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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원문보기 글쓴이: 우리
구 분 |
황제헌원(黃帝 軒轅) |
치우천자(慈烏支桓雄 蚩尤) |
직 위 |
중국의 시조(三皇中一人) |
桓雄시대 14대왕(三聖記) |
사서상 성분 |
少典(諸侯)의 아들, 漢族의 領袖(중국민족사) |
古天子(史記), 苗族의 酋長(중국민족사) |
출 생 |
壽丘(산동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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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100년 |
109년(三聖紀) |
향 년 |
111세 |
151세(三聖紀) |
능 지 |
陝西省黃陵縣城北 (中國歷朝帝王槪覽 |
山東城 東平郡 壽張縣(史記) |
후 비 |
元妃: 祖 二妃:方雷 |
견비총:山陽郡鉅野縣(史記) |
* 『揆園史話』의 太始記에 의하면
神市氏는 蚩尤氏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참으로 뛰어나 만고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치우씨는 하늘을 빙빙돌게하는 힘과 바람과 번개, 구름과 안개를 능숙하게 부리고 칼 창 큰칼 큰도끼 긴창을 만들어 초목과 날짐승, 벌레, 고기따위를 다스리게 하였다.
- 치우씨는 대대로 兵器 만드는 일을 맡게되고 늘 적을 쳐서 나라 지키기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 치우씨는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잡고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이 쇠잔해 짐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이때 형제와 친척중에서 장수될 사람 81명을 뽑아서 군사를 거느리게하고 갈로산(葛盧山)의 금을 캐서 칼과 창과 화살촉을 벼르고 만들게하여 군사를 한데모아 정비한 후 탁鹿땅을 떠나 구혼(九渾)에 가서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는 마치 비바람 같아서 세상 만물을 두려워 떨게하고 그 위력을 천하에 떨쳤다.
치우씨는 1년동안에 9諸侯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에서 시작하여 예과(芮戈)땅에 나가서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洋水를 떠나 공상(空桑)을 쳤다. 1년동안에 다시 12諸侯國을 얻으니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중국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게 되었다.
* 『중국25사』 『史記』-오제본기 제1-에 의하면
- 응(應)은 蚩尤는 古天子(應 曰蚩尤古天子)라고 하였고 반대로 안차기(安此紀)의 기록으로는 諸侯들이 서로 침공하는데 蚩尤가 가장 포악하니 蚩尤는 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安此紀云諸侯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 또한 관자가 말하기를 蚩尤는 노산에서 금을 캐어 五兵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庶人은 아니고 제후의 자리에 있었다. (管子曰蚩尤受盧 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蓋諸侯號也)
- 찬이란 사람은 공자의 三朝記를 인용하여 치우는 서인으로 탐욕이 있는자(瓚曰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貪者)라고 하였다.
-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銅이고 이마는 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五兵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萬民을 殺害하였다.(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 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誅殺無道萬民)
- 『산해경』에서는 황제(黃帝)가 명령하여 龍으로 하여금 蚩尤를 공격케하니 치우는 바람과 비를 불러일으켜 대풍우를 좇아 다루었다. (山海經云黃帝令應龍攻蚩尤蚩尤請伯雨師以從大風雨)
-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史記』본문에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또한 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鹿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탁록之野)
-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 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 在東平郡壽張縣함향성高七丈民常十月祀之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견비 在山陽郡鉅野縣)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 보는자의 시각과 목적에 따라 치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록한 것을 볼수 있다. 그러나 치우가 누구인가하는 것을 공안국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九黎의 통치자(君號:직위)가 치우라는 것이다.(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바. 치우천자에 대하여 우리의 사서는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로서 중국의 시조인 황제를 물리친 용장임을 기록하였고 중국의 사서는 蚩尤天子를 諸侯, 포학자(暴虐者) 또는 탐자(貪者) 등의 여러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한 토의는 황제에 관한 기록을 검토한 다음 설명하기로 한다.
* 黃帝(軒轅)
1) . 황제(헌원)에 관한 것은 『25사』의 맨 첫 번째 책인 『사기』권1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황제의 지위와 치우의 관계 및 전쟁을 중심으로 토의하도록 한다.
