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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 비참함
-로마서 7장-
본 장은 오해가 많은 장이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바울이 왜 6장에서 승리를 다룬 후에 7장의 패배로 이동해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 연구자들이 많다 ! 그들은 6장의 승리로부터 8장의 큰 축복들로 건너 뛰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저자는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7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생생한 문제거리를 다루고 있는데, 곧 신자들이 갖는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6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임을 설명한다. 로마서 7장은 “우리가 계속 죄에 거하겠느뇨?“(6:1)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런데 바울은 6장 15절에서 두번째 질문을 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해서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7장에서 이 질문에 답하여,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율법에 대하여도 죽은 것임을 설명한다(7:4).
바울이 6장 4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에서 워치만 니 (Watchman Nee)는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며,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인가를 하신다는 뜻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규칙들과 규율과 훌륭한 결단들“로 말미암아 짐스러워 하며, 율법적인 거룩함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율법 아래“ 있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갖는 새로운 위치와 성령 안에서 갖는 새로운 능력(8:3-4)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는 승리와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 바울은 일련의 “이중주“를 우리에게 들려 줌으로써 7장에서 이를 설명한다.
1. 두 남편(7:1-6)
우리가 율법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결혼관계를 사용한다. 바울이 “법“이라고 말할 때 이는 모세의 구약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죄를 억제하거나 거룩함을 얻으려고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법률을 말한다.
두 남편이란 율법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인이 결혼하고 나면 남편이 죽기까지는 그에게 매여 있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다시 결혼해도 되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율법에 묶여져 있었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 우리는 더이상 율법의 체계와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으며, 율법은 더이상 우리를 조절할 수 없다.
7장 4절을 거듭해서 읽고 그 놀라운 멧세지에 집중하라. 그 남편이 우리를 조절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놀라운 새로운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였을 때, 율법은 우리의 옛 본성에 “죄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죽음을 산출하게 되었다(5절).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구원을 받으며, 옛 문서(“의문의 묵은 것“)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안에서 섬기고 있다.
6절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는 이제 더 커졌다. 신약의 요구들은 구약 율법보다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신약은 산상 수훈의 예만 보더라도 외적인 행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가짐을 다루기 때문이다.
6절은 우리의 순종의 동기가 달라졌음을 가르친다. 우리는 일단의 규율에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 사랑으로,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이다(8:4). 초보적인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를 완전하게 연주할 수는 있으나, 숙달된 음악가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노래의 내적인 정신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노예가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과 다르다. 그와는 달리 신부가 사랑으로 신랑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2. 두가지 발견(7:7-14)
그렇다면 왜 거룩함을 산출하지 못할 율법을 주어 괴롭히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 심중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일까? 바울은 이 질문에 답이 될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곧, 율법 자체는 영적이다. 그러나, 신자는 육적이며 죄 아래 팔렸다는 사실이다. 교만한 바리새인에 비해 얼마나 겸손한 발견인가 ! 바리새인들의 본성은 영적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다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7절). 우리가 율법을 읽을 때 율법이 저주하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 율법은 죄에 동력을 제공하며(8절), 죄의 동기들은 우리의 본성을 선동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을 죽이며 죄인을 속인다(9-11절).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순종하는 데에 얼마나 미약한가를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죄의 죄됨을 드러내며(13절) 밖으로 나타난 행동만이 아니라 안에 있는 육적인 마음가짐의 죄악성도 역시 나타낸다.
신자가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법으로 말미암아 조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옛 본성은 규율을 알지 못하나, 새로운 본성은 규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이겠는가 !"
3. 두 가지 원리들(7:15-25)
율법과 더불어 패배의 경험을 한 후에 바울은 신자의 생활에 작용하는 두 가지 원리 또는 “법“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두 가지는 첫째, 죄와 사망의 법,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8:2 참조)이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자녀들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성에 대한 사실들을 다룬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 옛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정결케 하시는 것, 또는 개혁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의 옛 성품은 그가 구원받던 날과 마찬가지로 사악하며 영을 거스린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시며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를 지을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제는 거룩함을 위한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죄를 향한 동력은 아직도 있으나, 욕구는 없다.
1)죄와 사망의 법-이는 다시 말해서 옛 본성이 작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선을 행하기를 원할 때에도 악이 공존한다. 우리가 육신의 힘으로 행하는 일은 “선한 일“이라 해도 악에 물들어 있다(21절 참조). 여기서 6장의 승리와 7장의 승리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6장에서는 신자가 육신의 악한 일들을 극복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7장에서는 육신이 율법에 순종하여 행하려는 “선한 일들“을 극복하여 승리한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육은 무익하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법을 정해 놓고는 거기에 순종하도록 육을 훈련시키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육신의 생각(옛 성품)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며 사실상 순종할 수도 없다“(8:7).
