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된다는 건
2023년 5월 7일 / 막 10:13-16
1. 어떤 아버지
제가 경동교회에서 교회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던 시절의 기억입니다. 어린이부에 독특한 학부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그분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지금은 꽤 유명해지셨더군요. 대학교 교수였는데 정말 특이했습니다. 아내도 교회에 출석하고, 아들과 딸 두 아이도 교회에 출석하는데 이분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주일마다 교회 문 앞까지 왔다 가는 겁니다. 아마도 교회나 담임목사님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자신은 기독교 신앙을 믿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교회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일 아침이면 반드시 교회학교에 아이들을 태워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본인은 인근 공원에 가서 기다리다가 교회학교 마치는 시간이면 와서 데려가곤 하였습니다. 참 특이하지요. 정말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아이들이 그 어린 시기에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그 시기에 신앙적으로 필요한 양분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그 아버지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신은 예배드리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교회학교에 태워다 주고 데리고 가고 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아이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2. 마가복음 10:13-16
(1) 어린이를 반기신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특이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여자들과 관련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가 아이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만, 우리의 시계를 2,000년 전으로 돌려놓고 보면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 시대에는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여자를 ‘짐승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존재’로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하물며 아이들은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하나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완전한 인격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인원수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오늘 본문 막 10:14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노하셔서’
성경에서 예수님의 감정을 묘사하는 가운데, ‘노하셨다.’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노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이 예수께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애들을 예수께 데려 오려고 했는데, 제자들은 그런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사람들은 훌륭한 랍비에게 자기 아이들이 안수 받기를,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만, 제자들은 아이들을 막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바쁜 스케줄과 효율적인 사역을 위하여 이렇듯 무질서하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제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여러분! 특별히 부모여러분! 어떤 형태로든, 어떠한 이유로든 아이들이 주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는 건, 주님의 분노를 사는 일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우리 주님의 분노를 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3. 부모가 된다는 건
(1) 너희에게 속하지 않는다.
지난 주간 어린이날 교회 단톡방에 묵상자료로 올렸었지요. 자녀에 대해 노래한 칼릴 지브란의 시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저들은 너희를 거쳐 왔으나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저들은 너희와 함께 있으나 너희에게 속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를 거쳐 왔으나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있으나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우리 몸을 거쳐 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쳐 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이러한 신앙이 없지요. 그래서 분별할 줄 모릅니다. 자기 속에서 나왔으니 자기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자녀들도 데리고 가는 모자란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온갖 좋은 것으로 다 갖추어 주어도 그 자녀는 잘 못 될 수 있습니다. 복이 없어서 조실부모한 자녀라 해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키우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키우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수와 하수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모자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식을 키운다고 생각합니다.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식 키워본 분들은 다 아시지요. 자식이 부모 맘대로 큽디까? 아니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수가 높은 분들은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수들은 자식을 끼고 돕니다. 그러나 수가 높은 분들은 자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법륜 스님이 고등학생 시절 절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그 절의 스님을 찾아왔다지요. 애가 고등학교나 마치거든 데려가든지 하지 고등학생을 출가시키면 되겠느냐며 따지자, 그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얘가 일찍 죽을 상이다.” 그러니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어머니가 바로 단념하고 이랬답니다. “아이고 마, 스님 아들 삼으세요.” 법륜이 그 어머니 치마폭을 떠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름 일가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내 손안에, 내 품안에 두어야 잘 양육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자라나야 합니다. 내 자녀로 자라나면, 죄송하지만 이 타령밖에 안 됩니다.
“저들은 너희와 함께 있으나 너희에게 속하지 않는다.” 지혜자의 충고를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2) 무엇을 줄까?
어린이주일입니다. 과연 부모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거쳐 왔지만 우리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닌 이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가장 귀한 인생의 진리인 하나님 신앙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을 만들 수는 없지만 나의 신앙을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아이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일까요? 먹을 것이 모자랍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아이들이 비만이 되어 걱정이지요. 입을 것이 모자랍니까? 아니지요. 너무 좋은 옷, 비싼 옷을 입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공부가 모자랍니까? 아니지요. 너무 많이 공부시켜서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놀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많이 공부를 시키니 똑똑하긴 한데 뭔가 부족한 것이 있지요. 뭐가 부족합니까? 영성(靈性, Spirituality), 영적인, 신앙적인 품성이 부족합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지요. 지적으로만 살이 찌고, 영적으로는 메말랐단 말입니다. 흡사 비유해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이 머리는 커지고, 마음은 텅 비었단 말입니다. 극심한 영양결핍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마음이 커지는 영적인 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영을 살찌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신앙의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이 왕따 당하는 친구 곁에 서서 그 불쌍한 친구의 친구가 되어줄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절대 절명의 가르침으로 양육될 때 비로소 엄마, 아빠에게, 동생에게, 할머니에게 내가 무슨 기쁨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신앙 안에 바로 선 아이들이 나이 들면서 과연 내가 커서 어떻게, 무슨 일로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바라시는 천직(天職, Calling, vocation)도 찾고, 그 부르신 바의 사명을 위해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자 청소년주일이자 교회교육주일입니다. 우리 아이들, 교회학교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묵상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