2). 『사기』의 오제본기에 황제는 少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黃帝者少典之子) 또한 황제의 姓은 公孫이요 이름은 軒轅(헌원)이라고 하였다.(姓公孫名曰軒轅) 그런데 有熊國의 君이 少典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周曰有熊國君少典之子也) 또한 少典은 諸侯國號이고 인명이 아니라는 것이다.(皇甫謐曰少典者諸侯國號非人名也)
헌원이라는 이름은 헌원이라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黃帝生於壽丘長於淮水因爲姓居軒轅之丘因以 爲名)
- 孔安國은 黃帝는 복회 신농과 더불어 三皇중 하나라고 하였는데 太史公은 五帝중의 하나로 적고 있다.
< - 太史公依世本大戴禮以黃帝,전頊,帝 ,唐堯,舜爲 五帝 - 孔安國尙書序-伏犧,神農,黃帝爲三皇 少昊,전頊,高辛,唐,虞爲五帝>
3). 『사기』에 기록된 黃帝의 世譜는 아래와 같다.(표 추후보완)
황제의 아들이 25인인데 그중 성을 받은자는 14인이라고 한다. 金氏의 조상이라고 하는 黃帝의 正妃(누조)로부터 난23자중 少昊金天氏인 玄 (현효)로부터 교극을 거쳐 고신(제곡)에 이르고 여기에서 지(摯)와 방훈을 포함한 4남에 이르고 있다. 또한 황제의 正妃에서 난 창의로부터 고양(전욱)을 거쳐 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우순,우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황제로부터 순,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은 같고 국호만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自黃帝至舜禹皆同姓而異其國號) 舜이 東夷人 이라고 적고 있다.(風土記云 舜東夷之人生姚丘) 8대손이 東夷人이니 그 할아버지인 黃帝도 東夷人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 黃帝는 죽은 뒤 교산(섬서성)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데 괄지지에는 寧州 羅州縣東八十里 子午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蚩尤와 黃帝에 대한 평가
우리사서인 『삼성기』에서 蚩尤天王이 靑丘를 개척하여 땅을 넓혔다고 했는데 청구는 지금의 중국 산동반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고 (桓檀古記譯者) 환웅시대의 14대 통치자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규원사화』에서도 치우씨가 백성을 거느리고 황하 이북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1년동안에 9諸侯의 땅을 빼앗고 또 1년동안에 다시 12諸侯國을 얻었다고 하였다. 軒轅과의 싸움도 10년동안에 70여회나 되었다고 하니 相互犬猿之間의 戰爭勇士였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25사』의 기록은 다른점이 있다. 그것은 蚩尤는 天子였고 黃帝는 少典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이다. 이한마디로서 황제와 치우는 비교할 수 없는 직위임을 알수 있다. 다만 사가들이 황제를 높이기 위하여 少典之子를 有熊國의 君이라하여 少典을 人名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고 蚩尤를 貪者,暴者,또는 諸侯정도의 위치로 낮출려고 애쓴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 탁록의 전쟁
1. 사서내용의 비교
蚩尤와 黃帝의 탁록전에 대하여 『삼성기』와 『규원사화』,『중국25사』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각각 차이가 있다.
① 『삼성기』에는 蚩尤天王이 神農(삼황중1인)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索度(산동성)로부터 淮岱(淮水와 岱山 사이의 中國要地)사이에 웅거하였다가 헌원과 탁鹿의 들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한다.
②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에서는 蚩尤天王이 탁鹿의 들에서 軒轅과 싸울 때 큰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이 마침내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크게 혼란하여 도망가고 숨으니 백리안에 병사와 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 탁鹿에 城을 쌓았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또한 헌원은 항상 거쳐를 안정시키지 못하는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하는 전장에서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헌원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살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③ 『규원사화』의 太始紀에 의하면 軒轅이 蚩尤氏에게 도전하여 탁鹿의 벌에서 크게 싸우니 蚩尤氏는 큰안개를 일으킴으로 적군은 정신이 흐려지고 손이 떨려 급히 도망가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였다. 이리하여 淮南,山東,北京,洛陽을 모두 차지하게 되고 탁록에 城을 쌓아 淮南,山東에 자리잡게 되었다. 雲 의 軒轅記에 치우씨가 비로소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못하여 銅頭鐵額者라 하였으니 헌원이 심한 낭패를 본듯하다.