2)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법에 의해 좌절당한다. 우리가 거룩함에서 성장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섬기는 것은 외적인 법에 순종함으로써가 아니다. 이 법, 또는 원리는 8장에서, 특히 처음 17절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가 없다. 성령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신다(8:3-4).
이 모든 문제들은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지위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 마땅히 순종해야 할 어떤 “그리스도인의 법“이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아래 속박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성취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6장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더이상 육신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보다 더한 일, 하나님께 열매를 생산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할 수 있다 !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하려고 시작하는 순간, 그는 실패자라는 사실들 발견할 것이다.
말하기는 유감스럽지만,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까지 와서 멈추고 영적인 재난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오히려 로마서 7장의 진리, 곧 그는 실패자이며, 율법은 선하지만 자신은 육신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자기의 생애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축복된 자유(7장)를 누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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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로마서 8장-
본 장은 성화에 대해 다룬 부분의 절정을 이루며(6-8장), 또한 율법과 육신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질문들에 답한다. 본 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이 지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정복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게되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본 장을 세 구절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죄함이 없음-성령과 율법(8:1-4)
이 구절들은 7장에서 나오는 논쟁의 결론을 이루고 있다. 바울이 7장에서 구원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그는 신자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으신가?
대체로 하나님은 모든 생각과 행위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 여기서 “정죄“라는 단어는 지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5장에서부터 제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며, 그리고 우리가 아직 “육신에 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어 있으므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행하게 하실 수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에 대처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본성의 능력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은 참으로 영광된 날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영광된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가 !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빚이 없음-성령과 육신(8:5-17)
신자는 두 가지 “뜻“(마음)을 품을 수 없다. 그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육신의(육체에 속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반목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면서 성령에 속한 일들을 사모할 수 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대해 아무런 빚이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8:12). 우리의 빚, 우리의 채무는 성령께 대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구원하는 믿음을 부여하고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을 심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에서 매일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는 성령께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령은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시며 우리 안에 사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참으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근심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인치심에 따라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영원한 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축복들의 보증이 되신다(고후 1:22). 성령이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령은 15절에서 “양자의 영“이라고 불리워진다. 육신대로 사는 것, 또는 율법 아래 사는 것(자신을 법 아래 두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다)은 속박 아래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만,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된 자유의 생활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신자에게 있어서 자유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장 나쁜 노예 생활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자유는 율법과 육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신약에서 “양자“는 고아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오늘날의 양자와는 그 뜻이 같지 않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아들의 지위“인데, 가족이거나 외부에서 손아랫 사람을 취하여 정당한 상속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는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이고 양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속자이므로 그는 우리가 영광 가운데서 그의 유산을 받기까지는 유업을 받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신자는 육신(“fersh“/ 신체의 의미가 아님)에 대해 만족케 하거나 제멋대로 하게 두거나, 육에 순종할 빚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행위를 “죽음에 넘겨 주어야 하며“(억제하다- 8:13/골 3:9-),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지도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3. 끊어짐(분리)이 없다-성령과 고난(8:18-33)
신자가 비록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실상, 세상 만물(19-21절에서는 “피조물“)은 아담이 불순종한 탓으로 인하여 죄의 속박 아래 탄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사단을 정복하실 때에, 그는 전 피조 세계를 그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모든 자연이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감격적인 구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다(5장). 우리는 죄에 대하여(6장),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7장) 죽었기 때문에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다. 어느 날 우리는 자연이 그 무서운 속박에서 구조될 때 죄라는 그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으나 양자될 것, 즉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영은 구원을 받았으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가운데 기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앞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일의 첫열매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구속의 날에(엡 1:13-14) 우리를 인치신 성령은 우리의 몸을 생명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다(8:11).
22-26절에 나오는 세 가지 “탄식“을 살펴보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22절),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탄식한다(23절),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중재하시면서 탄식하신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셨을 때에 친히 탄식하셨음을 눈여겨보자. 피조물의 괴로운 속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부담스러우시겠는가 ! 그리스도는 우리들뿐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값을 치르셨던가 !
바울은 우리가 소망 중에 이러한 고난을 견디어 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기도하는 특전이 있다고 지적한다. 길고, 아름답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신앙심이 깊은“ 기도들이 너무도 많다. 바울은 가장 영적인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 없는 탄식임을 시사한다.
어떤 번역은 26절을 “말로 몹시 깊이 탄식한다“고 번역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8:29).
우리는 8장 29절의 목적을 인하여 8장 28절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8장30절에 나오는 모든 동사들이 과거시제로 사용된 것에 유의하자. “신자는 부름을 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영광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영광을 받았는데 왜 이 세상의 고난 아래 무기력한가? 할렐루야! 놀라운 구주이시다!
바울은 32-35절에서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며 이에 대해 명백하게 답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대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증거는 많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의 가장 좋은 것을 주셨으며 그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라도 거저 주실 것이다.
누가 우리를 죄 때문에 고발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우리는 의로워졌고 이 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정죄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오른 편에서 우리의 변호사로서 살아 계신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없다. 마귀자신(38절에 나오는 “권세자들과 능력“)도 할 수 없다.
