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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목사
누가복음 18:9-14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대림절도 어느덧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를 보내고 나면 드디어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3주간의 대림절 기간이 어떠셨나요? 기쁘셨나요? 아니면 그냥 저냥 무난했나요? 그것도 아니면 힘들고 괴로웠나요?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성탄을 기다리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째 주에는 요한복음 3:16절 이하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고, 그 영생이란 다름 아닌 빛이신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삶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영생이란, 죽은 뒤 하늘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얻는 것이며, 그것은 어둠을 사랑하여 어둠 가운데서 행하던 삶에서 돌이켜 빛을 사랑하여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삶으로의 전환, 돌이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생의 약속을 예수님을 보내신 이후로 계속 이행하고 계셔서, 지금도 이행하고 계시니 이것을 받아 누리자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영생을 받아 누리는 대림절, 그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와 기쁨, 희망으로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자고 했었습니다.
둘째 주에는 마태복음 24:1절 이하 성경말씀을 읽고, 이 성전파괴의 예언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비판하는 것으로, 위선적인 그들이 이끌고 있는 종교, 사회, 단체라면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신앙, 위선적인 신앙, 그릇된 신앙 역시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신앙에서 돌이키라고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예수님과 그 가르침마저 배척하니 그런 자들이 이끄는 종교의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이러한 신앙 역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돌이키자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엇나간 마음을 제자리로 돌리는 대림절을 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희망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주인 셋째 주에는 누가복음 3:7절 이하 성경말씀을 읽고,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삶과 무관하게 무조건 죄 사함 받는다는 의미가 아님을 들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폭력을 써서 타인의 재물을 뺏는 것을 그만하라고 말하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세금 이외의 것을 거두는 것을 그만하라고 말하고, 무리들로 지칭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즉 지도자들에게는 가난하고 소외된 동포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을 그만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선 구부러진 것들, 주름들을 펴야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즉 하던 짓을 그대로 하면서 죄를 사함 받을 길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함, 용서’를 뜻하는 ‘아페시스’의 본래 의미는 ‘놓아주다’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마음속에서 붙잡고 있는 죄를 놓아주자고 들었습니다. 그때에 진정한 자유, 진정한 죄 사함이 있으니 죄를 놓음으로써, 죄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것을 그만하자고 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에 사로잡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대림절을 보내자고 들었습니다.
어떠셨나요? 저는 지난 3주간의 대림절이 기쁘면서도 괴롭고, 괴로우면서도 기뻤던 것 같습니다. 기뻤던 것은 어둠이 무엇인지 찾는 것,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 여전히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찾을 때 찾아졌고, 그것은 곧 개선의 여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조금이지만 나아진 것도 있었구요.
그런데 괴로웠던 이유도 같았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말이지요. 내 안의 어둠이 무엇인지, 돌이킬 것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너무 많아서 찾아도 찾아도 계속 나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점검 후에 찾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데, 거기서 또 다른 문제들이 나오고, 거기서 또 다른 문제가 나오고 하는 일이 거듭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음을 놓고 포기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내게 문제가 너무 많고 쌓여있는 것을 보니, ‘이처럼 문제가 많은 나인데 정말 변화될 수 있을까? 이 많은 문제들을 다 고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울 바에는 차라리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냥 되는대로 사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가기도 했습니다. 순간 스쳐간 생각이지만 그것에 제 마음은 온통 헤집어졌고, 그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습니다. 또한 이런 생각에도 흔들리는 제 자신을 보며 더욱 괴로웠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잠재우는 데에 힘들었다는 것까지 말이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괜찮아지고 있는 줄 알았던 마음, 생각, 습관들이 어느새 도진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무력감에 휩싸여 참 괴로워집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로 그렇게 다짐했건만 어느새 또 반복하고 있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라는 비참함과 참담함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선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알다시피,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의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망이 두텁고 존경 받던 집단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멸시 받고 사람 취급 못 받는 집단이었습니다.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이방인인 로마에 바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복음서에서 창기와 함께 죄인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통념과는 정반대로 이 둘을 묘사하십니다. 바리새인은 부정적으로, 세리는 긍정적으로 묘사하십니다. 본문 10절 이하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죄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여느 죄인들처럼 죄를 짓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자랑합니다. 또한 율법에 명시된 내용을 넘어서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그만큼 열심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음을 감사하며 자랑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생산물을 넘어선 모든 소득에서 십일조를 하는 것 모두 율법에 명시된 것을 초과하여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전통, 규율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며 누가복음 11:42절에서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로부터 면제되었던 온갖 채소들은 십일조로 드리면서, 정작 거기에 담긴 사랑과 정의는 소홀히 한다고 말이지요.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사실 바리새인이 스스로 말한 기도의 내용은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무시해서도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될 내용입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는 자기 자신은 의롭다고 확신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옳다고, 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정작 그 마음에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연민, 따듯함이 없었고, 자기 마음에 그러한 것이 부재함에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의롭다고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의롭고 옳다는 교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는 교만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14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세리의 기도는 비참함과 참담함 그 자체입니다. 너무나 죄스럽고 염치없어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감히 하늘을 올려다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할 뿐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에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번역됐습니다. 원문인 헬라어 성경은 “힐라스테티 모이 토 하마르톨로”(ἱλάσθητί μοι τῷ ἁμαρτωλῷ.)로, 직역하면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 주소서”입니다. ‘힐라스코마이’(ἱλάσκομαι)는 ‘달래다, 화해하다’라는 뜻이 있고,, 이런 의미에서 ‘속죄하다’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본문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 2:17절에서만 사용됐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말씀처럼 속죄의 제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명사형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는 각각 요일 2:2절과 4:10절에 두 번 나오는데,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화목제물, 속죄와 관련돼서 사용됩니다. 다른 명사인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도 로마서 3:25절과 히브리서 9:5절에 2번 사용됐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 위에는 영광에 빛나는 그룹들이 있어서, 속죄판을 그 날개로 내리덮고 있었습니다.”라는 말씀들처럼 신약성경에서는 모두 속죄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할 때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 의미를 잘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세리는 지금 어떻게 보나 죄인인 자신의 존재와 그 삶 때문에 너무나 비참하고 죄스럽고 괴로워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뿐인 것입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그 죄를, 자신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자신과 그 죄에 대해 염치 불구하지만 그저 용서를 구할 뿐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세리의 기도내용으로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는데요. 우리가 기도할 때, 속죄를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보다는 용서해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여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세리는 지금 하나님께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은 곧 주님께 이처럼 죄 많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의미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요? 어떤 죄 때문일까요? 동족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며 호가호위하던 삶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돌아서기로 했는데, 막상 살아갈 땐 그렇게 하지 못해서일까요? 그런 자기가 너무 한심하고 그런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일까요? 여기서 예수님은 세리가 자신의 무슨 죄 때문에 이렇게 비참해하며 기도하는지는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죄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하며 참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뿐이라고 묘사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즉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세리와 같은 기도를 하면, 또는 그런 흉내를 내면, 무조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비참한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시인하고 그저 주님 앞에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변화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의 도우심과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주님께선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를 베푸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자비가 가득한 대림절 마지막 주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괴로움과 비참함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