④ 『중국25사』『사기』권1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의 명을 듣지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치우의 墓가 東平郡壽張縣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탁록에서 黃帝가 蚩尤를 죽였다고 했는데 그 묘가 동평군에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즉 황제가 탁록에서 치우를 살해하여 시체를 다른곳에 옮겨 장사했다고 하고 혹은 黃帝가 龍을 시켜 치우를 中冀에서 참한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중국25사』의 내용에 대하여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서는 치우천자의 兄弟 81人이 銅頭鐵額의 동일한 복식을 하였기 때문에 치우천자를 살해했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은 사실은 81인중의 한 장수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⑤ 최근에 발간된 『중국민족사』에서
중국사에 기록된바 漢民族과 異民族의 최초의 전쟁은 바로 黃帝와 蚩尤의 탁록戰이다. 황제는 漢族의 領袖이며 蚩尤는 구려(九黎) 즉 묘족(苗族)의 추장(酋長)이었다.
<中國史上所記漢族與異族第1次戰爭卽黃帝與蚩尤 鹿之戰黃帝爲漢族之領袖蚩尤爲九黎卽苗族之酋長>
라고 기록하였고 그 전쟁의 경과와 결과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漢族과 異族의 최초의 전쟁이 중국의 탁鹿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 장수는 黃帝와 九黎의 통치자인 蚩尤였다는것만 적었다. 그러나 『산해경』에서 蚩尤가 兵을 동원하여 黃帝를 征伐했다고 기록하였다.(蚩尤作兵伐黃帝) 이는 같은 중국의 사서에서도 기록이 엇갈리는 것은 내용을 조작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다. 이미 오랜 옛날의 전쟁에 대한 승패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시대의 이면을 찾아보는 것이 더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⑥ 탁록전 관련 지역
*. 최초의 전쟁과 歷史의 脈
1. 蚩尤와 黃帝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해야 한다.
치우와 황제는 모두 東夷人이었다. 중국사서는 이들을 동이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이인이고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중국은 황제를 漢族의 시조로 삼아 중국역사를 약5백년이전으로 더 연장시켜 단군조선보다 약 3백년 앞선 역사로 꾸며 놓았다. 그렇게하 기 위하여 중국의 역사는 부득이 蚩尤天子를 역사적인물로 인정하고 『25사』의 앞부분에 여러 가지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탁록의 전쟁을 漢族최초의 민족간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동이민족의 후예들은 그것을 모른체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치우는 한지방을 다스린 제후에 불과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와는 무관한 사람이다.
② 치우는 苗族 또는 東夷人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조상만이 아니고 中國 蒙古,朝鮮등 중국대륙에서 살던 여러족속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인들이 시도하고 있는 어리석은 이론에 불과하다. 『중국민족사』에서 漢族來源을 16개족속으로 구분하여 그중 東夷族에 대하여 "夷或曰東夷,以其居於華夏系之東也."'說文:夷東方之人也.從大從弓'東夷一名詞廣狹二義 狹義專指秦以前居山東,江蘇, 安徽等省自淮以北沿海一帶之異民族. 廣義則爲秦漢以後版圖擴張, 在境內之東夷己歸同化,因別指滿洲,朝鮮,日本,琉球 等族爲東夷"라고 기록하여 秦나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狹廣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東夷를 희석하기위하여 설명한 내용이지만 『양서』를 비롯한 여러사서에 "東夷國曰朝鮮"이라고하여 東夷는 바로 우리조상임을 분명히하고 있다.또한 치우는 환웅을 뜻하고 환웅시대는 모든 사서에서 단군조선 직전의 우리선조임을 기록하고 있다. 우선 역사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 아래는 필자의 글이다.
* 치우에 虫 자가 붙은것은 잘못이다.
임신한 여자에게 덕담으로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라고 하는데 떡은 뚝이 변한 것이고, 뚝은 둑(纛)으로 치우를 말한다.