정죄가 없고, 빚이 없고, 끊어짐도 없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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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선택
-로마서 9장-
다음의 세 장은 이스라엘의 과거(9장), 현재(10장), 미래(11장)에 대한 영적인 역사를 다룬다. 바울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선택한 백성을 제쳐두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무엇이고,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은 이 민족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다.
1.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설명(9:1-13)
1)선택으로 인한 축복들(1-5절)-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진실한 부담감을 칭찬할 수 밖에는 없다. 그의 말은 출애굽기 32장 31-32절의 모세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양자-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해 선택됨(사 43:20-21).
-영광-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출 24:16-17).
-언약-아브라함과, 전 민족과,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언약.
-율법의 수여-하나님은 이방인을 다루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들의 생활을 다스릴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
-하나님을 섬김-성막에서의 제사장 직분.
-약속들-구약의 수 많은 약속들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취될 것이다.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
-메시야-그리스도는 유다지파에 속한 유대인이셨으며, 율법에 따라 출생하셨다.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축복하셨다“ 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다른 어떤 나라도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축복들을 일축해 버렸으며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 중에 속해 있으므로 그와 유사한 축복들을 누린다. 곧, 양자(엡 1:5), 영광(엡 1:6-7),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마음에 기록된 율법(히 10:16-17),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장 직분(벧전 1:4), 그리고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 등의 축복들로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선택의 기초(6-13절)-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절대 주권을 행사하셨다. 로마서 9-11장에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민족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음을 유의하자. 이 장들에 나오는 진리들을 구원에 적용시키거나 또는 신자 개인의 안전성에 적용한다면, 그 전하는 멧세지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실제로, 바울은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족적으로 논하는 것이지 각각의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아브라함-그는 히브리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유대 백성이 이스라엘의 참된 아들은 아니라는 점을 서술한다(2:25-29 참조). 아브라함은 자녀들이 많았으나 선택된 아들은 이삭 한 사람뿐이었고, 이삭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다.
-이삭-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던(갈 4:21-31) 반면에, 이스마엘은 행위를 통한 육신의 아이였다. 참된 “아브라함의 씨“는 신자들이며, 혈관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 “아브라함의 씨“는 아니다.
-야곱-하나님은 장자인 에서를 지나치셔서 야곱을 택하셨다. 이것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 왜 그랬을까?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민족적인 목적이 성취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 반역할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목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둘 다 진리라는 점이며, 말씀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이스라엘이 선택됨에 대한 변호(9:14-33)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선택의 교리가 몇 가지 의문을 일으킨다.
1)하나님은 불의하신가?(14-18절)-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선택은 의로움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사람은 버리신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하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공정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면 그는 우리 모두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세(출 33:19)와 바로(출 9:16)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그의 원하시는 대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고 다른민족은 지나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도 전혀 없다.
2)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왜 잘못을 찾아내시는가?(19-29절)-바울은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응답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레미야 18장 1-6절에서 빌려 왔을 것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민족들과 그 지도자들은 그릇들이다. 어떤 그릇들이 파괴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내로 참으시는 진노의 그릇들인가 하면(창 15:16), 다른 그릇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비의 그릇들이다. 이러한 자비의 그릇들은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24절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를 뜻함).
다음으로 바울은 호세아 2장 23절과 1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 중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울 한 백성을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 백성이란 교회를 말한다(벧전 2:9-10 참조).
바울은 이사야 10장 22-23절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밝힌다(사 1:9). 다른 말로 하면,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3)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30-33절)-여기에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올바른 역사의 역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유대인들이 가졌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영접을 받았다 !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하였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사 8:14/사 28:16/마 21:42/고전 1:23/벧전 2:6-8). 이들은 그 민족에게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올 메시야를 원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스가랴서에 대한 본 서의 설명을 참조하라.
본 장에서 바울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위치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었고, 다른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이 민족은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데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본 장은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를 높이고 있으며, 이 주제는 오늘날 인간의 의지와 자기 공로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인간의 불순종에도 관계없이 잘 이루어져 나갈것이며, 불순종하는 사람은 축복을 잃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측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11:33-36 참조).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특별 연구
1)9장 13절-“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귀절은 말라기 1장 2-3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들을 가리킨다. “에서“는 에돔을, “야곱“은 유대인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신 것을 예증하기 위한 강압적인 방법일 뿐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빛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다른 이들은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2)9장 18절-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심에는 이중의 과정이 있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셨고 바로는 이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 얼음을 녹이는 바로 그 동일한 태양이 진흙을 굳게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구절을 읽고 바로가 그의 마음을 굳게 한 것과(출 8:15), 하나님이 또한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셨음을(9:12) 눈여겨보자.
3)9장 28절-마지막 적용은 환란의 “단축“에 관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고, 수가 감소될 것이며, 남은 자들은 참된 신자들 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