도 모른다.
특히 두 가지 불가피한 여건이 이런 맥락을 규정해왔다. 하나는 인구, 영토, 기후조건, 천연자원 따위들을 포함하는 물리적 여건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습속, 종교, 통념이나 고정관념, 관습이나 집단무의식, 군중심리 따위들을 포함하는 인간의 심리적 여건이다. 물리적 여건은 대리정치(공화정치)와 지도자중심정치에 타당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 여건은 지도자중심정치를 지속시키고 잠재적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가능성을 잔존시킨다. 이런 여건들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도 여전한 위력을 발휘한다. 정치가 국가단위로 실행되고 왕정이나 제정이나 독재정치를 거부하는 한에서, 정치는 반드시 공화정치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이토록 거의 불가피한 물리적-심리적 여건들에 얽매여 공화정치를 채택할 수밖에 없고 또 그리한다.
전체주의나 파시즘은 이런 공화정치의 암면(暗面)을 가장 선명하게 예시하는 만큼이나 이른바 ‘민심, 여론, 표심 따위’로 통칭되는 참정권자들의 심리적 여건마저 가장 선명하게 예시한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런 심리적 여건은 바로 최고지도자를 찬양·숭배해버릇하는 피치자(被治者)들의 심리습성(psychological habit)이다.
이런 심리습성은 적절한 물리적 여건과 맞물리면 대리민주공화정치를 전체주의정치나 파시즘정치나 독재정치로 변질시키거나 복원하거나 복고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한국 시인 김수영이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다고 〈푸른 하늘을〉이라는 시(詩)에 썼듯이, 지난날 독재와 압제를 벗어나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를 실현하려고 피흘리며 혁명하고 정치를 개혁했다고 자부한 참정권자들-피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물리적-심리적 여건도 그들을 변질시키거나 복고시켜버린다. 이제 그들은 피흘리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직선(直選)한” (혹은 직접 선출했다고-직선했다고 믿어마지 않는) 최고지도자를 예찬하든 비난하든, 하여간, 그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깡그리 걸어버리는 심리습성을 탈피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왕정에서도 제정에서도 독재정치에서도 대리민주공화정치에서도 불변하는 강력한 심리습성이라고 정평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작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한계들에 단순히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자율적 존재가 확실한데도, 자신이 지독하게 혐오하던 과거로 그토록 쉽사리 복고해버리는 인간의 몰골은 정녕 황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세계에는 이렇듯 복고하려는 인간심리습성이 여전히 강력하게 잔존한다. 인간의 이런 복고심리습성은 물론 과거에도 강력하게 작동했고 현재에도 그렇게 작동하며 미래에도 그렇게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혁명자와 개혁자는 자신들이 주도한 혁명과 개혁의 수명(壽命)과 진정한 수혜자(受惠者)를 정확하게 가늠해보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참정권자들이라고 믿기거나 자처하거나 자신하는 피치자들은, 비록 기껏해야 딸랑 1표밖에 던지지 못하는 대리민주정치용 선거-투표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참여할 수 있거나, 참여하고프거나, 참여해야 하거나, 하여튼, 자신들의 정치의결권을 행사할 기회를 잡으면 자신들이 정녕 바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고민해봐야 하리라.
(2016.01.20.)
아래왼쪽그림은 잉글랜드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대표저서 《리바여선(Leviathan); 레비아탄; 리바이어던(ㅋ)》(1651)의 표지화로 사용된 프랑스 화가 아브람 보스(Abraham Bosse, 1604~1676)의 판화 〈레비아탕(Leviathan)〉이고, 아래오른쪽그림은 미국에서 미상작가가 1915년경에 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삽화용 판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