정말 우리 말까지 중국놈에게 팔아먹는 언어 왜곡이다.어떻게 우리가 명절에 해 먹는 떡이 한자에서 나왔단 말인가? 떡두꺼비의 떡은 ㄷ 이니 밥이나 나물등과는 달리 땅 처럼 겹겹이 된 두꺼운 음식을 말하고 두꺼비는 두껍다는 말로 땅과 같이 두툼한 아들을 낳으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은연중에 치우를 남자의 표상으로 흠모하면서 치우 같은 아들을 낳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사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모양이나, 투구 쓰고 갑옷 입으니 자연 걸음이 느릿느릿 한 것이 두끼비와 닮았기 때문에 두꺼비란 동물의 이름이 여기서 생겨났고다. 느린 걸음을 뜻하는 글자 치(蚩)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한 치우의 군사들이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蚩尤의 蚩는 오래된 사전에는 山아래 아래 豆자로 벌래충 (虫) 자가 붙어 있지 않다. 따라서 두꺼비가 아니고 어리석을 치, 추할치, 얏볼치, 비웃을 치로 蚩 자와 같은자 이고 蚩笑 라 한다면 비웃음이 된다. 그래서 虫 자가 붙어있는 蚩역시 어는 옥편에도 두꺼비란 말이 없다. 다음 치우의 尤는 더욱우, 허물우,탓할우 자이다.
그런데 치우는 우리는 물론 중국인들도 전쟁에 나가려면 전쟁의 신 이라는 치우에게 제를 올리고 나가는데 만약 그 어리석은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삼았겠는가?
치우는 때리다, 치다의 '치'에 우리(무리) 라는 '우'가 붙어서 된 이름으로 치는우리 즉 치는데 도사인 우리란 말을 한자로 적자니 가장 못된 글자를 붙인것이다.
중국측 기록에 치우의 머리에는 소처럼 두 개의 뿔이 났다 하였는데 이는 투구에 두개의 뿔이 있는 것으로 풀이 되며, 치우의 뿔 달린 투구는 고구려 군사의 투구와 고려 군사의 투구로 이어진 것이다. 소뿔 달린 투구는 용맹을 상징하고, 싸움에서의 승리를 상징하는 치우의 모습이다.
* 구리에 대한 설명
(이 글은 계시판 '책에 추가할글...' 154 내용이다.)
단군조선 (배달국 )이전 환웅때부터 우리는 우리 종족의 명칭을 '구리' 라 하였고 이것이 한자로 표현 하면서 구려(九黎), 고리(藁離),구이(九夷)라 하다가 이것이 고구려(高句麗)가 되고 고려(高麗)가 되었는가 하면 이것의 영문표기가 KOREA가 되었다.
그러면 이 말들의 뿌리인 구리가 무엇인지 알아 보자.
책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에도 써 있지만 신지녹도문자 해독 천부경 해설 '다섯' 부분의 내용에서 간추려 본다. 우리한번 타임 머신을 타고 6천년전 원시사회로 돌아가 보자.
먼저 말했드시 여기는 지금 숲은 우거지고 집같은 집도 없으며 당연히 가로등이나 전기불도 없는 그야 말로 원시 사회로 밤만되면 추위는 그만두고 호랑이 울음소리 늑대 울음 소리가 소름을 끼치게 한다.
그렇다면 이때 사람들은 이 밤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여름에는 원두막 같이 나무를 얽어서 살았겠지만 겨울에는 당연히 바위 굴이나 아니면 땅굴을 파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땅굴을 평지에 파고 살았을까? 이는 물론 아닐것이다.우리 원시 조상들은 산에서 적당한 바위굴을 찾지 못하면 당연히 산비탈에 땅굴을 파고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땅굴이나 천연 바위굴은 그 앞이 급경사진 낭떠러지가 아니면 않된다. 그것은 비가 많이 와 홍수가 진다거나 습기 문제도 있었겠지만 밤에 잠을 잘때 맹수나 외적으로 부터의 공격을 피할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그림을 보자
신지 녹도전자 천부경에서 다섯을 말 하는 굴 그림중의 일부
여기에 대한 중국인들이 객관적 으로 본 근거 문헌을 찾아 보자
진서 동이전에 의하면 "여름에는 나무 위의 깃에서,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고 했다 (夏則巢居冬則穴處 - 晋書 東夷傳) 그렇다면 굴은 당연히 동굴이거나 동굴처럼 판 것 일 것인데 ‘깃’은 무엇인가?,
우리는 닭이나 새들의 몸통이 아닌 몸통의 ‘갓’의 털을 ‘깃털’ 또는 그냥‘ 깃’ 이라고 하고 새들이 나무 위에 집을 짛고 사는 것을 ‘깃든다’ 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땠을까? 사람도 분명 여름에는 그 깃을 틀고 살았을 것인데 그 사람의 깃은 지금 원두막 같은것 이었을 것이다. (이부분은 여덟에서 다시 설명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리고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을 것인데 이 굴에서 우리 한아비 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위 진서 동이전 에서도 말했지만 삼국지에서도 나온다.
...‘보통 거주하는 굴구멍의 큰집은 깊고, 사다리는 아홉 개까지 있는데 이는 많을수록 좋다(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라 했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일부분에서 ‘흙으로 방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았다(室形如冢)’ 라고 한점으로 보아 우리 한아비들은 자연 동굴, 또는 인위적인 동굴, 그리고 그후에는 무덤갗은 흙집을 지어서 사신 모양인데 하여간 콩크리트 독성에 어항의 물고기나 화분이 다 죽어 가는 아파트에 사는 현대인에 비하여 이 자연 황토방에서 사셨던 우리 한이비들은 참으로 좋은 주택에서 사셨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 주목해야 할것은 "보통 거주하는 굴구멍의 큰집은 깊고 사다리는 아홉 개까지 있는데 이는 많을수록 좋다"(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 이다.
즉 많은 사람이 사는 큰 굴구멍 일수록 깊고 사닥다리를 옆으로 아홉개나 놓았다는 것인데 이 사닥다리를 많이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굴이 깊고 식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사다리 들은 그 굴구멍이 평지가 아니라 굴에서 급경사 진곳, 즉 낭떠러지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으로 볼때 좌측이 터진 尸자 그림 꼬리처럼...즉 좌로 터진 "ㄷ"의 아래 꼬리 부분은 바로 사닥다리를 놓았던 자리 그림 일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인도네사아등 오지에서 사람이 죽으면 절벽...즉 낭떠러지 에 굴을 파고 시신을 안치 하는데 이역시 그림 글자를 만든다면 같은 그림이 될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이 사는 굴과 시신이 안치된 굴은 그 입구가 다르다. 즉 시신이 안치된 굴은 그 입구를 막아놓아 글자 그대로 尸자가 되나 사람이 사는 굴은 그 입구를 막아놓을 필요가 없으니 그대로 ㄷ의 돌려놓은 형태에서 꼬리...즉 절벽이 있을 뿐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주검(죽엄)시(尸) 그림
그래서 위 신지 녹도 전자에서 그 입구가 막힌 글자로 진화한 것이 바로 주검시(尸)자 일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조상들이 이 주검을 대단히 신성시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즉 죽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잠시 자는데 불과 하다는 사상이다.
우리 글자 "ㅅ"은 서고 솟는 글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 "ㅅ" 위에 서고 솟는 것을 쉬게 하기 위하여 이불, 즉 "ㅡ"을 덮어 놓은 글자가 바로 "ㅈ"이고 이 글자로 "자다", "죽다"라는 말이 되므로 우리 조상들은 죽는것을 "길게 잠자는것"으로 보아 지금도 우리는 죽음을 영면(永眠)이라 하고 있다. (여기의 자세한 설명은 책 421-429 쪽에...)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사는것으로 신성시 하여 절벽 바위 의 자연동굴이나 단단한 흙(아마 파기 좋은 푸석돌 )에 굴을 파고 안치 했을것이고 이것의 증거는 지금 6-7천년전 에서 만년 이전의 동굴에서 사람 뼈흔적과 같이 나오는 꽃가루 등으로 볼때 사람의 시체만 그대로 안치한것이 아니라 꽃을 덮어 안치 했으니 얼마나 경건한 장례 였던가가 짐작 된다. .
한편 이 굴무덤이 세월이 흐르고 한반도로 쪽으로 내려 오면서 차츰 고인돌 형태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절벽에 있었던 굴집도 차츰 땅으로 내려오면서 움집 같은것이 되는데 이것이 마치 무덤과 같다(室形如冢), 는 집으로 발전한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조상이 굴에 살았다는 근거를 우선 중국 기록부터 보자
* 왕동령(王桐齡)이라는 중국 사학자는 이십오사를 인용하여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였고 구려는 옛날 천자의 이름 (古天子之名)이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 라 한다고 했다.
* 위서(魏書)에는 "고리(藁離)에서 온 동명(東明聖王)이 세사람을 만나 흘승골(訖昇骨)에 이르렀다"라는 말 있다.
* 또 이십오사 에서는 구이(九夷)라 하였다.
이 이외에더 다수의 기록이 있지만 생략하고 여기서 한자의 뜻과 음에 대하여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이유는 여기에 지금 전개되고 있는 사건은 환인 환웅 시대로 한자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 이야기 이고 그후 환웅의 신하 신지의 제자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 하나 이도 그림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원시 한자 이기 때문이다.
그후 중국인들은 이 창힐 한자를 토대로 자기네 들이 우리 상고사를 기록 할때 우리 말과 글자의 뜻은 상관없이 엇비슷 하게 적어 놓은것만도 다행 이다. 이는 예를 들면 지금 우리의 한강은 한자로 漢江이다. 글자 뜻 풀이로 본다면 중국 한나라 강이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한강이라는 "한"은 먼저 말했드시 "크고 넓은것"이다. 즉 우리의 크고 넓다는 뜻의 한강을 한자로 그 음만 따서 적자니 漢江이 된것과 같다.
또 말과 글자는 전음 된다. 즉 밝은땅 이라는 "밝달"이 한자로 "밝"자를 쓸수 없으니까 배달(倍達)로 써 놓고 지금 민족의 뿌리를 찾겠다는 사람들까지도 우리가 "배달민족" 이라고 한다.
이상을 참고로 위에 중국의 기록인 "구려"(九黎), "고리"(藁離), "구이"(九夷 -여기서 구이는 아홉 동이족 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는 구리를 쓴다는 것이 그렇게 써진것으로 본다
* 다음에는 위 "구리"가 무엇이며 우리 말로본 우리가 굴 에서 살았다는 증거 이다.
우리말에는 약방의 감초격으로 접미사 "이" 가 붙는다. 원래 해(日)의 원어는 "하" 인데 여기에 "이"가 붙어 "해가 됬다고 했다.
갑순이 갑돌이는 물론 꾀꼴 꾀꼴 하는 새 이름은 "꾀꼴"인데 "이"가 붙어 꾀꼴이 > 꾀꼬리가 됬는가 하면 깟 깟 하고 우니까 깟 인 새에 이 를 붙여 깣이 > 까치가 되고 "뜸북이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주어먹는 짐승인 "주"에 "이"가 붙어 "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말에는 "이"자를 붙이길 좋아 하다보니 학교 라고 할것을 핵교 라고도 한다.(여기의 자세한 설명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172-175쪽)
그래서 "굴"에 "이"가 붙어 "굴이" > "구리"가 된다. 즉 "구리"는 "굴에 사는것들"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다른 짐승들도 굴에 살겠지만 여기서는 자신들...즉 동물의 대표인 사람들을 이야기 한것이다.
여기서 "굴"이 한자 굴(窟)에서 나온말이 아니가 의심 할수도 있느데 이는 신지의 제자인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으므로 우리말의 대다수를 본뜬것이 한자 음이고 또 그당시는 동이족이나 하화족(중국)이 국경도 없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지전자 같은 것을 같이 썻고 그래서 녹도문자는 한자와 한글의 어머니라 했다.
* 그렇다면 지금 우리말에 "구리"라는 말이 남아 있는가?
그 흔적은 "멍텅구리"의 "구리"에 그대로 남아있고 심술 꾸러기 작난 꾸러기의 "꾸러기"도 굴이 > 구리 > 꾸리 > 꾸러기 이다.
그리고 이 굴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구리는 환웅시대 많이 써서 중국 기록에 많이 남았는가 하면 고구려의 구려도 이 구리 이다.
즉 주몽의 아버지는 "해벌판" 이라는 뜻의 "해부루" 였는데 그렇다면 주몽은 당연히 해주몽이 될텐데 이 해가 높고 거룩하기 때문에 한자로 쓸때는 높을 고를 썻으며 따라서 "해구리" 이여야 할것을 고구려(高句麗)라 한것이고 고려(高麗)는 고구려 에서 "구"자만 생락된 것으로 보는데 한편 고려는 위 굴이 에서 모음이 혼동된 말일수도 있다. 즉 굴구멍 이라는 '굴'과 골짜기 라는 '골'은 그 말의 뿌리로 볼때 같은 말이다.
여기서 골짜기의 '짝' 은 짜개지다(쪼개지다) 라는 말이고 따라서 골짝은 골 이 짜개진. 즉 갈라진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면 이 '굴'이라는 말이 왜 어떻게 생겨 났을까?
먼저도 말했지만 우리의 하느님(桓因)은 그 아드님 환웅...아니 우리 민족에게 값으로 계산할수 없는 보물 천부인 새개를 주시는데 이는 "ㅇ"같이 원형으로된 하늘 천부인과 "ㅁ"같이 모가진 땅 천부인과 △과 같이 세모가 서있는 사람 천부인이라 하였다.
그중 ㄱㅋ ㄴ ㄷ ㄹ ㅂ ㅍ등은 모두 땅 천부인 "ㅁ"에서 분해된 글자인데 이 들 글자로 시작되는 말은 모두 땅(물질)에 관한 뜻만 있지 하늘 천부인 "ㅇ" 이나 "ㅎ"같이 원융무애 하거나 정신, 특히 하늘의 뜻은 없으며 사람 천부인인 "△"- >"ㅅ"으로 시작되는 말처럼 서거나 솟는 뜻은 없다고 했다.
따라서 당연히 하늘 천부인이나 사람 천부인에는 땅 천부인 같은 물질에 관한 뜻은 없는것이다.
그러면 우선 땅 천부인 "ㅁ"에서 분해된 "ㄱ"부터 그 뜻을 보면 이는 가장자리(邊)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바다 가 니 강 가니 할때 가 가 붙고 또 가지(枝)나 가시(刺), 가죽(皮)에도 "가"가 붙으며 한편 "겨"가 되어 겨드랑이니 알맹이의 가장자리 가 되어 왕겨 등이 된다.
그리고 이 "가"에 세우는... 즉 성립을 뜻하는 "ㅅ"이 붙으면 "갓"이되어 가시 어머니, "가시 아버지" 하면 장인 장모가 되고 (이북 방언) 갓인애 > 가시내 하면 계집 아이가 되며 이 계집도 역시 가장 자리 라는 뜻이 되는데 가시내나 계집이 왜 가장자리 인가는 사내는 주체적, 계집은 객체적 입장으로 본것이 아니라 말이란 강력한 자즉에 의하여 만들어 지므로 남녀 성기 결합시 그 알맹이는 사내의 숫 이되고 그 가장자리 즉 껍데기는 여음이 되기 때문오로 본다.
또 역시 "ㄱ"으로 된 굴, 굼(구무) 등은 모두 구멍으로 알맹이가 아닌 껍질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물론 여음(女陰)도 해당 된다.
그러니까 '굴' 이란 땅굴도 되지만 여자의 굴도 되고 그러므로 사람은 굴에서 태어나 굴에서 살다가 굴에서 긴 잠을 자므로 이 사람을 '구리' 라 한것이고 이 사람들이 사는 족속까지 '구리하 하였는데 지방에 따라 모음이 혼동되었는가 하면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위에서 말했드시 구려(九黎), 구이(九夷), 고리(藁離)라 하다가 이것이 고구려(高句麗)가 되고 고려(高麗)가 되었는가 하면 이것의 영문표기가 KOREA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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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악마라 해서는 않된다.
(월드컵때 헛소리 웃음방에 올렸던글)
할배 - 너 요즘 왜 빨간옷만 입고 다니냐?
손자 - 아 우리는 붉은 악마니까 그렇지요.
할배 - 네가 왜 악마냐? 이 핼애비 손자가 왜 악마냐? 누가 너더러 악마라고 그러던?
손자 - 에구 할아부지는 무식하게 그것도 몰라! 그전에 우리 청소년 축구팀이 4강까지 올라갔을때 우리 응원단이 악마구리 처럼 응원하니 미국 기자들이 붙여준 이름 아녀요?
할배 - 미국 사람이 붙여준 이름? 그렇다면 붉은 도깨비라고 할것이지 악마가 뭐냐?
손자 - 영어에는 도깨비라는 말이 없어요. 글구 악마나 도깨비나 뭐 다를게 없잖아요?
할배 - 무식한 녀석. 인마 악마는 악독한 못쓸 귀신이고 도깨비는 애교 있는 장난꾸러기야.
손자 - 도깨비가 작난꾸러기라니요?
할배 - 도깨비의 어원은 '도가비' 이고 이는 '도가니 아비'란 말이다.
손자 - '도가니 아비'가 뭔디요?
할배 - '도가니'란 쇠 녹이는 그릇이고 '아비'란 사내 이니 '도가니 아비'란 쇠녹이는 사내란 말이다.
전에 김수로 왕때나 신라때는 쇠녹이는 제철기술자가 왕권을 잡았었었는데 왕족이 늘고 무위 도식하는 자가 많자 왕족들을 시골로 파견하여 나무 꼬챙이로 농사짓는 농민들의 농기구를 만들어 주게 했다.
그런데 이 제철 기술은 무기를 만들수 있는 국가 극비 기술이었으므로 장막을 처 놓고 그 안에서 일을 했다. 그래서 장막 안에서 뚝딱 뚝딱 하면 그 귀한 쇠붙이 농기구가 나오므로 도가비 패들이 금나와라 뚝딱, 은나와라 뚝딱 하면 금은 처럼 귀한 쇠붙이 농기구가 나왔단 말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이들 도가비 패 들에게 술밥을 잘 대접하며 친하면 무엇 보다 값이 나가는 쇠붙이 농기구를 얻을 수 있고 대접을 소홀히 하면 무쇠솟 뚜껑을 솟 안에 집어넣는 심술을 부렸단다.
이 도가비 패 들은 날이 궂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꽹가리를 치며 놀았는데 그래서 지금도 날씨가 궂으려 하면 도깨비가 논다는 말이 있다.
즉 이 "도가니아비" 패들을 도가비패> 도깨비패 라 했는데 그래서 도깨비는 어떤 악독한 악마가 아니고 사실 장난꾸러기패 들이었고 너그덜이 쓰고 다니는 탈도 실은 치우 천황의 구리탈 이었어. 그러니까 도깨비는 우리 민족의 해학적 친구였지 결코 악독한 악마기 아니야. 그러니께 너그들은 서양사람이 붙여준 붉은 악마 라는 이름에 감지 덕지 할게 아니라 " 붉은 도깨비" 라고 이름을 갈아라! 내가 그러더라고 그래라.
손자 - 할아부지가 그러더라고? 히히. 미국사람이 지어준 이름이 더 좋지. 우리 역사가 다 뭔디요? 아마 우리 역사나 우리 전통말 때문에 이름을 바꾸지는 안을거에요.
할배 - 고얀놈들! 너 같은 놈들이 " 대~ 한민국" 은 다 뭐냐? 차라리 너그덜이 장가들어 애를 낳더라도 너그덜 씨를 받지 말고 서양놈 노랑머리 씨나 받아다가 낳으며 "미~국민국" 혀라!
* 치우천황 도깨비 탈 막새 기와장 ( 경주 박물관 소장 )
마침 ' 신지녹도전자 91번에 동두철액 치우천황 상이 있기에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아마 젊은이들은 더 좋아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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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우천황 도깨비 탈 막새 기와장 ( 경주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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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치우천자가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2800년경 이었으며 이때 이미 청동제 무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근데 우리는 역사시간에 뭐라 배웠던가요? 기원전 10세기 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마디로 우리는 택도없이 배워왔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이집트에서는 청동 도구로 돌을 깍아 피라미드 만들 때 우린, 돌도끼로
맷돼지나 잡고 있었을까요? 중국 사서에 '치우는 구리국의 천자다' 라고 기록했는데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한 고조선이 신화라고 .... 말도 안되는 소리. 우리가 할 일은 사서 발굴과 고고학적 발굴를 통해 사실을 밝혀 내는 일입니다. 중심활동 지역이 중국에 있으니 어려움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가 본 동기들도 있겠지만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이 고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장소입니다. 우리 뿌리를 늘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때가 되면 예날에 세계문명을 이끌었던 조상님들처럼 앞으로 다시 세계문명을 주도할 날이 반드시 올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